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에드바르트 뭉크 - 절규

Gijuzzang Dream 2008. 2. 27. 01:33

 

 

 

 

 

 뭉크 - 그의 연인은 죽음의 천사  

 

 

 

 

‘절규’는 지옥에서 나온 그림들을 그린다는 ‘죽음의 화가’로 알려져 있는

노르웨이 출신의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대표작이다.

 

심한 이상성격자였던 의사 아버지를 둔 뭉크는 6살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13살 때 그 자신도 죽을 뻔 한 데 이어 어머니 역할을 했던 누나 역시 결핵으로 죽었다.

그래서 뭉크의 유년은 ‘요람을 지키는 검은 천사들과 함께 한 시절’이라 표현되기도 한다.

이 불행한 경험은 신경쇠약증과 병약한 육체와 함께

그의 정신세계와 작품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작품에는 강렬한 색채와 형태의 왜곡된 표현과 함께

늘 삶과 죽음, 공포, 불안, 고독, 애수 등의 주제가 담겨 있다.

의사나 엔지니어가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미술학교에 진학한 뭉크는

이후 파리로 가서 인상파를 접하고선 초기에는 밝은 색채의 풍경화와 인물화들을 그렸다.

하지만 자신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음을 감사해서일까.

 

그림을 통해 무엇보다도 살아있는 인간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신이 느끼고 있는 불안과 공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 같은 작품의 기본 주제는 뭉크가 1983년 초에 쓴 편지 속 문구에서 나타난다.

“사랑과 죽음을 다룬 그림들에 대한 연구들이 나를 몰두하게 한다.”

그의 그림에는 언제나 ‘죽음과 사랑’이란 테마를 담았다.

이 테마의 초기작품들은 1893년 베를린에서 전시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절규’이다.

뭉크의 대표작 '절규' 캔버스에 유채, 91×73.5㎝, 1893, 오슬로 국립미술관소장

 

Edvard Munch. The Scream. 1893.

Oil, tempera and pastel on cardboard. 91 x 73.5 cm. Nasjonalgalleriet, Oslo, Norway.

  

 

“어느 날 저녁 나는 길을 걷고 있었다. 길 한쪽에는 도시가 있고 내 발 밑에는 피오르드가 있었다.

나는 피곤했고 몸이 안 좋았다. 나는 멈춰 서서 피오르드 저쪽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구름은 핏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비명소리가 자연을 꿰뚫고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마치 내가 절규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이 그림을 그렸다.

구름은 진짜 핏빛으로 칠했다. 색깔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이것이 ‘인생의 프리즈’ 중 ‘절규’라는 그림이 되었다.”

마 치 그림 속의 유령 같은 모습의 인간은

금방이라도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캔버스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뭉크 자신이 겪은 경험을 묘사하고 있는 그림인데

다리를 건너고 있는 황혼 저녁 핏빛으로 물든 구름을 보면서

뭉크는 고독과 공포에 휩싸여 전율하며

양손을 얼굴에 대고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지르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왜곡된 형상으로 묘사된 해골처럼 보이는 얼굴에서 공포에 찬 절규가 느껴진다.

그 머리 위 어두운 강물과 핏빛으로 물든 구름의 거친 선들로 인하여

불안한 심리상태가 더욱 더 강렬하게 표출되고 있다.

일생동안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끊임없는 갈등에 사로잡혀 있었던 뭉크의 절규가

고스란히 표현된 것으로 처럼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은 드물다.

- [명화로 보는 논술] 최혜원 블루 로터스 아트디렉터 · 경희대 강사

 

 

 

 

 

뭉크의 '절규'하는 다리

 

 

다리가 사선이 아니었다면 '절규'가 이토록 불안했을까
기괴한 얼굴, 꿈틀대는 색채보다 무의식의 불안을 더 자극한다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뭉크의 대표작 '절규'

캔버스에 유채, 91×73.5㎝, 1893,

오슬로 국립미술관 소장

그림은 구도에 따라서 느낌이 달라진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느낌의 수평선 구도,
집중력과 원근감을 주는 대각선 구도,
균형감 있는 삼각형 구도 등이
'정적인 구도'라면,
불길한 느낌의 '동적인 구도'도 있다.
 
예컨대
속도감과 불안감이 공존하는 사선 구도,
운동감과 더불어 불안감을 주는 역삼각형 구도 등이 그렇다.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구도의 선택이다.
화폭에 소재를 어떻게 배치하고,
균형을 잡느냐에 따라
그림의 표정이 달라진다.
불길한 기운으로 가득 찬,
에드바르드 뭉크(1863~1944)의 '절규'는
강렬한 이미지뿐만 아니라
사선 구도의 힘을 톡톡히 보여준다.

뭉크의 그늘진 이력

1905년부터 1930년까지,
독일 미술계를 지배한 표현주의는
왜곡된 형태와 색채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탐구한 미술사조.
고흐 고갱 뭉크 놀데 클림트 쉴레 코코슈카 등이 대표적인 화가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주관적인 감정의 표출이었지만
관람객들은 거친 붓질이 불편했다.
고상한 스타일의 그림에 비춰보면 표현주의는 시각적인 횡포에 가까웠다.
그들은 인간의 고통과 가난 폭력 걱정을 외면하지 않았다.
미술이 삶의 밝은 면만 보거나 이상적인 아름다움만 추구하는 것은
위선적이라 생각했다.

독일 표현주의에 깊은 영향을 끼친 뭉크도 마찬가지였다.
사물의 거죽에 매달리기보다 인간의 고통 죽음 불안 등을 캔버스에 담았다.
그런 그림은 외부의 영향보다는 불행한 가족사와 개인사로부터 비롯된
운명적인 것이었다. 다섯 살 때, 결핵으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열네 살 때는 집안 살림을 꾸리던 한 살 위의 누나가 죽었다.
역시 결핵이었다. 계엄령 같은 불행의 그늘이 그의 생에 드리워졌다.

뭉크는 또 병약하고 예민한 성격이었다.
의사가 되라는 아버지의 뜻을 저버리고 미술대학에 들어갔다.
졸업 후 파리에서 잠시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지만 곧 반발했다.
더 이상 빛을 탐구하지 않고, 인간의 내면세계를 파고들었다.

사선으로 외치는 '절규'

'절규'(1893, 유채)는 다리 위에서 공포에 질린 인간을 형상화하고 있다.
화폭 가득 불길한 기운이 자욱하다. 핏빛으로 물든 하늘과 구름,
두 척의 배가 떠 있는 해안, 왼쪽에서 오른쪽 아래로 배치된 다리,
그 위에서 온몸으로 절규하는 사람.
눈 코 입 등 최소한의 형상으로 왜곡된 주인공의 얼굴은 성별 구분도 없다.
얼굴이 해골 같기도 하고 유령 같기도 하다.
게다가 꿈틀거리는 듯한 색채는 불길한 분위기를 가중시킨다.

이 작품에서 겉으로 드러난 불길한 기운은
일렁이는 색채와 인물의 절규하는 표정에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 두 가지에만 주목한다.
그런데 상당히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소재가 있다.
바로 다리다. 사실 색채와 인물에는 불안한 느낌이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다리는 그렇지 않다. 없는 듯이 배경으로 놓여 있다.
하지만 왼쪽에서 오른쪽 아래로 비스듬히 배치된 다리는,
관람객의 무의식에 작용하여 불길한 기운을 풀무질한다.
그것은 다리의 가파른 각도 즉, 사선에서 비롯된다.
수평선이 주는 안정감과 비교해보면, 다리의 사선이 주는 불안감은 뚜렷해진다.
만약 다리가 사선이 아니라 수평으로 배치되었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지금과 같은 불안감은 현저히 떨어질 것이다.

게다가 이 사선은 사람들이 편하게 느끼는 시선과 방향이 반대쪽에 배치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시선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한다.
그러므로 오른쪽에 중요한 소재가 배치돼 있으면 안정감을 준다.
 
'절규'는 어떤가 하면, 왼쪽에서 아래로 배치됨으로써 시선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림을 보는 사람의 무의식을 은근히 자극한다. 불길한 기운이 먹물처럼 번진다.

뭉크의 그림에는 유난히 사선 구도가 많다.
유채물감으로 그린 '불안'을 석판화로 제작한 '불안'(1894),
'불안'과 같은 배경이되 군중들을 등장시킨 '절규'(1896),
세 명의 소녀가 서 있는 '다리 위의 소녀들'(1900)와 '다리 위의 소녀들 2'(1901)
등은 사선 구도의 불안한 성격을 표나게 보여준다.

사선 구도는 불안과 쌍둥이다.

그것도 자연스런 시선의 흐름에 역행하는 사선 배치는 불안감을 가중시킨다.
형태의 과감한 생략과 변형, 강렬한 색채대비 외에도
'절규'는 사선의 악마적인 속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그림이다.
- 정민영의 그림 속 작은 탐닉 
- (주)아트북스 대표이사
- 국제신문(www.kookje.co.kr), 2008.03.26
 

 

화가의 질병과 작품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절규’를 그린 노르웨이 화가 뭉크는 스스로 정신분열증을 인정했다.

그는 “여러분도 ‘절규’를 알고 있겠지만 당시 나는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 있었으며

내 피 속까지 자연의 절규가 스며들어 터질 것만 같았다”는 글을 남겼다.

 

 

 

 

 

 

뭉크의  '절규' 도난 사건

 

 

(1)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개막날인 1994년 2월 12일 세상이 깜짝 놀라는 사건이 발생했다.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의 국립화랑에서

국보급 화가인 에드바르 뭉크의 대표작 ‘절규’가 도난당했던 것.

 

‘감시가 소홀해 감사합니다’란 메모 한 장이 절규가 있던 자리에 남겨져 있었다.

경찰은 화랑에 설치된 감시카메라 테이프를 분석했다.

세계적인 걸작품 치곤 너무나 쉽게 털렸다.

2명의 범인들은 이날 새벽 창문을 부수고 침입한 뒤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그림을 떼어낸 뒤 사라졌다. 50초도 채 걸리지 않았다.

 

뭉크는 네 가지 버전의 <절규>를 그렸는데,

도난당한 것은 세상에 가장 널리 알려진 두 버전이었다.

'절규'의 감정가는 5천400만 달러(당시 가격 약 430억 원),

<이 작품의 가치는 한 점당 1억2000만 달러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2008년현재>

 

화랑 관계자들은

‘작품이 너무 유명해서 암시장 등에서 거래되기 힘들고

가격을 매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며 절대 거래될 수 없을 것으로 예측했다.

 

범인은 장물아비와 접촉하며 값을 흥정하다 범행 3개월 만인 그해 5월에

박물관에서 90km 떨어진 한 호텔에서 체포됐다.

이들은 노르웨이 정부에 작품 반환 조건으로 미화 100만 달러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후로도 뭉크의 작품은 최근에도 수차례 도난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인간 심연의 공포를 표현했다는 그의 작품의 무엇이 절도범을 끄는 것일까?

- 2006년 2월 11일, [역사속의 오늘]

- 조문호기자 news119@msnet.co.kr

 

 

 

 (2)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의 뭉크 박물관에서

2004년 8월22 일요일 오전 관객들로 북적이던 미술관에 침입한

두 명의 복면무장강도에게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 뭉크의 걸작 '절규(The Scream)'와

뭉크의 다른 걸작 '마돈나(Madonna)'를 도난 당했다고 경찰이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AP통신과 인터뷰에서

"2~3명의 무장 괴한이 총기로 박물관 직원을 위협하며 두 작품을 내놓으라고 했다"며

"다행히 아무도 다치지 않았고 용의자들은 아우디 A6 승용차를 이용, 도주했다"

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우리는 현재 모든 가능한 수단을 통해 용의자들을 찾고 있다"고 덧붙였다.

사건 당시 박물관 관람객들은 테러리스트들의 공격을 받는 줄 알고 공포에 떨었다.

영국 BBC 인터넷판은 복면 무장괴한 2명이 '절규'와 '마돈나'를 훔쳐갔다고 보도했다.

 

사건을 목격한 한 관람객은 노르웨이 NTB통신과 인터뷰에서

"범인은 검은색 복면을 하고 있었으며 총처럼 보이는 물체로 여성 보안요원을 제압했다"

고 말했다.

 

또 사건 당시 뭉크 박물관을 찾았던 프랑스의 한 라디오 프로듀서 프랑수아 카스탕은

"이 박물관의 기이한 점은 작품들을 보호하기 위한 어떠한 장치도 없다는 점"이라며

"경보기도 없다"고 지적했다.

 

카스탕은 "작품들은 철사로 벽에 걸려있을 따름"이라며

"작품을 세게 잡아 당겨 철사를 끊으면 되는데 내가 목격한 바가 바로 이랬다"고

덧붙였다. 카스탕은 경찰이 사건 발생 15분 뒤에 현장에 출동했다고 진술했는데

경찰은 현지 시각으로 이날 오전 11시10분 신고를 받았으며

2시간 남짓 지난 오후 1시에 현장 접근을 차단한 뒤 25명의 목격자로부터 진술을 받았다.

- 2004년 8월 22일

 

 

 

(3)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표현주의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의 작품 '절규'와 '마돈나'가

도난 당한 지 2년여 만에 돌아왔지만 회수 경위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노르웨이 오슬로 경찰에 따르면

2004년 8월22일 무장괴한 2명이 오슬로 소재 뭉크 미술관에서 훔친 그림들을

2006년 8월 31일, 2년 만에 되찾았다. 경찰 수사 책임자인 이베르 스텐스루드는

“우리는 지난 2년간 그림들을 되찾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며

“이제 남은 것은 전문가들이 그림들의 진위를 판명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가격이 5억크로네(약 758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 뭉크의 대표작 ‘절규’는

현대인의 불안을 상징하는 걸작으로 꼽혀왔다.

‘마돈나’의 가격은 1억크로네(약 151억원)로 알려졌다.

회수된 작품들은 약간 해지거나 테두리에 미미한 손상을 입었다고

오슬로 시의회 관계자가 전했다.

박물관측이 작품들을 회수한 직후 공개한 사진에는

'마돈나'의 화폭에 구멍이 나 있고

'절규'의 한쪽 귀퉁이가 파손돼 있는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노르웨이 경찰은 두 작품이 노르웨이에서 발견됐다고 말했으나

자세한 회수 경위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고 있다.

또 그림의 회수와 관련해 어떠한 보상도 지급된 바 없다고 덧붙였다.

경찰 대변인은 AF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어떻게 두 작품을 되찾았는지에 대해

어떤 정보도 제공할 수 없다"면서 "우리는 현재 비밀을 굳게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두 작품을 훔친 동기도 석연찮다.

미술품 전문가들은 이 두 작품이 너무 유명해 미술품 시장에서 되파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단순히 돈을 노리고 훔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두 작품의 시가는 1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평가된다.

 

한편 노르웨이 일간 다그블라데트(Dagbladet)는

최근 “은행강도 죄로 수감중인 조폭 두목 데이비드 토스카가

검찰청의 토아 악셀 부시 주임 검사에게 자신의 사면을 조건으로

'절규'와 '마돈나'의 행방과 반환을 주선하겠다는 비밀협상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두 작품의 행방을 알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조폭 두목 토스카는

오슬로 시 역사상 가장 큰 스타방게르 은행강도가 벌어졌을 당시

13명의 무장 갱단을 지휘, 경찰관 1명을 사살한 후 700만유로를 강탈,

도주에 성공했으나 2005년 봄에 스페인에서 체포돼

19년의 징역형을 언도받고 오슬로에서 복역 중이다.

토스카가 재판을 받았을 당시 그의 입에서 뭉크 명화의 행방을 알려주는 대가로

형량의 감경을 요구하리라고 사람들은 기대했었으나 당시에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실제로 지난해 은행강도 사건 때 도난당했던 돈이

뭉크 도난 사건 용의자 중 한 명의 집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노르웨이 일간지 VG는

경찰이 일찍부터 두 사건의 유사성에 주목하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똑같은 종류의 특수 장갑이 두 사건에 모두 사용됐다"

고 말했다.

뭉크 도난 사건을 지휘한 이베르 스텐스루드 경찰 수사책임자도

"어떤 것도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은행강도 사건과

뭉크 도난 사건에 사용된 장갑에 유사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은행강도 사건과

뭉크 도난 사건의 연관성 및 회수 경위 등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고 있다.
-
2006년 9월 2일

 

 

 

 

 

 

 

 

뭉크의 도난작품(석판화 2점과 수채화 1점)

 사실은 모작이었다 !  

 

 

  2005년 도난작품 하루만에 되찾아

  뒤늦게 속은줄 안 도둑들 자진반납

훔친 뭉크 작품, 알고 보니 모작

 

 

에드바르 뭉크(1863~1944)의 유화 '절규'는 지구상에 4점이 존재한다.

노르웨이 오슬로의 뭉크미술관이

몇 년 전 도난당한 작품을 포함해 2점의 ‘절규’를 소장하고 있고,

나머지 2점은 오슬로 국립박물관과 한 개인이 소장 중이다.

 

그런데 뭉크처럼 작품 도난사건이 끊이지 않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뭉크의 유화 ‘절규’는 오슬로 국립박물관 소장품이

지난 1994년 2월 도난당했다가 3개월 뒤 회수됐다.

또 2004년 여름에는 복면을 한 괴한 3명이 백주 대낮에

뭉크미술관에 침입해 ‘절규’와 ‘마돈나’를 훔쳐갔던 것.

 

한편 2007년 3월 1일 미국 시사주간 Time지(誌)는

지난 100년간 세상을 뒤흔든 ‘세기의 범죄’ 25건을 선정했다.

2004년 <절규> 도난사건을 포함시키기도 했다.

 

게다가 이듬해인 2005년 8월에는 노르웨이 남부 한 호텔에서

뭉크의 수채화와 석판화 등 작품 3점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 작품들은 도난당한 지 하루 만에 회수됐다.

 

당시 경찰 대변인은 뭉크의 ‘푸른 드레스’ 등 3점을 훔친 용의자를 체포했다고

밝혔으나 자세한 회수 경위는 공개하지 않았다. 그런데 실상은 이러했다.

 

오슬로에서 남쪽으로 50㎞ 떨어진 모스 시 인근 레프네스 호텔에서

2005년 8월 식당 영업이 종료된 후 벽에 걸렸던 뭉크의 작품 3점이 사라졌다.

호텔 측은 자신들이 소장 중인 뭉크의 작품 12점 중

석판화 2점과 수채화 1점이 사라졌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석판화는 뭉크의 자화상과 다른 사람의 초상화였고,

수채화는 ‘푸른 드레스’라는 제목의 1915년 작품이었다.

 

그런데 그 후속 이야기가 압권이었다.

도둑들이 훔쳐간 작품은 모두 위작이었던 것이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모작이었던 것.

도둑들은 호텔에서 뭉크의 작품을 훔친 후

밝은 불빛 아래서 살펴보니 가짜임을 간파하곤 내동댕이쳤던 것이다.

 

사실 호텔 주인은 현명했다.

미술관 등에서 뭉크 그림이 자꾸 도난당하자 모작을 만들어

진품 대신 걸어놓았던 것. 진품은 은밀한 곳에 감춰놓았음은 물론이다.

 

사건 종료 후 호텔 주인이 한 말도 걸작이었다.

그는 “그놈들, 대단한 피에스코였군”이라고 했는데

‘큰 실수를 저지른 도둑’이란 뜻이다. 도둑들은 작품을 걷어갈 때만 해도

 신이 났겠지만 모작임을 확인하곤 보나마나 홧술을 들이켰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도둑들도 작전(?) 개시에 앞서 진품인지 아닌지 잘 따져봐야 하겠다.

- 헤럴드 경제, 2007-04-24, [조명계 교수의 미술품 위작이야기]

- 조명계 중앙대 예술대학원 겸임교수

   

 

 

 

 

 

 

 

 

 

- 전수연 / '情(Arir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