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눈빛, 깊은 정신을 그리다
- 이채(李采) 초상화
- 이재(李縡) 초상화
이채(李菜) 초상, 조선 1802년, 작자 미상, 비단에 색, 99.2×58.0㎝, 보물 제1483호.
국립중앙박물관 회화실에서 만날 수 있는 <이채 초상화>
『화천집(華泉集)』 8권을 남긴 조선 후기 학자의 58세 때 모습을 그린 초상화이다.
이채(李采, 1745-1820)는 본관이 우봉(牛峰)이며, 자를 계량(季亮), 호를 화천(華泉)이라 했다.
그는 김창협의 문인으로 노론의 중심인물이었던 도암 이재(李縡)의 손자이다.
이재는 노론 중에서도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이었으며
당시의 호락논쟁에서 사람과 동물의 본성이 같다고 주장한 낙론(洛論)의 입장에 섰다.
이채는 음죽현감이 되었을 때 무고로 벼슬을 그만 두고 귀향하여 학문에 전념하고
가업을 계승하는 데 힘썼으나, 이후 다시 벼슬길에 올라
호조참판, 한성부 좌윤,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저서로는 <화천집(華泉集)> 16권8책이 있다.
머리에 검정색 관(冠)을 쓰고 하얀색 심의(深衣)를 입고 있다.
이채는 스스로 쓴 제발문에서 정자관(程子冠)을 썼다고 하였으나,
실제 관(冠)의 모습은 동파관(東坡冠)에 가깝다.
검정 목깃과 흰색의 옷자락이 대조를 이루는 심의는 유교의 원리를 담고 있는 겉옷이다.
오방색(五方色) 실로 짠 광다회(廣多繪) 띠를 가슴에 내려뜨렸는데
흑, 백, 적, 청, 황의 색으로 광다회의 짜임을 전채하였다.
흑백의 근엄한 분위기 속에서 색채의 변화가 신선하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작인 이채의 초상은,
정면을 또렷이 응시하며 입체감있게 묘사된 얼굴과 노인의 품위를 보여주는 수염이
생생한 기운을 전하는 가운데
긴장감없이 편안하게 표현한 옷차림이 얼굴과 대조를 이루며 윗부분을 넉넉하게 받쳐주고 있다.
안면은 배채를 한 후, 짧고 묘사적인 붓질을 수없이 그려서 얼굴의 굴곡과 특징을 그려 냈다.
눈 주위에서 보듯 필선의 개별성이 부분적으로 두드러진다.
필선을 무수하게 그어 음영을 만들고 밝은 곳은 붓질을 최소화하였다.
콧등과 미간과 눈썹 주위, 콧망울은 발게 하고 얼굴면의 가장자리로 갈수록 어둡게 하여
얼굴이 볼록한 입체감을 갖게 되었다.
양 귀는 얼굴색보다 붉게 그렸고 수염이 입술 바로 밑에 그려지는 등 붓의 사용이
부분적으로 과감하다.
이채의 얼굴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정면을 응시하는 눈이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지식인들은 초상화의 핵심을 ‘정신’으로 보고
특히 ‘눈’을 그 정신의 상징으로 여겼다.
이 초상에서도 동공, 홍채, 흰자위, 눈초리를 섬세하게 묘사하여
눈의 표현을 중히 여기는 당시 사람들의 의식을 보여준다.
더하여 실감나는 피부 표현과 노인의 품위를 보여주는 수염의 탄력 있는 붓질이
마치 시공을 넘어 이채를 직접 대면하고 있는 듯 생생하다.
덥수룩한 수염이 눈길을 끄는데, 자칫 수염이 과도해 보일 수 있으나,
탄력있는 묘사가 화면에 생동감을 더해주고 있다.
갓이 겹치는 면에 따라 검정색의 농도가 다르게 그려지고,
눈가의 약한 검버섯, 콧등의 상처 자국 등을 묘사하는 등 세부적인 특징까지
놓치지 않고 있어 화가의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다.
세세한 안면 묘사에 비하여 옷주름은 선 위주로 대담하게 처리하여 평면적인 느낌을 준다.
심의 바탕에 하얀 배채를 하고, 앞에서 옷주름 골에 그늘이 드리우도록 하였으며,
어깨선 밖에 약간 음영을 주었다.
순수한 마음을 지녀 학문에 싫증을 내지 않는 맑고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잘 보여준다.
사진이 전하지 못하는 내면 세계를 선명하고도 감동적으로 전해준다(傳神) 하겠다.
화면에는 시기를 달리하여 전서, 예서, 행서로 쓴 글이 있다.
특히 오른쪽에는 이채가 58세 때, 이 초상화를 바라보며 스스로 쓴 글이 있다.
관직생활을 정리하고 이제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하겠다는 내용이다.
초상화를 보면서 한낱 겉모습의 닮음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는 수양의 정신을 읽게 된다.
글씨가 이루는 단정하고 절제된 느낌은 주인공의 용모를 더욱 엄정해 보이도록 해 준다.
이 초상은
1910년 鈴木?次郞으로부터 20엔에 구입하였다고 한다.
- 제발문 -
彼冠程子冠, 衣文公深衣, ?然危坐者. 誰也歟, 眉蒼而鬚白, 耳高而眼朗. 子眞是李季亮者歟. 考其迹則三懸五州, 問其業則四子六經. 無乃欺當世而竊虛名者歟. ?嗟乎. 歸爾祖之鄕, 讀爾祖之書. 則庶幾知其所樂, 而不愧爲程朱之徒也歟.
華泉翁自題, 京山望八翁書. 印文 : '京山,' '中雲'
정자관(程子冠)을 머리에 쓰고 주자(朱子)가 말씀하신 심의(深衣)를 입고 꼿꼿하면서 단정하게 앉아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짙은 눈썹에 하얀 수염, 귀는 높이 솟았고 눈빛은 빛난다. 그대가 참으로 계량(季亮) 이채(李采)라는 사람인가? 지난 행적을 살펴보니 세 고을과 다섯 주(州)의 수령을 역임하였으며, 무슨 공부를 하였는가 물으니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이다. 한 시대를 속이고 헛된 명성을 도둑질한 것은 아닐까? 아! 너 할아버지 이재(李縡, 1680-1746)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너 할아버지가 남긴 글을 읽어라. 그러면 삶의 즐거움을 알 수 있을 것이고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문도(門徒)가 되기에도 부끄럽지 않으리라.
화천옹(華泉翁) 이채가 직접 글을 짓고 팔순을 바라보는 늙은이 경산(京山) 이한진(李漢鎭)이 쓰다.
*** 화면 오른쪽 윗부분에 이한진(1732-1815)이 전서로 쓴 이채의 자제문이 <제진상(題眞像)>이라는 제목으로 이채의 <화천집> 권9에 실려있는데, 이채가 주(註)에서 '임술(壬戌)'이라고 달아 자제(自題)를 순조 2년(1802)에 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채 초상도 그해에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
화면에는 1802년, 1803년, 1807년이라는 시기를 달리하여 묵서된 제발이 있는데, 1803년과 1807년의 찬문은 1802년 초상의 제작 이후에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 <조선시대 초상화 1>, pp 66-73, pp 209-211, 국립중앙박물관, 2007, 장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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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면 왼쪽에는 친지가 이채의 인간됨을 평하며
“하루종일 마주 보아도 싫증나지 않고, 평생토록 사귀어 그 성실함을 더욱 알겠네”라고 쓴
대목을 찾을 수 있다.
豈弟得乎爾性, 精粹著乎爾容. 儉少日英發之氣, 加中歲經術之工. 終日相對而未覺其厭, 終身與交而益見其篤. 外貌之淸和, 畵者能寫, 衷操之剛介, 其友能識. 嘗拜陶菴先生遺像, 蓋知此精神之彷彿.
園嶠老人贊, 松園丁卯書.
온화한 성질은 타고난 성품에서 얻은 것이요 순수한 마음씨가 너의 얼굴에 드러났다. 젊은 날의 재기발랄한 분위기를 갈무리하고 중년에는 경전 공부에 힘을 쏟았다. 하루 종일 마주보아도 싫증이 나지를 않고 평생토록 사귀어도 인간적인 성실함을 더욱 알았다. 청순하고 부드러운 외모는 화가가 그릴 수 있지만 굳센 지조와 절개는 친구가 알 수 있다네 예전에 도암 이재(李縡, 1680-1746)선생의 초상화를 본 적이 있으니 이 초상화에 표현된 정신과 비슷함을 알겠다.
원교노인이 찬문을 짓고 1807년에 송원(松園) 김리도(金履度)가 정묘년에 쓰다.
*** 왼쪽 윗부분에 송원이 정묘년인 순조 7년(1807)에 행초로 쓰고, 원교노인(圓嶠老人)의 찬이 있다. 여기에서의 원교노인은 서예가 원교 이광사(1705-1777)가 아니고, 원교라는 호를 쓴 다른 사람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용모와 기상의 평온함은 그대 성품에서 얻은 것이고 순수함과 깨끗함은 그대 얼굴에 나타나 있네. 젊은 날 재기발랄한 기상을 거두고 중년에 경술(經術)의 공부를 더하였으니 온 종일 마주 보고 있어도 싫은 줄 모르겠고 평생 사귀어도 돈독한 마음만 더욱 드러나네. 맑고 고른 외모는 화가가 온전히 표현하였고 강직하고 굳센 지조는 친구가 알아줄 것이니 일찍이 도암(陶菴)선생의 유상(遺像)을 배알(拜謁)했기에 이 정신이 비슷함을 알 수 있다네.
원교(圓嶠)노인이 찬문을 짓고, 송원(松園)이 정묘년에 글씨를 쓴다. -국립중앙박물관 박물관뉴스, 2011년 11월, Vol.483 |
?冠博帶, 宛周旋乎禮法之場, 晧髮魁儀, ???兮山野之容. 不自以爲高, 而高出於凡. 不自以爲淸, 而淸在其中. 是蓋世類攸好也. 不可誣者, 有自之泉芝, 家訓所受也. 其爲學則相傳之箕弓. 若是者, 吾不知誰歟. 其人其惟吾友五十九歲之華泉翁乎
著菴七十二歲翁讚 綺園書 印文 : ‘綺’ ‘園’
아관박대(?冠博帶: 높은 갓과 넉넉한 옷, 유생이나 사대부의 일반적인 복장)차림으로 행동하나 하나가 예법에 잘 들어맞으며, 흰 머리카락과 점잖은 거동은 자연에 파묻혀 사는 사람과 비슷하다. 자신을 고상하다고 여기지는 않았지만 보통사람보다도 훨씬 고상하고, 자신을 청정(淸淨)한 사람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그 마음 속에는 청정함이 있다. 이러한 성품을 가진 사람을 세상 사람들이 좋아한다. 의도적으로 꾸며서 이렇게 될 수 없음은 스스로 고결한 인간적인 향기가 있고 집안의 가르침을 전수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배운 학문은 집안 대대로 전해져 내려온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을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는가? 그 사람은 아마도 나의 친구로 59살 된 화천옹(華泉翁)이 아니겠는가?
저암(著菴) 유한준(兪漢雋) 72세 늙은이가 찬문을 짓고, 기원(綺園) 유한지(兪漢芝)가 글씨를 쓰다.
***** 높은 관모(冠帽) 넓은 각대(角帶) 완연히 예법(禮法)의 마당에 노니는 듯, 하얀 머리에 훤칠한 모습 바라보면 산과 들의 모습과 비슷하네. 자신이 높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보통 사람보다 훨씬 높고 자신이 맑다고 여기지 않아도 맑음은 그 속에 있네. 이는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 속일 수 없는 것은 연원이 있기 때문. 가정교육에서 배운 것. 그 학문은 부자가 서로 전해왔다네. 이런 사람이 누구일까? 그 사람은 나의 친구 59세 된 화천옹(華泉翁)이지.
72세 된 노인 저암(著菴) 유한준이 찬문을 짓고 기원(綺園) 유한지가 쓴다. -국립중앙박물관 박물관뉴스, 2011년 11월, Vol.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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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3월5일, 국립중앙박물관 <큐레이터와의 대화> 제78회
- 국립중앙박물관 미술관 회화실, 이수미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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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의 얼굴 생김새를 그린 그림이 초상이다. 옛날부터 쓴 말은 아니다.
초상이라는 말을 쓰기 이전에는 진영(眞影)이나 영정(影幀), 화상(畵像) 따위로 불렀다.
그런데 얼굴 그림은 내면적 정신세계를 담아야 그 진가가 인정되었다.
이를 전신(傳神)이라 했고, 마음까지 아우른다는 뜻에서 사심(寫心)이라는 말도 썼다.
초상을 흔히 휴머니즘에 충실한 예술로 일컫는 까닭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고대부터 초상을 그렸다는 기록이 나오지만, 이를 제대로 그려 널리 퍼뜨린 시기는 조선시대다.
이 시대 초상의 유행은 국가가 유교를 정치적 지도이념을 삼은 데서 비롯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나 조상의 뿌리를 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인격에서 찾으려 한 흔적이
초상 곳곳에 배었다.
국립중앙박물관을 가면, 엇비슷한 이미지의 걸작 초상 두 점을 만날 수 있다.
도암 이재(陶庵 李縡, 1680∼1746)와 그 손자 이채(李采, 1745∼1820)의 상이다.
한 가족의 유전적 혈통을 속일 수 없다는 기묘한 느낌이 들 만큼 두 얼굴이 서로 닮았다.
골상(骨像)부터가 닮아 할아버지와 손자 얼굴이 길다.
고요히 생각하는 정려(靜慮) 어린 눈매가 온유한데, 단아(端雅)한 입술은 수염 속에 감추었다.
얼굴에 어울리는 코가 역시 기다랗지만, 날카롭지 않은 콧날이 섰다.
이들 두 초상에서는 한산 모시에나 보임직한 올곧고도 정갈한 체취가 우러난다.
이는 곧 선비의 풍모가 아닌가.
할아버지 이재는 조선 후기 성리학자로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손자 이채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副使)로 부총관(副總官)을 겸임한 학자이자 행정가였다.
두 초상 얼굴에는 유풍(儒風)이 그윽하다.
- 2007년 2월. 서울신문, 황규호 ‘한국의 고고학’ 상임편집위원
도암 이재(陶庵 李縡)의 초상화 - 화천 이채(華泉 李采)의 祖父
조선 18세기 후반, 작자 미상, 비단에 색, 97.8×56.3㎝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도암(陶庵) 이재(李縡, 1680-1746)는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가로서, 김창협의 문인이다. 벼슬은 이조 참판과 대제학을 지냈다.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에 반대한 노론(老論) 준론(峻論)의 대표적 인물로, 호락논쟁(湖洛論爭) 당시 이간(李柬)의 학설을 계승하여 낙론(洛論)을 주창했다.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菴) · 한천(寒泉). 용인 한천서원(寒泉書院)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저서로는 〈도암집〉 〈근사심원(近思尋源)〉 〈오선생휘언(五先生徽言)〉 〈존양록(尊攘錄)〉 〈사례편람(四禮便覽)〉 〈주자어류초절(朱子語類抄節)〉 등이 있다.
이 초상화는 한국 사대부의 초상화 가운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오른쪽을 향하여 앉아있으며, 7분면이고 복부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인데, 심의(深衣)에 복건(幅巾) 차림을 하여 유풍(儒風)이 감돈다. 이 초상은 1910년 일본인 堺吉松에게서 구입하였다고 전한다.
화면에 초상화의 주인공을 알려주는 아무런 단서가 없으나, 손자 이채의 초상화에 표현된 용모와 매우 흡사하여 같은 가계의 인물로 볼 수 있으며, 전하는대로 주인공을 이재로 보는 데에는 무리가 없다. 이채의 또 다른 초상화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확실치 않다.
화법상으로 볼 때 안면은 갈색 선으로 윤곽과 이목구비, 눈두덩과 주름 등을 그리고 선을 따라 담묵을 가했다. 주위의 잔붓질과 훈염으로 인해 윤곽선이 또렷이 드러나지 않는다. 치밀한 육리문(肉理文)을 재현하면서 능숙한 훈염법으로 처리하였다. 얼굴의 정치한 필법에 의습의 간략한 필선을 대비, 조화시켜 완성도가 높은 수작이라 하겠다.
얼굴의 요철과 굴곡, 명암으로 표현도 무수하게 잔붓질을 넣었는데 이처럼 필선으로 형상을 그리지 않고 잔붓질에 의한 음영으로 입체감을 표현하여 자연스러운 사실성이 느껴진다. 눈은 눈동자를 또렷이 표현하고 윗 눈꺼풀을 짙게 강조하였다. 인중을 갈색선으로 간략히 그리고, 아랫입술의 도톰한 부분만 갈색 윤곽 안에 홍염으로 묘사하였다. 턱선을 그리지 않고 살색을 점점 엷게 처리하여 옷깃으로 이어지도록 하고 그 위를 무성한 수염으로 덮었다. 수염은 구레나룻에서 턱, 코 아래까지 검은 가닥을 먼저 그리고, 그 위로 흰 가닥을 약간 두꺼운 필선으로 한 올씩 묘사하였다.
복건은 안과 겉, 세부 형태가 확실히 표현되었으며, 검은 바탕과 질감이 다른 검은 선으로 세부 형태를 그리고 안자락에는 음영이 있는 주름을 표현하였다. 몸부분은 배채하여 심의의 흰 색감을 환하게 나타냈다. 검은 깃과 소매단을 두른 심의는 주름을 풍성하게 잡아 다소 과장되었으나 필선은 부드럽고 능숙하다. 가는 선으로 소매등에 잡힌 주름선을 잡고, 담묵으로 옷주름을 그린 후, 안쪽으로 음영을 넣어 입체감을 주었다.
가슴에 가장자리를 검게 두른 넓은 띠를 매었는데, 앞면에서 연백을 덧칠하여 띠의 흰색을 강조하였다. 띠 위로 오색실로 짠 광다회(廣多繪)를 드렸다. 광다회는 가는 먹선으로 테두리를 그리고 색실의 짜임이 드러나도록 색점을 찍어 표현하였다. 공수한 손 아래로 드리워진 띠와 광다회의 단정함은 초상화에 절제된 장식성을 부여하고 있으며, 주인공의 단아한 용모를 돋보이게 한다.
《이재》초상과 《이채》초상은 관모나 자세의 차이를 빼면 용모가 매우 흡사하다. 《이재》초상과 《이채》초상을 비교해볼 때, 미세한 잔붓질에 의해 선조는 거의 눈에 띠지 않고 훈염에 의한 음영을 자연스럽게 살리고 있는 《이재》초상에 비해, 《이채》초상은 붓의 질감이 드러나 있고, 밝은 갈색 선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초를 잡은 흔적이 눈에 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재》초상에서보다 붓의 질감이 살아 있으며, 윤곽선을 정의한 밝은 갈색 선이 눈에 띄게 두드러진다.
《이채》초상의 이러한 표현법을 두고 일본 학자 구마가이(熊谷宣夫)는 채용신(蔡龍臣)의 후손의 진술을 토대로 하여 채용신이 이재가 죽은 뒤 손자 이채(李采)의 초상화를 토대로 그린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채용신과는 거리가 있지만, 도암 이재가 살았던 18세기 전반의 보편적 화법 치고는 이재 초상화의 표현 기법에 너무 정묘한 음영이 깃들어 있고, 색채 또한 양화계(洋畵界)의 기운이 현저하다.
1746년에 卒한 이재 당시의 초상화풍치고는 잔붓질과 훈염이 다소 과도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1802년에 그려진 《이채》초상과 오히려 부합된다. 《이채》초상을 그리면서 다시 그린 초상화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이채》초상의 화면에 적힌 찬문 속에 《이채》초상의 제작시 이미《이재》초상이 전해오고 있었음이 밝혀져 있어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다. 다만 화법상 이 작품을 당시 전해오던 《이재》초상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확실하다. - 문화재청 - <조선시대 초상화 1> pp62-65, p208, 국립중앙박물관, 2007, 장진아
|
- 모든 그림자료는 기주짱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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