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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창종자들] 증산교 - 증산 강일순

Gijuzzang Dream 2008. 2. 29. 02:50

   

 

 

 증산교 - 증산 강일순, 민초들에 꿈을 주다 (1)

 

증산교 강증산


1871년 전북 고부서 양반 후손으로 태어나

강증산의 영정.

 

종교는 꿈이다. 지옥에서 꾸는 꿈이 종교다.

현실이 악몽일수록 꿈은 절실하다.

 

구한말 이 땅은 숨쉬기조차 힘든 고난의 대지였다.

한 사람이 꾸는 꿈은 세상을 바꾸지 못하지만 모두 같은 꿈을 꿀 때 꿈은 현실이 된다.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은 현실을 견딜 수 없었던 민초들에게 꿈을 주었다.


태생이 운명을 결정했다.

1871년 전북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客望里).

하필이면 후일 동학이 혁명을 일으킨 땅에서 쇠잔해가는 나라의 몰락한 양반의 후손 강일순이 태어났다.

찾아올 손님을 바란다는 객망리의 지명은

본디 선망리(仙望里).

하늘의 신선이 찾아오길 바란다는 마을 이름조차 신비의 배경이 되기에 충분하다.

하늘이 갈라지고 불기둥이 몸을 덮치는 태몽을 꾼 후에 그가 태어났다. 마을 뒷산이 시루봉이라 후에 증산(甑山)이라는 호를 지었다.

 


동학혁명 실패 예감 참여 안해


고부는 농사짓기에 좋은 땅이다.

하지만 조선 말의 가렴주구는 비옥한 고장일수록 가혹했다.

농사짓는 사람은 늘 굶주렸고 불행은 불만을 끌고 다녔다.

어린 시절 총명한 강일순의 눈에는 가난한 땅의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두 가엾게 비쳤을 것이다.

 

어느 가을 알곡을 추수하며 새를 쫓는 농부를 보고

어린 그가 어른들에게 했다는 말은 사정을 짐작케 한다.

“새가 한 알 쪼아 먹는 것을 그렇게 못마땅히 여기니

굶주린 사람들을 먹여살려 보려고 애를 쓸 수가 있을까.”

일곱 살에 글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곧 그치고 만다.

세상과 사정이 허락지 않았기 때문이다.

겨우 일할 수 있을 정도로 자란 후에는 가난이라는 짐을 짊어졌다.

품을 팔고 나무를 져다 팔아야 하는 어려운 살림이었다.
10대 후반 시절을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색하며 보냈다고 전한다.

파국을 향해 치닫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병폐를 몸으로 느꼈을 것이다.

민심은 불온하고 세상이 망하기를 바라는 심사도 적지 않았던 때다.

절망을 감당할 수 없을 때 하늘과 땅이 맞붙어 뒤집어지기를 바라기도 한다.

세상은 점차 구세주를 원하고 있었다.

마침내 고부땅에서 난이 일어났다. 갑오년 동학의 혁명이 일어났을 때

강일순은 처가에서 마을 훈장을 하고 있었다.

혁명의 와중에 서당 문을 닫고 다시 이리저리 몸을 옮겼다.

그는 혁명이 성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정확히 예감하고 있었다.

동학의 접주였던 박윤거에게 권한 이야기는 동학군의 운명을 고스란히 예측한 것이다.

“동학군이 고부에서 난리를 일으켜 황토마루에서 승리하였으나 결국 패망할 것이다.

그대가 접주라고 하니 전란에 휘말려 들지 말고 무고한 생민을 전란에 끌어들이지 말라.”

강일순의 행장을 살펴보면 동학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줄곧 관심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농민군의 진격 행로를 따라 더러는 사람을 피신시키기도 했다.

동학농민군에 종군하던 안필성은 행군을 말리는 강일순에게 화를 터뜨렸다.

“이리 목숨을 내던지며 백성을 구하려는 마당에 남의 일처럼 보고만 있습니까.

게다가 사사건건 불길한 말만 하는 겁니까. 당신은 어찌 이곳까지 왔으며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함께 뜻을 세우지 않는 것까지는 참아도

늘 말리기만 하는 그의 태도에 분노가 치민 것은 당연한 일이다.

강일순의 대답은 동학과 세상을 바라보는 연민의 일단을 느끼게 해준다.

“어찌 난들 그것을 모르겠는가. 그들을 미워할 수 있겠는가. 불리한 앞날을 보고 일러주는 것이다.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아껴 건지려는 것이다.

내가 이곳에 온 것도 여기서 동학군들이 많이 희생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찌 구경하러 왔겠는가. 젊은이들의 목숨을 건져보려고 온 것이다.”

 


김항에게서 정역의 원리 배워


세상을 태우는 불길을 끄기에 한 사람의 힘은 너무 벅찰 것이다.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파멸의 결과. 그것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알면 알수록 번민도 심해진다.

동학혁명에 종군하지는 않았지만 강일순은 줄곧 전란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동학의 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지옥문이 열렸다. 관군에 더해 일본과 청의 군사까지 밀려왔다.

혼란이 겹겹이 쌓였다. 살아남은 가족에 비하면 죽은 자들은 오히려 행운이었다.

강일순은 세상의 혼돈을 굽어보리라 길을 떠난다.

20대의 마지막 몇 해를 전국을 다니며 이 땅의 불행과 비극을 절감하게 된다.

여정에서 일부(一夫) 김항(金恒)을 만난 것은

세상을 개벽하려는 증산의 사상을 세우는 데 큰 전기를 만들었다.

김항은 동학(東學)의 최제우와 남학(南學)의 김광화와 함께 동문수학한 학자다.

최제우와 김광화는 관에 잡혀 처형당했지만 그는 살아남았다.

그들은 유교의 경문을 공부했으나 세상의 도탄을 구제하기엔 힘에 겹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찍부터 선가(仙家)와 불교에 눈을 돌렸고 주문과 종교적 신비에 빠져들었다.

김항은 특히 주역에 심취했다. 시대가 바뀌어 주역의 수리원리가 뒤바뀌었음을 주장했다.

정역(正易)을 주창한 것이다.

하늘과 땅이 개벽하여 일어난 천지(天地)의 시대가

땅과 하늘의 지천(地天)의 시대가 됐다고 가르쳤다.

선천(先天) 시대의 원리로는 후천(後天) 시대의 진실을 밝히지 못하니 새로 교의를 세웠다고 했다.

전하기로는 김항도 매일 관촉사의 미륵불 앞에서 기도하였고 강력한 종교적 신비를 체험했다고 한다.

그는 정역의 사상을 펼치면서

우주와 생명의 조화 원리를 꿰뚫어 안 유일한 사람이 자신임을 전파했다.

김항의 사상은 후에 생겨난 민족종교들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인간의 마음이 하늘까지 바꿀 수 있는 시대가 됐음을 예고했기 때문이다.

강증산이 태어난 마을의 뒷산인 시루봉.

 


강일순은 1897년 김항을 만났다.

며칠간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무엇엔가 두 사람의 뜻이 맞아 떨어졌을 것이다.
이때부터 강일순의 발길은 전라도를 벗어난다.

충청도 경기도에서 황해도 평안도를 둘러 함경도 강원도를 찾았다.

경상도를 거쳐 충청도를 다시 돌아 고향으로 돌아왔다. 나이 서른이 된 해였다.

정역의 원리를 배우고 순례의 기간 사람들의 마음을 정면으로 마주보는 방식을 익혔다.

이때부터 사람들 사이에 그는 신비로운 인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군데군데서 보여준 이적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세상을 이루는 복잡한 원리를 읽어낼 줄 알았고

마음의 갈피를 뒤져 필요한 지혜를 찾아내는 법을 터득했다.

3년 동안 전국을 돌며 자신이 누구이며 무엇을 해야 할지 자각했다.

고향에 돌아와 그가 한 일은 산꼭대기에 올라가 명상하고 주문을 외우고 울부짖는 일이 고작이었다.

세간의 몰이해 속에서 자신이 걸어야 할 운명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결국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동학이 휩쓸고 지나간 후라 고부의 관은 예민했다.

남다른 모습이 보일라치면 세상을 현혹한다는 명목으로 잡아들였다.

산에서 기도하며 지내는 강일순의 행적도 당연히 혹세의 죄목으로 다스릴 대상이 됐다.

몇 차례나 체포의 고비를 넘기고 기도를 끝내자 그는 산을 떠났다.

 


모악산 대원사서 49일간 정진


강일순이 찾아간 곳은 금산사의 말사인 모악산 대원사.

이곳이야말로 증산의 종교적 출발점이 된 곳이다. 여기서 그는 다시 태어났다.

증산은 대원사의 방 하나를 얻어 49일간 정진한다.

먹지도 않고 바깥 출입도 없이 목숨을 건 수도가 이루어졌다.

가장 귀한 것을 버릴 각오가 된 자는 더 귀한 것을 얻는다.

모세와 붓다, 예수와 마호메드도 그랬다.

생명을 내던지고 세상을 구제할 지혜와 용기를 구하는 것이다.

49일 동안 자신과 맞부딪치며 증산은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은 욕심과 성냄, 음란과 어리석음을 떠나 천하를 바로잡는 도를 깨우쳤다.

대원사를 나와 증산은 세상을 향한 공사(公事)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가르침에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오직 ‘만고에 없는 무극대도’라고만 했다.

 

강증산이 금산사 아래 동곡마을에 연 약방.


 

자기 앞에 놓인 가혹한 여정을 절감하고 있었을까.

증산은 그를 따르던 이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내가 이 일을 맡으려 함이 아니다.

내가 아니면 천지를 바로잡지 못한다 하니 괴로우나 어찌할 도리가 없다.

내가 맡지 않으면 천하는 비겁에 쌓여 운명을 다하기 때문이다.”

시대의 운명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다.

부귀나 종교적 권세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교세를 불리는 일에 힘을 쓰지 않았고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주었다.

 

집안을 돌보는 평범한 삶을 살아달라는 아내의 당부를 오히려 나무랐다.

“천하를 위하려 하오. 천지를 바로잡고 세계의 창생을 건지려는 나에게 집에 머물라 권하오.”

이후 줄곧 금산사 아래 동곡 마을을 중심으로 지내며 뜻을 펼친다.

광제국(廣濟局)이라는 약방을 열고 병든 중생을 구하겠다는 뜻을 세운 것이다.

사람의 병을 고치기 위해 결국 하늘도 뜯어 고치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누구도 고쳐주지 못했던 민초들의 하늘을 고치며 지냈다.

세상만 잘못된 것이 아니라 하늘도 잘못되었으니 당연히 바로잡아야 할 일이라 애쓴 것이다.

낡은 것으로는 새 세상을 맞을 수 없으니 증산의 뜻은 분명했다.

“다른 사람이 만든 것을 따라 행할 것이 아니니 새롭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낡은 집에 그대로 살려면 엎어질 것이니 불안하여 괴롭게 살 것이니라.

우리는 개벽해야 하나니 나의 공사는 옛날에도 없고 지금도 없는 일이요.

선천을 뜯어 고치고 후천의 무궁한 선운을 열어 낙원을 세우리라.”

그의 가르침을 쫓아 사람들이 모이면서 증산은 많은 고초를 겪는다.

개인적인 원망을 당할 때는 묵묵히 받아들여 오해를 사라지게 했다.

결국 의병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기에 이르렀다.

1907년 사람들과 함께 투옥되어 40여 일을 갇혀 지냈다.
이때 당한 혹독한 고문은 후에 사망의 원인이 됐다는 추측을 낳게 했다.

 

의병이냐는 추궁에 증산의 대답은 단호했다.

 

“의병이 이씨 왕가를 위하여 일본 병사에게 항거하는 것을 말한다면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다.

혼란하고 멸망에 가까운 때를 맞아 천지를 개조하여 새로운 세상을 열려 한다.

진실로 천하를 도모하여 창생을 건지려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시달리는 민생을 건지려는 것이다.”

천지를 고치는 공사를 시작한 지 9년 만에 강증산은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지막 말은 단순하다.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라. 행하여 오던 대로 잘 행해 나가라.”
늘 혹세무민하지 말라 가르쳤고 병든 것을 낫게 하려고 애쓰던 길지 않은 삶이 저물었다.

그래도 그가 꿨던 꿈은 백일몽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절망에 목을 놓아 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결정된 운명을 강요하는 하늘이 아니라 마음을 써서 바꿀 수 있는 하늘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과거의 영광만 돌아보며 무지와 원망 속에서 살지 말고

하나라도 할 수 있는 일을 행하라는 것이 그의 가르침이다.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한 것을 귀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세상은 서로 다투는 곳이 아니라

함께 살 수 있는 상생의 터라는 것이 강증산이 열어주려 한 이 땅의 모습이다.

그 꿈은 오늘에 이르러서도 빛이 바래지 않고 있다.
- 2008 02/26   뉴스메이커 763호 [한국의 창종자들]
- 김천, 객원기자,
mindtemple@gmail.com

 

 

 

 

 

 해강 증산, 한국적 구세주로의 열망 (2)

 

자신을 미륵불로 지칭… 한국 종교사상 최초의 사건

한국 종교사에서 증산 강일순은 독창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한국의 종교는 증산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2000년 이상 지속되어온 이 땅의 종교적 흐름은

그로 말미암아 아주 새로운 경지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김종서 교수는 한국 종교사에서 증산이 준 충격을 이렇게 설명했다.

“수운 최제우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습니다.

강증산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천명했습니다.

한국 종교사상 최초의 사건입니다. 그 이전에는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각성이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가르침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신임을 선언하다

 

강증산을 상제로 모신 진영.

강증산이 스스로 신임을 선언한 종교적 자신감은

가깝게는 원불교부터 통일교까지 이후

한국에서 태어난 종교에 깊은 인상을 주었다.

창종자가 스스로 신이거나 신성의 현현임을 밝힌 시초가 그에게 시작됐다.

흔들리는 세상에서 더 이상 신을 찾아 헤매지 않고

자신이 신임을 깨우친 이가 강증산이다.

한국종교학회의 김탁 박사는 증산이 펼친 종교적 행위는 스스로 하늘임을 알고 나서야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동학을 일으킨 수운 최제우는 하늘과의 대화를 체험했습니다.
그것을 통해 후천개벽의 새세상이 올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러나 증산의 가르침은 예언에 그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늘이며 우주 최고의 주재자이므로 후천개벽으로 새세상을 만들 계획을 세워두었다고 밝혔습니다.”

신은 더 이상 세상의 저편에서 드러나지 않는 뜻을 통해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똑같은 고통 속에서 그 고난을 구제하기 위해 이 땅에 온 것이다. 증산계통의 종교에서 강증산을 하늘님인 상제(上帝)라고 부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증산에 이르러 신은 대행자를 통하지 않고 이 땅의 역사에 직접 개입한다. 그는 자신이 신이며 동시에 세상을 구제하는 미륵불(彌勒佛)임을 주장했다.

증산의 행장과 가르침을 담은 대순전경(大巡典經)에는

하늘에 있던 그가 이 땅에 오게 된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서천서역대법국천계탑(西天西域大法國天階塔)에 내려와서

삼계를 둘러보고 천하에 대순(大巡)하다가 이 동토에 그쳐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상(彌勒金像)에 임(臨)하여 30년을 지내면서

최수운(崔水雲)에게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내려 대도(大道)를 세우게 하였더니

수운이 능히 유교의 테 밖에 벗어나 진법을 들춰내어

신도(神道)와 인문(人文)의 푯대를 지으며 대도의 참 빛을 열지 못하므로

드디어 갑자년에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신미년에 스스로 세상에 내려왔노라.”

금산사 미륵불에 30년을 머물다 세상에 왔다는 것이다.

대순전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그의 모습조차

‘얼굴이 원만(圓滿)하사 금산미륵불(金山彌勒佛)과 흡사하시며

양미간(兩眉間)에 불표(佛表)가 있으시다’하여 금산사 미륵불과 같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미륵신앙은 동아시아의 역사에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왕조에 의해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변용되는 경우도 있었고

사회변혁을 바라는 민중의 혁명이념으로 내세울 때도 있었다.

원나라의 국운이 쇠잔해갈 때 중국의 민중들은 미륵을 신앙하는 백련교를 만들어

홍건적의 난을 일으켜 새 세상을 갈망했다.

신라가 망해갈 때 궁예는 자신이 미륵임을 주장하며 세상을 구하겠다고 나선다.

강증산이 평생을 보낸 향토는 미륵신앙의 중심지였다.

백제시대 익산 미륵사는 국가 신앙의 중심이었고

통일신라 이후 진표율사가 창건한 모악산 금산사는 지금까지 미륵신앙의 근본 도량이 되고 있다.

금산사로 가는 길목인 구리골에서 약방을 차리고

그는 세상을 향해 무극대도의 가르침을 폈던 것이다.



원불교 · 통일교 등에 깊은 인상줘


도솔천에서 자비심으로 수행하는 미륵보살은 부처가 되어 이 땅에 온다.

그 시절이 되면 세상의 모든 고통과 고난은 사라지고 억압에서 풀려나 모든 이가 구원된다.

그것이 미륵신앙의 근본이다.

그때 미륵불과 함께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는 이상적인 지도자가 세상을 이끌어

풍요와 평화가 넘치는 세상이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대진대학교 종교문화학부의 윤재근 교수는 강증산이 미륵을 주창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하부 민중들이 미래를 바라는 종교적인 마음은 미륵신앙에 배어 있습니다.

강증산은 우리 사회의 혼란과 고통을 끝내고 안정시키려는 열망을 갖고 있었고

한국적인 구세주로서 미륵불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금산사 미륵불.

미륵(彌勒, Maitreya)이란 명칭의 어원은

‘모두를 사랑으로 대하는 이’라는 의미다.

부처가 되기 전의 미륵보살은 일체를 연민으로 대하는 자비심을 수행한다.

그러기에 옛 역경사들은 미륵보살을 ‘자비를 이름으로 삼는다’는 자씨보살(慈氏菩薩)로 의역했다.

미륵불이야말로 시대의 아픔 속에서 민중을 사랑하는 종교적 구세주의 모델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신으로서, 상제로서, 미륵불로서 이 땅에 온 증산은

세상의 모순을 바로잡기 위해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펼쳤다고 했다.

공사는 강증산의 독창적인 종교행위다.

여러 공사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천지공사다.

대순전경에는 강증산이 공사를 펼치는 뜻을 적고 있다.

“내가 하늘과 땅과 인간세상의 대권(大權)을 주재(主宰)하여 천지를 개벽하며 무궁한 선경의 운수를 정하고 조화정부를 열어 재겁(災劫)에 싸인 신명(神明)과 민중(民衆)을 건지려 한다.”

 

천지를 개벽하고 재난 속의 민중뿐 아니라 신명까지도 건질 수 있다.

세상의 신들마저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절대자만이 가능한 일이다.

공사란 후천 세계의 질서를 재편하는 창조주의 행위인 것이다.

“수운 최제우의 가르침은

하늘님을 모시는 ‘시천주(侍天主)’입니다.

신의 힘에 의지합니다.

그러나 강증산의 공사는 자신이 천주(天主)인 하늘님이라는 자각에서 비롯돼

능동적으로 세상을 개벽합니다. 이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이 천지공사이며

이를 통해 종교적 이상세계를 구현할 수 있다고 믿고 가르쳤습니다.”

 

대진대학교 윤재근 교수의 설명이다.

강증산은 당대의 현실을 원(寃)으로 가득한 세상이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지배구조 때문에 원망과 원한이 쌓일 수밖에 없으니

해원(解寃)으로 원을 풀어주려면 천지공사만이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이상세계는 단순히 기다리면 오는 세상이 아니었다.

세상이 그릇되기 시작한 근원까지 돌아가 원한을 풀어주고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도수를 정해놓아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적극적인 실천이 따라야 했다. 그래서 펼친 것이 천지공사였다.

강증산이 9년 동안 그산사 인근에서 천지공사를 펼쳤던 오리알터.

지금은 금평 저수지가 됐다.


강증산은 “마음이 깨끗해야 복이 이른다”고 했다.

그가 대중에게 제시한 종교적인 수행법은 ‘마음을 닦으라’는 포괄적인 지침이었다.

외부보다 내면의 종교체험을 강조한 것이다.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윤이흠 명예교수는 이 같은 가르침이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라고 지적한다.

“강증산은 동학혁명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종교를 조직했습니다.

동학이 외형적이고 대사회적인 가르침을 펼쳤지만 실패하는 것을 보았기에

내형적인 종교 경험을 주목했습니다.”

 

사람들을 향해 늘 “마음을 부지런히 하라. 정심으로 나를 따르라”고 강조했던 것이 그의 가르침이다.

도통진경(道通眞境)이라는 지상천국에 이르기 위해 마음 수련을 권했다.

 


약국을 만들고 직접 약을 지었다


증산은 세상에서 원이 가득 찬 이들에게 다가서서 종교를 펼쳤던 이다.

복잡한 교리로 가르침을 포장하기보다 약국을 만들고 직접 약을 지어 병을 고치려 했다.

때로는 주문 외는 것을 가르쳤고 부적을 쓰기도 했다.

이해할 수 없는 논리를 강요하기보다 마음을 닦으면 누구나 도통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세상의 개벽을 미리 짜 두었으니 진심으로 마음을 닦아 올바른 생각을 되찾자고 말했다.

양반의 후예들이 중심이 되어 시작된 동학과 대비해 강증산을 따르던 이들의 신분적인 특성은 달랐다.

그는 늘 배우지 못하고 세상의 낮은 곳에서 어렵게 사는 사람에게 다가섰다.

그것이 마음 수련이라는 포괄적인 수행법을 펼치게 된 밑바당이라는 분석도 있다.

대진대학교 윤재근 교수는 신분적 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증산을 따르던 이들은 무당이나 서얼 등 신분상 하부구조의 사람이 많았습니다.

백성들의 문맹률이 높았던 점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에게 다가서서 종교적인 수행법을 쉽게 전하기 위해

마음을 닦으라는 광범위한 표현을 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세상은 곳곳에서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국가와 지배체제가 분열되고 신분이 역전되며 민족의 정체성이 위협받았다.

필요한 것은 화합하는 세상이며 그것이 이루어진 것이 ‘상생(相生)’의 세상이다.

증산이 꿈꾸어 비춘 것은 사람이 근본이 되고 존귀해지는 ‘인존(人尊)’의 지상천국.

고통과 슬픔이 없는 세상이다.

강증산은 이미 5만 년의 무극대도를 설계해놓았으니

그것이 천지공사를 통해 이루어지는 후천개벽의 세상이 열렸다고 했다.

그러니 모두가 마음을 닦으라고 권했다.

 

이상세계에 이르기란 불가능한 일도 아니고 그다지 어렵지도 않으니

오직 마음을 닦으면 누구나 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지금 이 순간도 그 꿈이 이루어지는 후천의 개벽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 2008 03/04   뉴스메이커 764호 [한국의 창종자들]
- 김천 , 객원기자 mindtemple@gmail.com

 

 

 

 

 천민과 여성의 해원(解寃)을 풀어주라 (3)

 

“당대의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는 자들을 품어야 한다” 강조

세상이 불행하여 종교가 있다. 대부분의 종교는 절망적 상황에서 시작되었다.

이집트의 노예로 가혹한 현실을 살던 유태 백성에게

모세는 민족의 자각을 이끌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다.

예수는 로마의 학정에 절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사랑이라는 삶의 방식을 일깨웠다.

석가모니는 주변 강대국의 침략 위협 속에서 수행의 길을 택했다.

동곡약방에 걸린

강증산의 친필.

강증산의 시대는 변화와 고난과 두려움이 지배하던 때다.

사람들은 불행했다.

그는 이런 세상의 모습을 천지가 새로 열리는 개벽(開闢)의 시대로 파악했다.

행복해지려면 왜 불행한지 알아야 한다.

고통의 원인을 바로 보아야 하고 무엇이 행복에 이르는 길인지

알지 못하면 결코 행복을 얻지 못할 것이다.

 

강증산은 세상이 혼란한 원인을 불행한 이들의 원한에서 찾았다.

이미 만들어진 세상인 선천개벽(先天開闢) 시대에 쌓인 원한이

극에 달해 세상이 망해버릴 지경이 되었다는 것이 그의 자각이다.

그러니 원한을 풀지 못하면 세상은 결코 행복해지지 못하리라고 했다.

 


요순시대는 조선이 꿈꾼 이상세계

 

모세가 율법을 외쳤고 부처가 지혜와 자비를 가르치며

예수가 사랑을 이야기했던 것처럼 증산은 해원(解寃)을 말했다.

원한과 원망은 불행의 씨앗이다. 개인과 국가 모두가 그렇다.

조선은 사회 운용의 모범을 중국에서 찾고 있었다.

모든 이가 풍요를 누리던 태평성대의 요순(堯舜)시대는

조선이 꿈꾼 이상세계다.

유교정치의 궁극적인 목표는 요순시대의 실현이다.

조선이 망해가던 시절 강증산은 요순시대야말로 최초의 모순,

원한이 시작된 출발점이라고 파악했다.

당시까지의 세계관과는 전혀 다른 접근이다.

한국종교학회의 김탁 박사는 해원의 근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세상의 첫 원한을 맺은 것이 요임금의 아들 단주(丹朱)입니다.

모든 원한은 그로부터 시작됐습니다.

단주의 원한을 풀어가는 과정이 선천시대의 해원이며 천지공사의 시작입니다.”

1926년 이상호가 쓴 ‘증산천사공사기(甑山天師公事記)’는 강증산의 언행을 적은 최초의 기록이다.

그곳에 실려 있는 강증산의 육성은 해원의 의미와 단주에 대해 들려주고 있다.

“옛부터 쌓여온 원을 풀어 그로부터 생긴 모든 불상사를 소멸하여 영원한 화평을 이루려 한다.

대개 머리를 끌면 몸이 움직이는 것 같이 인륜 기록이 비롯되었으며

원의 역사의 첫 장인 요임금의 아들 단주의 원을 풀어주면

그 이하 수천 년에 쌓여온 원이 다 마디와 코가 풀어지리라.”

요임금의 아들인 단주는 왕권이 당연히 자신에게 전해지리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아들이 현명하지 않음을 안 요임금은 왕위를 순에게 물려주었다.

단주는 아버지로부터 바둑판 하나를 받고 말았다.

요와 순임금이 세상을 풍요롭게 했다지만 단주에게는 원한의 대상일 뿐이다.

강증산은 유교적 이상세계란 개인에게 불행을 강요하는 허위란 점을 간파했다.

한 시대와 세계관이 몰락하고 있으니 그 원인을 종교적으로 규명하고 풀어주려 한 것이다.

지나간 시대의 가치는 더 이상 힘이 되지 못하며 새 세상을 이루는 걸림돌에 불과하다는 통찰이었다.

강증산이 꿈꾼 행복한 세상이란 결국 원이 풀린 세계다.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려면 그 원한의 첫 단추를 바로잡아야 했다.

강증산은 천지공사를 펼치며 해원의 첫머리를 푸는 종교적 상징을 장치하고 있다.

그는 천지공사의 현장인 동곡약방(銅谷藥房)에 약장을 만들어 천하를 고치는 도구로 삼았다.

공사기에는 약장의 모습을 상세히 그리고 있다.

“약장의 가운데 칸에 단주가 명을 받는다는 뜻의 ‘단주수명(丹朱受命)’이라 쓰시고

그 속에 목단 껍질을 넣어두셨다.

그 아래에 사나운 바람과 번개 · 비에도 혼미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열풍뇌우불미(烈風雷雨不迷)’라고 옆으로 쓰셨다.

또 ‘칠성경(七星經)’을 아래로 쓰고

그 끝에 걸음을 재촉하여 양명에 오른다는 의미로 ‘우보상최등양명(禹步相催登陽明)’이라 쓰셨다.”

 

단주가 명을 받는다는 것은 그의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어 원을 풀어주었음을 밝힌 것이다.

창조주인 강증산이 쓴 글귀를 통해 해원이 이루어졌음을 선포했다.

 


강증산 사후 교세 들불처럼 번져


뜻을 세웠으나 이루지 못한 자들의 좌절은 아프다.

그것이 쌓여 세상의 불평등과 소외가 생겨난다고 보았다.

 

강증산은 예수회 선교사로 중국에 최초로 가톨릭 신앙을 전한

마테오 리치(중국명 이마두, 利瑪竇) 신부도 원을 남겼다고 보았다.

강증산은 서학의 이마두는 지상에 천국을 만들려고 했지만

유교의 폐습 때문에 실패했다고 말했다고 했다.

동학의 전봉준과 최제우도 원을 남겼으니 풀어준다고 했다.

강증산의 진영이 걸린 한 증산도 도장에서

수행하는 모습.

강증산의 해원 실행 중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천민과 여성의 원을 풀어주려 한 것이다.

당대의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는 자를 품지 않고서 세상의 상처는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여자도 수도를 하면 도를 통할 수 있고 자기를 완성할 수 있다. 여성은 남성과 평등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가르쳤다.

증산의 교의 중에 음양합덕(陰陽合德)을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음과 양은 동등하게 세상을 이룬다는 가르침이다.

강증산이 예고한 세상에서는

천민도 귀해지고 주인이 된다.

가장 약한 것이 강해지며

천한 것이 높아지는 세상이 오리라는 것을 예언했다. 조선의 사회는 그런 세상의 반대편에 서 있으며 그 역사는 이미 끝장나버렸다는 것을 주장한 것이다.

서울대학교 윤이흠 명예교수는

강증산의 공사사상과 해원의 종교행위야말로 독창적인 것이라고 지적한다.

“해원의 가르침을 통해 증산 특유의 신비주의적인 교리가 진행됩니다.

증산은 개인과 사회의 원, 동양과 서양 뿐 아니라 일본의 원까지 풀어주고 있습니다.

일본에 대해 앞으로 일어날 일까지 예언하여 도수를 정해놓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 민족의 우월성을 갖게 하고 민족 주체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민족의식을 강조한 강증산의 종교적 가르침은 격렬한 압력이 되어 돌아왔다.

탄압의 빌미가 됐다. 예수가 로마 총독인 본디오 빌라도의 법정에 섰던 것처럼

강증산도 고부경무청에 체포되었다.

나라가 망해갈 때 종교에 민족의식이 더해지면서 불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그의 가르침은 번져나갔다.

 


모악산 금산사에 재림할 것을 예고


강증산의 사후인 1918년 조선총독부가 조사한 ‘조선의 유사종교 조사 자료’에는

증산계열 종교의 교도는 약 1만 명이 채 되지 않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던 것이 1923년 ‘조선의 유사종교’에는

훔치교계 보천교 2만3006명, 무극대도교 1031명, 태을교 210명, 불교를 표방한 미륵불교 4411명 등

약 3만 명 가까이로 늘어난다.

김제 금산사 전경.

1935년 6월 7일자 동아일보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유사종교단체를 엄중  보기 드물게 동서양의 종교적 가르침을 모두 어우르고 있습니다. 국운이 흔들리던 당시 상황에서 기존의 유교와 불교만으로는 부족하며 서양의 기독교만으로도 구원할 수 없다고 본 것입니다. 동서양의 종교에 무속신앙까지 포함해 모두를 가지고 종교적 비전을 제시한 것이 강증산의 가르침입니다.”

믿지 않으면 종교가 아니고 믿을 수 없으면 신이 아니다. 강증산은 자신이 다시 돌아올 것임을 예고했다. 제자들도 그의 재림을 의심치 않았다.

죽음을 나흘 앞두고 그는 제자를 불러 모아

“너희들이 나를 믿느냐?” 하고 물었다.

제자들이 믿는다고 하자

다시 “죽어도 믿겠느냐?”라고 물으니

제자들도 죽어도 믿는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잘 보아두라고 했다.

후일 다시 돌아올 때는 눈이 부셔서 보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금산사에 들어가니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오라는 말을 남겼다.

모악산 금산사에는 지금도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 2008 03/11   뉴스메이커 765호 [한국의 창종자들]
- 김천 , 객원기자 mindtemple@gmail.com

 

 

 

 

 

  증산의 종교는 그가 죽어서야 시작됐다 (4)

 

 

 

 

교의 세운 사람은 둘째부인… 증산과 함께 신앙의 근본

강증산은 종교를 세우지 않았다.

촌마을에 방 하나를 얻어 약방을 열고 사람들과 만나 함께 꿈을 꿨을 뿐이다.

증산의 종교는 그가 죽어서야 시작됐다.

강증산의 유해가 있는 김제 금산면 오리알터의 영대.


증산교의 교의를 세운 사람은 둘째부인인 고판례(高判禮, 1880~1935)다.

교단에 따라 태모(太母), 고수부(高首婦), 천후(天后), 고부인(高婦人), 사모(師母)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는 증산교의 핵심 인물이다. 그

는 상제(上帝)로 칭하는 강증산과 함께 신앙의 근본이 되고 있다.

 


“고부인 통해 증산의 영이 강림”


강증산은 동곡약방을 중심으로 5년간 천지공사를 편 후 차경석을 만나 제자로 삼았다.

차경석은 미칠 것 같은 세상에서 동학을 거쳐 자신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둘은 첫눈에 의기투합했다.

강증산은 차경석의 정읍 집으로 잠시 거처를 옮겨 천지공사의 격식을 더한다.

차경석에게는 과부가 된 이종사촌이 있었는데 그가 고판례다.

강증산은 고판례를 둘째부인으로 삼아 수부공사(首婦公事)를 펴니

고부인에게 천하의 대권을 물려준 의식이라 보는 이도 있다.

고판례는 대단히 주체적인 여성이었다.

당시 시대 상황에 비추어볼 때 그는 더할 바 없는 거침없는 언행을 남겼다.

그는 강증산 앞에서 당당히 자신을 첫째로 삼아줄 것을 요구했다.

흔쾌히 ‘일등수부(一等首婦)’로 정하리라는 강증산의 언약에도

다시금 그 다짐이 변함없어야 한다는 것을 강요했다.

혼례를 마치며 강증산은 고부인에게 “이로부터 천지대업을 네게 맡기리라”고 명하니

주변에 자신과 고부인이 똑같음을 밝혔다.

후천개벽의 시대는 약한 자와 여성을 억압하는 일이 없어야 하며,

여성이 세상을 주재할 수도 있음을 예고하는 것이다.

영대안 강증산의 진영과 무덤.

‘선도신정경’에는

고부인이 무당임을 드러낸 구절이 나온다.

강증산은 어느 날 사람들에게 원을 풀어주는 뜻을 밝힌 후 고부인을 일러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천지 굿이니 나는 천하 일등재인이요.

너는 천하 일등무당이라.”

천지공사란 곧 천지 굿이며 대업을 맡긴 고부인은 천하의 큰 무당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은 모두의 원을 풀어주는 굿판과 다르지 않다는 선언이다.

그러니 당골이 되어 원을 풀라고 했다.

강증산의 사후 고부인은

증산이 자신의 몸에 강림하는 강력한 신비 체험을 하게 된다. 세간에서는 증산이 부활했다는 평이 자자하여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모았다.

증산을 따르는 종교가 생겨난 배경에 대해

성균관대 임태홍 교수(동아시아학술센터)의 관점은 흥미롭다.

“강증산은 새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것을 예언한 사상가였습니다.

그러나 고부인은 증산의 종교를 실제로 만든 사람입니다.

그는 제자들을 끌어모으는 역할을 했습니다.

죽은 증산의 신이 자신의 몸을 통해 내려오는 강력한 종교 체험을 하였습니다.

직접 계시를 받아 갖가지 이적과 기행을 남겨 증산 사후 신앙의 중심이 됐습니다.”


교세 커지자 차경석과 다툼

 

강증산의 3년상을 치르고 고부인은 증산의 생일을 맞아

금산사 미륵전에서 탄신을 기념하는 치성을 드리다가 강력한 신비 현상을 경험했다.

하늘에서 저울과 갖가지 과일이 쏟아지는 환상을 보고 쓰러져 몇 시간 동안 정신을 잃더니

깨어나 차경석에게 증산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건네는 이적을 보였다.

세상은 복잡한 가르침보다 단순한 기적에 더 귀를 기울인다.

증산의 영이 강림했다는 소식이 사방으로 퍼지면서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고부인은 “법은 증산께서 내렸지만, 일을 함은 내가 한다”고 말해

자신이 공사의 주체임을 거듭 밝혔다.

강증산의 유품인 약장과 물품을 모두 챙겨 자신의 거소로 옮기고

여러 차례 증산의 영을 몸으로 받아 신비한 일들을 보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고부인 주변에는 새세상을 원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선도교(仙道敎)라는 이름의 종교가 시작되었다.

교세가 커지자 차경석과 다툼을 벌이다 결국 일부 교인을 이끌고 나와

태을교(太乙敎)로 이름을 바꾼다.

증산 계열의 종교는 교당보다 사람 중심의 종교다. 교리보다 체험을 우선하는 종교다.

그 때문에 교단은 인물을 중심으로 계속 분열되어 퍼져나간다.

처음에는 고부인을 중심으로 비롯했지만 강증산 주변의 여러 인물을 축으로 갖가지 교파가 등장했다.

선도교, 태을도, 훔치교, 보천교, 미륵불교, 용화교, 증산대도교 등으로 시작된 증산 계열의 종교는

지금도 100여 개가 넘는 종단이 있으리라 추정된다.

그 이름도 다양해 일부만 살펴도

증산도, 증산교, 대순진리회, 증산법종교, 동도교 법종교회, 청도교, 순천교, 천인교, 임무교, 수산교,

금산교회, 삼덕교회, 증산대도교 등으로 다양하다.

그들은 전국 곳곳에 무리지어 신앙 활동을 했고

간도 땅까지 건너가 종교적 이상사회를 만들려고 애쓰며 강증산이 돌아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부인 이래 가장 강력한 교세를 떨친 이는 차경석이다.

고부인의 인척으로 차천자(車天子)라는 별명을 가져 보천교(普天敎)를 세웠다.

승승장구하던 보천교는 후에 일제 탄압의 표적이 되어 소멸하고 만다.

김형렬은 강증산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다.

동학농민혁명에 종군하다 처음 강증산을 만났고 동

곡약방을 연 후에는 자신의 집으로 모셔 죽을 때까지 수발하며 섬겼다.

그는 증산이 세상을 떠나자 증산의 영을 섬겨 포교를 시작했다.

특히 금산사 미륵불로 증산이 재림할 것을 굳게 믿어 미륵불교라는 이름을 내세워 종단을 열었다.

한때 금산사 승려와 결탁하여 절 안에 간판을 걸고 포교를 하였으나

미륵불을 두고 분란을 일으키자 쫓겨나고 말았다.

그는 금산사 어귀에서 후천세계의 선경이 시작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밖에도 강증산의 수제자였던 문공신은 증산교 문공신파를 세웠고,

이치복은 보화교를, 김광찬은 도리원파를 세웠다.

안내성은 증산대도회를 세워 증산의 환생을 기다렸으며 박공우는 태을교를 만들었다.

1949년 4월 8일 현재의 자리에 강증산의 유해를 다시 모신 장례식.

 

일제강점기에 증산 계열의 종교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총독부의 탄압뿐 아니라 내부적인 경쟁으로 소란한 모습을 보인다.

특히 강증산의 유해를 둔 다툼은 법정분쟁까지 벌어졌다.

1929년 3월 27일자 동아일보에는 유골반환 청구 소송을 소상히 소개하고 있다.

강증산의 본부인인 정씨부인이 관리하던 묘를 차경석이 파헤쳐 유골을 옮겼다는 것이다.

분쟁이 일어나 보천교를 반대하는 교단에서는 정씨부인을 내세워 유골반환 소송을 냈고

결국 차경석은 패소하고 만다.

고부인과 차경석 외에 다른 종단은 크게 포교에 힘을 기울이지 않았다.

단순히 치성을 하며 증산의 재림을 조용히 기다리는 입장이었다.

이런 모습은 일제강점기를 지나 지금까지도 이어진다.

최소 60여 개에서 많게는 100개가 넘는 종단이 있지만

한두 개 종단을 제외하고는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지냈다.

보천교가 사라진 후 증산 계열의 종교들은 큰 움직임 없이 산발적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해방이 되고 한반도의 운명이 급변하자 모악산 일대는 다시 증산 계열 종교의 성시를 이룬다.

증산법종교의 이상흥(70) 사무국장은 어릴 적 본 경험을 이렇게 말했다.

“정말 많은 종단이 있었습니다.

수천 명의 신도가 함께 살면서 수도하는 집단이 수십 개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대단해서 교세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고 6·25 전후에 절정에 이르렀던 것 같습니다.

이 일대는 오나가나 모두 증산교를 믿는 신도들밖에 볼 수 없었습니다.

요즘엔 몇몇 종단만 남아 있고, 많아야 수십 명이 남아 명맥만 유지할 정도로 교세가 미약해졌습니다.

시대에 맞는 교리와 신앙체계를 만들어내지 못하니 널리 포교가 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선도교 · 태을도 등 100여 개 종단


강순임은 강증산의 본부인인 정씨로부터 얻은 유일한 혈육이다.

어릴 적에 아버지를 잃고 세상의 고초를 다 겪다가 목숨을 끊으려 할 때 부친의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이곳저곳을 떠돌며 강증산의 상을 모시고 치성을 드리다가

해방 후 오리알터에 자리를 잡고 증산선불교(甑山仙佛敎)의 교단을 열었다.

강증산 부부의 묘인 영대를 중심으로 교세를 펼치다가

지금은 증산법종교로 이름을 바꾸어 이어지고 있다.

증산 계통의 종단 중 서백일의 용화교는 세상에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서백일은 금산사 미륵불로 다시 오리라는 강증산의 유언을 들어 미륵신앙을 표방해 신도를 모았다.

미륵이 이 땅에 와 만드는 세상을 용화세계라 하니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소원이 성취되는 지상천국이다.

용화종은 강증산의 가르침을 따라 그 이상세계를 지향하는 종교를 표방했다.

6·25전쟁 와중에 금산사 일대와 전주에서 엄청난 교세를 떨쳤다.

해방과 전쟁의 혼란 속에서 그의 종말론은 곳곳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서백일이 불미스럽게 죽은 후에 뿔뿔이 흩어진 신도들은 지금도 곳곳에서 도를 닦고 있다.

조용히 그들만의 용화세계가 이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서울대 윤이흠 명예교수는 종교의 지나친 신비화가 갖는 맹점을 지적했다.

“증산 계열의 종교는 개인적인 신비 체험을 강조합니다.

증산의 제자들 역시 증산의 사상을 정확히 전달하기보다 자신이 본 것만 강조해서 전했습니다.

자기 체험을 중시해서 활동하다 보니까 종파가 많아졌습니다.

종교는 일정부분 신비의 영역을 갖습니다만,

너무 그쪽으로 치닫고 기복과 손잡으면 종교성이 흩어지는 결과를 낳고 맙니다.”

강증산의 가르침은 민족의 수난기에 나와 발전해갔다.

곧 망할 것 같은 세상 속에서 빛과 희망을 전하려 애썼다.

닥쳐올 불분명한 미래는 그야말로 두려움이다. 모르기 때문에 두렵고 두려우니 절망한다.

증산은 늘 “마음을 놓으라”고 했다. 우리 앞에 놓인 것은 파멸도 아니고 지옥도 아니라고 가르쳤다.

증산을 따른 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방식으로 이상사회를 꿈꿨다.

더러는 실패했을 수도 있다.

더러는 민중을 우롱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악몽 같은 상황 속에서 백일몽일지언정 꿈을 주었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미쳐버렸을지도 모를 현실의 지옥에서 사람들을 구해낸 것이

강증산이 건네준 종교의 꿈이다.
- 2008 03/18   뉴스메이커 766호 [한국의 창종자들]
- 김천 , 객원기자
mindtemple@gmail.com

 

 

 

 

 

 

 

 

 

 

- Ja Vais Seul Sur la Route / Anna Ger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