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순간 火魔가 앗아간 500년 국보>
화마(火魔)의 무서운 기세에 국보 1호 숭례문(崇禮門.남문)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수차례의 전란(戰亂)을 견뎌온 성문이 한순간의 화재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광화문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하여 양녕대군이 세로로 썼다고 전해지는 숭례문의 현판도,
화재 등 재난을 막아준다는 장식물 치미(망새)도 화재 피해를 막아내지 못했다.
10일 오후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가 발생해 붕괴된 숭례문은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지난 1962년 12월 국보 1호로 지정된 명실상부한 국내 대표 문화재로
현존하는 한국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기도 하다.
숭례문은 조선왕조가 한양 천도 후인 1395년(태조 4)에
한성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남산)의 성곽과 만나는 곳에 짓기 시작해
1398년(태조 7)에 완성됐으며 이후 500년 동안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쳐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1447년(세종 29)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0년대 초반 해체, 보수 과정에서 발견된 발견된 상량문(上樑文)을 통해
1479년(성종10)에도 한 차례의 대규모 보수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1961-1963년의 대규모 해체, 보수공사를 한 후에는
몇차례의 소규모 정비 공사만이 진행됐다. 1960년대 공사 당시에 제거했던 옛 목부재와 기와 등 350여 점은 숭례문 내에서 보관하다가
2005년 한국전통문화학교 부재보관소로 옮겨 다행히 이번 화재 피해를 피해갔다.
숭례문은 1907년 일제가 연결된 성곽을 허물고 도로를 내면서 대로에 둘러싸여 고립돼 있다가
2005년 5월 숭례문 주변에 광장이 조성되고,
2006년 3월에는 100년 만에 중앙 출입문인 홍예문이 개방되면서 일반인들의 접근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며 500년을 지켜온 숭례문에 화재가 발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또 지난 1984년 보물 163호였던 쌍봉사 대웅전이 불 타고
2005년 산불로 보물 479호인 낙산사 동종이 소실되는 등
화재로 인한 문화재 피해 사례는 몇차례 있었지만 국보급 건축물이 화재로 전소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이처럼 국보 1호가 화재로 사라지는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지면서
목조 문화재의 취약한 방재 관리도 다시 도마에 오를 수 밖에 없게 됐다. 실제로 숭례문에는 소화기 8대가 1,2층에 나뉘어 비치되고, 상수도 소화전이 설치된 것이 소방시설의 전부이며
감지기 등 화재 경보설비나 스프링클러 등은 설치돼 있지 않았다.
또 홍예문이 개방되는 오전 10시에서 오후 8시 사이에 평일 3명, 휴일 1명의 직원이 상주하며 관리하지만
그 이후에는 사설경비업체의 무인경비시스템에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이날과 같이 홍예문 폐쇄 시간에 발생한 화재 상황에 대해서는 신속한 대처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특히 숭례문은 야간 조명시설이 설치돼 있어 누전 등 전기 사고의 가능성이 있는 데다
일반인들의 접근이 쉬워 방화 위험도 비교적 큰 편이다. 문화재청은 2005년 4월 낙산사 화재 이후 중요 목조문화재가 산불 등으로 소실되는 것을 막기 위해
중요 목조문화재 방재시스템 구축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지난해 1차로 해인사, 봉정사, 무위사, 낙산사 등 4곳에 수막설비, 경보시설 등을 설치했다.
숭례문도 우선 구축대상인 중요 목조문화재 124개에 포함돼 있으나 아직까지 방재시스템이 구축되지 않은 상태다. 지난해에는 숭례문 지붕 위에 있는 작은 흙 인형인 잡상(雜像, 어처구니) 중 하나가 훼손된 채
수개월째 방치돼 관리체계에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이번에 붕괴된 숭례문이 다시 제 모습을 찾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최근 숭례문 실측 도면을 제작해 둔 상태이기 때문에 원형 복원이 가능하지만
피해 규모에 따라 1년 이상의 복원 기간이 소요될 것이라고 문화재청 관계자는 전했다. - 연합뉴스 / 2008-02-11 고미혜기자
'서울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 숭례문
원래 이름은 숭례문… 양녕대군이 현판 써
10일 화재가 난 숭례문(崇禮門)은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조선왕조가 수립된 직후인 1395년(태조 4)에 한성 남쪽의 목멱산(木覓山 · 남산)의 성곽과 만나는 곳에 짓기 시작해
1398년(태조 7)에 완성됐으며 이후 500년 동안 몇 차례의 보수를 거쳤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1447년(세종 29)에 성곽 부분을 높이고 더 웅장하게 만들고
팔작지붕이었던 2층 지붕은 사다리꼴 형태의 우진각 지붕으로 고쳐 지은 것이며,
1961년부터 1963년까지 대규모 해체 · 보수 과정을 거쳤다.
이때의 해체 수리 과정에서 1479년(성종 10)에도 비교적 큰 보수공사가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숭례문은 서울 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이지만
도성 남쪽에 있는 문이어서 사람들은 흔히 남대문(南大門)이라 불렀다.
1406년(태종 6)에는 명 사신 황엄이 나주 지역에 갔다가 서울로 돌아올 때
"백관(百官)으로 하여금 숭례문 밖에서 영접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수광이 쓴 '지봉유설'에 따르면
‘숭례문(崇禮門)’ 현판 글씨는 태종의 큰 아들인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조선은 유교국가였기 때문에 대문의 이름을 유교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각각 붙였다.
숭례문은 1962년 12월 국보 제1호로 지정됐으며, 2005년 5월 숭례문 주변에 광장이 조성됐다.
2006년 3월에는 100년 만에 홍예문이 일반에 개방됐다.
또 누각이 목조로 지어진 탓에 화재에 취약하고,
지붕을 받치는 서까래와 대들보 등의 구조물이 불에 탈 경우 건물 자체가 붕괴되는 구조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이번 화재 이후 숭례문에 대한 보수가 아니라 전면적인 복원이 불가피하다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현장을 지켜본 김동현 문화재위원(건축문화재분과)은
"긴급 소집될 문화재위원회에서 건물을 해체해서 복원하는 방향을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사실상 처음부터 재건축하는 상황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2008년 2월 10일 조선일보
양녕이 현판 썼다는데 과연 그럴까?
지난 10일 밤 화재로 숭례문 누각이 소실된 가운데, 현판이 새삼 시민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불기둥이 치솟는 상황에서 소방관이 현판을 가까스로 떼어내는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면서 안타까움을 더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언론은 현판 글씨를 쓴 인물로 조선조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1394∼1462)을 지목했다.
문화재청과 서울시 누리집 등에 소개된 내용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숭례문 현판 글씨의 ‘원작자’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 |
조선후기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을 보면 “지금 남대문 현판인 숭례문 석 자는 그(양녕대군)가 쓴 글씨”라는 구절이 있어 통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추사 김정희는 <완당 전집>에서
“지금 숭례문 편액은 곧 신장의 글씨”라고 적어 놓아 이긍익의 주장과 다르다.
신장(1382∼1433)은 대제학을 지냈으며 초서와 예서에 능했던 사람이다.
역시 조선후기 실학자인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지은 것이요, 그 액자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양녕대군의 글씨라 한다”면서도 “숭례문의 편액은 정난종이 쓴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는 근거로 “(정난종은) 세조 때 사람으로 비석이나 종에 글을 새기도록 임금의 명을 많이 받았다”며 “글씨체로 보아도 그의 것임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또한 이 글에는 임진왜란 때 현판이 일본인들에 의해 없어졌다가 난리가 수습된 뒤에 다시 걸렸는데, 이는 좋은 글씨가 땅에 묻히면 괴이한 빛이 나기 때문이라는 일화도 소개돼 있다.
정난종(1433∼1489)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서예에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잡지인 <별건곤> 1929년 9월치에는 ‘안평대군의 글씨는 오해요, 중종시대 명필 유진동의 글씨’라는 기록도 보인다.
이처럼 옛 기록의 서술들이 서로 엇갈려 현판 글씨의 ‘주인’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사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호암 문일평(1888∼1939)은 1935년 한 일간지에, 현판 글씨를 누가 썼는지를 밝히는 게 매우 어려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 2008년 2월 12일 한겨레
풍수지리설 근거 없어..논어 '立於禮'서 유래한 듯
국보 1호 숭례문(崇禮門)이 방화로 무참히 붕괴되면서 서울성곽의 4대문 혹은 8대문 중 유독 남대문(南大門)인 숭례문의 현판만 가로로 놓지 않고 세로로 세운 까닭이 화제가 됐다.
풍수지리설에 근거,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세워 단 것이었다는 설명이 가장 그럴듯하게 받아들여져 왔다.
이를 좀 더 학술적인 차원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한양은 풍수지리적 특성에서 볼 때 좌청룡(左靑龍)에 해당하는 낙산(駱山)이 허약하며,
조산(朝山)이 되는 관악산(冠岳山)이 지나치게 높고 화기가 드세다는 약점을 지닌다.
특히 관악산은 그 뾰족한 봉우리 생김새가 화산(火山)의 기운을 지닌다.
이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조치들이 남대문과 동대문에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남대문은 불꽃이 타오르는 형상인 '崇'(숭)자와 오행에서 화(火)를 상징하는 예(禮)를 수직으로 포개어 놓아 관악산이 뿜어내는 화기를 막고자 했다.
이렇게 되면 "불로써 불을 제압하고 다스린다"는 뜻을 구현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숭례문 편액을 이렇게 설명해온 민속학자나 풍수학자들에게 그 출처를 물었으나
한결같이 "글쎄, 어디에 있을까? 조선왕조실록에 있지 않나?"는 정도의 반응을 보였다.
조선시대사를 전공하는 권오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이에 대해
"현판을 세운다 해서 무슨 화기를 막겠느냐. 어디에도 그런 근거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에 의하면 유독 숭례문 현판을 세운 까닭은 조선왕조를 뒷받침한 유교의 절대경전인 논어(論語)에서 유래한다.
논어 태백편(泰伯篇)에서 공자가 남긴 말 중 하나로
"興於詩, 立於禮, 成於樂(흥어시, 입어례, 성어락)"
다시 말해 "시에서 흥이 생기고 예에서 일어나고 악에서는 이룬다"는 말이 그 근거라는 것이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과 같은 유교의 가치이념을 음양오행설에 접목해
서울성곽 문 이름을 지은 조선왕조의 이데올로그들은 남쪽에 예(禮)를 배정해 이를 활용한 숭례문이란 이름을 지으면서 그 현판을 세우게 된 까닭이 바로 이 논어 구절 중 '立於禮'에 있다는 것이 권 교수 설명이다.
다시 말해, 예를 통해 사람은 일어난다 했으므로 숭례문이란 현판 또한 세워서 달게 되었다는 것이다.
권 교수의 해석이 틀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화기 때문에 숭례문 현판을 세워 달았다는 설명은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예컨대 조선전기 전국 지방지의 집대성으로 일컬어지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은
한양 궁궐에 관해 자세한 기록을 남겼으나 이런 언급은 어디에도 없다.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박물학자 이규경(李圭景) 또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라는 방대한 백과사전 중 경사편 5 논사류 1 에서 조선의 궁궐 액자를 다루면서 숭례문에 대해서는
"세상에 전하기를 양녕대군(讓寧大君) 글씨라 하며,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그것을 떼어 버려 유실되었다가 난리가 평정된 뒤에 남문(南門) 밖 연못 근방에서 밤마다 괴이한 광선을 내므로 그곳을 파서 다시 이 액자를 찾아 걸었다고 한다"는 정도의 언급만 남겼을 뿐이다.
같은 맥락에서 서울성곽 다른 대문이 모두 3글자임에도 동대문만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해서 굳이 '之'라는 글자를 덧보태 4글자로 만든 까닭을 풍수학계에서는 한양의 좌청룡인 낙산의 허약함을 보충하기 위한 조치라고 하나, 이 또한 근거를 찾기가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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