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때 다성(茶聖) 육우(陸羽)가 지은 차의 고전인 《다경(茶經)》에
“울분을 삭이는 데는 술을 마시고, 혼미(昏迷)를 씻는데는 차를 마신다”고 했듯이,
술이 시끄러운 사람의 집합을 위해 나온 것이라면, 차는 한적한 모임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또 “차를 마시면 흥하고, 술을 마시면 망한다(飮茶興 飮酒亡)"고 했다.
'다신계(茶信契)'를 조직하기도 했던 정약용(丁若鏞)의 말이다.
조선후기 실학자인 정약용은
강진에서의 유배생활 중에 차를 즐기기 시작해 초의선사(艸衣禪師)와 교유하며,
스스로 호를 '다산(茶山)'이라 칭하고 차와 관련된 많은 명시(名詩)를 남겼다.
이렇게 이어온 차문화는
초의선사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의 교류에서 한층 강인한 생명력을 유지하게 된다.
'추사'하면 초의를 연상하고, '초의'하면 추사를 연상할 만큼
그들 사이를 풋풋한 녹차가 묶어 놓고 있다.
추사의 차 생활은 청나라 연경에 가서 당대의 석학 완원(阮元)과 승설차를 마시면서부터 시작돼
결국은 차벌레가 된다. 차를 끓이며 시상을 얻었고, 차를 마시며 귀양살이의 시름을 달랬다.
초의에게 자주 차를 요구했던 추사는 차를 마시지 못하면 병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명선, 차삼매, 선탑차연, 조주차 등의 용어를 즐겨 썼고,
‘죽로지실(竹爐之室)’, ‘일로향실(一爐香室)’, ‘다로경권(茶爐經卷)’ 등 불후의 글씨를 남겼다.
초의선사가 거주한 일지암의 다실인 ‘일로향실’은 추사가 제주에 있을 때
‘차를 끓이는 다로의 향이 향기롭다’라는 의미로 써 준 것이다.
다산과 초의, 그리고 추사로 이어지면서 명맥을 유지해오던 차문화는
여러 이유로 인하여 쇠퇴의 길을 겪게 된다.
일제때 겨우 일부 계층에서 유지하고 있던 차문화는
해방후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과 효당(曉堂) 최범술(崔凡述)에 의해서 꽃을 피웠다.
의재는 광주와 전남지방을 중심으로 남도의 다풍(茶風)을 이끌어갔고,
효당은 엄격함을 요구하며 일정한 틀을 중시하는 ‘다도용심(茶道用心)’을 강조하며
진주지방을 중심으로 경상도 다풍을 가꾸며 차 문화를 이끌었다.
차인들은 다도(茶道)와 다법(茶法)을 구별한다.
다도란 특별한 격식이 없이 차를 통해 심신을 수련, 진리의 길에 이르는 것이고,
다법은 특별한 격식을 지킴으로써 찻자리의 예절을 전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도를 명쾌하게 정의해놓은 것이 바로 불가(佛家)의 ‘다선일미(茶禪一味)’이다.
즉 차와 선은 같은 맛이라는 것이다. 차는 곧 진리요, 진리는 곧 차라는 뜻이기도 하다.
중국 당나라 때 조주(趙州) 선사와 젊은 스님의 일화에서 유래된
“차나 한잔 마시고 가게(喫茶去)”라는 화두(話頭)는
각자 차를 마시며 느끼는 맛과 향기가 다르듯,
각자 근기(根機)에 따라 깨달음을 얻으라는 가르침의 큰 뜻이었다.
또한 초의선사의 ‘중정(中正)의 묘’는 다도의 진수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동다송(東茶頌)》에서
“차를 마시는 법은 객이 많으면 수선스럽고 수선스러우면 아늑한 정취가 없어진다.
홀로 마시면 신묘하고,
둘이서 마시면 좋고,
서넛이 마시면 유쾌하고,
대여섯이 마시면 덤덤하고,
7,8인이 마시면 나눠먹이(施)와 같다”고 했다.
때문에 차는 오감(五感)으로 마시는데,
귀로는 찻물 끓는 소리를,
코로는 향기를,
눈으로는 다구와 차를,
입으로는 차맛을,
손으로는 찻잔의 감촉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차는 인간이 가진 모든 감각을 통해 그 맛과 향취를 즐겨야 한다.
때문에 옛 선인들은 차는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므로
단순히 마시려고 하지 말고 ‘끽(喫)’ 하라고 했다.
차는 뜨거운 물에 우려내어 찻잔에 부은 다음
‘한 모금 입에 물고 혀 전체에 실어 조용히 목구멍으로 넘겨 뱃속에 간직하면서
기운을 느껴야 하는 법’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끽다(喫茶)’ 의 참뜻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 시대에는
대중들이 차 마시기를 어려워하는 다도의 엄격성만을 강조하는
우아하고 품격있는 행다법(行茶法)만이 존재한다.
초의선사가 거주한 해남 대흥사 일지암에 가면 ‘일지(一枝)’가 가진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일지암의 이름은 장자(莊子)의 《남화경》소요유(逍遙遊) 편에
“뱁새는 일생동안 한곳에 작은 깃을 틀고 잔다”는 구절과
한산시(寒山詩)의
“뱁새는 항상 한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나무 한가지만 있어도 편안하다”는 구절에서 비롯되었다.
‘일지’는 마음 거울 맑게 닦기를 게을리 하지 않은
초의선사의 ‘초의(草衣)’라는 법호인 ‘풀옷’과 맞닿아 있다.
“조용한 곳에 숨어 사는 사람이 입는 옷, 그런 옷을 입고 사는 청정한 사람,
솔잎으로 배를 채우고 풀옷으로 몸을 가리며 사는 사람”이
“굴을 파고 그 속을 나뭇가지로 얽은 보금자리[一枝庵]를 삼고 나무 열매를 먹으며 사는 사람”을 뜻한다.
우리는 복잡한 일상사를 벗어나 여유의 마음을 그리워하며 보금자리를 찾는다.
비록 일회용 커피에 길들여진 입맛이지만,
소담한 찻상을 앞에 두고 나 자신에게 예를 갖춰 한 잔의 차를 대하고 싶을 때가 있다.
또 가끔씩 따스한 차 한 잔을 떠올리며,
사랑하는 사람과 무릎을 맞대며 담소(談笑) 나누기를 꿈꾼다.
한해를 시작하는 지금 술자리보다는 마음의 문을 열고 조용한 다방(茶房)을 찾아
서로에게 차 친구가 되어 ‘끽다’를 권해 봄이 어떨까.
‘다선일미’는 그것으로 족할 뿐이다. 그래야 맛있고 멋있다.
- 홍영의(개경학연구소 소장, 전 한신대 연구교수, 역사학자,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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