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목장(大木匠) |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 지정일 1982.06.01 |
나무를 다루는 사람을 보통 목공이라 하고 크게 2가지로 나눈다.
하나는 건축물을 다루는 대목장이고, 또 하나는 조각이나 일반가구를 다루는 소목장이다.
대목장은 주로 궁궐 · 사찰 · 주택 등의 큰 건축물을 지으며,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도편수(都片手)의 지휘 아래 작업을 한다.
조선 초기부터 시행되었다는 직급인 도편수는 현장을 통솔하는 우두머리로서
나무의 재질, 운반, 제재, 지을 집의 기법, 공정분담 등을 도맡아 책임졌다.
건축에는 목장 · 기왓장 · 단청장 · 화원 등도 동원되나 목장이 기본이었다.
대목이 되는 길은 매우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했으며 대목 밑의 부편수를 거쳐야 도편수가 될 수 있었다.
중앙과 각 지방에도 대목수라는 장인들이 있어 큰 집을 지을 때는 그들의 손을 빌려야 했다.
우리나라 대목장의 제일 큰 특징은 아무리 큰 집이라 하더라도
쇠못 하나 쓰지 않고 정교하게 꿰어 맞추어 집을 올린다는 점이다.
대목장은 나무를 재목으로 하여 집짓는 일에서 재목을 마름질하고 다듬는 기술설계는 물론
공사의 감리까지 겸하는 목수로서 궁궐, 사찰, 군영시설 등을 건축하는 도편수로 지칭하기도 한다.
대목장은 문짝, 난간 등 소규모의 목공일을 맡아 하는 소목장과 구분한 데서 나온 명칭이며,
와장 · 드잡이 · 석장 · 미장이 · 단청장 등과 힘을 합하여 집의 완성까지 모두 책임진다.
목조건축물일 경우는 목장이 위주가 되는데
목장은 국가에 예속된 사람들과 민간에서 차출된 기능인들로 구성되며 전문에 따라 분야를 맡는다.
조선조에서의 조직은 도변수(都邊首), 편수 (片手)를 정점으로 삼는다.
도대목(都大木)이라고도 하는데 일을 총괄하는 우두머리로
지을 집의 법식(法式)을 정하고 맡을 일의 분담과 기법을 지도하는 소임을 감당한다.
즉 현대의 건축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목조건축이 발달하여 궁궐과 사찰건물이 모두 목조였다.
따라서 목수에 주어진 벼슬 또한 상당하였다.
통일신라의 관직을 보면 목척(木尺)이 70인이라 하였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가 전문직으로서의 목수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목업에 벼슬이 주어졌고 조선시대에는 60인의 목장을 선공감에 두었고,
세종(재위 1418∼1450) 때 서울 남대문 재건기록에 의하면 대목이 정5품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목수에게 벼슬을 주는 제도가 없어졌다.
오늘날에는 사찰이나 개인의 집을 목조로 짓는 것으로 기술의 명맥이 전수되어 오는 형편이다.
대목장은 궁궐이나 불전(佛殿), 가옥과 같은 것을 축조하는 목수를 말한다.
나라에서 큰 역사가 시작되면 도감(都監)이 열린다.
도제조(都提調)를 비롯하여 제조(提調)와 감역관(監役官)들이 정해지면
지유(指諭)에게 명하여 행수(行首)들로 하여금
목장(木匠), 석장(石匠), 야장(冶匠), 와장(瓦匠), 화원(畵員)들을 동원 조직하게 한다.
신라에 초빙된 백제의 아비지(阿非知)도 그런 건축가였다.
신라의 대소장인을 동원하여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을 짓는데 현존하는 유지(遺址)에서 보면
사용된 기와마저도 백제의 특성을 갖고 있다.
아비지가 모든 분야를 관장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이런 도대목의 능력은 후대에도 계승된다.
서울의 남대문을 비롯한 여러 건축물의 상량문(上樑文)이나 묵서명(墨書銘)에 기록된 내용에서
당시 대목들의 조직과 이름을 읽을 수 있는데
남대문의 경우는 좌우의 부변수(副邊首), 부사목(副司木)을 도편수가 거느렸다.
부편수들은 치목(治木)과 조립(組立)을 각기 분담하는데
치목(治木)에서는 목재의 벌목과 운반, 제재까지 관여하고
조립에서 방의 수장과 두껍닫이 설치까지 관장한다.
전공정을 두 분야에서 다 맡아 처리하는 방식이다.
이를 위하여 부편수들은 각 분야의 전문집단을 통솔한다.
제재하는 일만 도맡은 기거장(岐鋸匠)이나 큰 나무를 다듬어내는 선장(船匠) 등도 그의 수하에 든다.
도목수는 석수(石手), 야장(冶匠), 소목장(小木匠), 이장(泥匠), 와장(瓦匠), 도배장(途褙匠), 화원(畵員)
까지도 지휘한다. 대목들이 구축해주는 뼈대가 진척되어야 시공이 가능하기 때문에
일은 저절로 그렇게밖에 진행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건축의 공역은 민간에서도 이루어진다.
마을에서 소문난 대목(大木)을 초빙한다.
능력있다고 평가된 기문(技門)의 소속 도대목이 그 일을 맡아 조직을 단출하게 해서 일을 했다.
대목장은 그 기법이 엄격히 전승되기 때문에 기문(技門)이 형성되어 있다.
기문은 기술로서 한 가문이 만들어지는 것인데, 기문에서의 대목장은 절대권위를 누린다.
대목장은 능력에 따라 새로운 기법이 도입되기도 하고, 기능이 향상되기도 하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대목장은 전통적인 공예기술로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대목장 기능보유자로는
경복궁을 중건할 때 활약하였던 도편수 최원식-조원재-이광규로 이어지는 기문의 계승자로 신응수 씨와
김덕희 · 김중희 계열의 전흥수와 최기영 씨, 그리고 조원재 · 배희한으로 이어지는 고택영 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대목장 보유자로 인정된 고 배희한과 신응수는 각기의 특질을 지녔다.
배희한은 사가(私家)의 일을 차근히 하는 데 특징이 있는 분이고
신응수는 도대목(都大木)으로서 큰 조직을 운영하고 지휘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다.
배희한이 섬세하고 새틋한 작품을 차분하게 완성시킨다면
신응수은 수십 명의 조직을 가동시켜 불국사(佛國寺) 대웅전(大雄殿)의 일부를 조성하는 등
대규모 공역을 감당한다.
대목(大木) 전승자 | ||||
보유구분 |
이름 |
기예능 |
인정일 |
해제일 |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 |
배희한(裵喜漢) |
대목(大木) |
1982.06.01 |
1997.11.05 |
이광규(李光奎) |
1982.06.01 |
1985.11.16 | ||
신응수(申鷹秀) |
1991.05.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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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영(高澤永) |
1997.03.24 |
2004.12.19 | ||
전흥수(田興秀) |
2000.0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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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영(崔基永) |
2000.0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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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수교육보조자 |
이중구(李重九) |
1996.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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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기현(文基賢) |
1996.0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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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성(金永成) |
2000.0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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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편수란?
목수는 분야나 직급에 따라 부르는 명칭이 다르다.
분야에 따라서는 큰 집을 짓는 목수를 대목이라 하고,
문이나 가구 등을 짜는 목수를 소목(小木)이라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구분이 확연한 것은 아니며,
경우에 따라서는 대목이 문 짜는 일까지 다 관장하는 경우도 있다.
직급으로 본다면 도편수 - 부편수 - 편수로 구분할 수 있는데,
도편수는 모든 일을 총괄하는 목수의 최고책임자이다.
목수 기술만 뛰어나다고 도편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도편수는 여러 사람과 화합할 수 있는 인격도 갖추어야 하고 리더십도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선임 도편수가 후임 도편수를 고를 때에도 이런 조건을 모두 고려하여 결정하는 것이다.
“일도 잘해야 하지만 통솔력이 있어야 돼요. 통솔력이 없으면 안되요.
물론 우선적으로 일을 잘해야 되지만, 그런 단계를 떠나서 머리가 빨리 돌아갈 줄 알아야 돼요.
도면을 봐도 어디가 어떻고 하는 걸 알 수 있도록 자꾸 가르치지요.
목수들 간의 우애관계도 봐야 되고, 서로가 안 맞는 사람은 어딜 가나 트러블이 생기거든.
그래서 마음속으로 대충 도편수를 선정하면 그 사람을 집중적으로 가르쳐요.
도면 그리는 것과 보는 것, 어디가틀렸는지,
도편수가 현장에 가서 직접 할 것을 그 사람한테 자꾸 넣어줘야 돼요."
- '도편수의 정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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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응수 대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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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백제역사재현단지 내에 건축중인 높이 29m의 백제 5층 목탑은
능산리 사지에서 발굴된 목탑 터를 바탕으로 재현했다.
2005년 9월5일 최기영 대목장이 목수들과 함께 목탑 지붕 위에 올라
수직으로 잘 세워졌는지 점검하고 있다.
- 전재홍기자 jhju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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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문화재 전흥수대목장
땀으로 인내로 고건축 계승 40여 년, 손 거친 목조건물 연주암 · 망월사 등
사재 130억 들여 고건축박물관 - 98년 1차 개관, 2002년 완공, 총면적 5만여평
‘목수 치고 제집 가진 사람 없다.’
8월22일 인간문화재 대목장(大木匠) 74호로 지정된 국내 고건축의 거목(巨木) 전흥수씨에게
이 말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그는 오는 2002년 완공되는 국내 최초의 한국고건축박물관을
사재 130여 억원을 들여 손수 짓고 있는 목수이기 때문이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 대동리. 덕숭산 수덕사를 우로 비껴 차로 5분 정도 내달리면
우람한 자태를 뽐내는 고건축물들이 버티고 서 있다.
◇ 전 관장이 사재 130여 억원 들여 건립중인 한국고건축박물관 전경.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하는 강릉 객사문을 그대로 본떠 만든 정문을 지나
전시관에 들어서면 실물 크기의 10∼20% 모형으로 재현된 국보 제1호 숭례문, 국보 제15호 봉정사 극락전,
국보 제18호 부석사 무량수전 등 우리나라에서 내로라 하는 국보와 보물 200여 점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들 전시물은 건축재료를 빠짐없이 축소해 짜맞춘 것으로
기와, 흙벽, 단청 없이 목조 얼개로만 돼 있어 건축물을 속속들이 볼 수 있다.
못 하나 쓰지 않고 재료를 모두 새기고 파서 짜맞추는 우리 전통 건축물이고 보면
이렇게 나무의 맨살을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우리 전통 건축물의 참 멋을 잘 나타내고 있다.
뼈대가 훤히 드러난 건물 모형에는 작품설명과 함께
곳곳에 배흘림기둥, 공포 등 각 나무 재료들의 기능을 설명하는 이름표가 붙어 있다.
국사 교과서에서 무조건 외우기만 했던 전통건축 용어와 한국 건축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5000여 평의 부지에 98년 10월 1차 개관한 이 박물관은 현재 본관, 제1전시관 등 6개 동이 개관돼 있고
양반 사대부집, 초가 삼간 등을 더 지어 2002년 완공할 예정이다.
한국의 미를 응축해 놓은 한국고건축박물관.
40여 년간 고건축 하나만 부여잡고 열정과 혼을 불어넣으며 장인의 삶을 살아 온 전흥수 관장이
고향에 세워 놓은 자기 인생의 회향물(回向物)이다.
“세계적으로 우수한 우리 조상들의 슬기와 아름다움이 전수되지 못하고 당대에 끝나고 마는 것을
항상 가슴아프게 생각해 오던 중 고건축 분야만이라도 그 기능과 기법을 전승하는데 기여하고자
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게 된 것입니다.”
40년의 목수 일로 ‘인간문화재’라는 입신(入神)의 경지에 오른 전 관장이
고건축과 인연을 맺은 것은 약관 18세. 당시 대목으로 널리 알려진 부친 전병석씨에게 일머리를 배웠다.
전 관장은 보릿고개의 가난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다섯 살 아래인 동생(前 조계종 중앙종회 의장 설정스님)을 가난으로 속세를 떠나보낸 고통과
돈이 없어 배우지 못한 상처가 불량스런 사춘기를 낳기도 했다.
21세 되던 해 전 관장은 방황을 접고 자신의 인생을 담보로 고건축 일에 뛰어 들었다.
부친이 대목이었던 인연으로 대목장 故 김중희씨를 만나 고건축의 미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전 관장은 위계질서가 엄격한 공사현장에서 어깨너머로 일을 배우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했다.
배우는 속도가 빠른 그를 견제하고 쫓아내려는 선배들의 주먹질도 숱하게 이겨내야 했지만,
오로지 불심과 전통문화를 이어가겠다는 집념으로 고행길을 이겨냈다.
“배우는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내 일이 아닌가 하는 회의도 많이 들었고 돈 되는 일에 대한 유혹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목재가 쌓여 법당의 형태로 만들어져 가는 것에 심취한 나를 발견했을 때는
무척이나 환희심에 젖었습니다.”
전 관장은 이 때 좋은 나무를 선택하는 방법 등 고건축의 기초부터 하나하나를 튼실하게 배울 수 있었다.
‘15년이 지나야 자를 잡는다’(독자적인 설계와 건축이 가능하다는 뜻)는 고건축 목공기술을
그는 배운지 10년만인 31세에 자립의 꿈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선조들의 품격 높은 기(技)와 예(藝)를 그대로 재현해 내야 한다는 두려움과 중압감이
자립에 길에 들어선 그의 마음을 혼돈으로 밀어 넣었다.
이런 중압감은 마치 화두에 몰두하던 수좌가 은산철벽(銀山鐵壁)에 가로막힌 것처럼
한동안 나무를 쳐다보는 것 조차 두려울 정도로 심한 고통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했다.
그런 그가 마음의 평정을 찾고 망치와 끌에 혼을 담을 수 있었던 데는 수덕사 대웅전이 큰 힘이 됐다.
백척간두진일보(百斥竿頭進一步) 하는 ‘죽어야 산다’는 심정으로 발심을 새롭게 하자,
정제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사찰 고건축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옆에서 볼 때 혼이 나간 사람처럼 일념에 푹 빠져 전통기법을 연구하다 보니,
거기서 화두(話頭)가 깨쳐져 사자후(獅子吼)가 나온 셈이다.
전 관장이 전국을 돌며 본격적인 고건축 공사를 시행한 곳은
문화재는 물론 전국 주요 사찰 건물 등 수백건에 이른다.
난공사로 꼽히는 관악산 연주암과 도봉산 망월사를 비롯해 오대산 월정사 대웅전, 속리산 법주사 대웅전,
안동 용담사 대웅전 등 그의 손을 거쳐간 건축물이 전국에 산재한다.
그가 신축·보수한 전통 건물을 면적으로 따지면 5만여평은 족히 넘는다.
특히 전 관장이 신축한 서울·여주·포천 등 10여 채에 이르는 대순진리회관과 대진대학,
대전 엑스포 종각 건축은 그의 대표작으로 건축미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전 관장이 가장 애착을 느끼는 건축물은 수덕사 대웅전의 양식을 그대로 재현한 수덕사 황화루다.
20여 년 전 신축부터 최근 보전 수리작업에 이르기까지 직접 관여할 만큼 애착을 쏟아부었다.
문화재의 원형보전과 전통적인 기법을 고수하는데 주력해 온 그의 집념의 단편을 보여준다.
이제 그는 한국 고건축계에서 4명에 불과한 인간문화재 대목장이 되었다.
입문 당시 천대 받았던 직업이 이제 최고의 문화재 기능인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지난 90년부터 한국문화재보전수리기능인협회 회장을 10여년간 맡아 온 그는
최근 신흥수씨에게 회장 자리를 물려주고 상임고문을 맡아
일반인의 문화재 애호정신을 고취시키고 보전수리기능의 전승·개발에 심혈을 쏟고 있다.
그는 우리 문화유산의 보전과 전승에 기여한 공로는 물론
노인공경과 효 실천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여 MBC와 한국전력공사가 공동주최한 ‘99 좋은 한국인 대상’을
받기도 했다. 예산군 ‘효 장학회’에 2000만원의 성금을 쾌척하고,
남 모르게 양로원 등에 쌀을 수시로 전달하는 등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실천해 왔다.
한 우물을 파는 뚝심과 배짱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점철돼 온 이 시대의 장인 전 관장의
마지막 불사는 ‘전통문화의 계승과 발전’이다.
“고건축박물관에 전통건축기술을 전수할 수 있는 전수장과 일반인을 위한 실습장을 만들어
청소년과 해외교포들에게 우리 문화의 얼과 문화를 체험하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할 생각입니다.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문화재를 아끼는 마음이 싹트기 때문이죠.”(041)337-5877
- 김재경 기자(jgkim@buddhapia.com)
평생을 바치니 알겠더라,
한옥이 얼마나 조화로운 집인지
한옥과 고건축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썩지도 늙지도 않는 콘크리트로 만든 집이 아니라,
늘 돌보고 고치며 살아야 하는 나무와 흙과 돌로 지은 집이 좋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외국의 명건축물만 쳐다보던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 땅과 제 나라 사람을 쏙 빼닮은 고건축에 눈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한옥을 제대로 짓고 문화재를 보수, 복원할 수 있는 장인이 이제 별로 없다.
한국의 주요 건축물을 보수, 복원하며 살아온 전흥수 대목장에게
그의 목수 인생 반세기의 이야기를 듣는다. - 인터뷰 노현균
노현균
그동안 수덕사, 월정사, 도갑사 등 고건축 일을 주로 해오셨는데, 요즘은 어떤 일을 하고 계신가요?
전흥수
나이가 많으니, 욕심을 부려 일을 하진 않아요.
현재 비중있게 진행하는 일은 덕수궁 함녕전 행각과 남한산성 행궁 하궐 복원 공사, 두 곳이에요.
덕수궁 함녕전은 고종이 침전으로 사용했던 곳으로 고종 8년(1904) 불이 나서 바로 다시 지은 곳이에요.
승하하신 곳도 이곳이니, 고종 황제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는 곳이죠.
물론 보물(제820호)로 지정돼 잘 관리되고는 있지만, 일제강점기 때 많이 변형돼서
이를 바로잡는 복원 공사를 하고 있어요.
덕수궁 함녕전도 그렇고 남한산성 행궁도 그렇고 왕이 기거한 중요한 문화유산이라 부담이 커요.
그런 만큼, 더 많은 정성과 마음을 기울여 작업하고 있습니다.
남한산성과 맺은 긴 인연
노현균
남한산성과는 인연이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전흥수
그러고 보니 이 일을 하면서 남한산성과 꾸준히 인연을 맺어왔군요.
1970년대에는 동문, 남문, 수어장대 보수 공사를 했습니다. 전쟁의 폐해 때문에 처참한 꼴이었지요.
입에 풀칠하는 게 먼저였을 때니, 문화유산을 보살필 겨를이 없었어요.
살아 있으니, 수리도 하고 복원도 하는 거지요.
남한산성 안에 절이 많지 않습니까. 그중 장경사와 망월사 신축 공사를 진행했어요.
절을 통째로 지은 건 아니고, 장경사는 종각만 지었고,
망월사는 대웅전과 요사체, 극락보전을 신축했어요.
이때는 도로가 제대로 포장되지 않아 좋은 목재를 구해도 길이 나빠 못 옮길까 걱정을 많이 했어요.
또 지금처럼 대규모로 음식점이 조성되지 않았던 때라 끼니를 해결하는 것도 큰일이었지요.
지금은 딱 일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편하죠.
노현균
이런 인터뷰를 하면 옛 생각이 새록새록 나시겠어요. 예전에 작업한 건물을 종종 둘러보시는 편인가요? 남한산성에는 하궐 복원 공사 때문에 자주 오실 텐데
수어장대나 장경사, 망월사 같은 곳도 가끔 둘러보시는지 궁금합니다.
전흥수
네. 종종 둘러보는 편입니다. 남한산성에 발길을 하려면 큰맘 먹어야 했는데,
지금은 여기서 일하고 있으니 시간이 날 때마다 둘러보지요.
어디든 그렇겠지만, 여기 남한산성도 그냥 평범한 시골마을이었어요.
지금이야 많이 좋아졌지만 그땐 여기서 외지인 보기가 어려웠죠.
동네 사람 아니면 공사하러 들어온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지금은 남한산성에 구경 오는 사람도 많고, 등산하러 오는 사람도 많잖아요.
그 사람들이 내가 복원한 건물을 보고 있으면 뿌듯하기도 하고,
그때 고생했던 일이 생각나기도 하고 그래요.
지금 같은 환경이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까지 일일이 마음 쓰던 시절이라,
한 번 더 눈길이 가는지도 모르겠어요.
대목장이 되기까지
노현균
고건축과 관련한 일을 1961년부터 이름을 걸고 일을 하셨으니, 거의 50년 동안 하셨는데,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축물은 무엇인가요?
전흥수
일을 할 때는 언제나 온 마음을 바칩니다. 어느 것 하나 소홀하게 대하지 않아요.
배신자의 집을 짓더라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일합니다.
집을 생각해야지, 그런 걸 따지면 절대 좋은 집을 지을 수 없어요.
그래서 이런 질문을 받으면 곤란해져요. 어느 것을 꼽아야 할지….
다들 의미가 있고 힘든 작업이었지만 아무래도 나와 가장 인연이 깊은 수덕사라고 말해야겠네요.
어릴 적 가난 때문에 수덕사에서 살기도 했고, 또 수덕사 암자 건물인 정혜사 선방을 증축하다
상량문에서 아버지의 함자를 발견한 적도 있고요.
아버지가 지은 건축물을 수리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나 될까 생각해봤는데
정말 흔치 않은 일 같더라고요.
노현균
아버님이 목수여서 가업을 이어받을 생각으로 일을 하신 건가요?
전흥수
가업을 이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어릴 때는 집안이 너무 가난했어요.
그래서 부모님이 저와 동생을 수덕사로 보냈지요.
스님이 되라고 그런 게 아니라 먹고살 게 없으니 그리 한 것이지요.
저는 절 생활이 안 맞아 4~5년 있다가 나왔는데,
동생은 그걸 계기로 출가해 지금까지 수덕사에 있어요.
절에서 나와서는 여기저기 다니며 많이 방황했어요.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떠나왔지만 포목공장이며, 피혁공장을 옮겨 다니다가
힘이 드니깐 고향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고향에 돌아왔죠.
아버지 밑에서 잔심부름도 하고, 목수일도 같이 하러 다니다가 지금까지 이 일을 하게 된 거예요.
먹고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먼저였어요.
노현균
아버지에게 일을 많이 배우셨겠네요. 다른 선생님께 배운 적은 없나요?
전흥수
아버지께도 많이 배웠지만, 본격적으로 배운 것은 김중희 대목장을 만나면서부터예요.
김중희 선생의 형님 되는 김덕희 대목장도 아주 유명한 목수였어요.
그 분들이 당시에는 1인자, 2인자셨죠.
김중희 선생은 경기도와 충청도에서, 김덕희 선생은 경상도에서, 이렇게 구역을 나눠서 일하셨어요.
그분들 밑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지금은 다들 이름 있는 일꾼이 되었죠.
노현균
2000년에 국가 지정 중요무형문화재 74호 대목장이 되셨는데 그전과 달라진 점은 없나요?
아무래도 마음가짐이나 태도에 더 신경이 쓰였을 것도 같은데요.
전흥수
처음에 문화재청에서 대목장으로 지정해준다고 할 때 나는 전혀 생각이 없었어요.
그냥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며 살면 되지, 그런 걸 뭐하러 하냐는 생각에 안 한다고 했어요.
주위 사람들은 명예라 했지만, 난 그런 게 싫더라고. 그러니 그런 걸 받았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죠.
그저 온 마음을 다해 집을 지어야 한다는 생각만 했지
상을 생각하고 문화재 지정을 염두에 두고 일한 적은 없어요.
평생이 담긴 한국고건축박물관
노현균
숭례문, 부석사 무량수전, 덕수궁 중화전 등 조형미가 빼어난 전통 건축물의 목조 뼈대를
10분의 1이나, 5분의 1 크기로 재현한 한국고건축박물관을 지었는데,
이 박물관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하신 건가요?
전흥수
1998년 10월에 고건축박물관을 개관했는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꽤 오래전에 그런 박물관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나라에는 그런 고건축박물관이 없지 않습니까?
일하면서 우리 전통건축 기술이 축약되어 있는 박물관을 꼭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돈을 좀 벌게 되면서 구체적으로 고향(충남 예산군)에 그 박물관을 지어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이거야말로 내가 살았던 흔적이고 표시겠구나 싶었죠.
노현균
단순히 흔적을 남기기 위해 만든 박물관이라고 하기엔 규모와 물량, 전시물에 쏟은 정성이 대단합니다.
6000평의 부지, 예산이 100억원이 훨씬 넘는 대규모 공사였으니
이 박물관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전흥수
박물관 짓는 데 지금까지 160억 원 정도가 들어갔어요.
어떤 사람들은 그 돈으로 편히 먹고살지 뭐하러 그런 짓을 하느냐고 말렸지만,
나는 내가 한 일의 흔적을 꼭 남기고 싶었어요.
후대 사람들이 고건축에 대해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생각해낸 것이 이 박물관입니다.
이 박물관의 전시물은 겉모습만 축소해놓은 단순한 모형이 아니에요.
자재도 건축기법도 그 모두 그대로이고 크기만 축소한 것이라서,
모형 하나 만드는 데 집 한 채 값이 들어가기도 했죠.
현재 전시된 작품은 주로 국보와 보물 등 문화재급 건축들이에요.
앞으로 우리 문화재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유명한 고건축 모형도 제작해
비교할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언젠가는 이 박물관을 기증할 생각도 있고요.
노현균
모형을 만드는 데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드니까,
모형으로 제작할 건축물을 선정하는 기준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전흥수
전시된 것들은 주로 국보나 보물급 문화재인데,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것 중에도 중요한 고건축이 있습니다.
아직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 아쉬운데,
되도록이면 가치를 지닌 건축물들을 모형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우리나라 고건축의 아름다움을 알릴 수 있는 것들로요.
노현균
박물관에는 주로 어떤 사람들이 관람하러 오나요?
전흥수
전통 건축에 관심이 있는 대학생이나 일반인이 많죠. 그런 사람들은 오래 머물다 가요.
가끔은 수학여행을 오기도 하는데,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오면 정신이 없어요.
관심을 갖고 질문하는 학생들이 있으면 내가 아는 만큼은 답변해줍니다.
하나라도 더 알아갔으면 하는 마음에서요. 가끔이긴 하지만 건축을 공부하는 외국인들도 옵니다.
조화로운 집이 가장 좋은 집이다
노현균
문화재로 지정된 건물 모두가 건축학적으로 좋은 건물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건축미가 뛰어나 지정되었다기보다는 다른 의미가 있어서 보존 가치를 부여받은 건물도 있으니까요.
목수가 생각하는 잘 지은 건축물은 어떤 것인가요?
전흥수
조화로운 집을 우선으로 꼽아요. 건물에 사용하는 각각의 부재들도 서로 조화를 이뤄야 하지만,
집 주변의 자연경관과도 잘 어울려야 하죠.
아무리 좋은 자재를 써서 지어도 자연경관을 해치면 좋은 집이라고 할 수 없어요.
우리 고건축은 ‘자연스러운 멋’을 최고로 칩니다.
처마도 그렇고, 기둥도 그렇고 모두가 자연의 선과 닮아 있어요.
동네 뒷산처럼 처마 선이 섬세하고 아름답단 말이에요.
중국은 너무 치켜올라간 느낌이고, 일본은 너무 처진 것 같지만
우리나라 처마 선은 적당해 조화로워 보이죠.
노현균
그런 자연의 조화 때문에 각 지역의 건축물이 다 다른 건가요?
전흥수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그런 자연의 조화도 하나의 이유가 되겠고,
생활 방식이 다른 탓도 있겠지요. 집이라는 게 사람이 사는 곳이라 변하기 마련입니다.
편리한 것은 그대로 두고 불편한 곳은 고쳐 나가니까요.
추우면 더 따뜻하게 만들 것이고, 더우면 더 시원하게 만들어 생활하겠지요.
노현균
요즘 사람들은 아파트에서 살지 않습니까. 이 아파트가 현대인에게 가장 적합한 집의 형태일까요?
전흥수
나도 서울에 있을 때에는 아파트에서 사는데, 편리하긴 하지만 우리에겐 맞지 않더군요.
문 닫으면 그만이잖아요. 사람이 소통을 하나 뭘 하나.
효율성이나 경제성을 따져 짓다 보니 아파트라는 게 생긴 것 같아요.
노현균
그런 단절된 삶이 싫어서 요즘 사람들이 한옥에 주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옥의 가장 큰 장점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전흥수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하고, 또 나무니까 향긋한 나무 냄새가 나고,
벽은 흙으로 만드니까 건물 내 수분이 자동으로 조절되어요.
반면 아파트는 재료가 모두 시멘트, 페인트인데 전부 좋지 않은 거잖아요.
한옥은 자체에서 흙냄새, 나무 냄새가 배어 나오는데
이런 게 자연이고, 사람들 또한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사는 한옥입니다.
즉, 한옥은 우리나라 자연에 맞게 만든 건물이라 우리에겐 가장 좋은 집이라 할 수 있죠.
마음으로 지어야 좋은 집을 지을 수 있다
노현균
잘 만든 한옥은 천년을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 한옥을 짓기 위해서는 재료부터 엄선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떤 나무가 좋은가요?
전흥수
육송 같은 나무가 좋아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소나무가 육송이잖아요.
육송은 날이 풀리면 따라 풀리고, 날이 얼면 따라 얼죠. 우리나라 계절에 맞게 나무 상태가 변해요.
그러나 수입 목재를 써서 지으면 금세 표시가 나죠.
근래에 지은 건물 중에 보수를 해야 하는 곳들은 다들 수입목재로 지은 곳이에요.
옛날 육송으로 지은 집을 보세요. 단단한 돌로 지은 것도 아닌데, 천년이 넘어도 멀쩡하지 않습니까.
노현균
그렇다면 좋은 집을 지으려면 좋은 나무가 기본이겠네요.
전흥수
좋은 재료도 중요하지만 좋은 마음이 첫째여야 해요. 좋은 마음이 아니면 집이 잘될 수 없어요.
그다음이 좋은 재료죠.
노현균
좋은 마음이란 게 무엇인가요?
전흥수
목수에게 좋은 마음이란 욕심을 버리는 것이죠. 돈에 욕심이 없어야 제대로 된 집을 지을 수 있어요.
욕심이 나서 자재 값을 아끼면 절대로 좋은 건축물을 지을 수 없어요.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어요.
어떤 절의 대웅전을 짓는데, 일을 하청에 하청을 줘서 중간에 값이 깎이니깐 기둥의 굵기가 달라져요.
나무 하나당 두 치씩 치수를 줄이면 결국 어떻겠어요. 그런 재료로 지으라 해서 못겠다고 했어요.
후일에 거기 가 보니깐, 그 나무가 벌써 썩고 있더군요.
노현균
좋은 마음을 갖기 위해서 따로 마음 수양을 하고 계신가요?
전흥수
나는 거창하게 명상을 한다거나, 음악을 듣는 게 아니라
평소에 참아야 할 일은 참고, 견뎌야 할 일은 견디는 것이 마음 수양이라 생각해요.
해야 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용기와 하지 않아야 할 이야기를 참아내는 인내 같은 게 있다면
따로 마음 수양을 할 필요가 없겠지요. 제자들을 가르치면서도 그런 말을 해요.
참된 목수는 감정에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고요. 집을 짓는 데 다른 마음을 먹으면 욕심도 생기고,
하지 말아야 할 말도 막 하게 되지요. 그러면 결국 좋은 집을 지을 수 없어요.
마음을 다스리는 것, 그것이 목수의 첫 번째 조건이에요.
노현균
마지막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계획하고 계신 일, 하시고 싶은 일은 어떤 것인지 말씀해주세요.
전흥수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라 뭘 해야겠다는 욕심은 없어요.
나에게 주어진 일이라면 하겠지만, 억지로 이것저것 할 생각은 없어요.
다만 무엇을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는 일을 하고 싶어요.
어떤 집을 짓더라도 완고한 것으로 지어 남기고 싶어요.
누군가 내가 지었다는 걸 알 수 있게 짓는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한국고건축박물관
충남 예산군에 있는 한국고건축박물관은 1998년 10월에 개관했다.
건축 기능인의 자질과 기량을 닦고 고건축 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려 전흥수 대목장이 설립한 곳이다.
6000평 부지에 전시관을 비롯해 사대부 가옥, 평민 가옥, 초가삼간, 연수원, 중국관, 일본관,
야외 공원, 사진전시관 등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주요 전시물로는 숭례문,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 화엄사 각황전 등의 축소 모형이 있다.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대동리 산152-18번지
- 041-337-5877 홈페이지 www.ktam.or.kr
노현균
명지대학교 건축학과에서 조선시대 중층건물을 주제로 박사과정에 있다.
경복궁 근정전 수리공사, 법주사 대웅보전 수리공사, 숭례문 정밀실측조사, 흥인지문 정밀실측조사 등
국내의 중요문화재조사 작업에 참여하여 문화재만의 고유 가치를 찾아 기록을 남기는 작업을 해왔다.
현재는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에서 행궁 복원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나루> No.66 2009년 9-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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