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조선왕조 궁중음식

Gijuzzang Dream 2008. 2. 15. 01:23

 

 

 

 

   조선의 음식문화를 이끈 음식, 조선왕조 궁중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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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봉수당 진찬도」/ 오른쪽 :「봉수당 진찬도」부분도

 「봉수당 진찬도」

조선 후기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그린 그림이다.

  회갑연은 화성 행궁의 주건물인 봉수당에서 열렸다. 
「봉수당 진찬도」 부분도

방석이 깔린 자리가 왕의 자리이다.

  방석 앞에는 붉은 옻칠을 한 상 세 개가 놓여 있고 상마다 굄 음식이 가득하다.


옛날 우리나라에서 음식 문화가 가장 발달한 곳은 궁중입니다.

궁중에서 가장 좋은 음식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온 나라에서 진상된 명산물을 재료로

수십 년간 음식을 조리한 솜씨 좋은 요리사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궁중 음식은 한국 요리의 정수를 모은 것으로,

음식 한 가지에도 맛과 멋, 영양까지 생각하며

온갖 정성을 들였던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담겨 있답니다.

식생활이 많이 변화하고 있지만,

궁중 음식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범으로 삼고 보존해야 할 전통입니다.

 


궁중에서 양반가로, 다시 백성들에게


조선왕조 궁중 음식은 고려왕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조선 시대 궁궐에서 차리던 음식으로,

전통적인 한국 음식을 대표합니다.

 

크게, 평소에 먹는 일상식과

왕족의 경사 때나 외국 사신을 맞이할 때에 먹는 연회식으로 나눌 수 있어요.

일상식은 임금이 아침과 저녁에 먹는 진짓상인 수라상과 이른 아침의 초조반상, 점심의 낮것상 등

모두 네 차례 식사로 이루어집니다.
궁중 음식은 요리하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이 개발해 전수해 온, 역사가 오랜 음식이에요.

이렇게 개발한 음식은 잔치 때 반기라는 풍습으로 반가에 전해지고,

이는 다시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전달되어 음식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어요.

 

궁중에서는 잔치를 하고 나서 높이 쌓았던 음식을 헐지 않고

외척이나 종친, 양반들의 집으로 보내 주었는데,

이 때 양반들의 집에서 궁중 음식을 맛보고 따라 하기도 했던 것이지요.

혼례나 회갑 때 음식을 높이 쌓는 굄 음식도 궁중 연회식의 상차림이 전해진 것입니다.

 


궁중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


조선 시대에 궁중에서 음식을 만들던 곳을 ‘소주방’이라고 합니다.

소주방은 안소주방과 밖소주방으로 나누어져요.

안소주방은 평소 아침과 저녁 식사를 만드는 곳으로, 주방 상궁이 맡아서 돌보았어요.

밖소주방은 궁중의 잔치 음식을 만드는 곳으로,

‘대령숙수’라는 남자 전문 요리사가 음식을 만들었어요.


주방 상궁은 안소주방을 책임지는 사람이에요.

주방 상궁이 되려면 적어도 20년 동안 오로지 음식 만드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그렇게 주방 상궁이 되면 평생 소주방에서 음식 만드는 일을 한답니다.

주방 상궁은 늘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비법을 연구했으며, 그 비법은 대를 이어 전수되었습니다.


대령숙수는 지금으로 치면 출장 요리사라고 할 수 있어요.

대령숙수는 세습되었으므로 대대로 그 기술을 전수했고,

궁궐 밖에 살면서 궁중 잔치 때 궁궐에 들어와 음식을 만들었답니다.

 


신분에 따라 다른 밥상 
 

조선 시대는 신분에 따라 많은 것이 결정되었어요.

같은 밥도 궁중에서는 수라, 양반들은 진지, 백성들은 밥, 천민들은 끼니라는 말을 사용했답니다.
또 신분에 따라 반찬의 종류도 달랐습니다.

신분의 차례에 따라 상을 나누는 것을 ‘반상’이라고 하는데, 궁중에서는 12첩 반상을 차렸습니다.

12첩 반상은 밥, 국, 찌개, 찜, 전골, 세 가지 김치, 장류 같은 기본찬 말고도

반찬이 12가지나 올라갑니다. 궁중에서는 12첩, 벼슬이 높은 사대부 집안에서는 9첩까지만,

그 아래 반가에서는 7첩까지만 차릴 수 있었답니다.

 


궁중 음식의 이름


궁중 음식과 민간 음식은 조리법이 같습니다. 다만 이름과 규모에서 차이가 있지요.

반기 - 잔치나 제사가 끝나고 여러 군데에 나누어 주려고 목판이나 그릇에 몫몫이 담아 놓은 음식.
반가 - 양반의 집안.
외척 - 왕비의 친족.
종친 - 임금의 친족.
수라 - 궁중에서만 사용하는 말이다. 몽골어에서 음식을 ‘술라’라고 했는데,

          이 말이 고려 말기에 원나라에서 들어와 우리말이 되어

          조선까지 내려온 것이 아닌가 추측됩니다.

위 : 수라상 차림, 아래 : 수라상 반배도


수라상 차림
12첩 반상으로, 재료와 조리법이 모두 달라 한국 음식의 특징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식사 예법도 아주 엄격하고 정중하다.
수라상 반배도
수라상은 대원반, 곁반인 소원반, 네모진 책상반 세 개의 상에 나누어 차린다.

책상반 대신 둥근 소반을 쓰기도 한다.

격식을 갖추어 밥상을 차릴 수 있게 만든 그릇 한 벌을 ‘반상기’라고 하는데,

수라상의 식기는 모두 은반상기를 사용한다.

 


조선왕조 궁중음식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 궁중 음식은

한희순(1889∼1971), 황혜성(1920∼2006) 등 2명의 기능 보유자가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한희순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황혜성이 궁중 음식에 대한 학문적 배경과

실제 조리법 전수에 큰 역할을 하다 2006년 12월에 세상을 떠났지요.

황혜성의 장녀 한복려와 정길자가 그 기술을 전수받았고,

현재 조선왕조 궁중 음식 전승 현황은

기능보유자 후보 1명(한복려), 전수 교육 조교 1명(정길자)입니다.

 


궁중음식 연구 외길 -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자 황혜성


황혜성은 1942년부터 한희순 상궁에게 궁중 음식을 전수받기 시작해

1972년 한희순 상궁이 돌아가실 때까지 약 30년간 궁중 음식 조리법을 전수받았답니다.

이를 바탕으로 궁중 음식을 계량하고 조리법을 정리했지요.

또 궁중 음식과 관련된 문헌을 조사하고 연구해 궁중 음식에 대한 학문적인 배경을 다지고,

실제 조리법을 전수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황혜성은 한희순 상궁이 살아 계실 때

궁중 음식 전수 기관으로 ‘사단법인 궁중음식연구원’을 설립했어요.

이 연구원은 지금까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궁중 음식 전수 교육과 정기 발표회를 하고 조리서를 출간하고 있습니다.

또 1960∼1970년대에는

전국의 향토 음식을 조사해 『한국민속조사종합보고서』 「향토 음식」 편을 썼고,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요리서인 『음식디미방』같은 옛 음식 서적들에 해설을 덧붙여

책을 펴냈으며, 궁중의 잔치 기록인 『진찬의궤』, 『진연의궤』를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황혜썽은 조선왕조 궁중 음식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데 큰 역할을 했어요.

1970년 문화재위원회 전문위원이었던 황혜성은

「조선왕조의 궁중 음식」이라는 무형문화재 조사 보고서를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에 제출했지요.

나라에서는 이를 심의해 1970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로 ‘조선왕조 궁중 음식’을 지정했고,

제1대 기능 보유자로 한희순 상궁을 지정했습니다.

 

또한 황혜성은 대학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는 것도 소홀히하지 않았어요.

1941년 숙명여자전문대학 조교수를 시작으로 명지대학교, 한양대학교, 성균관대학교 가정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1986년 정년퇴직했습니다.

 

황혜성은 일제 강점기에 우리 음식의 정수인 궁중 음식을 전수해

한국 음식의 우수성과 품위를 널리 알리고,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일깨워 주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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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계절출판사에서 발간한 [어린이 문화재 박물관②]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 이글의 저작권은 문화재청과 사계절 출판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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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포커스, 문화재청, 게시일 2008-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