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최북 - 풍설야귀인도(風雪夜歸人圖), 조어도(釣魚圖)

Gijuzzang Dream 2008. 2. 27. 02:02

 

 

 

 부정. 반항으로 사회 통념에 도전한 최북

 

 

한국의 반 고흐, 최북

아마 고흐는 잘 알아도 조선시대 영정조 시대를 살다간 우리나라 화가 중 최고의 기인

호생관 최북(毫生館 崔北, 1712~1786?)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스스로를 ‘'붓(毫)으로 먹고 사는(生) 사람’이라고 부를 정도로 범상치 않았던 최북은

또한 자신의 이름 ‘북(北)’자를 반으로 쪼개어 ‘칠칠(七七)’이라고 불렀다.

 

당시 중인계급의 미천한 출신이었지만 그림을 잘 그려 명성을 얻었다.

메추라기를 잘 그려 ‘최 메추라기’, 산수화에 뛰어나 ‘최 산수(崔山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림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던 그는 엄격한 신분제에 대한 반항심과

화가로서의 자존심, 술과 기행으로 ‘미치광이’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이런 파란만장한 최북의 삶은 숱한 일화를 남겼다.

그림은 자기가 그리고 싶을 때만 그리고, 그려주고 싶은 사람에게만 그려주었다.

그림을 그려준 사람이 맘에 안 들어 하거나 요구사항이 계속되면

받은 돈을 도로 돌려주고 그림을 그 자리에서 찢어 버리기 일쑤였다.

그의 작품이 지금 별로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자신의 눈을 찔러 애꾸가 된 ‘칠칠이’

어느 날 별로 탐탐치 않은 양반이 그림을 그려달라고 찾아와 그의 솜씨를 트집을 잡자

화가 난 최북은 급기야 자기 손으로 한쪽 눈을 찔러버렸다.

애꾸가 된 최북은 그 후로 전국을 유랑하며 그림을 팔아 얻은 동전 몇 닢으로

자신을 천대하는 세상을 원망하며 술에 취해 지냈다.

결국 어느 추운 날 한밤중에

그림 한 점을 팔고는 열흘을 굶다가 술에 취해 돌아오는 길에 성곽 모퉁이에 쓰러져 얼어 죽었다.


눈보라 치는 겨울 밤 속의 뜨거운 열정

여기 그의 삶을 대변해 주는 작품이 있다.

 

최북이 보여준 기인의 면모는 ‘풍설야귀인도(風雪夜歸無人圖)’ 에 잘 나타난다.

눈보라 치는 겨울 밤,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귀가하는 나그네를 그렸다.

그림 속 거칠게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헤치고 의연히 걸어가는 나그네의 모습에서

최북의 거침없는 성격과 그의 고달픈 인생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그림은 ‘지두화(指頭畵)’로 알려져 있다.

붓 대신에 손가락이나 손톱에 먹물을 묻혀서 그린 그림으로

그의 손놀림에 불 같은 성격과 광기가 더해져 있다.

 


 '풍설야귀인도, 종이에 수묵담채, 66.3×42.9㎝, 조선시대(18세기), 개인소장

 

최북의 그림은

세상에 대한 불만과 쓸쓸한 인생의 회한을 받아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최북이 남긴 풍경화 ‘풍설야귀인(눈보라치는 저녁에 돌아오는 사람)’은

   거칠면서도 힘이 넘치는 붓질로

   겨울바람에 금방이라도 부러질 듯 휘청 뒤로 꺾인 나무와 얼어붙은 개울을 표현했다.

 

 

日暮蒼山遠 天寒白屋貧(일모창산원 천한백옥빈)

날은 저물고 푸른 산 아득한데

찬 하늘 눈 덮인 집은 쓸쓸하기만 하네

 

柴門聞犬吠 風雪夜歸人(시문문견폐 풍설야귀인)

사립문 밖엔 개 짖는 소리 들리고

눈보라치는 밤 길손은 돌아가네

- 유장경 <逢雪宿芙蓉山主人(봉설숙부용산주인)>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는 인생

최북은 사회에 대한 반항과 부정으로 기존의 통념에 도전한 화가였다.

그의 삶은 늘 불만스러움과 고독이 함께 했다.

쓸쓸한 그의 최후를 보면 그가 그린 그림 속에 그의 불편한 심사가 그대로 묻어난다.

 


다음은 그의 지인 신광하가 남긴 최북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다.

‘그대는 최북이가 눈 속에 죽은 것을 보지 못했는가?
담비 가죽 옷에 백마를 탄 이는 뉘 집 자손이냐?
너희들은 어찌 그의 죽음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득의양양하는가?
최북은 비천하고 미약했으니 진실로 애닯도다.
최북은 사람됨이 심히 굳세었다.
스스로를 칭하여 붓으로 먹고 사는 화사(畵師)라 했다. 호생관(毫生館).
구는 단구에 작았으며 눈은 애꾸였지만 술 석잔만 들어가면 두려울 것이 없고 거칠 것 없었네.

최북은 북쪽으로 숙신까지 들어가 흑룡강에 이르렀고

동쪽으로는 일본에 건너가 적안까지 갔었다네.

  

고흐보다 백여 년이나 앞선 선배인 최북은 이렇게 허허롭게 한 생을 살다 갔다.

고흐와 최북, 그들은 ‘미치광이 화가’라는 소리를 들었고 고통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애썼다.

꺼져가는 잿더미 속에서 희망의 불씨를 피워가듯 그들의 열정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이쯤 되면 ‘한국의 반 고흐, 최북’이 아니라 ‘네덜란드의 최북, 반 고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 [명화로 보는 논술] 최혜원 블루 로터스 아트디렉터, 경희대 강사

 

 

 

 

 최북 '풍설야귀인도'의 개

 

차디찬 겨울밤 사납게 짖는 모습이 '아웃사이더' 최북을 연상케

 
 

최북의 '풍설야귀인도'

종이에 채색, 66.3×42.9㎝, 개인소장

술에 미친 화가들이 있다.
김명국 최북 김홍도 장승업 등은 술 힘을 빌려서 그림을 그렸다.
술은 내부에 깃든 천부적인 기질을 끌어올리는 일종의 '마중물'이었다. 펌프에서 물이 잘 나오지 않을 때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 붓는 물처럼 그들에겐 술이 그랬다.

호생관 최북(1712~1786)은 소문난 술꾼이었다. 그는 중인이라는 신분적 한계에 갇혀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마음껏 펴지 못하자 술과 그림에 의지해서 살았다.
술값을 벌기 위해 그림을 그렸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술을 마셨다.
 
현재 남아 있는 그림 중에서 '풍설야귀인도'는 취기가 느껴지는 그림이다.
거침없는 필치에서 호생관의 기질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림을 팔아서 술을 사먹다

그는 별칭부터가 예사롭지 않았다.
자기 이름인 '북(北)'자를 둘 쪼개서(七七) 스스로를 '칠칠이'라고 했다.
호생관(毫生館)도 '붓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자신이 지었다.
또한 메추라기를 잘 그려서 '최메추라기', 산수화에 뛰어나 '최산수'로도 불렸다.

그는 늘 5~6되씩 술을 마셨다.
집안의 책과 종이 천 등 돈이 될 만한 것은 다 털어서 술과 바꾸었다.
그림 한 폭을 팔면 열흘 동안 오로지 술병을 끼고 살았다.
박제가는 호생관의 무모한 음주벽을 무자식에서 찾았다.
자식이 없어서 삶을 목적을 잃었기 때문에 술을 탐닉했을 것이라고 말이다.

당시 그의 서울 생활을 묘사한 한 시에는
그림을 그려서 근근이 먹고사는 그의 초상이 선명하다.
 "한양에서 그림 파는 최북/ 오막살이 신세에 네 벽 모두 텅 비었네.
유리안경과 나무필통 옆에 두고/ 하루종일 문 닫고 산수화 그려
아침에 한 폭 팔아 아침끼니 때우고/ 저녁에 한 폭 팔아 저녁끼니 때우네."(신광수)

애꾸눈에 키가 몹시 작고 몸집이 왜소했던 호생관은 성격이 까칠한 편이었다.
당대의 유명한 문인들과 교유하며 살았지만 취기가 오르면
안하무인격으로 욕지기를 해대고 술주정을 부렸다. 감정이 격하고 성질이 괴팍했다.
사람들은 그를 '미치광이'라고 놀렸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술로 벼리어진 자존심과 넘치는 풍류의식으로, 평생 자유로운 삶을 추구했다.

왜 겨울밤에 개를 강조했을까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 눈 오는 밤. 흰눈에 묻힌 산야가 으스스하다.
나무들이 바람에 휘청거린다. 한 선비가 시동과 함께 귀가하는 중이다.

단숨에 그린 듯한 먹선에서 광기가 느껴진다.
거친 붓질에서 칼바람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런데 소리는 바람소리뿐만이 아니다. 개 짖는 소리까지 섞여있다.
집 대문 앞쪽을 보면, 개 한 마리가 선비를 향해서 짖고 있다.
선비와 이 집 주인과는 친분이 없는 사이다.
만약 서로 아는 사이라면 개가 크게 짖을 리 없다.
개 짖는 소리가 차가운 겨울밤에 한기를 더한다.

여기서 개는 비중 있는 조연이다. 개 때문에 그림이 흥미로워졌다.
 KBS 2TV의 '1박2일'이 '상근이'라는 개 때문에 더 재미있듯이.
만약 개가 빠진다면 이 그림은 어떤 느낌일까? 심심해진다.
바람이 세찬 겨울밤에 귀가를 서두르는 행인이 전부다. '코믹'한 맛이 없다.
개 때문에 묘한 재미가 우러난다.

그런데 이상하다. 개의 크기가 보통이 아니다. 덩치가 사람만하다.
디테일까지 살아 있다. 네 다리며 꼬리, 짖는 주둥이 등이 사실적으로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사실성 면에서 개가 행인들보다 더 생생하다.
개를 그만큼 신경 써서 그렸다는 뜻이다.

애꾸눈으로 개 같은 인생을 짖다

혹시 개가 호생관의 분신인 것은 아닐까?
차디찬 세상에서 맨몸으로 컹컹 짖고 있는 폼이 천생 그를 닮았다.
이런 혐의를 갖게 하는 부분이 유난히 큰 개의 눈이다.
그림의 전체 분위기로 봐서는 굳이 개의 눈을 그려 넣을 필요가 없다.
그저 형상이 개임을 알아볼 수 있으면 된다. 그럼에도 눈을 그려 넣었다.
그러다보니 가분수가 되었다. 왜 그랬을까?
 
개가 자기 분신임을 은근히 강조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었을까?
이미 말했듯이 호생관은 애꾸눈이었다.
그리기 싫은 그림을 그려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눈을 찌른 것이다.
그래서 한 쪽 눈에 안경을 낀 채 그림을 그렸다.
이런 정보가 '개=호생관'의 혐의를 짙게 만든다.
 
또 개가 서 있는 곳을 보면 집 안이 아니라 밖이다.
그 위치가, 중인의 신분으로 양반들과 시서화를 논하고 교류하면서도
자신을 아웃사이더의 자리에 두었던 호생관을 연상케 한다.
 
'풍설야귀인도'에는 술을 사랑한 아웃사이더의 야성적인 기질이
거침없이 드러나 있다.
스스로 "천하명인 최북은 마땅히 천하명산에서 죽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떠돌이 개처럼 살다가 눈 오는 날, 거리에서 동사(凍死)하고 말았다.
- (주)아트북스 대표 정민영의 그림 속 작은 탐닉
- 2008.07.10 ⓒ 국제신문(www.kookje.co.kr)
  

 

 

 

 

 

[전준엽의 그림읽기]

 

 

최북 ‘풍설야귀인도’, 눈보라 치는 광기와 천재성


거친 필치로 그린 자신의 밤길 같은 일생
 

‘예술가’ 하면 떠오르는 모습. 현실보다는 꿈을 좇는 사람,
그래서 생활력이 없고 상식이나 일반 규범을 과감하게 뛰어넘어도 용납되는 사람,
술을 엄청나게 잘 먹어야 하고 지저분한 외모를 지녀야 하며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창작에 몰두해야 하는 사람,

성격은 거칠거나 괴팍해야 하며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이상한 행위나 버릇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사람,

평생 가난하고 외롭고 불행하며 처절하게 살다가 일찍 죽거나 비참하게 죽어야 하는 사람.

이런 모습은 특히 화가에게 많이 적용된다.
우리에게 이처럼 왜곡된 예술가상을 심어 놓은 데에는 매스컴의 역할이 크다.

그런데 꼭 이런 모습으로 살다 간 화가가 있다.
한국미술 사상 최고의 기인 화가로 꼽히는 최북(1712~1786)이 그 사람이다.

그는 중인 출신 화가로 일생 동안 조선시대의 엄격한 신분사회를 헤집었다.

가난했고 외로웠으며 처절하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어서
우리나라 TV드라마에 화가의 모델로 등장하는 꼭 그런 삶을 충실하게 보여주었다.

사실 그는 작품보다 자기 눈을 찌른 미치광이 화가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무리한 그림을 요구하던 고관대작에게 대적하기 위해서였다고 알려져 있다.

최북의 이런 행적이 용납되고 미화될 수 있는 것은
그가 천재적 낭만성을 지닌 화가였기 때문이다.
최북의 이런 성정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그림이 바로 ‘풍설야귀인도(風雪夜歸人圖)’다.
“눈보라 치는 밤을 뚫고 돌아오는 사람”이라는 화재가 말해주듯 이 그림은
매우 거친 필치로 단숨에 그린 듯하다. 천재성이 없다면 불가능한 그런 그림이다.

마치 바람소리라도 들릴 것 같다.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을 토해내듯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그림의 영감을 놓치지 않으려는 작업 방식인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도 이런 작업 태도로 격렬하게 솟아오르는 감정을 그림에 담아냈다.

최북을 그토록 주체할 수 없게 만들었던 그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진정한 천재성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에 대한 절규는 아니었을까.
사실 최북은 당대에 상당한 명성을 얻었고,
평생을 전업작가로 살 만큼 그의 그림은 인기 있었다.

그러나 그런 그림들에는 최북의 진가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그림들에는 품위 있고 얌전한 선배 화가들의 화풍이 배어 있었다.
어쩌면 생계를 위한 그림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뜻대로 살 수 없었던 최북의 삶은 눈보라 치는 밤길이었으며,
작달막한 노인은 영락없이 최북 자신일 것이다.
비루먹은 모습의 강아지조차 이 노인의 행로를 업신여기듯 사립문 앞까지 뛰어나와
사납게 짖고 있다. 바람은 산과 들을 흔들 듯이 요란하게 분다.
휘어지고 꺾인 나무의 모습에서 호된 바람의 위세를 가늠할 수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밤길 같은 일생을 살았던 최북은
자학적 기행과 위악적 술주정으로 세상으로부터 불어오는 눈보라를 뚫었던 것이다.
최북은 이 그림을 통해 그러한 심사를 풀어놓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최북은 이 그림같이 눈보라 치는 밤길을 만취한 상태로 걸어오다
객사하고 말았다.

- 전준엽 화가, 전 성곡미술관 학예예술실장

- 중앙, 이코노미스트 924호, 2008.02.04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  

 

 18세기, 종이에 수묵담채, 66.3×42.9㎝, 이후락 소장.

 

 

‘한국미술 5천년전’에 출품되었던 작품으로

‘눈보라 치는 날 돌아오는 사람’의 마음을 그린 굳센 그림이다.

소재 자체가 말해주는 낭만적 서정이 붓 끝에 흠씬 배어있는 호방한 작품이다.

 

뒤틀린 사립문 옆 마른 나무들이 바람에 쓸리고 있는 묘사는

이규상의 표현대로 ‘노끈처럼 힘있는’ 필치로 묘사하였는데

그것이 절묘하게 화면 효과와 맞아떨어졌다.

동자와 더불어 방한모를 쓰고서 지팡이 짚고 가는 사람의 발걸음이 무척 피곤해 보이며,

사립문에서 검정개가 뛰쳐나와 짖는 상황연출로 그림의 내용이 정확하게 전달된다.

눈 덮인 뒷산을 거의 추상적으로 마무리하고 아래쪽 개울가는 짙은 먹선으로 마감했는데,

그 붓놀림이 아주 빠르고 스스럼없이 구사되어

그림에 강한 동세(動勢)와 말할 수 없이 짙은 서정을 자아내고 있다.

 

흰 눈에 파묻힌 산야는 고즈넉하지 않다.

왼쪽으로 쏠린 가지들은 소리를 내며 눈보라를 날리고 살을 에는 바람이 몰아치기 때문이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으나 흰 눈길 따라 동자와 함께 지팡이를 끌고 돌아오는 사람은

방한모를 쓴 머리가 앞으로 기우뚱할 걸 보니 눈길에 어지간히 지친 모양이다.

강아지 한 마리가 허술한 사립문 밖에 나와 짖고,

흐린 하늘과 계곡은 담묵을 베풀고, 눈 위로 드러난 앙상한 가지와 마른 이파리들은

경쾌하고 짧은 선과 점으로 마감했다. 붓질은 호방하여 거친 바람소리가 인다.

 

 

 

 

 조어도(釣魚圖) = 여름날의 낚시

 

종이에 담채, 66.3×42.9㎝, 이후락소장.

 

 

<풍설야귀인>과 대련으로 되어있는 <조어도(釣魚圖)>는 하경산수(夏景山水)로 필치와 구도에서

호생관 최북의 거칠 것 없는 호쾌한 기질과 성품이 잘 드러난 그림이다.

붓놀림이 빠르고 공간의 여백 구사가 대담하여 과연 최북의 득의작으로 삼을 만하다.

강 언덕에서 자란 버드나무의 축 늘어진 모습과 그 너머에 초가로 지은 정자가 화면의 중심을 이루는데

강가에 기우뚱한 낚싯배의 묘사 또한 여름날의 서정을 절절하게 전해준다.

이럴 때 칠칠이 그림은 과연 칠칠이답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빠른 붓으로 휘둘러 여름날의 호젓한 풍경을 잡아낸 걸작이다.

가까운 언덕에는 휘늘어진 버드나무가 한 그루 있고, 그 아래 작은 거룻배에 낚시하는 사람이 있다.

대강 그린 듯 붓질이 자유롭지만 기우뚱한 배에 걸쳐둔 삿대나 사람의 동작이 정확하다.

타고난 감각이 그 성품처럼 예리하다고 볼 수 있다.

초가로 지은 정자 뒤쪽의 암벽은 하늘에 떠 있는 듯 도발적이다.

날개를 편 새처럼 추상적으로 처리했다. 누런 바탕에 푸른 채색을 가한 것도 이채롭다.

그 왼쪽 위에 멀리보이는 산은 술에 취한 듯 기우뚱하다.

 

 

 

 

 호생관 최북, 칠칠이 최북의 일화

 

 

- 이가환 <동패낙송(東稗洛誦>에는

최북의 가계와 출생 연도까지 적혀 있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본관 경주, 숙묘임진년 출생, 계사(計士) 상여(尙餘)의 아들이다.

초명은 식(埴), 자는 성기(聖器),

화폭에 제(題)할 때 성재(星齋), 삼기재(三奇齋), 거기재(居其齋), 좌은(坐隱),

호생관(毫生館)이라 한 것이 많다.

 

최북의 자(字)는 칠칠(七七), 처음 사용했던 자(字)는 유용(有用)이었으며,

출생한 숙종 임진년은 1712년이다.

그의 아버지가 계사(計士)였다는 것은 산원(算員)이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 또한 중인의 직급이라 그가 미천한 출신이었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최북의 용모에 대해서 신광하(1719-1796)는 “체구가 작달막하다”고 했다.

그리고 한결같이 애꾸였다고 말한다.

남공철은 ‘최북은 눈이 하나 멀어서 항상 안경알을 하나 붙이고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조희룡이 칠칠이가 눈을 하나 잃게 된 사연을 이렇게 묘사한다.

 

“한 귀인이 최북에게 그림을 요구했는데 최북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에 귀인이 최북을 협박했다.

그러자 최북은 분노하여 ‘남이 나를 저버리느니 차라리 내 눈이 나를 저버린다’라고 하며,

송곳으로 한 쪽 눈을 찔러 애꾸가 되고 말았다. 늙어서는 한쪽에만 안경을 낄 뿐이었다.”

 

오기, 기개, 고집, 자만심, 불같은 성미의 칠칠이의 수많은 숱한 일화 중에서

같은 괴팍함이지만 사대부인 남공철, 이규상이 표현한 것과

같은 중인 출신인 조희룡이 말한 것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남공철 - 칠칠이는 천성이 오만하여 남의 비위를 맞추려 하지 않았다.

이규상 - 최북은 성품은 날카로운 칼끝이나 불꽃과 같아서

             조금이라도 뜻에 어긋남이 있으면 꼭 욕을 보이곤 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망령된 독(毒)이어서 고칠 수 없는 것이라고 지목하였다.

조희룡 - 최북은 사람됨됨이가 격앙(激昻)하고

             웬만해서는 꿈쩍하지도 않을 정도로 당당하며(排丌=其의 古字),

             작은 규범에 스스로 구속되는 일이 없었다.

 

한쪽은 못된 성미로 보았고, 한쪽은 오히려 굳센 기상으로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칠칠이의 숱한 일화들은

이런 신분적 관점에서 행간을 잘 읽어보아야 그 진의를 살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1)

이규상(1727-1799)의 <화주록(畵廚錄)>에 소개된 최북의 화법과 성품

 

“최북은 그림을 잘 그렸는데, 그 화법은 힘이 있어 비록 가는 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일지라도

갈고리처럼 기운찬 모양이 되지 않은 게 없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거칠고 사나운 데가 있었다.

 

메추라기를 특히 잘 그려 사람들이 그를 ‘최메추라기(崔鶉)’라고 불렀다.

한 번은 호랑나비를 그린 적이 있었는데 그 모양이 늘 보던 것과 달라 사람들이 물으니,

깊은 산골짜기 사람들이 이르지 못하는 곳에 이런 나비들이 많다고 대답하였다.

 

초서를 잘 썼는데, 그 반쯤 흘린 글씨체는 아름답게 빼어나고 신기하였다.

그의 성깔은 칼끝처럼 예리하고 불꽃처럼 괄괄해서

조금이라도 뜻에 어긋나면 이내 욕을 보이곤 하였다.“

 

 

(2)

조선후기의 문장가 남공철(1760-1840)의 <금릉집(金陵集)>

 

어떤 이가 산수 그림을 청하는데, 산은 그리고 물은 그리지 않아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최북이 “종이 밖은 다 물이다” 하였다.

잘 그린 그림에 값을 적게 쳐주면 화를 내며 그림을 찢어버리고,

그림이 잘못되었는데도 값을 후하게 쳐주면 껄껄 웃으며 밀어내고 돈은 돌려주어 버렸다.

또 한 번은 어느 귀인 집에 찾아갔는데 그 집 하인이 최북의 이름을 부르기 미안해서

종7품인 ‘직장(直長)’이 왔다고 주인에게 말했다.

최북은 버럭 화를 내며 ‘정승’이라 하지 않고 ‘직장’이라 한다고 야단을 쳤다.

하인이 웃으며 언제 정승이 되었느냐 하자,

최북은 그럼 내가 언제 직장이 되었느냐고 반문하고는

기왕에 헛벼슬로 공치사를 할 바에는 정승처럼 높여주지 못할망정 직장이 뭐냐 소리지르고

주인을 만날 생각도 하지 않고 돌아서버렸다고 한다.

 

 

(3)

석북 신광수(石北 申光洙, 1712-1775)가 지은 ‘최북의 설강도(雪江圖)에 부치는 詩’

 

‘용돈이 궁하면 평양과 동래에까지 가서 그림을 팔았다’는 최북의 모습,

가난에 굴하지 않고 그림을 팔아 당당하게 호구책을 삼았던 화가의 초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장안에서 그림 파는 최북이를 보소.

살림살이란 오막살이에 네 벽은 텅 비었네.

유리 안경 집어쓰고 나무필통 끌어내어

문 닫아 걸고 종일토록 산수화를 그려대네.

아침에 한 폭 팔아 아침밥 얻어먹고

저녁에 한 폭 팔아 저녁밥 얻어먹네.

추운 날 손님은 헌 방석에 앉았는데

문 앞 작은 다리에는 세 치 눈이 쌓였네.

... (줄임)...

 

(崔北賣畵長安中 生涯草屋四壁空 閑門終日畵山水 琉璃眼鏡木筆筒

朝賣一幅得朝飯 暮得一幅得暮飯 天寒坐客破氈上 門前小橋雪三寸)

 

 

(4)

조희룡 <호산외사> 최북전

 

조희룡은 중인으로서 칠칠이 최북을 십분 이해하며 그의 약전(略傳) 끝에 다음과 같은 찬사를 부쳤다.

 

북풍이 너무도 맵구나.

부잣집 광대노릇 하지 않은 것만도 장한데

어찌 그다지도 괴롭게 한 세상을 사셨나요.

 

(北風烈也 不作王門伶人足矣 何乃自苦如此)

 

 

 

- 참고자료

박영대, <우리그림 백가지>, 현암사, 2002, pp 310-313

유홍준, <화인열전 2>, 역사비평사, 2001, pp 129-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