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고분벽화 - 수렵도
고분벽화에서 조상의 모습 엿보다
고구려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땅속에 그냥 묻어 버리지 않고 무덤 속에 넣은 후,
무덤의 벽면과 천장에 그림을 그렸다. 무덤 속에 그렸다고 해서 ‘고분벽화(古墳壁畵)’ 라고 한다.
물론 일반 평민의 경우는 아니고 왕이나 귀족들의 경우에 평소 살던 집의 모양을 본떠서
죽어서도 영혼이 살아가는 집으로 꾸며 놓았다.
죽음으로 인해 모든 게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부귀영화를 계속해서 누리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는 고구려 사람들이 살던 집, 옷, 그릇 같은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고구려 고분벽화를 통해 고구려 시대를 이해 할 수 있다.
마치 고구려 사람들의 모습을 비디오로 찍어 놓은 오늘날의 타입캡슐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활 잘 쏘던 주몽의 후예
<수렵도>는 고구려 고분 벽화 중에서도 가장 생동감이 넘치는 그림이다.
사냥을 하는 긴박함이 느껴진다.
먼저 깊은 산 속에서 말을 탄 사냥꾼들이
사냥감을 향해 활을 겨누고 힘차게 달려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말들과 사냥개 그리고 사냥감인 사슴과 호랑이들의 다리를 한번 보자.
네 개의 다리를 쫙쫙 벌리고 있는 모습과
호랑이의 혀를 내밀고 있는 벌린 입에서 다급하게 달리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백제나 신라에 비해 고구려는 산악지형이 많은 곳이었기에 사냥으로 식량을 충당했음을 알 수 있다.
얼마 전 최고 시청률을 자랑하며 종영된 모 방송사의 ‘주몽’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는데,
고구려를 세운 주몽도 활쏘기의 명수였다고 하니 고구려 고분벽화가 그 사실을 대변해 주고 있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몇 가지 의문스러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
화면 맨 위의 사냥꾼을 보면 앞으로 달리면서
몸은 뒤를 향해서 반대쪽으로 달리고 있는 사슴을 향해 활을 쏘고 있다.
주몽처럼 활쏘기의 명수라면 이 곡예와 같은 사냥이 실제로 가능한 지도 모르겠다.
다음은 사냥꾼들의 활을 한번 살펴보자.
사냥을 한다면서 활 끝이 뾰족하지 않다. 이런 활로 호랑이와 사슴을 잡을 수 있을까 의문스럽다.
이 활은 ‘효시(嚆矢)’라고 하는 활로 실제로 사냥에 사용되었던 활이다.
우리 선조들은 장난감처럼 생긴 이 활로 사냥감들의 가죽을 상처내지 않고 사냥을 한 것이다.
화면 중앙과 우측의 파도무늬처럼 그려진 산의 모습을 한번 보자.
말을 타고 있는 사람들 보다, 때론 사냥감인 사슴들보다도 작게 그려져 있다.
화면 우측의 산은 나무보다도 작게 그려져 있다.
실제로 산이 가장 큰데도 〈수렵도〉에서는 반대로 그려져 있다.
또한, 우리가 실제로 눈으로 보아 알 수 있는 산의 모습으로 그려졌다기보다는
단순하게 도안화된 형상으로 그려졌다.
당시에는 산보다 사슴과 같은 사냥감들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수렵도〉의 사람들의 얼굴모습과 복식을 보면 고구려가 기마민족이었다는 것을 대변하듯
바지, 저고리 차림이 꽤나 활동적으로 보인다.
지금의 한복과는 다르게 상의가 길고 하의도 치마대신에 바지를 입고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특이한 것은
사냥꾼들이 머리에 쓰고 있는 모자를 보면 새의 깃털장식이 있는 ‘조우관(鳥羽冠)’이다.
우리 민족의 모습을 대변하는 이 깃털모자는
고구려 땅을 떠나 중국을 지나 실크로드를 지나는 길목에서도 그 모습이 간간히 확인된다.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압 궁전의 벽화에 나타난 고구려사신
<장회태자묘〉에서
사신으로 먼 길을 떠난 우리 선조들의 얼굴과 복장, 그리고 깃털장식 모자를 확인할 때
우리는 새삼 중원대륙을 달리고 있었던 고구려의 웅혼한 기상을 느끼게 된다.
<양직공도>에 보이는 백제사신
이러한 고구려 고분벽화는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동북공정(東北工程)’ 프로젝트 하에 고구려를 자국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의 의도 속에
2004년 7월 1일 북한과 중국의 고구려 유적이 나란히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최혜원 / 블루 로터스 아트디렉터 · 경희대 강사
- 조선일보 2007-03-22 조선, [명화로 보는 논술]
<양직공도>는 6세기 초, 나중에 양(梁)의 원제(元帝)에 즉위하는 소역(蕭繹)이
형주자사에 재직하던 시절에 양(梁)을 찾았던 여러 나라의 사신들의 모습을 그리고
그 나라에 대한 역사와 풍습을 간략하게 기록한 도서(圖書)이다.
현재 중국의 남경박물원(南京博物院)에 소장되어 있다.
나중에 편찬되는 『양서』의 「이역전」이 <양직공도>를 바탕으로 서술되었을 만큼 사료적 가치가 높은데, 특히 현재까지 회화를 통해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백제인의 모습을 담고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주목이 된다.
원래 원본에는 35개국의 사신도가 그려져 있었는데, 현재는 소실되어 12개국의 사신도의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 중 왜국조(倭國條)의 기록에 해당하는 부분은 후대에 왜국과 탕창국(宕昌國)에 대한 기록이 합쳐져 전해진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13국에 대한 기록인 셈이다. 현재 남아있는 그림은 6세기(526∼536년) 무렵에 제작된 원본을 1077년 북송시대에 모사한 것이다.
<양직공도> 외에 백제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기와 파편에 새겨진 그림들이 있다. 하지만 전문적인 화공이 그린 것은 아니기 때문에 회화적 기법이 매우 미숙하며 단순하다.
사신도 옆에는 각국의 설명도 첨가되어 있는데, 백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마한에서 시작하여, 고구려와 언어 및 풍습이 비슷하고, 진나라 말에 고구려가 요동, 낙랑을 차지하고, 또한 백제는 요서를 차지하였다. 백제인은 키가 크다"라는 설명이 있다.
기록을 보면 백제에 대해 ‘마한에서 시작된 나라이며, 중국의 요서(遼西)지방을 차지해 다스렸다. 고구려와 말씨 및 옷차림이 비슷하며, 백제 무녕왕은 고구려를 크게 격파했다는 사실을 알려온 적이 있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백제가 다스리는 탁국(卓國), 다라(多羅), 전라(前羅) 등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한편 백제국사 초상은 현존하는 회화자료 중 백제인의 모습을 담은 것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 백제국 사신도의 해당 기록부분
百濟國使
(1) 百濟舊來夷 馬韓之屬 (2) 晋末 駒麗略有遼東 樂浪亦有遼西晋平縣 (3) 自晋已來常修蕃貢 義熙中 其王餘賟 宋元嘉中其王餘毘 齊永明中其王餘太 皆受中國官爵 梁初以太 除征東將軍 尋爲高句驪所破 普通二年 其王餘隆遣使奉表云 累破高麗 (4) 治所城曰固麻 謂邑檐魯 於中國郡縣 有二十二檐魯 分子弟宗族爲之 旁小國有 ; 叛波 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巳文 下枕羅 等附之 言語衣服略同高麗 行不張拱拜不申足 以帽爲冠 襦曰複袗 袴曰褌 其言參諸夏 亦秦韓之遺俗
(1) 백제는 오래전에 夷로부터 나왔고 마한에 속하였다. (2) 진나라(晋) 말기에 고구려는 요동을 공략하였고 낙랑도 역시 차지하였고, 백제는 요서의 진평현을 차지했다. (3) 진(晋) 이래로부터 항상 여러 번 조공을 드렸는데 의희(義熙) 년간(405~418)에는 백제왕 여전(전지왕), 송(宋) 원가(元嘉) 년간(423~453)에는 백제왕 여비(비유왕), 제(齊) 영명(永明) 년간(483~493)에는 백제왕 여태(동성왕)가 모두 중국으로부터 관작을 받았다. 양(梁) 초에 여태(동성왕)를 정동장군에 제수하였다. 얼마 뒤 고구려에게 격파 당하였다. 보통(普通) 2년(521) 백제왕 여융(무령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표를 올리며 이르기를 "여러 차례 고구려를 무찔러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고 하였다. (4) 백제는 다스리는 곳, 도성을 '고마(固麻)'라 하고 읍을 '담로(檐魯)'라 이르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같다. 22담로(檐魯)가 있는데 왕의 자제와 왕실 친척들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하였다. 백제 옆에는 반파(叛波), 탁(卓), 다라(多羅), 전라(前羅), 사라(斯羅), 지미(止迷), 마연(麻連), 상기문(上巳文), 하침라(下枕羅) 등이 붙어있다. 언어와 의복은 고구려와 대략 같으나 걸을 때 팔짱 낀 것을 벌리지 아니하고, 절할 때 한쪽 다리를 펴지 아니한다. 모자를 관, 저고리를 복삼, 바지를 곤이라 부르는데, 그 나라 말에는 모두 중국(諸夏)의 말이 뒤섞여 있으니 이 또한 진한(秦韓)의 습속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신의 모습과 복식은 각국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으며, 기록은 그 나라의 상황과 중국과의 왕래 사실을 서술한 것으로, <양서(梁書)> 제이전(諸夷傳)의 서술과 부합되고 있다. 특히 삼국시대 백제 사신의 모습과 이에 대한 기술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에 일찍부터 우리나라 학계의 주목을 받아 왔다.
사신도에 따르는 기록은 백제가 중국과 통교한 내용이 전체의 3분의 1로서, <양서>의 기록과 구성·내용이 대체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몇 가지 중요한 기사를 담고 있다.
첫째, “진나라 말에 고구려가 요동 · 낙랑을 차지하고, 또한 백제는 요서 진평현을 차지하였다 (晋末駒麗略有遼東樂浪亦有遼西晋平縣)”라는 기사이다. 종래에는 당시 국제정세로 보아 백제가 요서를 점령했다는 구절을 회의적으로 받아들이거나, 혹은 이를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고 낙랑 또한 요서 진평현을 차지하였다.”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이 기록은 <양서> 백제전과 <송서> 백제전에 똑같이 전해지고 있으므로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최근에는 백제가 진(晋)나라 말에 일시 요서지방을 점령하였다고 보거나, 요서지방에 백제의 무역 전진기지가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셋째, 백제에 부속된 나라로 반파(叛波) 이하 9개국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으며, 주로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실려 있다. 이들 소국(小國)들은 낙동강 유역과 섬진강 유역에 분포하던 나라들로 파악된다.
이 지역은 중국측 사서에서는 변진(弁辰)으로 표기하고 있으며, <일본서기>에서는 임나(任那)지역이라고 표기하면서 왜의 세력이 강하게 작용한 지역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중에서 사라(斯羅, 신라)까지도 백제에 부속된 소국으로 표시한 것은 백제의 과장이다. 이 양직공도의 백제국사도는 6세기 초 웅진시대의 백제사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그렇다면 백제 사신은 무엇 때문에 양에 왔으며 그림으로 남게 되었을까?
이 그림은 백제 무령왕 21년(AD 521) 시절 "백제는 다시 강대국이 되었다"라는 서신을 가지고 梁나라에 갔던 백제 사신을 그린 그림이다.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따르면
양으로 파견된 사절단을 태운 배는 무령왕 21년인 신축년(521)의 동짓달에 고마나루에서 발진했다.
이들의 항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당시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금강 하구를 빠져나온 뒤 연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영산강 하구에서 곧장 남서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바다를 횡단하여
양자강의 건강(建康, 지금의 난징으로 당시 양의 도읍)으로 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記) / 무령왕 21년
二十一年 夏五月 大水 秋八月 蝗害穀 民饑 亡入新羅者九百戶 冬十一月 遣使入梁朝貢 先是爲高句麗所破 衰8)弱累年 至是上表 稱 “累破高句麗 始與通好 而更爲强國” 21년(521) 여름 5월에 홍수가 났다. 가을 8월에 누리가 곡식을 해쳤다. 백성들이 굶주려 신라로 도망하여 들어간 자가 900집이었다. 겨울 11월에 사신을 양(梁)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이보다 앞서 [백제는] 고구려에게 격파당하여 쇠약해진지가 여러 해였다. 이때에 이르러 표를 올려 "여러 차례 고구려를 깨뜨려 비로소 우호를 통하였으며 다시 강한 나라가 되었다."고 일컬었다.
十二月 高祖詔冊王曰 "行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餘隆 守藩海外 遠修貢職 誠款到 朕有嘉焉 宜率舊章 授玆榮命 可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 12월에 고조(高祖)가 조서를 내려 왕을 책봉하여 말하였다. "행도독백제제군사(行都督百濟諸軍事)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백제왕(百濟王) 여륭(餘隆)은 해외에서 번방(藩方)을 지키고 멀리서 공물[貢職]을 보내 그 정성이 이르니 짐은 가상히 여기는도다. 마땅히 옛 법을 좇아 이 영예로운 책명(冊命)을 주니 사지절(使持節) 도독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이 가(可)하다."
미추홀(인천)과 덕물도(덕적도)를 지나
황해 북쪽 연안을 따라 요동반도와 산동반도로 돌아서가는 항로는 사실상 막혀버렸다.
포구마다 들어차 있는 적들을 지나서 가는 것은 버거운 일이었다.
백제는 문주왕과 동성왕 때 사절단을 보냈으나
모두 고구려의 감시망에 걸려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원양 항해를 통한 항로로 사절단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적이 지키고 있는 바다나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나 모두 위태로운 사지였으나,
원양 항해는 계절풍과 해수를 잘 타면
연안 항해나 근해 항해보다 시간을 더 절약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삼국사기』에는 이미 무령왕 12년인 임진년(512)에
양에 사절단을 보내 조공을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양 항해를 통한 항로는 개척이 된 상황이었던 것 같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를 대상으로 모두 6차례의 해상 봉쇄에 관한 기사가 나오는 반면에
그 반대의 경우는 한 번도 없었음을 들어 고구려 수군의 강력함을 주장했다
하지만 신축년 견양사(遣梁使, 일본의 견수사(遣隋使)와 견당사(遣唐使)에서 파생한 것)는 임진년 견양사보다 특별한 임무를 가지고 파견된 듯하다.
신축년은 무령왕이 회갑을 맞이하는 해였다.
이순(耳順)을 맞이하면서 무령왕은 자신의 힘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고 싶었으리라.
이는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몇 차례 승리를 거두면서 을묘년의 치욕을 어느 정도 갚았고,
왕들의 잇따른 죽음으로 어지러웠던 웅진에 안정을 가져왔다는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는『삼국사기』에
'고구려에게 패한 바가 되어 여러 해 동안 쇠약해 있더니 이에 이르러 (양에) 글월을 보내어
고구려를 누파(累破)했다고 일컫고 처음으로 우호를 통하였는데,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기록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신축년 견양사의 파견 목적은 첫째, 백제의 국력 회복을 대외적으로 선포하는 것이고
둘째, 그에 걸 맞는 관작을 줄 것을 요구하고
셋째, 신라를 비롯한 아홉 나라를 부용국(芙蓉國)으로 소개하는 것이었다.
양무제는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여 무령왕에게 제2품직에 해당하는
'사지절도독 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이라는 관작을 내린다.
1971년에 발견된 무령왕릉의 지석에는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이라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백제왕' 앞에 '영동대장군'이라는 칭호를 앞세웠다고 해서 반드시 사대주의의 산물로 볼 수는 없다.
이병도 박사는 이를 일종의 명예박사학위 같은 권위의 표시라고 해석을 했다
(이병도, <무령왕릉 발견의 의의>, 「무령왕릉」)
그리고 지석에는 무령왕의 죽음을 가리켜 천자의 죽음을 칭하는 '붕(崩)'이라고
적고 있는 것도 주목해야겠다.
한편,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백제가 부용국으로 소개한 아홉 나라이다. 이들 나라는 반파(叛波), 탁(卓), 다라(多羅), 전라(前羅), 사라(斯羅), 지미(止迷), 마련(麻連),
상사문(上巳文), 하침라(下枕羅)이다.
'반파'는 경상북도 고령지역의 가야를 가리킨다.
'탁'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탁순국(卓淳國)으로 보이는데, 경상남도 창원에 위치했다.
'다라'는 경상남도 합천에 위치하였다.
'전라'는 그 위치를 압독국(押督國)으로 경상북도 경산으로 비정하기도 하지만 분명하지 않다.
'사라'는 신라를 가리킨다.
'지미'와 '마련'은 그 소재지를 알 수 없다.
'상사문'은 상기문(上己文)의 잘못된 기재로 보이는데, 전라북도 임실 일대로 비정되고 있다.
'하침라'는 전라남도 강진으로 지목된다(이도학, 426쪽, 「살아있는 백제사」, 2003).
신라가 백제의 견양사를 따라 사신을 파견하였음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법흥왕) 8년에 (백제 사신을 따라) 사자를 양에 보내어 방물(方物 : 토산물)을 바쳤다.'는
기록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된다.
백제가 신라를 부용국으로 소개하여 의도적으로 낮추고 있었지만,
남모는 원화가 되었다가 이를 시기한 준정에 의해 피살되었고 모랑은 3대 풍월주가 되었다.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법흥왕이 국공(國公)으로 백제에 들어가 동성왕의 딸인 보과공주와 사통을 하여 남모와 모랑을 낳았다고 한다.
신라는 백제를 통해서 중국과 교류를 할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서로가 어떤 속셈을 지니고 있든 간에
중국의 사서에 신라가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양서』부터였다.
하지만 신라 사신은 중국어를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백제의 통역관을 통해서 양무제와 의사소통을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양인(梁人)들은 신라에 문자가 없었던 것으로 여기고
'(신라에는) 문자가 없고 나무에 새겨 신표로 삼았다. 의사소통은 백제의 통역이 있어야 했다.'고
기록했던 듯하다.
그리하여 신축년 견양사는 자신들의 임무를 온전히 달성하고 같은 해의 섣달에 귀국한다. 이를 계기로 백제와 양은 이전보다 더욱 깊은 우호 관계를 맺었을 것이다.
이렇듯이 <양직공도>는 다만 그림으로써 뿐 아니라
무령왕 당대의 외교적 정황을 상당히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대만 국립고궁박물원이 소장하고 있는 ‘왕회도(王會圖)’(폭 238.1×높이 28.1㎝)는 양직공도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하다. 이 그림은 1995년에 처음 공개되었는데, 현재 당나라 때의 화가 염립본(閻立本, ?∼673)이 양직공도를 모사한 것이라는 견해와 당 태종(太宗) 때 중국에 온 주변 23개국의 사신을 그린 것이라는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고구려 · 백제 · 신라 3국의 사신 모습을 세밀하게 그리고 채색하였기 때문에, 양직공도와 더불어 당시 3국의 복식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왕회도>, 염립본 그림/ 왼쪽부터 백제, 고구려, 신라 사신의 모습
이 '왕회도'는 비단에 3국 외에도 페르시아(파사국), 왜국 등 중국 주변 23개국 사신 모습을 채색으로 그린 그림. 그동안 대만고궁박물원이 소장만 하고 공개하지 않았던 이 작품은 지난 1995년 펴낸 '고궁서화도록'에 흑백사진으 로 실리고, 작년 발간된 '중국 강역의 변천' 도록에 3국 사신 부분이 컬러로 실리면서 최근 국내에 알려지게 됐다. 그림 속에서 중년 이상 나이로 묘사된 고구려와 백제 사신은 반달형 눈매에 화려한 문양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이 공통점. 특히 고구려 사신은 깃털장식 관모를 쓰고, 붉은 바탕에 하트의 위아래를 뒤집어 놓은 무늬가 새겨진 상의를 입고 둥글고 큰 귀걸이를 하고 있으며, 백제 사신은 턱수염 없이 콧수염만 기르고 연두색 바탕에 붉은 색 깃 상의를 입고 있다. 반면 청년 모습의 신라사신은 꼬리가 치켜 올라간 눈매에 긴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문양 없는 소박한 옷을 입고 있어 고구려-백제 사신과 대조를 이룬다.
'왕회도'는 몇가지 의문점도 제공한다. 이들 사신들이 어떤 행사에 참가하기 위해 모였는지, 또 어떤 기준으로 백제는 페르시아 다음의 3번째, 고구려는 왜국 다음의 15번째, 신라는 17번째로 그려져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어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것.
이 작품이 알려지자 국내 미술사학계와 복식전문가들은 "실물을 봐야 염립본의 진본 여부를 확인할 수 있겠지만 후대의 모사본일지라도 염립본의 원본을 그대로 옮겼을 것"이라며 '왕회도'에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허영환 성신여대박물관장은 "그동안 양직공도(백제사신)나 장회 태자묘 그림(신라사신) 등 개별 사신 그림이 발견된 적은 있지만 동시대 동일행사에 참석한 3국 사신이 그려진 작품은 처음"이라며 "미술사-복식 사연구에 귀중한 자료"라고 말했다. 복식연구가 유희경씨도 "고구려 사신이 쓴 관모의 깃털형상이 과거 알려졌던 사신도보다 뚜렷하게 그려져 있고, 옷 색깔이 선명한 데 놀랐다"며 "백제보다 고구려 사신 복장이 더 화려하게 그려져있는 등 문헌 속에서 막연하게 묘사된 당시 복식을 실물로 확인해 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했다. 민속박물관은 1998년 '퉁구스(Tunghus) 민족의상'展에서 '왕회도'에 나오는 3국 사신들의 옷을 복원해 일반공개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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