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으로 엮은 꽃삼합에 마음을 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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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내 식구들과 둘러 앉아 왕골로 물건을 만들었다. 화방석, 꽃삼합, 사주단자, 동구리, 보석함, 반짇고리. 하나씩 작품이 완성될 때마다 추수가 끝나 텅 빈 들판이 되어버린 사람들의 가슴에는 왕골로 한 올 한 올 매어 만든 소품들이 가득 차올랐다.
나는 소아마비에 걸린 수줍음 많은 소년이었다. 14살, 말없고 내성적이어서 삶은 어쩌면 무작정 불행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리가 불편해지면서 나의 두 손은 강해졌다. 나는 두 손으로 일어나야 했다. 어머니를 졸라 완초공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교동도 사람들은 봄이 오면 왕골 재배를 준비했다. 4월에 모를 내고, 여름에 옮겨 심고 뙤약볕에서 농사지어, 가을에 수확하여 말리고, 겨울이 오면 공예품을 만들었다.
나는 한 자리에 가만히 앉아 말할 필요도 없이 조용히 수작업을 하는 것이 즐거웠다. 다리를 움직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행복했다. 그래서 나도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었다. 씨줄과 날줄로 생을 엮다
섬세하고 은은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왕골은 완초라고도 불렸다. 왕골과 함께 하고 있는 시간, 나는 모든 것을 잊었다. 내 마음의 잔잔한 슬픔은 왕골을 엮으며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었다. 한 올 한 올 맨 정성을 아는지 만들기가 무섭게 팔려나갔다. 부자가 된다는 기쁨보다 일에 대한 자부심으로 내 가슴은 벅차올랐다.
한 올 한 올 엮어 가는 데 힘이 많이 들어가도 안 되고 덜 들어가도 안 된다.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짱짱하게 엮어 나가야 한다. 마음 시끄러워질까 다지고 또 다지며 나는 동구리를 엮고, 꽃삼합을 만들었다.
그러나 어느새 사람들은 돗자리보다는 카펫을, 화방석보다는 섬유 방석을, 완초 공예품보다는 플라스틱 제품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왕골 농사짓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가고 완초 공예품 만들던 사람들도 하나 둘 떠나갔다. 섬은 비어갔다. 나도 떠나고 싶었다. 그러나 왕골을 손에서 놓아버릴 수는 없었다.
나는 바람이었다. 그 뜨거움 함부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내가 가는 곳엔 언제나 왕골이 함께였다.
다시 일으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그 아름다움과 그 고고함 알리려 심혈을 기울였다. 내가 사는 곳은 종종 바뀌었지만, 나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사람들이 잊어갈수록 내 가슴은 더욱 뜨거워졌다.
오늘도 나는 강화도에서 아내와 딸과 함께 사주단자를 만들고, 보석함을 만든다. 내 아내, 부자유스러운 나의 신체를 대신하여 준 사람, 가정 형편이 어려울 때마다 힘이 되어준 사람. 나는 외로웠지만 아내가 있어 이겨낼 수 있었다. 그래서 여전히 내 가슴 속에는 왕골밭이 무성하게 자라고, 나의 손끝은 왕골을 엮어 영혼의 상자를 만든다.
누군가 왜 그 길을 가냐고 묻는다면, 나는 나의 길이기 때문에 이 길을 걷는다고 대답하련다. 가다 길이 끊기면, 다시 길을 만들어 나는 이 길을 가겠노라 말하련다. - 월간문화재사랑(글: 이지혜 / 사진: 임재철) - 2008-02-28 | ||||||
완초장(莞草匠)
완초(莞草)란 왕골을 말한다. 왕골은 논 또는 습지에서 자라는 1, 2년생 풀로서 키는 60∼200㎝에 이르며, 완초나 현완(懸莞), 용수초(龍鬚草), 석룡추(石龍芻)라고도 한다. 왕골줄기를 건조시켜 가늘게 쪼개어 말려 돗자리, 방석, 베개, 모자 등의 수공예품을 만든다. 제품의 수명도 길어 세계적인 풀 공예품이라 할 수 있다 옛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숙련된 솜씨를 이어받아 강화 왕골공예품은 매우 뛰어나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6두품이 혼자 다닐때에 완초자리를 치되 가장자리는 가죽과 베로 꾸민다"고 했다. '고려사' 권 29 충렬왕 기묘 5년(1279) 3월에 "낭장 은홍순을 원나라에 보내 화문대석을 바쳤다"는 기사가 있다. 왕골자리를 깔았으며, 왕실에서는 문석(文席), 채석(彩席), 화문대석(花文大席)을 사용하였고, 중국에 보내는 증여품으로도 사용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관청에서 수요를 빙자하여 민간에게 공납을 강요하는 몇가지 품목중에 왕골도 포함된 것으로 미루어 왕골은 매우 귀물(貴物)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는 일찍부터 영(令)에 의해 완초를 가꾸도록 했다.
좌정승 하윤 등이 민폐를 제거하는 몇가지 조목을 올렸는데, 그 내용중에 "민간에서 심은 완초, 모시...등을 취하는 일을 일절 금단하라"는 기록이 있어 당시 왕골이 생활에 귀중히 쓰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 '조선왕조실록'에 채석(彩席), 잡채화문석(雜彩花文席), 채화석(彩花席), 만화석(滿花席), 만화방석(滿花方席), 만화각색석(滿花各色席), 용문석(龍文席), 화문석(花文席=花文大席) 등 여러 명칭의 왕골제품이 궁중 및 상류계층에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으며, 외국과의 중요한 교역품으로도 쓰였는데, 이처럼 중국 황실은 물론, 중국의 사신들도 화문석 등의 왕골 제품을 요구한 사실이 실록의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강화 완초장은 도구를 사용하는 노경소직 기법을 이용하고 있다.
손으로 엮는 방법과 도구를 이용하는 방법인데, 노경소직(露經疎織)이라 하여 날줄을 겉으로 드러나 보이도록 성글게 짜는 기법과 날줄이 보이지 않도록 하면서 쫌쫌이 짜는 은경밀직(隱經密織)의 도구를 이용한 두 가지 기법, 그리고 모든 과정을 손으로 엮어가는 방법 등 세가지 기법이다.
도구를 이용하는 방법 중 한 가지는 고드랫돌에 맨 두 가닥 실을 자리틀에 걸고 자리알을 두가닥 실로 엮는 노경소직(露經疏織: 날줄이 겉으로 들어나 보이며 성글게 짜여진 기법)의 자리(席)와 방석(方席), 강화 화문석이며,
또 하나는 돗틀에 씨실을 촘촘히 걸어 긴 대바늘에 꿴 자리알을 넣으면서 바디로 눌러 다져서 짜는 은경밀직(隱經密織: 날줄이 겉으로 들어나지 않으면서 촘촘히 짜여진 기법)의 돗방석과 돗자리이다.
손으로 엮는 방법으로는 왕골 4날을 반으로 접어 총 8개의 날줄을 정(井)자형으로 엮은 후 두 개의 씨줄을 엮어 만드는 기법인데 왕골 공예품인 강화의 화방석과 꽃삼합, 송동이(작은 바구니) 등이다.
왕골제품은 역사가 오랜 생활문화유산으로, 지금까지의 왕골제품은 깔것과 용기에 불과하였으나 왕골은 염색과 굵기의 조절이 용이하며 특별한 도구 없이도 다양한 기물을 창작할 수 있는 좋은 소재이므로 전통적인 제작기법을 이용해 완상품(玩賞品), 실내장식용품, 신변용품, 장신구 등 여러 용도로 개발의 여지가 풍부한 공예분야이다.
자리틀에 걸어 노경소직의 방법으로 엮는 자리는 강화도의 특산물로서 1991년 12월 31일 조사에 의하면 인천광역시 강화군에서 1,847호가 종사하여 20,456매를 생산하였다. 돗틀에 걸어 은경밀직으로 짜는 자리는 원래 강화의 교동이 주산지였으나 약 50여 년 전부터 그 명맥이 완전히 끊어졌으며 지금은 전남 보성군 조성면 축내리에서 특용작물로 용무늬를 넣은 용문석을 생산하고 있는데, 1990년 조사에 따르면 연간 1,500매를 생산한다고 한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일대에서 부업으로 제조하고 있다. 1991년 12월 31일 조사에 의하면 609호가 종사하여 20,624매의 꽃방석을 생산하였고, 206호가 종사하는 꽃삼합은 연간 30,371매를 생산하였다. 그러나 강화에는 2, 3년전부터 들어서기 시작한 중소공장에 취업하느라 왕골부업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강화군 강화읍에 거주하는 완초장(莞草匠) 이상재(李祥宰)씨가 지난 96년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 103호로 지정,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씨는 14살부터 강화 교동에서 부모를 따라 왕골 공예품을 만드는 기능을 닦아왔다.
가격도 30만∼40만원에 불과하다. 화문석 생산을 기피하고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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