미륵하생경 변상도
고려 1350년, 178cm×90.3cm, 비단 채색, 일본 친왕원 소장.
삼국 이래 뿌리깊게 신앙되었던 미륵신앙은
미륵상생경에 의한 도솔천 왕생사상과
미륵하생경에 의한 용화수하성불의 이른바 메시아 사상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앞의 것은 극락왕생의 아미타 사상과 거의 흡사한 것이지만,
뒤의 것은 오랜 후세에 석가불이 미처 구제하지 못한 중생들을 미륵이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것으로,
가령 후삼국 때 궁예가 세상을 구제하러 강림한 미륵으로 자칭하기도 하였다.
이 그림은 도솔천의 미륵이 하생하여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고
당시까지 구제되지 못한 모든 대중을 성불시킨다는 미륵하생경의 내용을 도해한 것이다.
일종의 교화용 경변상도이지만
본존 미륵불을 크게 클로즈업시켜 화면을 압도하도록 구성했기 때문에
예배용의 존상화적 성격에 가까운 그림이다.
크게 2등분되는 화면의 상부는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서 중생들을 성불시키기 위해 설법하는 장면으로 전체의 2/3를 차지한다.
상부 중앙에는 미륵불이 큼직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불상 무릎 좌우로 두 협시 보살이 좀 더 크게 묘사되었는데
이 삼존은 삼각형적인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미륵불 주위에는 보살중 10대 제자들이 좀 더 작게 그려져 있으며
이 주위를 제석 범천, 사천왕, 팔부중 등이 둘러싸고 있다.
미륵불의 머리 보주 위에서
올라간 광선이 허공으로 올라가 맴을 돌아 좌우 두 가닥으로 퍼져 나가는 곳에
구름 속에 싸여 있는 2층의 화려한 건물은 성불하기 이전에 거주하던 도솔천 궁이 분명하며
이 주위로는 상서로운 별과 달이 하늘을 수놓고 있다.
이들 하늘 세계와 미륵불이 있는 지상세계를 흰 광선 모양의 둥근 광배가 분리시키고 있는데
불보살들이 발 아래의 청문대중과도 역시 구름으로 구획짓고 있는 점에서
당시 불화의 위계에 의한 계층적 구도를 실감할 수 있다.
청문대중은 바둑판 모양의 지상에 좌우 대칭되는 구도로 묘사되었는데
오른쪽에는 남성, 왼쪽에는 여성이 배치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서로 마주 바라보면서 꿇어앉은 남녀상과
머리를 깎고 있는 남녀상이다.
꿇어 앉은 인물들은 2용왕으로 알려져 있지만 용왕과 용녀일 것이며
삭발하고 있는 인물들은 전륜성왕과 왕비로 생각되고
기타는 신하들과 시녀들, 또는 미륵의 부모도 포함되었을 수 있다.
하여튼 이 장면에서는 삭발하고 있는 두 인물이 가장 크게 그려지고 있어서 주인공임이 분명하다.
이 장면은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에서 성도하고 난 후
전륜성왕 내외와 모든 신하 시녀 그리고 미륵의 부모를 위시한 일체 중생을
세 번에 걸쳐 설법하여 출가성불케 하는 내용을 도해한 것이다.
미륵하생경 변상도 세부 / 고려 1350년, 90.3cm×178cm, 비단 채색, 일본 친왕원 소장.
그림의 하부에는
미륵불이 하생한 성안의 궁궐, 궁전 좌우의 성벽, 궁전 앞의 보수와 보당, 궁전 주위의 칠보 등이
장엄하게 표현되고 있다.
궁전 앞 방광하는 향로가 놓인 좌우에 3인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장면과
보거를 메고 가는 장면 등은 당시 고려의 왕궁 생활을 재현해 주는 듯하다.
이보다 아래쪽에는 다시 두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왼쪽의 보거와 상대해서 두 마리의 소를 끌고 두 사람의 농부가 밭갈이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장면은 중국 돈황 61굴의 미륵변상도에서는
한 사람의 농부가 멍에를 두 마리에 연결해 밭갈이를 하고 있다.
세속의 괴로움을 나타낸 그림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오른쪽 장면과 함께 성중 농경 생활의 풍성함을 보여주는 춘경 장면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와 대칭적으로 오른쪽에는 추수하는 이른바 추경 장면이 그려져 있다.
아랫쪽에서는 벼를 베고 위쪽에서는 도리깨로 타작하고
떨어진 낱알을 쓸고 하는 갖가지 모습이 묘사되고 있다.
바위굴 속에는 장자가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이는 미륵의 부모로 알려지고 있다.
하여튼 좌우 장면은 춘경과 추경의 풍성함, 이를 감독하는 장자들을 묘사하여
'비가 때맞추어 내려 곡식이 풍성하게 자라고 한 번 심어 7번이나 수확한다'는
하생경의 표현을 도상화시켰다고 생각된다.
돈황 61굴의 3부분으로 된 농사 장면을 좀 더 자유분방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불화에 등장하는 생활상들이
당시 고려 사회의 실상을 그대로 재현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이들 불화가 중국 화첩에서 전형을 삼아 이를 닮게 그린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우회적으로 고려의 사회 구조, 사회상, 불교 사상의 역할 등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미륵하생경 변상도(彌勒下生徑變相圖), 고려 14세기, 비단에채색, 178×90.3㎝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후 56억7천만년 후에
미륵불이 다시 세상에 나타나 3번의 설법으로 중생을 구한다고 한다.
이 그림은 56억7천만년을 기다릴 수 없던 사람들이
한시빨리 미륵부처가 오기를 바라는 그 염원으로 하염없이 공을 들여 제작하였다.
윗면에 미륵부처가 오시는 그 날의 모습을 크게,
아래에는 미륵부처가 다시 중생 곁에 나시고 성불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윗 부분은 전형적인 예배도상으로, 가운데 본존인 미륵불이 다리를 아래로 내리고 앉아 있다.
(의상, 倚像)자세이고, 좌우 보살과 함께 삼존불의 형태를 이룬다.
미륵불은 붉은 가사와 가득 그려진 원문과 당초문으로 화려하다.
약간 위쪽으로 정면을 향하고 금니로 채색된 보관을 쓴 협시보살은 좌우에 하나씩 2명,
미륵불 발 아래 미륵불을 향하고 있는 2명의 또다른 금니로 채색된 보관을 쓴 하늘을 관장하는 천(天),
그리고 그 주변에 삭발스님(성문, 聲聞, 나한)들이 좌우로 5명씩 10명이 있다.
또 보살을 지나 양쪽 끄트머리에서 탑 등을 들고 있는 좌우의 2명씩인 사천왕(四天王),
그리고 그 위로 나머지 8부신중이 있다.
이렇게 가득채운 도상 위로 10명의 주악비천이 있고,
또 10명의 화불(化佛)이 나무구름 위에 배치되어 있다.
아랫부분은 미륵불이 마지막 생에 나셔서 출가하고 성불하는 모습을 담은 내용이다.
미륵불이 발밑에 용모습을 한 용왕 2명이 있고,
그 옆 화면상의 왼쪽편에는 전륜성왕 상거가 미륵불에게 감화를 받고
권속을 이끌고 출가하는 모습을 그렸다.
그 아래 전륜성왕 상거가 다스리던 시두말대성의 풍족한 모습이 그려있는데,
생활모습은 궁전과 연회의 모습, 수레와 가마 등 탈 것, 소를 몰아 논에 쟁기 가는 모습,
일년에 7번 수확하는 모습 등 경작하는 장면을 그렸으며,
가운데에는 부처님께 향로를 공양하는 모습이다.
이 불화는 고려불화의 화려함, 보다 세련되고 섬세한 필치, 틀에 잡힌 구성과 색채 등을
능히 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 불화의 화려함은 금분을 많이 쓴 까닭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면서도 분위기가 뜨지 않고 품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채색을 적은 숫자로 썼고,
서로 멀지않은 색들을 썼기 때문인 듯하다.
미륵불의 가슴에는 역으로 된 만자(卍)자가 금니로 그려있고,
부처의 붉은 가사 전면에는 원문을 가득 그려 넣었다. 원문 안에는 가득한 금니의 문양들이 그려있다.
고려불화에서 재미있는 사실은 간혹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나,
이 원문이 옷주름에 접히더라도 항상 원형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이 불화에는 부처님이 밟고 있는 연화대좌와 보살들의 연화대좌, 미륵불의 연화좌 사이 등
합하여 7개의 연꽃이 큼지막하고 탐스럽게 표현되었다.
한편, 고려불화는 우리나라에 10여 점이 소개되고 있으나 이 작품들도 일본에서 사온 것들이다.
고려불화가 일본에 전래된 것은 주로 배불정책의 조선 전기때이다.
조선의 배불 정책으로 인하여
고려 때까지 보호되던 막대한 사찰과 그에 딸린 경전, 조각, 회화, 기물 등이 오갈 데가 없어지게 된다.
많은 사찰들은 폐찰되고, 심지어는 유생들의 손에 의해 불태워지거나
서원 등으로 변해지고, 이런 와중에 여전히 불교를 숭상하던 일본에서 국가적인 입장으로
조선에 대장경을 요구하게 되자 조선은 대장경과 함께 범종, 불화들을 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의 사찰 90%가 소실되고,
사원건축들과 함께 그동안 전해오던 불화, 불경, 불상 등도 모두 불타버려 사라졌으나
일본에 건너간 회화들은 대체적으로 잘 보존되어 우리가 지금 찾아볼 수 있게 된 까닭이다.
현재 전하는 고려불화는 모두 13세기 이후의 것들로, 14세기 작품이 주요이다.
고려문화의 가장 극성기인 11-12세기의 작품들이 남아있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다.
고려의 무신정변, 몽고침략, 홍건적의 침입 등은 전국토를 황폐화시켰고,
따라서 고려의 예술품들은 보존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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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 Mirage on The Water / Yuhki Kuram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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