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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영 - 한강과 임진강을 여행하며 그린 경치(한임강명승도권)

Gijuzzang Dream 2008. 3. 7. 05:36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

 

 

지우재 정수영 - 한강과 임진강을 여행하며 그린 경치 

 

   

벌써 마음이 설렌다. 유람, 여행이란 말만 들어도 콧등에 바람이 스치는 듯하다.

여행은 익숙한 것을 떠나 새로운 것을 만나는, 흔치 않은 시간이기에 그 기억 또한 소중하다.

어떻게 이 기억을 남길까? 어떻게 이 느낌을 전할 수 있을까?

 

미술관 회화실에 전시된 <한강과 임진강을 여행하며 그린 경치>는

이런 문제를 조선시대 화가들이 어떻게 풀어냈는지 보여준다.

이 작품은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이

1796년 여름부터 1797년 봄까지 한강, 임진강 일대를 유람하고 그린 것이다.

 

거의 16m에 달하는 매우 긴 두루마리 그림으로 그 유람행로는 크게 3차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차 유람의 시작점은 경기도 광주부 언북면, 지금의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선릉과 정릉이다.

광주를 출발하여 한강의 지류를 따라

경기도 여주를 거쳐 강원도 원주 하류까지 갔다가

경기도 양근군에 들리고 이어 충청도 직산을 거쳐 다시 양근, 여주로 돌아왔다.

 

같은 해 가을의 2차 유람 때는

경기도 영평에 소재한 백운담, 은암서원, 금수정, 화적연을 방문하였는데

1차 유람과 바로 이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이듬해 1797년 봄의 3차 때는 경기도 금천(현재의 시흥)의 취향정, 검지산, 일간정에 갔다가

경기도 삭녕, 황해도 토산을 방문하였다.

여러 계절을 거쳐 24곳 정도를 방문한 꽤 긴 일정이었다.

 

강을 따라 떠나는 유람, 이런 여행의 동선을 두루마리 그림만큼 잘 잡아낼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두루마리는 옆으로 긴 그림 형태로 화면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펼쳐가며 보는 것이다.

그림을 펼칠 때마다 나타나는 산천의 모습, 마치 넘실대는 물결을 따라 배를 타고 있는 듯하다.

 

수락산, 도봉산, 삼각산 자락이 펼쳐진 시원한 한강의 전경이 나타나는가 하면

때론 손에 잡힐 듯 경물이 다가와 있다.

마치 새가 된 듯 광대하게 전개된 광경을 내려다 볼 수 있는가 하면

분홍빛 꽃과 고운 단풍으로 아기자기한 뜨락을 거니는 듯한 맛도 있다.

 

경기도 여주 신륵사탑은 특히 관심을 끌었던 듯, 시점을 달리하여 여러 차례 그렸는데

“사원의 경치가 앞면과 같지 않아 다시 고쳐 그린다”고 하였다.

이는 관찰과 경험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수영 筆 <한강과 임진강을 여행하며 그린 경치(한임강명승도권)> 부분,

종이에 옅은 색, 24.8X1575.6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직산의 휴류암이나 검지산(관악산)과 같이

전통적인 관점에서는 별로 주목할 만한 경치가 아닌 것도

산과 바위의 울퉁불퉁한 질감을 묘사하려고 애썼다.

 

실제 보이는 그대로 그리려다 보니 결과적으로 매우 괴상한 형상이 되었다.

이 대목에서 정수영이 <동국지도>를 제작한 정상기의 증손자임을 상기하게 된다.

지리학자 집안의 분위기가 영향을 주었을까?

 

배를 타고 한강을 따라 유람하는 한편, 배에서 내려 명승지를 방문하고 친지를 만나는데

이 여행에는 여러 명의 동행이 있었다.

함께 유람을 시작한 윤일 이영갑(1743-? ), 학이 임희하(1745-? ),

도중에 합세하게 된 헌적 여춘영(1734-1812).

여춘영은 원래 정수영 일행을 배웅하러 강가에 나왔다가 정수영의 손에 끌려 배에 올라타게 되었다.

 

화면에는 이런 글이 써 있다.

“(머리에) 관을 쓴 자가 여헌적(여춘영)이다. 관만 쓴 채 나를 전송하러 나왔으나

(내가) 손을 끌어 배에 태우고 사공을 불러 빨리 떠나라고 재촉하였다.”

강가의 정겨운 실랑이, 친구를 배에 태운 채, 의기양양 길을 재촉하는 정수영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화면 곳곳에는 조선후기 예술계의 수장 강세황의 셋째 아들 월루 강관(1743~1824)이 글을 남겼다.

강관은 정수영과 동갑으로 아마 절친한 사이였을 것이다.

여행에 동행하지 못한 강관이 정수영을 방문했을 때 이 두루마리 그림을 펼쳐 보았겠지?

화면 따라 여행담을 나누는 두 사람의 정다운 말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 이수미(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학예연구관)

- 박물관신문에서

 

 

 

 

 

 

 

화폭에 담긴 옛 여주 절경 - <한·임강명승도> 중 '여주'

 

 

 

이 그림은 관직에 나가지 않고 평생 기행과 탐승을 즐겼던 지우재 정수영(之又齋 鄭遂榮, 1743~1831)이

한강과 임진강의 각지를 돌아보며 그린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 1796年作》(국립중앙박물관 소장)중 여주 부분의 각 세부 그림이다.

경기도 광주에서 출발하여 원주 상류까지 한강의 14군데, 임진강 상류와 관악산 등 12곳의 풍경을

긴 화폭에 진경산수화로 담았다.

정수영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는 선묘 위주의 고르고 분명한 윤곽 표현,

생략에 의한 단순화와 대담한 화면 구성, 담채의 묘를 살린 맑고 담백하며 밝은 화면이 특색이다.
전체 길이 15m의 긴 그림인 이 그림 역시 이러한 특색이 잘 표현되어 있다.

특히 이 그림에는 계절감이 표현되어 있어 그가 여러 번에 걸쳐 탐승을 하며 그렸음을 알 수 있다.
 

▲ 그림 1. 한임강명승도 중 여주읍내를 그린 세부 그림    

그림 1은 한임강명승도 중 여주읍내를 그린 세부 그림이다.

그림 중앙을 보면 현재 여주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누각 청심루(淸心樓)가 보인다.

청심루는 성종대왕과 현종대왕이 세종대왕릉에 친행하면서  쉬었던 곳이고,

또한 이곳을 무대로 친행시에 과거를 치루었던 유서 깊은 곳이다.
그러나 아깝게도 1946년경 방화로 소실되어 지금은 옛터만 남아있다.

건너편에서 바라본 청심루를 비롯한 읍내 풍경이 여강과 어울어져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있다.

 

 

▲ 그림 2. 한임강명승도 중 신륵사를 그린 세부 그림

그림 2는 한임강명승도 중 신륵사를 그린 세부 그림이다.

현재의 건물 규모와 비슷해 보이며 특이한 점은 신륵사로 들어가는 입구가

육로뿐만 아니라 뱃길을 이용했음을 보여주는 길이 여강에 맞닿아 있는 점이다.

오른쪽 동대위에 높게 솟은 다층전탑은 이러한 뱃길의 안내역할과 함께

무사안녕을 기원하는 비보탑의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린 정수영은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한 정인지(鄭麟趾)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실학자이자 지리학자인 정상기(鄭尙驥)이다.

명문의 후손이지만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고 시(詩) · 서(書) · 화(畵)를 즐겼다.

특히 지리학자였던 증조부의 영향을 받아 전국의 명승지를 찾아다니며 아름다운 경치를 화폭에 담는데

주력했다. 그는 진경산수화를 개성이 강한 문인화풍으로 발전시켜 한국적인 독특한 정서를 담아낸

화가라는 평가를 받으며, 정선 · 심사정(沈師正) · 이인상(李麟祥) · 강세황(姜世晃)과 더불어

우리 나라 진경산수화 분야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구본만, 여주군향토사료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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