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단원 김홍도 - 풍속화첩

Gijuzzang Dream 2008. 2. 27. 01:48

 

 

 

 

 

 

 풍속화는 과거의 생활상 보여주는 ‘사진’  

 

 

 

사진이 없었던 조선시대 당시의 모습을 가장 실감나게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김홍도의 풍속화이다.

모두 25점으로 이루어진 ‘단원풍속화첩’ 에는

당시 사람들의 삶이나 사회상이 한국적 해학과 정취가 곁들여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민본주의 전통에서 자라난 풍속화

한국미술사에서 풍속화의 본격적인 발전이 이루어진 것은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서였다.

그 중에서도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와

혜원(蕙園)신윤복(申潤福, 1758~?)과 같은 풍속화의 거장을 배출했던

조선 후기의 풍속화는 한국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빛나는 업적으로 평가된다.

 

특히 이 시기의 풍속화는 일반 서민들의 생활상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은데

이것은 조선 후기에 일어난 사회 전반적인 변화,

즉 ‘시민의식의 성장’과 ‘실학사상의 발흥’ 등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사회적인 추세는 학문과 예술 전반에 걸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했는데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바로 관념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현실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에 서민들의 생활상을 그린 풍속화들이 유행하게 된 데는

관념 중심에서 벗어난 현실 중심의 사회적, 학문적 분위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들이 기존 체제에 대한 일종의 항거정신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서민들의 모습을 화폭에 즐겨 담았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풍속화가 김홍도, 신윤복 같은 이들은

왕실에서 총애를 받던 ‘도화서(圖畵署)’의 화원화가들이었으며,

나중에는 관직을 받기까지 했다.

 

조선 왕조의 근본적인 정치이념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임을 내세우는 민본주의였으며

현실에 바탕을 둔 인간중심의 현세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훌륭한 정치를 하기 위해서는 일반 백성들의 풍속이나 생활상,

특히 땀 흘리며 열심히 살아가는 백성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잘 살펴야만 했다.

또한 외국 사신들에게 한국의 풍속을 소개하고 이해시키기 위한

외교적 필요성과 국가적 행사와 의식을 기록적인 그림으로 남겨

후세에 전하고자 한 목적 때문에라도 사실적인 풍속화를 장려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이러한 정치이념과 성향이 현실적인 삶을 소재로 한 풍속화를 발전시킨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서민의 정서와 삶에 밀착된 민중화가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김홍도의 시대에 오면 풍속화는

서민은 물론 임금까지도 사랑하는 장르가 되어 화원시험 중의 한 과목이 되었다.

김홍도의 풍속화는 서민들의 소박한 일상생활을 꾸밈없이 표현하고 있어

각 계층의 생업장면과 놀이 등 생활의 이모저모가 잘 나타나 있다.


 

 

 

그의 대표적 풍속화인 ‘자리짜기’는

방안에서 돗자리를 짜고 있는 남편과 물레를 돌려 실을 잣는 아내, 그리고 그 뒤편에는

책을 펴놓고 글자를 막대기로 짚어가며 읽고 있는 떠꺼머리 아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양반 집의 풍경은 아닌데도 당시 18세기 후반의 조선시대 사회의 변화가 느껴진다.

고된 노동임에도 아들의 글 읽는 소리에 피곤함을 잊은 듯, 부부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비친다.


평범한 일상사를 화가의 따듯한 시선과 예리한 시각에 의한 순간포착으로

이를 볼거리로 부각시켜 그림이 그려진 당시 사회의 분위기를 잘 전해 준다.

김홍도는 조선 후기의 농민이나 수공업자 등 서민들의 생활상을 간결한 필치로

간략하면서도 한국적 해학과 정취가 곁들여진 풍속화를 그렸다.

 

단순히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기록화적 성격으로 그려졌다기보다는

서민의 심성으로 파고들어서 나온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시각을 가지고 새롭게 해석하고 있으며,

그림 속 인물 하나하나가 마치 자신의 삶에서 그대로 들어와 박힌 듯,

주변 인물 하나에도 각기 다른 표정과 모습이 부여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그의 그림을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이야기 하는 삶의 다양하고 따듯한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이다.

- 최혜원 블루 로터스 아트디렉터 · 경희대 강사,  [명화로 보는 논술]

 

 

 

 

<자료 추가> 김홍도 풍속화첩 / 종이에 담채, 27.0㎝x 2.7㎝ / 30대 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풍속화로 보는 조선 후기 생활의 발견

 

 

 

  조선 후기에는 진경산수화 · 풍속화 등 우리 현실에 뿌리박은

  사실적인 그림들이 유행했다.

  그 가운데 풍속화는 동시대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세심하게 그려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았다.

 

  조선 후기 풍속화는 윤두서 · 조영석 등 양반이 그리다가

  18세기 후반부터 김홍도 · 신윤복 · 김득신 등 중인 출신의 화원도 

  그리게 되었다.

  화원이 그린 풍속화는

  마치 신문의 사회면처럼 당시의 사회문제였던 신분관계,

  기생 중심의 남녀 간 애정행각, 불교계의 타락상, 음주 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흥미로운 점은

  조선 후기 풍속 화가들이 이러한 문제를 단순 전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 조상 특유의 ‘웃음 섞인 풍자와 해학’으로

  풀어냈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후미진 곳이라도, 또 아무리 힘든 삶이라도,

  풍속화 속 인물에게서 어두운 그늘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삶을 긍정하고 낙관적으로 보는 태도,

  그것이 풍속화에서 빛나고 있는 것이다.

 

  

소개하는 네 편의 그림들은 단원 김홍도의 풍속도 병풍으로

1901년 프랑스인 루이 마랭이 서울에 잠깐 머물렀을 때 구입한 8폭짜리 풍속화 병풍이다.

 

그의 사후인 1962년 파리 기메 박물관에 기증되었으며,

제 8폭 하단에 해서체의 ‘金弘道’라는 글씨와 ‘金弘道人’이 있고

다른 김홍도 작품과 선의 느낌이 비슷하여 김홍도 작품으로 짐작되고 있다.


사당유희도(寺黨遊戱圖)
사당패 놀음에 어깨 들썩, 마음도 들썩


개천가에서 사당패 놀음이 한창이다.

둥둥 딱, 소고 장단에 너나없이 흥겹기는 마찬가지.

이때를 놓칠세라 눈치 빠른 여사당이 부채 내어 엽전 챙기는 모습과

서책 낀 서당 학동이며, 아기 업은 할머니, 한량 등이 놀음에 푹 빠져있는 모습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갈 길 바쁜 여종을 훔쳐보는 이들까지 상세히 그려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낸다.

사당패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곡예와 가무를 연희하는 유랑 놀이 집단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사당패 같은 길거리 공연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산대놀이와 판소리가 가장 인기 있는 공연이었고 씨름·뇌고·굿도 훌륭한 구경거리였다.

 


후원유원도(後園遊宴圖)
풍악이 울려도 귀인 시름 깊어만 가네


호사스러운 귀인의 후원. 연못가에 자리 펴니 학과 원앙이 한가로이 놀고

아리따운 기생에 풍악 소리 드높아 흥겨운 분위기가 한창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귀인 시름은 더욱 깊어지는 듯한 모습이다.

이처럼 양반은 직접 기방에 가지 않고 기생과 악공을 집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아 지체 높은 양반이나 종친이 아니면 이를 감당하기 힘들었다고.

조선 후기에는 경화사족들 사이에서 호화저택을 갖추는 것은 기본이고,

서울 시내나 근교의 풍광 좋은 곳에 별장을 경영하는 것이 유행했다.

그들은 저택에다 수만 권의 서적을 소장한 장서처와 골동품, 그림, 서예 작품의 소장처를 두어

그들만의 독특한 고급문화를 즐겼다.

 


기방풍정도(妓房風情圖)
기방 난투 끝에 손님 물갈이


기방에서는 날마다 주먹질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기방 출입 풍속이 워낙 까다로운 데다 기방을 드나드는 이들 중에 무뢰배들이 많았기 때문.

먼저 온 손님들과 나중에 온 손님들 사이에 기 싸움이라도 벌어질라치면

위 그림에서처럼 힘깨나 쓰고 권세 있는 손님에게

먼저 온 손님들이 자리를 내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림을 보면 온갖 오입쟁이들이 기방에 다 모여 있다.

기방 난투가 끝나고 이긴 자들은 여유만만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진 자들은

걷어 부친 소매가 무색하게 씩씩거리며 밖으로 내몰리고 있다.

왼손에 사방등을 든 사람은 아쉬운 듯, 분이 안 풀린 모습인데

다른 일행이 멱살을 잡고 억지로 끌고 가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설중난로도(雪中煖爐圖)
눈 내린 달밤, 숯불구이에 술 한 잔


난로회 풍경을 볼 수 있는 그림이다.

난로회는 음력 10월에 추위를 쫓기 위해 쇠고기를 먹는 풍속이었다.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모르나 18세기에 유행했다.

「동국세시기」에서는 “한양에서 화로에 숯불을 활활 피워 번철을 올려놓은 다음

쇠고기를 기름, 간장, 달걀, 파, 마늘, 고춧가루에 조리하여 구우면서

화롯가에 둘러앉아 먹는다”고 전하고 있다.

털방석과 함께 모임에 참석한 사람 중 3명이 착용한 방한용 귀·목 가리개인 남바위는

때가 바야흐로 한겨울임을 보여준다.

뒤늦게 온 연로한 남자가 가죽신도 벗지 않은 채 돗자리 위로 발을 옮기는 장면이 흥미롭다. 

- 파리 기메 국립동양미술박물관 소장
- 월간문화재사랑 2008-0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