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숭례문 화재보고서

Gijuzzang Dream 2008. 2. 20. 02:40


    

 숭례문 화재 보고서

 

 

 

방화에서 복원까지


2008년 2월 10일 오후 8시 45분,

국보 1호 숭례문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설 연휴의 마지막 밤을 맞아 편안히 쉬고 있던 국민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은 숭례문 화재 사건의 시작이었다.

 

이 날의 화재로 인해

숭례문 1층 누각의 상당부분과 2층 누각 전체가 불에 타 사라졌다.

조선 태조 7년인 1398년에 완성된 이후 600여 년에 걸쳐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등 온갖 역경을 이겨 낸 소중한 문화재가

순식간에 우리 곁에서 사라진 것이다.


 


목조 문화재의 가장 큰 적, 불!
 

우리나라의 건축 문화재는 대부분 나무로 지어졌기 때문에 항상 화재의 위협을 받고 있다. 수원 화성,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 등이 이미 화재로 인해 큰 피해를 입은 적이 있다.

그러던 중 마침내 국보 1호인 숭례문까지 화재에 희생당한 것이다.

숭례문의 화재 원인은 방화로 밝혀졌다.

방화범이 2층 누각의 바닥에 시너를 뿌린 후 라이터로 불을 붙인 것이다.

 

시너를 뿌리고 불을 붙인 이유는 나무가 탈 수 있는 온도를 쉽게 확보하기 위해서다.

나무를 200℃ 이상의 온도로 가열하면

나무의 구성 물질이 분해되면서 불에 잘 타는 기체가 발생한다.

이 기체에 불꽃이 닿으면 비로소 나무에 불이 붙는 것이다.

외부의 불꽃에 의해 불이 붙을 수 있는 최저 온도를 인화점이라고 한다.

보통 나무의 인화점은 240~270℃이며,

숭례문에 사용한 소나무의 인화점은 253℃이다.

소나무의 인화점은 다른 나무에 비해 낮은 편이기 때문에 불이 붙기 더 쉽다.

숭례문에는 인화점을 2~3배 높여 주는 방염제까지 발라 두었지만

불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불은 주변의 나무 구조물을 태우면서 점점 커졌다.

목재 건물의 화재가 무서운 것은 불에 타는 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나무는 얇고 가늘수록, 표면이 거칠수록, 건조할수록, 검은색일수록 불에 잘 탄다.

목조 건물이라는 숭례문의 특성과 겨울철의 건조한 날씨는

화재의 진행 속도를 빠르게 해 주었다.

목조 건물의 화재는 A급 화재로 분류합니다.

대부분이 나무로 이루어져 있어 빠른 속도로 불타기 때문입니다.

목조 건물의 화재 진행 시간은 30~40분으로

보통 건물일 때 걸리는 2~3시간의 4분의 1밖에 안 됩니다.

또한 온도도 높아 불이 붙은 지 20분이면 1200~1300℃까지 올라갑니다.

일반 건물이 낮은 온도로 오랫동안 타는 반면

목조 건물은 높은 온도로 짧은 시간 동안 타는 것입니다.
- 이동명(경민대학교 소방방재학과 교수)




화(火)를 부른 숭례문의 구조


2층 누각의 바닥에서 시작된 열기는 빠르게 천장으로 번졌다.

출동 40여 분 후 대부분의 불길이 잡히고 연기만 나는 상태가 되자

소방대원들은 화재 진압의 강도를 잠시 낮추었다.

화재가 진압됐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불은 천장 깊숙한 곳에 살아 있었다.

이것은 숯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숯은 겉보기에는 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안쪽에서는 타고 있다.

탈 물질과 열은 충분하지만 산소가 부족해 타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다.

이 때 숯에 산소를 공급해 주면 불꽃이 살아난다.

숭례문 화재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잠시 후 지붕 안쪽 적심목에 숨어 있던 불길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맹렬하게 타오른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숭례문의 구조에서 찾을 수 있다.

숭례문의 지붕은 보온이나 단열을 위해

기와 밑에 진흙, 적심목, 개판 등이 층층이 쌓여 있는 구조다.

그래서 지붕 위로 뿌린 물이 불에 닿을 정도로 침투하지 못했다.

이 때 기와를 걷어 내고 물을 뿌렸다면 어땠을까?

이에 대해서는 불을 끄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과

기와를 걷어 내면 공기가 들어가 오히려 불길이 더 커졌을 것이라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 문제는 아직 논란의 대상이다.

불길이 되살아난 지 약 3시간 후, 2층 누각 지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불에 타면서 구성 물질이 대부분 기체로 변해 날아가자

기둥이 지붕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5시간 동안의 사투에도 불구하고

숭례문은 화재에 의해 파괴된 또 하나의 문화재가 되고 말았다.

 

 


문화재 지키는 첨단기술


그렇다면 문화재를 화재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화재가 발생하지 않게 철저히 관리하고, 그래도 불이 났다면 작은 불꽃일 때 꺼야 한다.

처음에는 소화기 한 대로 끌 수 있는 작은 불도

소방대원들이 출동하는 몇 분 사이에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물이나 문화재에는

열이나 연기를 감지하여 경보를 울리는 화재경보기가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일반적인 화재경보기는 작은 불꽃을 감지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그래서 최근에는 광섬유 센서를 이용한 화재경보기가 보급되고 있다.

최대 수 ㎞에 달하는 광섬유를 문화재에 고루 설치해 두면

일정한 간격으로 온도를 읽을 수 있다.

불꽃이 생겨 그 주변의 온도가 올라가면 그 차이를 감지해 불이 났는지 판단하는 것이다.

건물 외부의 불도 감지할 수 있어 산불이 문화재로 번져 오는 것을 미리 알 수 있다.

광섬유 센서는 화재뿐만 아니라 침입자를 감지하는 데도 유용하다.

CCTV와 달리 눈에 잘 보이지 않아 침입자가 피해 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전기가 아닌 빛을 이용하기 때문에

누전 등의 염려가 없어 문화재에도 안심하고 설치할 수 있다.

화재경보기가 불꽃을 탐지하면

내부에 설치된 스프링클러나 물안개 분사시스템이 작동하게 된다.

물안개 분사시스템은 단순히 물을 뿌리는 스프링클러와 달리

안개 같은 물 입자를 내뿜는다.

스프링클러에 비해 물을 적게 사용할 뿐만 아니라

 불과 접촉하는 물 입자의 표면이 넓어 온도를 낮추는 효과가 더 크다.


한편, 문화재가 밀집되어 있는 곳에는 수막시스템을 사용하면 좋다.

수막시스템은 화재가 발생하면 물을 분사하여 문화재 주위를 막처럼 물로 둘러싼다.

산불이 문화재에 번지거나 불이 다른 건물로 옮겨 붙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문화재 되살리는 전통기술


문화재를 지키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화재가 훼손되는 것을 완벽하게 막을 수는 없다.

훼손된 문화재는 원래 상태로 복원해야 하는데,

이 때는 조상들에게 물려받은 전통기술이 중요하게 쓰인다.


숭례문의 경우,

우선 남아 있는 숭례문의 잔해를 해체한 후에

다시 사용할 수 있는 부재와 새로 제작해야 할 부재를 파악해야 한다.

다행히 2006년에 숭례문을 정밀하게 측정해 놓은 도면이 있어 복원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다음으로는 재료로 쓸 나무를 확보해야 한다.

숭례문 복원에는 금강소나무가 쓰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

금강소나무는 나이테가 촘촘해 조직이 치밀하다.

다른 소나무에 비해 송진이 많고 골고루 분포되어 있어 균열도 적게 일어난다.

잘 썩지 않고 강도가 뛰어나 예부터 궁궐 건축 등에 많이 쓰였다.

 

현재 산림청에서 관리하는 금강소나무는 전국 39곳에서 자라는 21만 그루 정도다.

문화재청이 문화재 복원용으로 쓸 금강소나무를 요청하면

산림청이 적당한 나무를 골라 제공하게 된다.

숭례문 복원에 쓰일 금강소나무는 지름이 1m를 넘어야 한다.

금강소나무가 이 정도로 자라는 데는 100년 이상이 걸린다.

적합한 나무를 벌채한 후에는 최소 1~2년 동안 그늘에서 자연 건조를 해야 한다.

시간을 아끼려고 인공적으로 가열하면 터지거나 휘어져 못 쓰게 된다.

무리해서 쓰더라도 목재가 오래가지 않는다.

 

조상의 얼이 담겨 있는 문화재를 원형 그대로 되살리기 위해서는

혼을 불어 넣어 손수 만드는 옛 방식을 따라야 하는 듯하다.


신중하게 복원하면 옛 모습을 다시 찾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숭례문이 복원되기까지는 5~6년의 시간과 200~300억 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된다고 해도

과연 숭례문이 예전처럼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유지할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렇듯 한 번 잃어버린 문화재를 되살리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숭례문 화재 사건을 계기로 철저한 문화재 관리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의 무관심이야말로 문화재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이기 때문이다.

문화재를 원래 모습 그대로 복원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듭니다.
어느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 신응수 대목장

  

- 2008년 03월 01일 / 동아 사이언스(어린이 과학동아) / 고호관 기자

 

 

 

 

 

 

..... 생 략 .....

 

이런저런 기사에서는 흔히 "2층 누각이 불탔다"고 하던데,

이는 참 애매하고 부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2층 누각"이라면 1층은 다른 것이고 2층이 누각인데 그 부분이 탔다는 것인지,

누각이 2층으로 되어 있는데 그중 2층 부분이 탔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우선, 누각이라는 표현부터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숭례문은 성벽에 홍예문 모양의 문을 낸 것이지요.

그 홍예문 주위의 성벽은 안팎이 모두 장대석 석축으로 쌓여 있고,

좀 먼 부분은 네 귀가 궁글려진, 다시 말해서 동글게 모가 깎인 사고석으로 쌓여 있지요.

좀 동그란 사고석은 세종 때 쌓은 것입니다.

 

홍예문 주위의 석축 부분은 육축(陸築)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 육축 위에 문루(門樓)를 지은 것이지요.

사실 이 문루가 없다고 문이 만들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지요.

 

문루는 장수의 지휘소인 장대(將臺)나 회의소 기능,

군졸들의 파수 초소 기능 등을 갖는 부분인데,

그러한 실제적 군사적 기능 이외에 문의 위용을 드러내는 기능도 하는 것이지요.

 

그 문루가 숭례문과 흥인문은 지붕이 두 겹의 중층 지붕에,

실제로 중간에 마루칸이 깔린 2층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은 문루 2층 부분에서 시작하여

문루 2층을 다 태우고 1층으로 번져 1층도 거의 다 태우고 "스스로" 꺼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육축 부분은 남아 있고, 문루의 1층 부분은 기둥 등 기본 골격과

불완전하나마 지붕 부분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생 략 ....

 

(홍순민교수의 글 중에서)

 

 

 

 

 

 

 

 

 

 

 

 

 

 <한순간 火魔가 앗아간 500년 국보>

 

 

화마(火魔)의 무서운 기세에 국보 1호 숭례문(崇禮門.남문)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수차례의 전란(戰亂)을 견뎌온 성문이 한순간의 화재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광화문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하여 양녕대군이 세로로 썼다고 전해지는 숭례문의 현판도,

화재 등 재난을 막아준다는 장식물 치미(망새)도 화재 피해를 막아내지 못했다.

10일 오후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해 붕괴된 숭례문은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지난 1962년 12월 국보 1호로 지정된 명실상부한 국내 대표 문화재로

현존하는 한국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기도 하다.

숭례문은 조선왕조가 한양 천도 후인 1395년(태조 4)에

한성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남산)의 성곽과 만나는 곳에 짓기 시작해

1398년(태조 7)에 완성됐으며 이후 500년 동안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쳐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1447년(세종 29)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0년대 초반 해체, 보수 과정에서 발견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을 통해

1479년(성종10)에도 한 차례의 대규모 보수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1961-1963년의 대규모 해체, 보수공사를 한 후에는

몇차례의 소규모 정비 공사만이 진행됐다.
1960년대 공사 당시에 제거했던 옛 목부재와 기와 등 350여 점은 숭례문 내에서 보관하다가

2005년 한국전통문화학교 부재보관소로 옮겨 다행히 이번 화재 피해를 피해갔다.

숭례문은 1907년 일제가 연결된 성곽을 허물고 도로를 내면서 대로에 둘러싸여 고립돼 있다가

2005년 5월 숭례문 주변에 광장이 조성되고,

2006년 3월에는 100년 만에 중앙 출입문인 홍예문이 개방되면서 일반인들의 접근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500년을 지켜온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또 지난 1984년 보물 163호였던 쌍봉사 대웅전이 불 타고

2005년 산불로 보물 479호인 낙산사 동종이 소실되는 등

화재로 인한 문화재 피해 사례는 몇차례 있었지만 국보급 건축물이 화재로 전소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이처럼 국보 1호가 화재로 사라지는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지면서

목조 문화재의 취약한 방재 관리도 다시 도마에 오를 수 밖에 없게 됐다.
실제로 숭례문에는 소화기 8대가 1,2층에 나뉘어 비치되고, 상수도 소화전이 설치된 것이 소방시설의 전부이며

감지기 등 화재 경보설비나 스프링클러 등은 설치돼 있지 않았다.

또 홍예문이 개방되는 오전 10시에서 오후 8시 사이에 평일 3명, 휴일 1명의 직원이 상주하며 관리하지만

그 이후에는 사설경비업체의 무인경비시스템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이날과 같이 홍예문 폐쇄 시간에 발생한 화재 상황에 대해서는 신속한 대처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히 숭례문은 야간 조명시설이 설치돼 있어 누전 등 전기 사고의 가능성이 있는 데다

일반인들의 접근이 쉬워 방화 위험도 비교적 큰 편이다.
문화재청은 2005년 4월 낙산사 화재 이후 중요 목조문화재가 산불 등으로 소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중요 목조문화재 방재시스템 구축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지난해 1차로 해인사, 봉정사, 무위사, 낙산사 등 4곳에 수막설비, 경보시설 등을 설치했다.

숭례문도 우선 구축대상인 중요 목조문화재 124개에 포함돼 있으나 아직까지 방재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은 상태다.
지난해에는 숭례문 지붕 위에 있는 작은 흙 인형인 잡상(雜像, 어처구니) 중 하나가 훼손된 채

수개월째 방치돼 관리체계에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이번에 붕괴된 숭례문이 다시 제 모습을 찾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최근 숭례문 실측 도면을 제작해 둔 상태이기 때문에 원형 복원이 가능하지만

피해 규모에 따라 1년 이상의 복원 기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문화재청 관계자는 전했다.
- 연합뉴스 / 2008-02-11 고미혜기자

 

 

 

 '서울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 숭례문  

 원래 이름은 숭례문… 양녕대군이 현판 써

 

 

10일 화재가 난 숭례문(崇禮門)은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조선왕조가 수립된 직후인 1395년(태조 4)에 한성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 남산)의 성곽과 만나는 곳에 짓기 시작해

1398년(태조 7)에 완성됐으며 이후 500년 동안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쳤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1447년(세종 29)에 성곽 부분을 높이고 더 웅장하게 만들고

팔작지붕이었던 2층 지붕은 사다리꼴 형태의 우진각 지붕으로 고쳐 지은 것이며,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대규모 해체 · 보수 과정을 거쳤다.

이때의 해체 수리 과정에서 1479년(성종 10)에도 비교적 큰 보수공사가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숭례문은 서울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이지만

도성 남쪽에 있는 문이어서 사람들은 흔히 남대문(南大門)이라 불렀다.

1406년(태종 6)에는 명 사신 황엄이 나주 지역에 갔다가 서울로 돌아올 때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숭례문 밖에서 영접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에 따르면

‘숭례문(崇禮門)’ 현판 글씨는 태종의 큰 아들인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조선은 유교국가였기 때문에 대문의 이름을 유교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각각 붙였다.

 

숭례문은 1962년 12월 국보 제1호로 지정됐으며, 2005년 5월 숭례문 주변에 광장이 조성됐다.

2006년 3월에는 100년 만에 홍예문이 일반에 개방됐다.

또 누각이 목조로 지어진 탓에 화재에 취약하고,

지붕을 받치는 서까래와 대들보 등의 구조물이 불에 탈 경우 건물 자체가 붕괴되는 구조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이번 화재 이후 숭례문에 대한 보수가 아니라 전면적인 복원이 불가피하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현장을 지켜본 김동현 문화재위원(건축문화재분과)은

"긴급 소집될 문화재위원회에서 건물을 해체해서 복원하는 방향을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사실상 처음부터 재건축하는 상황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2008년 2월 10일 조선일보 

 

 

 


 

양녕이 현판 썼다는데 과연 그럴까?

 


지난 10일 밤 화재로 숭례문 누각이 소실된 가운데, 현판이 새삼 시민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불기둥이 치솟는 상황에서 소방관이 현판을 가까스로 떼어내는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면서 안타까움을 더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언론은 현판 글씨를 쓴 인물로 조선조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1394∼1462)을 지목했다.

문화재청과 서울시 누리집 등에 소개된 내용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숭례문 현판 글씨의 ‘원작자’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을 보면 “지금 남대문 현판인 숭례문 석 자는 그(양녕대군)가 쓴 글씨”라는 구절이 있어 통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추사 김정희는 <완당 전집>에서

“지금 숭례문 편액은 곧 신장의 글씨”라고 적어 놓아 이긍익의 주장과 다르다.

 

신장(1382∼1433)은 대제학을 지냈으며 초서와 예서에 능했던 사람이다.

역시 조선후기 실학자인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지은 것이요, 그 액자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양녕대군의 글씨라 한다”면서도 “숭례문의 편액은 정난종이 쓴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는 근거로 “(정난종은) 세조 때 사람으로 비석이나 종에 글을 새기도록 임금의 명을 많이 받았다”며 “글씨체로 보아도 그의 것임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또한 이 글에는 임진왜란 때 현판이 일본인들에 의해 없어졌다가 난리가 수습된 뒤에 다시 걸렸는데, 이는 좋은 글씨가 땅에 묻히면 괴이한 빛이 나기 때문이라는 일화도 소개돼 있다.

 

정난종(1433∼1489)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서예에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잡지인 <별건곤> 1929년 9월치에는 ‘안평대군의 글씨는 오해요, 중종시대 명필 유진동의 글씨’라는 기록도 보인다.

 

이처럼 옛 기록의 서술들이 서로 엇갈려 현판 글씨의 ‘주인’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사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호암 문일평(1888∼1939)은 1935년 한 일간지에, 현판 글씨를 누가 썼는지를 밝히는 게 매우 어려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 2008년 2월 12일 한겨레

 

 

 

 

 

 풍수지리설 근거 없어..논어 '立於禮'서 유래한 듯

 

 

국보 1호 숭례문(崇禮門)이 방화로 무참히 붕괴되면서 서울성곽의 4대문 혹은 8대문 중 유독 남대문(南大門)인 숭례문의 현판만 가로로 놓지 않고 세로로 세운 까닭이 화제가 됐다.

 

풍수지리설에 근거,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세워 단 것이었다는 설명이 가장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져 왔다.

 

 

이를 좀 더 학술적인 차원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한양은 풍수지리적 특성에서 볼 때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하는 낙산(駱山)이 허약하며,

조산(朝山)이 되는 관악산(冠岳山)이 지나치게 높고 화기가 드세다는 약점을 지닌다.

특히 관악산은 그 뾰족한 봉우리 생김새가 화산(火山)의 기운을 지닌다.

 

이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조치들이 남대문과 동대문에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남대문은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인 '崇'(숭)자와 오행에서 화(火)를 상징하는 예(禮)를 수직으로 포개어 놓아 관악산이 뿜어내는 화기를 막고자 했다.

이렇게 되면 "불로써 불을 제압하고 다스린다"는 뜻을 구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숭례문 편액을 이렇게 설명해온 민속학자나 풍수학자들에게 그 출처를 물었으나

한결같이 "글쎄, 어디에 있을까? 조선왕조실록에 있지 않나?"는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조선시대사를 전공하는 권오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이에 대해

"현판을 세운다 해서 무슨 화기를 막겠느냐. 어디에도 그런 근거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에 의하면 유독 숭례문 현판을 세운 까닭은 조선왕조를 뒷받침한 유교의 절대경전인 논어(論語)에서 유래한다.

 

논어 태백편(泰伯篇)에서 공자가 남긴 말 중 하나로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흥어시, 입어례, 성어락)"

다시 말해 "시에서 흥이 생기고 예에서 일어나고 악에서는 이룬다"는 말이 그 근거라는 것이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과 같은 유교의 가치이념을 음양오행설에 접목해

서울성곽 문 이름을 지은 조선왕조의 이데올로그들은 남쪽에 예(禮)를 배정해 이를 활용한 숭례문이란 이름을 지으면서 그 현판을 세우게 된 까닭이 바로 이 논어 구절 중 '立於禮'에 있다는 것이 권 교수 설명이다. 

다시 말해, 예를 통해 사람은 일어난다 했으므로 숭례문이란 현판 또한 세워서 달게 되었다는 것이다.

 

권 교수의 해석이 틀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화기 때문에 숭례문 현판을 세워 달았다는 설명은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예컨대 조선전기 전국 지방지의 집대성으로 일컬어지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한양 궁궐에 관해 자세한 기록을 남겼으나 이런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박물학자 이규경(李圭景) 또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라는 방대한 백과사전 중 경사편 5 논사류 1 에서 조선의 궁궐 액자를 다루면서 숭례문에 대해서는

"세상에 전하기를 양녕대군(讓寧大君) 글씨라 하며,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그것을 떼어 버려 유실되었다가 난리가 평정된 뒤에 남문(南門) 밖 연못 근방에서 밤마다 괴이한 광선을 내므로 그곳을 파서 다시 이 액자를 찾아 걸었다고 한다"는 정도의 언급만 남겼을 뿐이다.

 

같은 맥락에서 서울성곽 다른 대문이 모두 3글자임에도 동대문만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해서 굳이 '之'라는 글자를 덧보태 4글자로 만든 까닭을 풍수학계에서는 한양의 좌청룡인 낙산의 허약함을 보충하기 위한 조치라고 하나, 이 또한 근거를 찾기가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3년이면 원형은 복원되겠지만 국민상처는 복원 어려워" 

 

 

 

실측 도면 · 중수 자료 등 남아 기술적인 문제는 없어

석축 구조물까지 보수 필요 진단땐 '예산 200억+α'



숭례문의 원형 복원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전망이다.

11일 열린 문화재위원회 긴급회의에 참가한 전문가들은

숭례문은 2006년에 중요 목조문화재 방재시스템 구축사업의 일환으로

작성된 182쪽의 실측 도면, 1961~63년 수리했을 때의 보고서,

그 밖의 사진 자료 등이 남아 있기 때문에 원형 복원에 기술적인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현재 진행중인 광화문 복원공사에 비춰

숭례문의 복구 기간은 2~3년, 예산은 200억원 정도가 소요될 것으로 추산됐다.

화재 현장을 둘러본 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 기능보유자인 최기영 대목장도

“원형 복원은 가능하며 순수 우리 소나무 자재 등을 구하는 과정 등이 필요해 최대 3년 가량의 기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복구에는 화재 피해를 입지 않은 기존 부재가 최대한 활용된다.

정밀진단을 해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겠지만,
현재 외관 상으로는 석축 부분은 조금만 수리하면 대부분 재사용할 수 있고, 누각 1층의 기둥과 공포도 많은 부분을 재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층 누각의 부재들은 대부분 사용할 수 없고,
기와도 새 것으로 완전히 바꿔야 할 것으로 보인다. 못쓰게 된 목재 부분은 우리의 순수 소나무 자재로 새로 갈아 끼우게 된다.

목재는 문화재청이 상당량 비축해 둔 것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부족할 경우 목재 확보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밀진단 결과 홍예문(虹霓門) 상부의 석재를 비롯해 석축 구조물까지 대거 보수가 필요한 상황인 것으로 확인되면 복구 예산 및 기간이 늘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복원 작업은 피해 상황에 따른 복구 계획이 문화재위원회에서 확정되면
불탄 누각의 잔해 철거, 전통기와 제작, 구조물 축조와 기와 얹기, 단청 입히기 등 다양한 작업을 거쳐 이뤄진다.
복구 사업은 지방자치단체가 하는 방식과 문화재청이 직접 하는 방식이 있으나
현재 문화재청은 서울시 중구청 주도로 하는 데 무게를 두고 있다.

2005년 화재로 소실된 낙산사의 사례처럼 일반적으로 문화재 복구는
해당 지방자치단체에 국고보조금을 지원해 추진하는 게 일반적이나, 중요 문화재는 문화재청이 직접 추진한 적도 있다.

복원 기간과 예산 규모는 예상보다 늘어날 수 있겠지만
숭례문의 형태적 복원은 상당히 정확하게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번 화재로 숭례문이 간직했던 조선 건국 당시의 웅장한 기상은 다시는 느끼기 어려울 것 같다.

김봉렬 문화재위원(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은
“성급하게 복원하기보다는 철저히 조사 연구한 뒤

일제에 의해 훼손되기 이전의 형태로 복원이 이루어지길 바란다”면서

“숭례문이 복원되어도 그것은 21세기에 새롭게 중건된 숭례문으로 옛 숭례문의 정신적, 역사적 측면까지 복원할 수는 없는 점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 2008/02/11

 

 

 

 

 

  

 

 침입자 ∙ 화재 조기감시 기술 개발

 숭례문 같은 문화재 보호에 제격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이하 표준연)은

기존의 침입자나 화재 감시 시스템의 한계를 극복하고 문화재 특성에 맞는 침입자 감시 및 화재경보 시스템을 개발했다고 13일 밝혔다.

표준연 안전계측연구단 안봉영 박사팀이 개발한 광섬유센서와 적외선 열화상 카메라로 구성된 감시 시스템이다.

기존의 감시시스템은 사람이나 동물, 물건이 센서 사이를 통과해도
무엇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숭례문에 설치된 적외선 감지기에 침입자 경보가 울린 것은 10일 오후 8시 47분.

침입자 감지벨이 울리고 9분 만에 보안 업체 직원이 현장에 달려왔지만 숭례문에는 이미 불이 붙은 뒤였다. 설치된 CCTV에도 아무런 이상이 감지되지 않았다.


- 흥인지문<左>엔 적외선 감지기, 돈화문<右>에는 감시카메라가 설치돼 있다. -

 


하지만 표준연이 개발한 광섬유센서는
사람과 동물을 구별하거나 온도변화까지 감지할 수 있다.

침입자 감지용 광섬유센서는 한쪽에서 빛을 보내면 반대편에서 반사돼 다시 돌아온다.

따라서 교차하는 두 개의 빛이 생기는 셈이다.

하지만 침입자가 광섬유센서를 밟고 지나가면 눌린 부위에서 진동하던 두 개의 빛이 겹쳐져 간섭현상이 일어난다. 서로 다른 위상을 갖던 빛이 겹쳐져 진폭이 커지거나 줄어드는 원리를 이용해 침입자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고양이나 새들이 밟고 지나갈 수 있지만 일정한 몸무게 이상만 감지할 수 있도록 조절이 가능해 사람인지 동물인지 구별할 수 있다.

화재 감시용 광섬유센서는 한쪽에서 빛을 출발시켜 반대편으로 나온 빛의 정보를
10나노(n, 1n는 10억분의 1)초 단위로 확인한다. 유리로 된 광섬유센서의 내벽을 따라 진행하던 빛은 일정한 크기로 진동을 계속한다. 이때 화재가 발생하면 내벽이 허물어지면서 이곳에 부딪힌 빛은 산란된 만큼 위상의 크기가 변해 화재 경보를 울리게 된다.

광섬유센서는 지름이 0.25mm로 눈에 잘 띄지 않으며
문화재의 외관에도 영향을 주지 않는다. 또 빛을 이용하기 때문에 전기 누전이나 전자기 잡음, 부식의 염려도 없어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다. 이들 광섬유센서는 1m간격으로 압력이나 온도의 변화를 읽을 수 있어 설치 장소의 위치별 변화를 신속히 파악할 수 있다.

여기에 CCTV가 아닌 열화상 감지 시스템을 연결하면
깜깜한 밤에도 침입자의 유무를 알 수 있다. 또 침입자가 카메라의 위치를 인위적으로 피해가는 상황을 미연에 예방할 수 있다.

안봉영 박사는

“광섬유센서는 원래 전방의 휴전선 같은 군부대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개발됐다”며

“현재는 대형물류창고 관리에 쓰이지만 숭례문 같은 문화재 보호에도 사용할 수 있을 것” 이라고 밝혔다.

- 동아사이언스, 서금영 기자,  2008년 0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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