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느끼며(시,서,화)

풀밭 위의 점심(Le déjeuner sur l’herbe) - 마네作 / 모네作

Gijuzzang Dream 2008. 3. 5. 22:25

 

 

 

 

 마네(Edouard Manet) /  <풀밭 위의 점심>

 모네(Claude Monet) / <풀밭 위의 점심>

 조르조네와 티치아노의 합작 / <전원의 합주>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 / <파리스의 심판>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는 프랑스에서 법관의 아들로 태어나 경제적으로 유복했다.

뚜렷한 예술관과 집념,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고집, 자신의 잘못을 고쳐 나가려는 열린 자세 등에서

19세기를 빛낸 화가라는 칭송을 들을 만했던 마네는, 

1863년 프랑스 왕립미술아카데미가 주최하는 살롱전(展)에 '풀밭 위의 점심'을 출품했다.

1737년 파리 루브르 궁전의 한 살롱에서 시작된 이 전시회는 신인 미술가의 등용문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기성작가 중심으로 규격화된 심사를 하던 살롱전은

색채의 미묘한 변화 속에 자연을 묘사한 이 이색적 작품을 거부했다.

마네의 작품은 이 해부터 살롱전에서 떨어진 작품들을 따로 모은 낙선전(展)으로 가야 했다. 

더구나 살롱전에 출품해서 당선은커녕 낙선을 하고

그 낙선된 작품만을 따로 모아 전시하는 초라한 전시회에서

그 작품성과 외설성으로 인해 처참한 평을 들어야 했다.

   

낙선전에 출품된 작품중 평론가나 일반 대중들로부터 가장 많은 비판을 받은 이 '풀밭 위의 점심'은

당시에 유명한 고전으로 취급되었던

조르조네(Giorgione, 1477-1510) 와 티치아노(Titiano Vecellio, 1488-1576)의 합작

<전원의 합주>마르칸토니오 라이몬드의 <파리스의 심판>을 참조하여 그렸다고 한다.

<전원의 합주>에서 착의(着衣)와 나신(裸身)을 한 화면에 묶어 넣은데서 힌트를 받았으며,

또 인물의 군상의 포즈는

라파엘로의 데생을 라이몬디가 판각한 동판화 <파리스의 심판>의 우측 아래에서 빌려온 것.
그러면 이 작품이 비속한 것이 아니다. 오직 모방하였다고 하여야 옳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보아서는 별 차이점이 없어 보이는데

유명한 고전이라고 평가받는 두 작품과 마네의 작품을 비교할 때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은 그 당시 엄청난 비난에 직면하였던 것이다.

세잔느 · 마네 · 모네 · 피사로 · 휘슬러 등이 참가한 근대 미술사의 획기적인 사건이다.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은 나체 여성과 옷을 입은 남성을 대비시켜 화제가 되었으며,

벗은 옷 옆에 있는 과일 바구니에서 마네의 정물화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누드는 성서를 바탕으로 그리거나 대부분 실내에서 그렸다.

‘풀밭 위의 점심’은 빛과 어둠을 나타내 인상파 탄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세월이 흘러 후세 사람들은 이 작품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본다.

빛을 주제로서 표현하려 했던 이 작품은 결국 인상주의가 탄생할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역사적으로도 상당히 의미 있고 중요한 자료로 재탄생하게 되는 극적인 그림이 된다.
바로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작품이 바로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 이다.
 

인상주의 역사의 기원이 되는 작품

 

낙선자 미술전시회 이후 마네를 중심으로 한 젊은 화가들이 모여서 인상파를 만들었고

그때부터 마네를 인상파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마네의 새로운 미술과 그 정신은 인상주의자들에 의해 계승되게 된다.
그들은 마네의 뜻을 좇아 화구통을 들고 화실을 박차고 나온 화가들로,

자신의 눈을 통해 직접 본 것이 아니라면 그릴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됐고

그것을 가장 몸소 실천한 대표적 인물이 바로 모네이다.

 

그리고 모네의 작품 "인상, 해돋이"로 말미암아 비로소 인상주의가 화려한 외출을 시작 것이다.

서양미술사를 장식한 유명화가 가운데 당대엔 형편없는 작가로 비난 받거나,

완전히 잊혀졌다가 후대에 극적으로 컴백을 한 사례도 있다.
지금은 불후의 명작으로 꼽지만 제작 당시엔 쓰레기 취급을 받은 경우도 많다.
바로 마네의 "풀밭위의 점심" 과 같은 작품이다.

 

 Edouard Manet(1832-1883) : The Picnic ("Le Déjeuner sur l'Herbe"). 1862-1863.

208x264cm. Oil on canvas. Musée d'Orsay, Paris, France.
 

 

 

 

 <마네 / 풀밭 위의 점심>

 

 

이 작품이 처음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니다.

1836년 살롱에 출품하여 낙선한 작품으로

같은해 ‘낙선전’에 출품되어 비난과 조소의 표적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살롱전에 5천여 점 이상의 작품이 출품되었으나 3천점 이상이 낙선하였다.

낙선한 작품은 심지어 사회에 지대한 해악을 끼친다고 평가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살롱은 프랑스 미술가들의 등용문과 같은 것인데

고전주의 미술양식을 철저히 지킨 작품들만이 상을 받았다고 한다.

인체는 비례가 맞아야 하고, 성서나 신화와 같은 것을 다룬 작품들.

 

마네의 그림은 겉으로 근엄한 척하며 규범 속에 묶여있는 당시 사회상황을 꼬집고 있다.

19세기 후반 파리는 도시의 재개발사업으로 인해 술집들이 들어서면서

향락적이고 퇴폐적으로 변해갔다.

당시 파리의 상류층 남자들은 이곳을 드나들며 위선적인 이중생활을 즐겼다.

 

마네는 이런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나보다.

이 그림 속의 여성은 신화에 나오는 성스러운 이미지가 아니라

실존여성인 고급매춘부를 모델로 삼았다.

 

또한 그림 속의 남자들도 실존인물인데 가운데 남자는 처남이고 오른쪽은 마네의 동생이다.

그림을 살펴보면,

기존의 회화가 정확한 데생과 완벽한 색의 데생과 완벽한 색의 재현에 충실한 것에 반해,

여기에서는 명암의 강렬한 대비와 빛에 의해서

사물의 형태가 만들어지고 화면의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즉 빛을 받는 나부(裸婦)의 여인, 벗어놓은 옷가지와 과일바구니,

그리고 뒷부분의 웅크린 여인과 그 주위의 밝음이 하나의 큰 흐름을 형성하면서

우거진 나무로 만들어진 어두움과 대치하고 있다.

 

어두운 부분에서의 사물의 형태는 간결하게 처리되고 있고,

반면에 빛을 받는 얼굴이나 손, 정물들은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그가 빛을 주제로서 표현하려했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등장 인물들의 포즈와 구성이 마네의 창작이 아니라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가 제작한 동판화작품 ‘파리스의 심판’에서 따왔다는 것이다.

 

마네는 이 작품이 살롱전에서 낙선한 후,

심사위원들에게는 배척받았지만 대중들에게는 진정한 평가를 받을 것이라고 기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중들 역시 이 그림에 비난을 퍼부었다.

그 이유는 이 그림이 살롱전에서 낙선한 그림이기에

배척당해야 한다는 대중들의 일반적인 생각 때문이었다.

 

이러한 관점이 단지 이 시대에, 그림을 감상할 때만 적용되는 것일까.

지금 이 시대의 많은 문제들에서도 적용되고 있는 듯하다.

그럴듯해 보이는 것에만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마네가 기억되고 그의 그림이 후세에게 ‘명화’로 불리는 이유는 그가 틀을 깨부쉈기 때문이다.

진정한 가치를 찾아내는 것, 자신만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

이것이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에서 느낀 작은 감상이다.

2008년 <좋은만남> 1월호. 명화이야기, 정수연기자

 

 

 

 

 여신의 누드, 여인의 누드 

 

누드만큼 논란의 대상이 되는 건 태고 이래 없을 터다.

인류 최초의 스캔들, ‘이브의 사과’ 사건으로 알몸의 진실이 밝혀진 뒤 누드는

무시로, 그리고 흔히 위태롭게 예술과 외설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하지만 누드가 논란의 정점에 선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였다.

프랑스 화가 에두아르 마네가 1863년 ‘풀밭 위의 점심’을 발표했을 때

그것은 사상 최악의 스캔들이었다.

정장 차림의 두 신사 옆에 벌거벗은 여성이 앉아 있고 벗은 옷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려 있다니.

사실 그것은 마네가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조르조네(또는 티치아노)의 작품 ‘전원의 합주’를 본떠

그 미학적 전통에 맞춰 그린 것이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두 남성 앞에 음악의 여신 뮤즈가 알몸으로 나타나 함께 피리를 분다.

그런데 이 그림 앞에서 찬사를 아끼지 않던 사람들이 왜 마네의 그림을 보고는 역정을 낸 걸까.

현실 속의 여인이 등장한 탓이었다.

르네상스 이래 여성의 누드가 수없이 그려졌지만 그것은 모두 신화나 전설 속 인물이었다.

여신이 좀 벗었기로서니 누가 뭐라겠나.

어차피 여신이 평소 뭘 입고 다니는지 본 사람이 있기나 하냔 말이다.

하지만 마네 그림 속의 여성은 당시 유행하는 옷을 입은 (또는 가진) 현실적 인물이었다.

그림 앞에서 부도덕한 상상을 하기엔 현실적 인물이 보다 수월할 터다.

그만큼 사람들의 손가락질도 즉각적이었던 거다.

최근 한 유명 발레리나의 누드 사진 파문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국내 무용수의 누드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이미 10여 년 전 당대 최고의 무용수들이 누드로 춤추는 모습을 찍은 사진집이 발간된 적 있었다.

무용 전문 사진작가 최영모씨의 『벗은 춤(Dances Nudes)』이다.

당시 역동적이면서도 섬세한 그들의 알몸을 보고 감동이 있었을지언정 불만을 터뜨린 사람은 없었다.

징계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이번에 문제가 된 사진은

토슈즈만 신었을 뿐 춤추는 발레리나가 아니었다.

그저 옷을 입은 채 의자에 앉은 남성의 무릎 위에서 고혹적 포즈를 취한 반라의 여인일 뿐이었다.

그러니 보는 이들의 상상력이 보다 빠른 속도로 보다 자유롭게 나래 펴지 않겠나.

국립발레단 측의 곤혹감도 그래서 이해할 수 있겠다.

진보적 실험이 있어야 발전이 가능한 건 두말할 필요가 없지만

전통과 권위가 중심을 잡아주지 않으면 그것은 결국 모래 위의 춤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파문이 적정한 선에서 마무리됐다고 나는 본다.

우리의 가엾은 발레리나가 1개월 감봉 처분을 받긴 했지만

마네의 수모에 비하면 그 정도는 모기 눈물일 테니 말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이런 소모적 논쟁은 이제 그만해야 하지 않겠나 싶어 하는 얘기다.

누드를 예술이냐 외설이냐 나누는 것은 그 경계도 모호할뿐더러 나누는 것 자체도 의미가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상이 여신이건 여인이건 또는 남성이건,

성적(性的) 판타지가 녹아 있지 않은 누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판타지가 잠들었던 상상력을 일깨우고 그렇게 눈을 뜬 예술적 영감이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붓과 끌을, 그리고 카메라를 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을 관음증(觀淫症)으로 몰아붙이는 어리석음도 더 이상 범하지 말자.

오늘날 ‘풀밭 위의 점심’은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 걸려 있지만

그 앞에 선 전 세계 수많은 관람객들이 모두 관음증 환자는 아니다.

나도 발레리나의 누드가 썩 내키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것은 동시대인을 뛰어넘는 심미안을 갖지 못한 탓일 수 있는 거다.

앞으로 그것이 불후의 명작이 될지 누가 알겠나.

의학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고무풍선처럼 부풀린 채 끝나버린

수많은 여인들의 누드와 운명을 같이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관람객이 아니더라도 예술과 외설, 어느 편에 서야 할지 스스로 아는 것이 곧 누드다.
- 이훈범 논설위원, 2007-10-29, 중앙
, [이훈범시시각각] 

 

 

 

 

 모네(Claude Monet, 1840-1926) / <풀밭 위의 점심> 

 

 

  The Picnic (Le dejeuner sur l’herbe).

1865-1866. 248x217cm, Oil on canvas. The Pushkin Museum of Fine Arts, Moscow, Russia.
 

  

모네는 마네에 의해 창조된 빛의 파악을 발전시켰고,

"물체에 그 자체의 고유한 색은 없다. 색채는 빛의 변화와 함께 변화한다."

그의 인상파 이론은 그 자신에 의해 강조되고 실천되었다.

 

나무 그늘아래에 차려지고 있는 점심식사에는

나뭇잎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어른거리는 햇살과 나뭇잎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경쾌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햇볕이 쏟아져 내리는 한 낮, 싱그런 숲들의 어울림으로 건강한 숲속에는

일행들의 자연스런 모습속에서 행복한 순간을 느끼게 한다.

막 식사가 시작되려는 듯 식탁보와 냅킨, 와인병과 잔, 과일과 빵,

그리고 접시들 등 일상의 식탁에서 볼 수 있는 세세한 정물들을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그려 넣었다.

 

이 작품은 1863년 마네로 하여금 세간의 비난대상이 되었던 <풀밭 위의 점심>과

비슷한 구도를 재현하고 있다.

습작을 거듭한 끝에 25살의 모네는 1866년, 418×367cm의 작품을 완성하였다.

 

그의 의도는 마네에두아르 마네, 풀밭위의 점심식사,

1863 의 작품보다 자연스러운 장면을 그리는 것이었다.

'마네'와 '모네'의 작품을 비교해 보면

모네는 처음부터 1866년 살롱전의 출품을 계획하고 구상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인지,

마네의 작품과는 달리 인물들은 한결같이 산뜻하고 우아하게 차려입었다.


이 작품을 위해 친구인 바지유와 화가인 쿠르베가 모델을 서주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아마도 오른편에 앉아 있는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쿠르베인 듯 보인다.

스케치 작업은 야외에서 이루어졌으나,

채색 작업과 많은 섬세한 부분들이 화실에서 이루어진 이 작품에는

여전히 어두운 색조와 그림자가 눈에 띈다.

밝은 빛과 그 속에 어우러진 풍경에 관심을 가지긴 하였지만,

넓은 색면으로 견고하게 잡은 형태감, 개략적인 붓질과 강한 콘트라스트 등에서

아직까지 모네의 초기 화풍이 돋보인다.

 

그림메는 빛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빛이 그림을 과격하게 보이도록 한다.

빛이 나무 아래로 쏟아졌고, 따라서 명암이 분명하게 그림 전체에 나타났다.

모네의 관심은 모델들이 아니라 빛이 사람과 자연에 작용하는 데 있었다.

빛은 나뭇잎에 닿아 푸른색과 금빛으로 아롱진다.

그는 빛이 사람들의 머리와 어깨에 닿아 눈부시게 나타나는 것을 강조하려고 했다.

 

<풀밭 위의 점심>에는 여인이 여럿 등장하지만 모두 카미유 한 사람을 모델로 한 것이다.

18살의 카미유는 모네의 애인으로 나중에 그의 첫 부인이 되는 인물이다.

왜 단 두 명의 모델로 여러 사람을 묘사했느냐는 질문에

모네는 두 사람밖에 모델을 구할 수 없었고 돈도 또한 들지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개개인 인물에 대한 성격을 나타내고 싶지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으로 족했던 것이기도 했다.

  

  

 

  Claude Monet. Déjeuner sur l'herbe (The Picnic). Right fragment.

1865-1866. Oil on canvas. Musée d'Orsay, Paris, France.

 

이후 이 그림은 밀린 집세 대신 집주인에게 맡겨지고, 지하실의 열악한 보관상태로 그림은 손상되었다.

결국 파손된 그림의 오른쪽과 왼쪽 일부가 잘려나간 상태로

현재 오르세미술관에는 이 중앙패널과 왼쪽 부분 그림만이 소장되어 있다.

1866년 모네가 동일한 주제로 다시 그린 그림을 보면

원래 그림 중앙부분을 그대로 보존했음을 알 수 있다. 

 

 

 

 

 

 

 조르조네(Giorgione) 와 티치아노(Titiano)의 합작

 - 전원의 합주

 

 

 

 

 Giorgione. Titiano. Pastoral Concert (Fête champêtre).

1508-09, Oil on canvas. 110x138 cm. Musée du Louvre, Paris, France.

 

 

 

 

Ernest Ruckle. Concert Champêtre (after Giorgione).

1969. 23x30cm. 9x12in. acrylic and ink on board

 

     

우리는 19세기가 쾌락의 예술을 만들어낸 시대라고 생각할 수 없다.

19세기는 오로지 쾌락의 예술이 그 영역을 확장해나간 시기였을 뿐이다.

나폴레옹의 외교장관이었던 탈리랑드가

'프랑스 혁명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은 삶의 달콤함을 알지 못한다'고 한 말 가운데에는

어떤 진실이 담겨져 있다.

부유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것은 하나의 완전한 진실이다.

 

왜냐하면 18세기 예술에 있어 쾌락의 원리는

전적으로 귀족계급에 의해 소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회화에 있어서 개화된 형태의 쾌락이란 꿈결 같은 풍경 속의

잔디 위에서나 연못가에서, 아니면 나무수풀 아래에서

옷을 벗거나 정장을 한 채 시간을 보내는 목가적인 정경으로 묘사되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의 문화는 그 반대개념인 자연을 충실히 모방하는 것이다.

 

어쨌든 피크닉 장면을 이상화하여 묘사하는 전통은

16세기의 베니스에서 조르조네와 티치아노에 의해 출발하였다.

최소한 이들의 출현은 중세 암흑시대의 인간들을 사로잡았던 수풀공포가

말끔히 제거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이리하여 이제부터는 자연이

아무런 두려움없이 들어갈 수 있는 인자한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귀의 얼굴을 가진 자연으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울창한 숲으로 둘러친 작은 정원으로 인식되었던 천국의 이미지가,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소유한 재산으로서의 자연의 이미지와 결합하게 된 것은

고대 그리스 벽지의 아르카디아라는 이상향을 낳게 만들었다.

 

조르조네의 <전원의 합주>는

미술의 역사에 있어 등장인물들이 아무런 행위도 하지 않은 채

그냥 그림 속에 '있는' 장면을 묘사한 최초의 그림이다.

- 로버트 휴즈. <새로움의 충격>에서 발췌

 

 

 

 

  

 

 

 원작은 사라지고 복제품만 남아버린 '표절의 역사' 

- 파리스의 심판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 <파리스의 심판>
1514-18, 29.8 x 44.2 cm, 동판화, 대영박물관 런던

 

 

■ 지적재산권에 대한 최초의 법적 소송, '라이몬디의 판화'

 

16세기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였던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서양 미술사 최초의 표절사건이 발생했다.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Marcantonio Raimondi, 1480~1534)라는 판화가는

미술사 속에서 그다지 훌륭한 화가로 기억되지는 않으나

르네상스의 거장들의 작품을 모방한 위작을 제작 판매해 더 유명해진 사람이다.

 

그는 1506년경 독일 르네상스의 거장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1528)의

판화 총 80여 점 이상을 위작으로 만들어 판매했다.

뒤러의 목판화와 동판화는 모두 기술적이거나 예술적으로 완벽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각광을 받았다.

라이몬디는 모두 36장으로 이루어진 뒤러의 목판화 '그리스도 수난전(受難傳)'을

동판으로 정확하게 모각하고 작가의 사인이라고 할 수 있는 고유 문양까지 똑같이 새겨 넣었다.

이 위작은 날게 돋친 듯 팔려나갔는데 뒤러가 이 사실을 알고 젊은 청년 라이몬디를 고소했다.

 

이른바 '표절'을 문제 삼은 첫 번째 사건이었다.

당시는 지적재산권과 같은 법률적 근거가 없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 사건은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작가 고유의 문양만 뺀다면 별 문제가 없다'는 판결이 났다. 사실 당시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들의 작품을 그대로 베끼는 무명 화가들의 활동이 많았다.

그러나 라이몬디 사건 이후 변방 지역에서 온 시골화가들이

똑같이 모방을 하자 원작자들이 거세게 항의하는 등 여기저기서 분쟁이 일어났다.

원작에 대한 독창성과 화가의 자존심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비록 원작자로부터 고소를 당하기는 했지만,

라이몬디의 판화는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을 유럽 전역에 보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제로 라이몬디의 위작 판화는 기술적으로 훌륭했다.

그는 원작과 똑같이 만들어 내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목판화와 동판화의 기법을 정교하게 연마했고,

특히 뒤러의 작품을 모방할 때는 입체적인 표현까지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뒤러의 고소사건 이후 베네치아에서는 활동하기가 불편했는지

라이몬디는 4년 뒤인 1510년, 로마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그곳에서 르네상스 최고의 거장인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 및

그 제자들의 작품을 복제해 판매했다.

그는 소위 '복제 전문가'로 명성을 날리며 많은 돈을 벌었고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 라파엘로의 원작은 없고 복제품만 남은 '파리스의 심판'

 

라이몬디가 복제한 작품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라파엘로의 '파리스의 심판'이다.

'파리스의 심판'이라는 주제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내용이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결혼식에 초대 받지 못해 화가 난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연회장에 '가장 아름다운 자에게'라고 쓰여 있는 황금 사과를 남기고 떠난다.

그러자 올림포스 최고의 여신인 헤라, 전쟁과 지성(知性)의 여신 아테나,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서로 이 사과를 갖겠다며 쟁탈전을 벌인다.

 

이에 신들의 제왕 제우스는 그 심판을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맡겼다.

헤라와 아테나, 아프로디테는 파리스에게 각각 선물을 제시하며 자신을 뽑아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파리스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주겠다'고 약속한 아프로디테를

사과의 주인으로 선택한다.

아프로디테는 약속대로 가장 아름다운 여자인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아내로 맞게 해 준다.

하지만 헬레네는 이미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였기 때문에

그리스인들은 그녀를 되찾기 위해 트로이를 공격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이다.

 

라이몬디의 복제작 '파리스의 심판'은

작은 화면 속에 이 신화 이야기를 정교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그림 왼쪽에 인간인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 앞에서 잘 보이기 위해

아양을 떨며 미모를 자랑하는 여신들이 보인다.

그 오른쪽에는 이 시끄러운 사건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한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거나

딴 짓을 하고 있는 바다의 신들이 있다.

이 작품은 원래 라파엘로가 그린 것인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원작은 사라지고

라이몬디의 복제품만 남아 있다.

 

 

그로부터 350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뒤,

다른 화가의 손에 의해 '파리스의 심판'이 유명세를 타게 된다.

'19세기 근대미술의 스캔들'로 회자되는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가

 '풀밭 위의 점심'이라는 작품에서 '파리스의 심판' 에 나온

인물(오른쪽에 있는 3명의 바다의 신)들의 포즈를 그대로 모방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창작에 있어서 부분적인 모방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예술의 모든 분야에서 계속된다.

그래서 예술계에서 표절 시비가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벌어지는 것이다.

- 최혜원 블루 로터스 아트디렉터 · 경희대 강사

- 2008-01-09 조선 [명화로 보는 논술]

 

 

 

 

 

 

--- 별이 진다네 / 여행스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