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 -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
울분과 한(恨),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내다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 김시, 16세기 말,
비단에 수묵담채, 111×46㎝, 리움 미술관 소장, 보물 제783호
양송당 김시(1524∼1593)는 조선 중기 명종, 선조 때에 활동한 대표적인 선비화가이다.
김시의 가문은 당대 내로라하는 권세가문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희락당 김안로(希樂堂 金安老, 1481∼1537)는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과거에 1등으로 합격한 당대 최고 학식의 소유자였다.
또 그의 맏아들이 중종의 맏사위로 중종의 맏딸 효혜공주(孝惠公主)와 결혼하여
연성위(延城尉)에 봉해지는 등 중종의 사랑을 받아
벼슬이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까지 이른 권력의 핵심인사였다.
그는 잦은 권력 남용으로 탄핵을 받고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다시 기용되기를 반복하면서
정적(政敵)을 축출하고 사사(賜死)하는 등의 피를 부르는 살벌한 공포정치를 이어갔다.
하지만 그는 너무 오만해서였을까
또 다른 왕실권력의 한 축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중종에게 버림을 받아 막내아들 김시의 혼인날 의금부에 체포되어 유배되어 결국 사사되었다.
흔히 나라를 도탄에 빠지게 한 당파싸움의 주역,
정유삼흉(丁酉三凶)의 간신이요, 권력에 눈먼 악의 화신으로 일컬어지는 김안로는
사실 중국과 조선의 귀한 명화들을 수집하고 감상하는 등 감식안을 갖춘 교양인이었고,
‘야담설화집’인 ‘용천담적기(龍泉淡寂記)’라는 저서를 남길 정도로 학문에 조예가 깊었던 인물이었다.
이런 아버지의 문예적 소양과 가풍은 비록 역사적으로 남들에게는 손가락질 받는 아버지였으나
김시에게는 가장 훌륭한 스승이었고 알게 모르게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당대 최고의 부와 명예를 가진 권세가의 막내아들로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다가
하루아침에 역적의 가문으로 몰락하여 친구도 지인들도 멀어져간 역적의 아들이 되어버린 김시….
공교롭게도 자신의 혼인날 포승줄에 묶여 잡혀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의 모습이 될 줄이야. 그는 그런 아픔과 한을 평생 품고 살아갔다.
양반이었지만 끼니 걱정을 할 만큼 궁핍한 생활을 하였던 그는 평생 벼슬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하고
독서와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며 한 많은 세월을 보냈다.
그의 삶은 불행했으나 그의 그림들은 정겹고 따스한 느낌을 준다.
그는 산수화, 인물화, 영모화 등에 뛰어난 기량을 보이며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평가받는다.
문장을 잘 짓던 최립, 글씨를 잘 쓰던 한석봉과 더불어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로 불린다.
그의 대표작 ‘동자견려도(童子牽驢圖)’는
얕은 개울가의 통나무 다리를 사이에 두고 건너지 않으려고 버티는 당나귀와
고삐를 억지로 잡아 끌고 있는 동자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보고 있노라면 피식 웃음이 나온다. ‘해학적이다’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그림이다.
소풍이라도 갈려고 나왔는지 빨리 가야 하는 동자의 마음을 외면하고
당나귀는 쉽게 통나무 다리를 건너갈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팽팽한 고삐에서 밀고 당기는 둘의 힘겨루기가 느껴진다.
통나무 다리 위에 선 아이는 나귀의 힘에 끌려 곧 균형을 잃고 냇물로 떨어질지도 모르는
안타까운 상황에 어린 아이의 얼굴에 난처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당나귀가 있는 쪽에 커다란 소나무와 커다란 바위산과 이끼가 가득 낀 바위 덩어리들이
아무래도 무게를 실어주고 있어 당나귀가 아이의 바람대로 다리를 건너갔을지는 미지수이다.
한낮의 ‘일장춘몽(一場春夢)’과도 같은 인생의 덧없음,
‘부귀영화(富貴榮華)’의 허무함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꼈을 김시는
오히려 그의 그림 속의 사랑스런 동자의 모습으로 한을 풀어냈다.
- [명화로 보는 논술] 최혜원 블루 로터스 아트디렉터 · 경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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