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레오나르도 다빈치 - 최후의 만찬

Gijuzzang Dream 2008. 2. 23. 00:26

 

 

 

 

 '최후의 만찬’에 다빈치가 남긴 비밀

 

 

 

'최후의 만찬’은 산타 마리아델레 그라치 수도원의 식당 벽면에 그려진 벽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

밀라노에 거주하던 마지막 무렵인 1494년에서 1497년 사이에

무어인 로드비코의 주문에 의해 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일생 중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인 그의 12사도들과의 최후의 만찬을 통해

사도중의 한 명이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장면을

이전의 같은 소재의 그림들과는 구성방식이나 표현방식에 있어서 변화를 추구하였다.

 

전통적인 구성방식에서는 배반자인 유다가 눈에 띄게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반대편에 따로 앉아있으나

레오나르도는 모든 인물들을 한쪽 평면에 위치시키고 세 명씩 무리를 지어 구분되도록 하였고,

정확한 원근법을 이용하고,

실내의 배경과 멀리 보이는 창문을 통해 늦은 오후의 따뜻하고 평화로운 햇빛이 들어오게 하여

인물들을 뒤로 깊이 물러나 보이도록 하였다.

 

 The Last Supper. c.1495-1498 / Oil and tempera on plaster.

Santa Maria delle Grazie, Refectory, Milan, Italy

 

 

이 작품에서 그리스도는 담담한 심정을 표출하듯 그려졌으나

그리스도의 선언을 들은 사도들은 얼굴과 몸동작을 통해서

분노, 체념, 고통, 충격, 당황, 공포 등의 모든 인간의 감정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표정과 행동으로 인물의 성격을 파악하는 인상학을 연구했던 레오나르도는

하나의 사실에 제 각각의 반응을 보이는 12사도들을 마치 연극무대의 배우들을 보는 듯 표현하였다.

 

중앙의 그리스도 오른쪽의 배반자 유다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운 얼굴과

배신의 대가로 받은 30개의 은화가 담긴 주머니를 움켜쥐고 있고,

그 뒤에 성미 급한 베드로는 단검을 들고 유다를 막아선 채 그리스도를 향해 있다.

그 옆에는 미소년인 요한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왼쪽의 양팔을 벌려 충격에 휩싸인 야고보와

그 뒤에 집게손가락을 세워 위를 가리키고 있는 토마는 의심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 옆의 필립보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옆의 또 다른 무리들인 마태오, 유대, 맨 마지막에 앉은 시몬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상황에서 애써 냉정을 찾으려고 하는 듯하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은 이후 1796년 프랑스의 나폴레옹 군대들이 이탈리아를 점령했을 때

벽화가 있는 수도원을 마구간으로 사용하기도 하여 습기와 수많은 덧칠로 인한 훼손이 심하였다.

설상가상으로 1943년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폭격으로 식당 이 무너졌는데

수도원장이 벽화 위에 천을 덮어두어 세상에서 이 벽화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500년 동안 쌓여있던 먼지와 곰팡이를 제거하고 보수작업을 통해

화려한 채색과 선명한 인물의 묘사가 돋보이는 지금의 상태로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2003년 미국에서 출간되어 전 세계적으로 800만부이상 팔리고 영화까지 제작된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는 이 그림을 통해

막달라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제자이며 부인으로 그의 아이를 낳았다고 하는 그리스도교를 둘러싼

금기시 된 비밀을 파헤치고 있다.

 

이 소설과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가톨릭과 기독교인들로부터

교회의 역사를 왜곡하였다는 비판을 받으며

‘다빈치 코드 뒤집기’ ‘다빈치 코드의 사기극’ 등 현직 종교인들이 낸 책도 10여 권 출판되었다.

안티 사이트 등까지 만들어지고 ‘책과 영화 안보기 운동’으로까지 확산되며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초기역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재해석할 필요성을 제기하는 등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의 연구로는 그리스도가 결혼했다거나 마리아가 그의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은 증명되지 못했으나

이런 가설이 중세에 폭넓게 신봉되었고 수많은 예술작품과 문학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정말로 이런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해결하라고 ‘최후의 만찬’을 그렸는지 모르겠다.

- 2006. 12. 14 ⓒ 조선일보 & chosun.com [명화로 보는 논술]

- 최혜원 블루 로터스 아트디렉터, 경희대 미술학부 강사

 

 

 

 

"붓 대면 끝낼줄 몰라 교황이 핀잔" 천재 다빈치

이탈리아 일간지 라 레푸블리카는 국제문화연구소가 8개월간 유럽인들을 대상으로

유럽 문화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을 묻는 인터넷 투표를 실시한 결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14만 표로 1위에 올랐다고 보도했다.

(연합뉴스 5월 14일 보도)
"마치 신이 손을 빌려주어서 그린 그림 같았다."
르네상스 전기작가 조르조 바사리는 다 빈치를 이렇게 기록했다.

이탈리아 전기 작가들은 허풍이 센 편이지만,

적어도 레오나르도에게는 신이 내린 천재, 신성한 예술가라는 칭호가 썩 어울린다.

걸출한 재능뿐 아니라 끝없는 탐구심과 호기심으로

인간과 자연, 창조와 우주의 모든 현상에 질문을 던지고 답을 얻기 위해 애썼기에 그의 삶은 빛난다.

다 빈치를 화가라고 부르기는 낯간지럽다. 그림이 열다섯 점밖에 안 되는 데다, 대부분 미완성이다.

붓을 대면 끝을 볼 줄 몰라 교황의 핀잔을 듣기도 했다.

머릿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의문부호들이 그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했던 모양이다.

영국 미술사학자
케네스 클라크는

"레오나르도가 답도 없는 수학문제와 씨름하거나 낱말 맞히기 같은 언어유희에 골몰하는 대신

그 시간에 그림을 그렸더라면 인류는 오늘날 훨씬 풍요로운 예술과 조우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에는 주문자의 요구대로 물감을 사용해야 했고,

구름 위에 천사 두엇 더 그리라고 하면 군말 없이 따라야 했다.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은 푸줏간 주인이나 구두장수와 비슷한 대접을 받았다.

그림만 그려선 생계를 잇기 어려웠던 화가들은 크고 작은 행사 때마다

깃발, 간판, 문장, 벽화는 물론 축제 행렬이나

잔칫집에 쓸 이벤트 소품과 결혼식 함 그림과 관 장식, 나무로 깎은 후추통 그림까지 도맡았다.

그러나 레오나르도와 더불어 권력과 금력에 얽매이지 않는 근대 최초의 자유로운 예술가가 탄생한다.

연금을 두둑하게 주겠다는 페라라 군주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끝내 군주 초상을 완성하지 않고 버틴 것은 어지간한 뚝심으로는 어림없는 일이다.

레오나르도는 무엇보다 자연과 대화하며 사생하기를 즐겼다.

현재 7000여 점 남아있는 그의 수기 노트는 박쥐, 날치, 잠자리, 비둘기, 고양이, 그로테스크 인물초상

등 수많은 사생들로 채워져 있다. 살아있는 자연을 자신의 눈으로 직접 관찰하고

생동감을 살려내는 작업은 레오나르도 이전에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해부학 연구, 수목 연구, 구름 연구, 인상과 표정 연구, 옷주름 연구 등은

모두 자연관찰에서 나온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해부학 노트를 보면

놀라운 정확성과 더불어 생성과 소멸을 주관하는 절대자의 기괴한 손길이 느껴진다.

당시 예술가들의 해부학 연구는 의학적 관점과는 달리 주로 미술적 재현의 정확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뼈대와 근육과 힘살의 위치와 생김새 그리고 움직임의 원리를 파헤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태아가 웅크리고 있는 자궁, 호흡계와 순환계 그리고 신경계의 분포를 보면

레오나르도의 관심이 단순한 재현의 차원을 넘어서 창조주의 비밀 곳간에 감추어진

생명의 설계도를 훔쳐보려는 의도를 품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레오나르도는 자연이 무수한 톱니바퀴들로 이루어져 있는 지극히 정교한 기계장치라고 보았다.

새의 비행원리를 깨쳐서 인간의 어깻죽지 힘으로 하늘을 날아오르는 시도를 했던 것은

그가 근본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하늘을 정복하려던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카로스의 항해에 도전했던 레오나르도는 신화의 시대를 마감하고

과학의 시대를 열었던 진정한 선구자다.

갈릴레이를 최초의 과학자로 꼽지만 레오나르도라는 징검다리가 없었더라면

과학사는 17세기까지도 중세의 언덕을 비비고 있었을 것이다.
- 조선일보, 2008.05.31, 노성두 서양미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