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나아가는(문화)

족보(族譜)의 재발견

Gijuzzang Dream 2008. 1. 28. 23:05

 

 

 

 족보의 종류
① 족보 또는 보첩(譜牒)

관향을 단위로 씨족의 세계와 사적을 기록한 역사책으로 여러 종류의 보책

② 대동보(大同譜) 또는 대보(大譜)

시조가 같으면서도 본이 갈라져 본을 달리 쓰거나 성을 달리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모든 종파를 총망라하여 편찬한 족보를 말한다.

본관은 다르지만 시조가 같은 여러 종족이 함께 통합해서 만든 책이다.

③ 세보(世譜)

두 개 파 이상의 종파가 서로 합해서 편찬한 보첩

④ 파보(派譜)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한 계파의 혈연집단을 중심으로 수록하여 편찬한 보첩.

⑤ 가승보(家乘譜)

본인을 중심으로 편찬하되, 시조로부터 시작하여

자기의 직계 존속(尊屬; 자기 윗대)과 비속 (卑屬; 자기 아랫대)을 망라하여

이름자와 사적을 기록한 것으로 보첩 편찬의 기본이 되는 문헌.

⑥ 계보(系譜)

가계보, 또는 세계보라고도 하며,

가문의 혈통관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이름자만을 계통적으로 나타내는 도표.

하나의 씨족 전체가 수록되거나 어느 한 부분만 수록되기도 한다.

⑦ 가보(家譜)와 가첩(家牒)

편찬된 형태나 내용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집안에 소장되어 있는 모든 보첩.

⑧ 만성보(萬姓譜)

만성대동보(萬姓大同譜)라고도 하며,

모든 성씨의 족보에서 큰 줄기를 추려내어 집성(集成)한 책으로 족보의 사전(辭典)이라 할 만한 책.


 

 

 디지털 족보 국내 첫 도입


한경수씨 청주 하씨 중앙종친회 부회장… 한자투성이 쉽게 바꿔

 

청주 한씨는 지난해 3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자족보 시연회를 가져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다.
두껍고 한자 투성이의 접근하기 어려운 족보라는 일반인의 상식을 깨뜨린 것.
 
당시 이 행사를 주도한 이는 청주 한씨 중앙종친회 한경수 부회장이었다.
한 부회장은 81세의 고령임에도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전자족보를 채택,
청주 한씨는 물론 다른 문중에도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한 부회장은 특히 작년 8월 청주 한씨 열전과 과거급제자를 수록한 방목을 편찬하면서

문중 조상인 한방신(韓方信)이 과거시험관(동지공거)으로 포은 정몽주를 선발,

스승(座主)과 제자(文生) 관계를 유지했던 사실을 찾아내 문중은 물론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한 부회장은 "족보는 단순히 조상의 이름을 나열하거나 가문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조상들의 숭고한 뜻과 얼을 본받아 오늘의 나를 돌아보는 귀감"이라면서

"시대가 변해도 족보의 가치는 상존한다"고 말했다.

 
 
 

 

 

 현대 족보에서는 5급 이상 官職 기재


기업 근무 직위는 기재하지 않지만 상장사 임원직은 예외 두기도
뿌리찾기 트렌드로 새롭게 주목… '인터넷 족보' 시대도 열려

족보제작 업체 엔코리아 최용석 사장이 족보에 대한 접근성이 용이한 전자족보를 설명하고 있다. 

구시대의 유물로만 여겨졌던 족보가 요즘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국제적으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국내외적으로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려는 경향이 늘고 있고 시대의 흐름에 맞게 전자족보,

한글을 병기한 족보 등이 일반화하면서 젊은이들도 손쉽게 족보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앨범이나 인터넷상에 ‘개인 족보’를 만드는 추세가 증가하는 것도 ‘신족보문화’를 형성하는 배경이 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족보란 한 종족의 혈연관계를 부계(父系)를 중심으로 기록한 계보(系譜)를 말한다.

족보에는 종족의 문벌과 선조의 가장(家狀), 행적(行蹟) 등이 담겨 있어 씨족의 역사책이라 할 만하다.

 

족보는 원래 중국의 6조(六朝)시대에 왕실의 계통을 기록하면서 시작되었다.

 

개인이 족보를 갖게 된 것은 한(漢)나라 때 관직 등용을 위해

과거 응시생의 내력과 조상의 업적 등을 기록한 것이 시초이다.

 

특히 중국 북송(北宋)의 문장가인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 형제들이 만든 소씨족보는 그 후 모든 족보의 표본이 되었는데 한국의 초기 족보도 이를 모방하였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족보는 중국에서 탈피 독창적인 체계를 갖추었다. 성과 본관은 가문을 나타내지만 이름은 가문의 대수를 나타내는 항렬과 개인을 구별하는 자로 구성되어 있는 점이 그러하다.

 

성명은 개인 구별은 물론 가문의 계대(系代)까지 포함하고 있는데 이것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한국만의 독창적인 작명법이다.

 

내용은 시조로부터 차례로 한 세대에 한 칸씩 내려쓰며,

항렬이 같으면 같은 난에 쓴다.

여기에 명(名)ㆍ자(字)ㆍ호(號)ㆍ시호(諡號)를 쓰고,

생몰 연도와 간지ㆍ월일을 쓴다.

관직이라든가 호는 물론 과거에 합격한 사실 등 개인의 경력을 기록하고

배우자의 관(貫)과 성씨 및 부와 조부의 관명과 생몰 연월일도 기록한다.

이밖에 묘지 위치, 후계자 유무, 양자를 들인 것인지

아들을 양자로 보낸 것인지, 또는 적자와 서자, 아들과 사위를 구별하기도 한다

 

이는 미국 및 유럽의 족보가 왕실계통이나 일부 귀족의 것을 빼 놓고는

대개 자기 집안의 가계를 간략하게 기록한 가첩(家牒)에 지나지 않는 것과 구별되고

규모의 방대함이나 내용의 정밀함에서는 중국과 일본의 족보를 훨씬 뛰어넘는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고려 시대에 왕실이나 귀족들이 족속의 보첩을 제작한 기록이 있지만

체계적인 형태의 족보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기다.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1476년(성종 7)에 제작된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로

이후에 1565년(명종 20) ‘문화유씨 가정보(文化柳氏 嘉靖譜)’가 혈족 전부를 망라하여 간행되면서

이를 표본으로 하여 명문 세족에서 앞을 다투어 족보를 간행하였다.

그 결과 17세기 이후 여러 가문으로부터 족보가 쏟아져 나오게 되었으며

대부분의 족보가 이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조선 초기의 족보는 일반적으로 사위나 외손도 그 성을 기재했으며

아들ㆍ딸(딸은 사위 이름으로 기재)의 기재 순위는 출생 순위, 즉 연령 순으로 기재했다.

특히 친손과 외손을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기재했다.

반면에 조선 후기의 족보는 출생 순위와 관계없이 언제나 아들을 먼저 기재하는 '선남후녀'였다.

 

종래의 족보는 시조를 중심으로 고위관직에 오른 조상이 만든 파조(派祖),

또는 지역 입향조(入鄕祖, 흔히 中祖) 순으로 구성됐다.

족보 중에선 대동보(大同譜)가 가장 중시됐고, 파보(派譜), 가승보(家乘譜) 등이 만들어졌다.

 

오늘날은 과거와 관직의 개념이 달라

조선시대에는 종1품에서 종9품, 정1품에서 정9품의 관직을 모두 족보에 올렸지만

현대 족보는 공무원 5급을 기준으로 그 이상 직급을 기재하는 게 일반적이다.

따라서 군인은 영관급(소령) 이상, 국회의원, 사법ㆍ행정고시 합격자 등은 족보에 관직이 기재되지만

일반직 공무원은 빠진다.

공인회계사 등 자격증 소지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고 기업의 경우 기재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지만

예외적으로 상장기업의 임원을 기재하는 경우가 있다.

 

현대 사회에서 핵가족화, 개인화 추세가 가속화하면서 족보도 대동보의 비중이 줄어들고

파본, 가승보를 선호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

 

족보 전문출판사 ‘가승미디어’의 이병창 사장은 “종중에서는 종족의 단합을 위해 대동보를 중시하지만

종원들 중엔‘비효율적’이라는 이유로 파본이나 가승보만 갖추려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특히 가승보를 선호하는 추세가 두드러지고 있다고 한다.

 

재벌이나 경제적 이유가 있는 사람들 중엔 그들만의 가승보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

D그룹 K 전 회장이나 H그룹 J 전 회장의 경우 장기 보존을 위해 한지로 족보를 만들기도 했다.

 

인터넷의 발달과 개성을 중시하면서 파격적인 족보(특히 가승보)가 늘고 있는 것도 요즘 추세다.

즉 전통적인 형태가 아닌 앨범이나 인터넷상에 족보를 만들고

방식도 자식에서 부모-조부모로 나아가는 미국식 족보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

따라서 족보 전문업체에 족보 제작을 의뢰하는 대신 스스로 족보를 만들고

내용도 혈액형, 키, 몸무게 등 신변 사항부터 시시콜콜한 사항까지 올리는 게 특징이다.

 

최근 족보의 또 다른 경향은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평등하게 기록한다는 것이다.

특히 여성이 직업을 갖는 경우가 보편화하면서 여성의 직업이 기재되거나 결혼을 할 경우

조선 시대에는 출가외인으로 이름만 기재했으나 요즘은 생년월일까지 적는다.

 

최근 풍양 조씨와 강릉 김씨 일부처럼 족보를 성경처럼 제작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즉 족보에 가죽을 입히고 좀이 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금물을 입히는 것이다.

무엇보다 요즘 족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전자족보’다.

과거 활자판 족보가 비경제적인데다 젊은 층이 접근하기 어려워 전자족보화 경향은 점차 확산되고 있다.

 

전자족보는 가승미디어가 2001년 언양 김씨 족보(대동보)를 디지털화해 선보인 뒤 대세를 이루고 있다.

국내 족보 출판사의 산증인이기도 한 대전의 회상사를 비롯

대구의 대보사, 광주의 낭주인쇄소 등도 전자족보에 비중을 두고 있다.

그중에서 서울의 ㈜엔코리안은 가장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는 전자족보 전문출판사다.

엔코리안은 신개념 멀티미디어 전자족보를 제작할 수 있는 통합 전자족보 시스템을 개발,

국내 유일하게 국가인증을 받기도 했다.

 

낭주인쇄소 최영배 사장의 아들인 최용석 대표는

“독자적인 기술력으로 방대한 자료인 족보를 컴퓨터 상에서 관리가 용이한 데이터베이스로 제작해

한글 이름으로 개인족보 정보를 검색해 볼 수 있는 이름검색, 이름으로 촌수를 계산해주는 촌수 계산,

족보를 한눈에 보여주는 가계도 검색 등 누구든지 쉽게 자신의 족보를 찾아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족보유기코드시스템을 개발했다”면서

“베이징에 지사를 두고 있는데 기술력을 앞세워 중국 족보시장을 본격적으로 공략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국내 족보시장은 전자족보가 일반화하면서 새롭게 재편되고 있다.

과거 명성을 누렸던 회상사, 대보사, 낭주인쇄소 등이 기술 개발을 소홀히 해 뒤처지는 반면

가승미디어, 엔코리안 등이 새로운 강자로 등장하고 있다.

엔코리안은 2003년부터 시제품을 출시,

최근까지 40여 개 문중에 전자족보 약 15만 개를 납품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병창 사장은 “우리나라는 260여 성, 2,600여 개의 본관(本貫), 1만8,000여 파(派) 가 있는데

한 해 약 3% 남짓 계약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중이 족보를 제작하는데 들이는 금액은 대개 3억~5억원 정도라는 게 이 사장의 설명이다.

 

족보는 씨족의 역사를 넘어

하바드대 엔칭도서관에서 한국을 이해하는 최고의 자료(마이크로필름)로 평가받고 있으며

최근 전 세계 동포를 연결하는 네트워크로 활용되고 있다.

 

 

 

 족보가 부른 참화


도전, 하륜 서얼 드러날까 '연안 차씨 멸문'

족보에 정도전, 하륜 서얼 가록한 '연안 차씨' 멸문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면서 신흥 명문가가 생기는가 하면 멸문의 화를 입은 집안도 있다. 개성 왕씨를 비롯해 이 집안과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연안 차씨(延安 車氏)가 대표적이다.

 

연안 차씨 차원부는 고려 말 정몽주, 이색 등과 함께 명성을 떨친 성리학의 대가로 요동정벌을 떠나는 이성계가 찾아와 조언을 구하자 중국 정벌의 부당함을 언급해 위화도 회군의 명분을 주었고 조선이 창건된 뒤에는 태조의 공신 책봉을 거절하고 은둔한 인물이다.

 

차원부는 '왕자의 난'(1398년) 때 피살되고 가족은 물론 친척까지 주살되고 차원부가 은둔하면서 만든 연안 차씨 족보 판본까지 불살라지는 등 멸문의 화를 입는데 사가(史家)들은 이방원의 오판과 하륜(河崙)의 음모가 부른 참화라고 해석한다. 그런 배경에는 연안 차씨 족보도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도 있다.

 

연안 차씨 족보는 안동 권씨의 '성화보'와 문화 류씨의 '가정보'보다 앞선 우리나라 족보의 효시로

평가받는데 족보에는 차씨 문중과 혼맥을 형성한 다른 집안의 서얼까지 상세하게 기록돼 있었다.

 

족보에 따르면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鄭道傳), 조영규(趙英珪), 함부림(咸傅霖),

그리고 태종 이방원의 집권을 도운 하륜이 모두 서얼 출신이다.

 

정도전은 차 씨 집안의 사위인 우연(禹淵)의 첩이 낳은 딸의 아들이고,

조영규는 차운혁(車云革, 차원부의 조카)의 이복누이의 남편이고,

함부림은 차원부의 이복남동생의 사위이고,

하륜은 차씨 집안 사위인 강승유(姜承裕)의 첩이 낳은 딸의 아들이었다

 

연안 차씨 종친회 차기탁 부회장은

"우리 족보에 악감정을 품은 하륜 등이 왕자의 난을 빌미로 차원부 할아버지의 일족을 살해하고,

해주 신광사에 보관된 족보 판본까지 불살라버린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연안 차씨 족보에는 정도전, 하륜, 조영규, 함부림 등 4인이 원흉으로 기술돼 있다.

 

차원부의 죽음에 가장 분노한 사람은 태조 이성계였고

이방원 세력은 급히 차원부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려 했다.

세종과 문종을 거쳐 단종에 이르러서야 그 한 맺힌 사연을 기록한 '설원기(雪寃記)'를 펴내게 됐다.

  

   

 

 숨겨진 한국사 족보서 찾다 


이여송은 한국계… 유학사 연구에도 단서 제공
씨족의 병력도 드러나 유전병 예방에 도움도


조선조 1850년 무렵부터 1900년까지 전국적으로 사망 인구가 급증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이 기간에 전염병이 극심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전염병의 이동 경로를 보자.

 

외국인 선교사, 상인 등의 이동에 따라 외래병이 서울에서 창궐한 경우 위로는 황해도, 아래로는 충남까지 확산되는데 충북 대다수 지역은 빠져 있다.

그 후 전염병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다 호남으로 내려간 다음 북상해 평안도로 옮아가고 다시 내려와 경상도에 퍼진다.

이후 강원도로 북상한 전염병은 평안북도까지 올라갔다가 강원도로 내려와 머물다 북상하지만 함경북도 일부에서 멈춘다.

 

현대 의학이 등장하기 전인 조선 시대에 전염병의 발생과 이동 경로는 역학구조를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지만 좀처럼 기록을 찾기 어렵다.

 

그런데 한국만의 독창적인 족보(族譜)가 그러한 자료를 풍부하게 전해준다.

씨족의 족보에서 특정 기간에 부자, 부부 등 여러 사람이 동시에 사망하는 경우가 지역과 시기에 차이를 두고 나타났던 것이다.

 

족보 전문출판사 ‘가승미디어’의 이병창 사장은 “족보를 오랜 기간 다루다보니까 몇몇 씨족의 족보에서 갑자기 여러 사람이 동시에 사망하는 기간을 발견할 수 있는데 특히 1850년 무렵에서 1900년까지의 경우 평균 나이가 마흔 살을 넘기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기간에 전염병이 극심했다는 기록이 있다. 과거 본관이 거주지와 겹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염병의 분포와 확산 경로를 족보 연구를 통해 알아낼 수 있다는 게 이 사장의 주장이다.

 

족보 전문출판사 ‘엔코리안(www.n-korean.com)’가 올해 초 전자족보 형태로 제작한 신안 주씨(新安 朱氏) 대동보(大同譜: 가장 넓은 범위의 족보로 같은 시조 아래 각각 다른 계파와 본관을 갖고 있는 씨족을 함께 수록)에 따르면

 

수록 인원 23만313명 중 남자는 15만6,646명(68%)으로 여자 7만3,667명(32%)보다 월등히 많다.

 

문중 구성원의 출생률은 1~3월에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평균 9.35%), 4~5월이 가장 낮았다(평균 7.66%).

사망률은 1~3월이 가장 높았고(평균 9.25%), 6월이 6.78%로 가장 낮았다.

 

나주 임씨(羅州 林氏), 선산 김씨(善山 金氏), 삼척 심씨(三陟 沈氏),

이천 서씨 공도공파(利川 徐氏 恭度公波) 문중의 경우도

출생률과 사망률이 모두 1~3월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반면 장흥 임씨(長興 任氏) 문중은 출생률은 1월, 사망률은 10월이 각각 가장 높게 나타났으며

조양 임씨(兆陽林氏)는 출생률이 1월에, 사망률은 5월이 가장 높았다.

 

엔코리안 최용석 대표는 “족보에는 문중에 따라 출생과 사망이 특정 기간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임신 시기에 따라 아들과 딸의 출생률에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이 통계학적 의미를 가질 경우 의학적으로 접근하면

문중마다의 특이 질병력(歷)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유전적인 성격을 띠는 질병을 예방하거나 사고를 줄일 수 있고,

나아가 임신 시기를 조절하면 아들ㆍ딸의 출산 확률도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또 족보를 살펴보면 청주 한씨(淸州 韓氏)는 평균적으로 키가 크고

전주 이씨(全州 李氏)는 머리와 목소리가 크며

문중에 따라 눈동자의 색깔이 각각 다르고 치아의 테두리도 차이가 있다는 게 족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병창 사장은“족보에는 사람의 DNA를 암시하는 정보도 담겨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면서

“앞으로 족보를 통해 연구하고 활용할 분야가 무궁무진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족보는 씨족의 특성을 가늠케 하는 요소도 있는데,

청주 한씨나 신천 강씨(信川 康氏)가 그러한 예를 보여준다.

 

청주 한씨는 역사의 격변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가 청주 한씨이며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비(妃) 신의왕후 역시 청주 한씨다.

왕건 어머니의 친척인 시랑(侍郞) 한헌옹(韓憲邕)은

신라왕 김부(金傅ㆍ경순왕)의 시랑인 김봉휴를 만나 고려의 통일에 공을 세웠고

조선의 한 시대를 풍미한 덕종 비(소혜황후) 인수대비, 세조의 계유정난을 도운 한명회 등도

청주 한씨 사람이다.

 

신천 강씨는 족보상 유대민족과 같은 ‘오뚝이 문중’에 비유된다.

역사상 수많은 씨족이 멸문의 화를 당하면 아예 사라지거나 왜소해지는 경우가 많은데

신천 강씨는 그럴 때마다 다시 일어서는 강인함을 보여주었다.

가장 큰 핍박은

태종 이방원이 일으킨 ‘왕자의 난’때 태조의 후비인 신덕황후 강씨의 두 왕자를 비롯한 일가의 몰락이다.

이후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강순(康純)이 영의정까지 올랐지만

유자광의 모함으로 남이 장군과 함께 처형됐으며 연산군 때는 무오사화의 변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신천 강씨는 깨지지 않고 문중을 부흥시켰다.

우리 시대엔 강금실 전 법무장관이 신천 강씨다.

 

족보는 씨족의 역사책일 뿐만 아니라 정사(正史)의 잘못된 기록을 바로잡고

미처 발견하지 못하거나 지나쳐버린 역사의 틈을 잇는 사료로서의 기능을 한다.

그래서 족보를 ‘이면(裏面)의 역사서’라고도 부른다.

 

앞서 태조 왕건의 어머니가 청주 한씨라는 사실과 한헌옹의 역할은 정사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족보를 통해 밝혀진 사실들이다.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인의 후손으로 알려져 왔는데

이를 사실로 밝혀낸 것도 족보다.

이여송의 아버지는 이성량(李成梁, 1526~1615)으로 14세기 말 중국으로 건너간 이영(李英)의 후손이다.

이영의 아버지는 이승경(李承慶)으로 성주 이씨 중시조인 이장경(李長庚)의 손자다.

성주 이씨 대동보는 이여송의 7대조인 이승경의 아버지를 참지공파 이천년(李千年)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중국 청나라 ‘사고전서(四庫全書) 238장 명사(明史)에는

승경이 이조년의 아들로 나와 있다(李承慶兆年之子). 이조년은 이천년의 동생이다.

 

그럼에도 족보상 이여송이 성주 이씨 후손이란 사실에는 차이가 없다.

이 때문에 중국 내에 살고 있는 이여송의 후손들은

성주이씨 종친회와 교류를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이여송의 13대손인 리쩌멘(李澤綿ㆍ46)이 5월 12일 경북 안동에서 열리는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ㆍ1542~1607) 선생 400주기 추모제 행사에 참가하는 것은

족보가 전 세계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동포는 물론, 씨족적 연대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네트워킹 및 교류의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셈이다.

 

족보가 역사의 사료 차원을 넘어 기존 사학계의 통설에 정면 도전하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성리학이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본격 수용되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과정을 족보를 통해 보면

과거를 주관하는 지공거(知貢擧ㆍ시험관)ㆍ동지공거(同知貢擧ㆍ부시험관)와

과거 급제자의 ‘좌주(座主)-문생(文生)’관계와 혈연적 연결이

성리학 토착화나 사회 변화에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권단(權妊, 1228-1311)은 선구자적 인물로 그가 지공거일 때

권한공, 김원상, 최성지, 채홍철, 백이정 등 엘리트들을 뽑아 좌주-문생 관계를 형성했다.

그러나 심양왕 복위 사건으로 와해되면서 이후 이암(297~364)이 지공거가 돼

문생을 선발하고 그의 제자인 한방신은 동지공거로 포은 정몽주 등을 선발하면서

좌주-문생 관계는 계속 이어진다.

이암의 주체적 성리학이 정몽주에게 이어진 것은 그러한 특수관계 때문이다.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중국 성리학에 충실하였는데

스승인 권보의 사위가 돼 권력의 중심에 있으면서

오랫동안 지공거로 수많은 과거 급제자와 좌주-문생 관계를 형성하면서

한국 유학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한국 사학계 1세대 대표 학자인 고 이기백 교수(2004년 작고)는

생전에 신라 말기의 사병 문제를 연구하면서 흥양 이씨(興陽 李氏) 족보를 역사적 자료로 활용했고

진주 소씨(晋州 蘇氏) 족보를 통해 신라시대 최고관직인 상대등(上大等)이던 알천(閼川)을

새롭게 인식했다며 족보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었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35년 넘게 한국학을 개척ㆍ발전시킨 에드워드 와그너 박사(2001년 작고)가

평생 한국학을 연구하면서 가장 주목한 것은 한국의 족보였다.

그는 족보에 나타난 문과 급제자를 통해 우수 혈통에 관한 연구도 하였는데

족보에서 한국의 가능성을 확인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옛 정보의 보고(寶庫)인 족보에서 보물을 찾아 다듬는 일은 이제 우리 시대의 몫이다.
 

 

 

 

 

 90여 개 성씨 DB로 만들어… "클릭 한번에 조상들 자취 한 눈에"


족보 전문 출판업체 '가승미디어' 이병창 사장
'한민족 네트워크' 구축이 최대 목표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온 이여송의 아버지가 조선인 이성량입니다. 그는 청 태조 누르하치를 종으로 삼았지만 아들처럼 대해주었어요.”

“족보를 보면 문중마다 체질ㆍ체형이 다르고 질병에 따른 사인(死因)도 다른 것 같아요. 예방의학이 가능한 거지요.”

 

족보 전문출판사 가승미디어 이병창(53) 사장의 족보 예찬론은 끝이 없다. 분야도 역사에서 문화, 의학까지 광범위하다.

 

이 사장은 “10년 넘게 족보 출판업을 해오면서

족보에 우리의 얼이 배어 있고 다양한 정보가 내재돼

한국의 미래를 설정하거나 산업면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이 사장은 족보의 무궁무진한 가치를 알고 이를 젊은 세대까지 확산시키기 위해

오래 전부터 족보의 디지털화에 앞장섰다.

1995년 족보 관리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각 문중의 족보를 컴퓨터에 입력해 데이터베이스(DB)화한 것.

족보에 새겨져 있는 개개인의 정보를 해독해 한글 병기(倂記)를 하고,

없는 한자는 폰트를 만들어 컴퓨터 화면에 재생해냈다.

 

그렇게 풀이된 족보의 정보는

이름, 자(字)와 호(號), 세대, 부모 이름, 배우자 이름과 배우자 부모 이름,

탄생 · 사망 연월일, 업적 · 관직, 비문(碑文), 묘의 위치 등의 항목으로 분류돼

그가 만든 족보 관리 프로그램을 입력하면

족보의 내용을 한자와 한글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손쉽게 검색할 수 있다.

 

이 사장은 우리나라 260여 성(姓), 2,600여 개의 본관(本貫), 1만8,000여 파(派)

시조(始祖)부터 평균 30세(世)까지의 정보를 입력해놓았다.

입력된 사람의 수도 2,400만 명에 이른다.

이 중 80여 개 본관은 시조부터 생존해 있는 현 시대 인물까지 전체 족보가 입력돼 있다.

 

그는 “10년간 작업을 했지만 손을 댄 2,600여 개 본관 중 90개 정도밖에 입력을 못했다”며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가승미디어는 2001년 언양 김씨 족보(대동보)를 디지털화해 국내 처음으로 선보였다.

이듬해는 나주 김씨 대동보를 CD와 함께 출간했고

청주 한씨 문중은 2004년 3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자족보 시연회를 갖기도 했다.

 

가승미디어의 족보 검색 프로그램에 의하면 몇 대부터 몇 대까지를 지정한 부분 족보는 물론,

방계(傍系)는 생략한 채 직계(直系) 선조만을 뽑아 이른바 가승(家乘)을 만들 수 있고,

특정 선조에 대한 인물정보만 모아서 편집할 수도 있다.

DB화된 족보에서는 수시로 현존 인물에 관한 정보를 수정ㆍ입력할 수 있는 것도 강점이다.

 

이 사장은 90여 개 문중의 전자족보를 제작했거나 이행 중에 있다.

그의 최대 목표이자 바람은 전 세계 혈연망을 통한 ‘한민족 네트워크’구축이다.

누구든 인터넷상에서 자신의 뿌리와 가계도, 선조들의 면면을 쉽게 찾아보고

새로 태어나는 세대는 족보 DB에 자신의 신상 명세를 입력해

거대한 한민족의 네트워크를 구현하겠다는 야심이다.

 

“자기 문화를 이해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알아야 타 문화를 받아들이고 세계인도 될 수 있지요.”

이 사장은 최근 조승희 씨 총격사건을 접하고

더욱 ‘한민족 네트워크’ 사업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다고 한다.

“족보는 한민족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역사 그 자체이며

오늘에 반드시 되살려야 할 보고(寶庫)입니다.”그의 족보 예찬론은 끝이 없었다.

 


 

 족보에 얽힌 문중 이야기


남명 조식 종가, 絶孫으로 대 끊겨
안동 임청각 이명 종가는 면면히 이어지며 옛 명성 그대로


일부 문중은 신분 상승에 이용하기 위해 족보 조작하기도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척화(斥和)를 주장하며

항쟁했던 두 충신이 있었다.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선생이 그들이다.

이들 종가는 모두 후대에 이르러 종손이 나라의 죄를 입어

종통(宗統) 계승에 일대 위기를 맞았다.

 

청음 종가는 현재 13대를 내려와 있는데 5번의 양자가 있었다.

청음의 7대 종손에 김건순(金建淳)이라는 이가 있었다.

이 사람은 6대 종손이 세상을 뜬 뒤 입후되었다.

이를 ‘계후사손(繼後嗣孫)’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 사람이 사학(邪學, 天主學)의 죄를 입었다.

이 사건은 문중 뿐 아니라 국가적인 문제로 인식되어

결국 파양(罷養)에 이르렀다. 순조 1년(신유, 1801)의 일이었다.

 

동계 정온 선생의 종가는 15대로 내려와 있는데

그간 두 번의 양자가 있었다.

동계 종가에는 청음 종가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큰 사건이 있었다. 영조 대에 영남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반역 사건이다.

중심에 이인좌와 동계 정온의 현손인 정희량이 있었다.

정희량은 둘째아들이었기 때문에 종손은 아니었으나

종손의 아들로 종가 사람이었다. 결국 종가에서 역적이 난 셈이다.

 

이 사건을 ‘이인좌의 난’ 또는 영조 무신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무신난(戊申難)’이라고 부르는데,

정희량의 고향 지방에서는 ‘희량의 난’이라고도 한다.

당연히 역적의 집안 재산이 적몰되었다.  

문제는 충신의 상징적인 집안이었던 동계 종가가 불천위 제사를 모시지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종가 유지 자체에 큰 위기를 맞았다.  

영조 14년에 이르러서야 정승 송인명 등에 의해

역적은 역적이고 충신가의 종통을 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논의가 일어 마침내 관철되었다.

 

 

무신난 당시 죄를 입은 또 한 사람의 봉사손이 있다.

문묘에까지 배향된 정암 조광조의 봉사손 조문보(趙文普)였다.

조문보는 정암 조광조의 종손이었고, 그가 죄를 입고 죽었기에 대가 끊기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당시 조정에서는 “문묘에 종사한 선현의 제사가 끊어지는 것은 합당하지 않으니

의당 그 후손을 세워야 합니다”라 하였다.

 

가장 가슴 아픈 종가의 절손(絶孫)은 남명 조식 선생의 경우다.

남명 조식 선생은 퇴계 이황 선생과 함께 우리나라 영남 성리학의 양대 선생으로 유명하다.

퇴계가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학문의 꽃을 피웠다면, 남명은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의리의 빛을 드리웠다.

퇴계 종가는 몇 번의 양자가 있었지만 종통이 면면히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에 비해 동갑인 남명의 경우는 순조롭지 못했다.

 

수제자인 내암 정인홍이 북인정권의 영수(領袖)로 죄를 입은 것도 남명에게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남명 종가는 11대에 이르러 연 3대의 입후가 있었지만 종통이 순조롭게 계승되지 못해

현재는 종손이 없는 상태라 한다. 종가의 명운이 단절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를 절손(絶孫) 이라고 부른다.

 

조선 시대에는 이러한 상황을 만나면 국가적인 관심을 가지고 이를 논의해

봉사손을 세워 향화(香火)를 잇게 했다.

그나마 다행한 점은 남명의 불천위 제사는 그때마다 헌관을 세워 현재까지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가에서 면면히 종통을 계승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우리나라 역대 왕조의 왕통잇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대를 계승함은 물론 반가로서의 면모도 유지한 명문가가 있다.

 

안동의 고성 이씨 임청각 종가다. 21대 종손 이창수씨가 유일한 양자다.

그것도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한 때문이다.

고성 이씨 임청각 족보를 보자.

시조 이황(李璜)으로부터 씨족의 역사가 시작되어 8대손에 행촌 이암(1279-1364)이 났는데,

그는 고려 시대에 문하시중을 지냈고 당시를 대표하는 명필로 이름났다.

 

10대손에 이르러 이원(李原, 1368-1429)은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좌의정을 지냈을 뿐 아니라 청백리로도 명성이 높았다.

그는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처남이자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 1388-1443)의 장인이기도 하다.

그의 여섯째아들에 이증(李增)이란 이가 영산현감을 지내다 안동으로 낙향했다.

안동의 고성 이씨 입향조인 이증은 당시 지역을 대표하던 12인과 함께 우향계를 조직해

향촌사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증의 셋째아들이 임청각 이명이다.

이명의 여섯째아들인 반구옹 이굉은 부친인 임청각의 유지를 받들어 집을 맡았다.

 

이는 임청각 재세시 ‘여섯째아들에게 재산을 의탁한다’는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다.

여섯째집이 잘된다는 느낌이 있을 정도로 임청각의 가세가 좋았다.

다시 대를 이어 17대손인 석주 이상룡에 이르러 3형제였다가 그 이하 양대의 외동을 거쳐

20대에 이르러 다시 6형제의 번성함을 이루었다.

석주 이상룡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독립지사다.

 

   

조상찾기와 협잡

   

족보를 펴면 시조가 나오고 이름난 조상 즉 현조(顯祖)가 있다.

그런데 몇몇 명문가에서는 상계에 실전(失傳)이 있다. 휘(諱)자를 알 수 있는 정도면 그나마 다행이다.

휘자조차 모르는 경우가 있다.

이런 때 학식이 있는 후손들은 부단하게 자신의 뿌리에 대한 연구와 확인 작업이 이루어진다.

그 예가 대구 서씨(大丘 徐氏)와 나주 정씨(羅州 丁氏)의 상계(上系)찾기다.

 

대구 서씨는 1세 소윤공(少尹公)으로부터 7세 전객공(典客公)에 이르는 5세가 실전이다.

명문가인 대구 서씨 가에서는 선대의 휘자조차 소명하지 못해

국내외 문적과 금석문을 뒤지며 소목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 과정에 외부에서 무수한 조작 자료를 들이댔다. 그중의 하나가 금천사건(金川事件)이다.

 

“황해도 금천군 강북면에 서씨 묘가 있는데 주민들이 서거정 선분(先墳)이라고 하였다.

이에 숙종 22년(1696) 개성유수 서종태가 조사하였으나 소득이 없었다.

다시 영조 7년(1731) 개성유수 서명균과 황해도감사 서종옥에게 주민들이 지석(誌石)을 얻어 바쳤는데

전·후면에는 인도 글자와 같아 알 수 없었고 아래에 새긴 글자는 여덟 줄인데 모두 61글자였다.

서씨의 묘소는 틀림이 없으나 연대가 일치하지 않았다.”

 

명문가에 실전한 사실을 안 이들이 거짓으로 비석이나 지석을 날조하여 증거물로 제시해

종중을 현혹하고 대가를 요구하며 상을 받고자 한 것이다.

 

나주 정씨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나주 정씨에게는 아직도 미제로 남아 있는 압해도 고분의 피장자(被葬者) 정덕성(丁德盛) 설(說)과

상계(上系) 세계설(世系說) 논의가 분분하다.

 

쟁점은 진주시 평거동 44-2의 석갑산(石岬山) 고분군 피장자의 문제다.

다산 정약용은 증조부로부터 자신에까지 문헌 연구와 현지 답사 등을 벌인 결과,

이 고분군이 범정씨동조동근설(凡丁氏同祖同根說)의 신봉자인 낭혜라는 중의 날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고분은 1964년에 고고학자 고 김원룡 교수에 의해 재차 학계에 알려졌고

1968년 12월 국가사적 제164호로 지정되었다.

문제는 나주 정씨인 다산이 석갑산 정씨 고분은 명문의 자획으로 볼 때 날조라는 글을 남기고 있는 데도

지금까지 학계의 원로 교수들은 매듭을 짓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산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다. 금석고증학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조상들에 대해 사실적으로 기록하는 가풍에 긍지를 가지면서

조상들의 기록을 중시하라고 자식들에게 말했다.

또한 국사나 야사, 다른 사람들의 문집에서 자신의 조상에 대한 문제가 나오면 그것을 기록했다가

책으로 만들어 가승(家乘: 집안의 역사)의 누락된 부분을 보충해 주기를 당부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무징(無徵)이면 불신(不信)’이라, 즉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는다’는

학문 태도를 가졌고 이를 자신의 조상 상계를 밝히는데 적용했다.

 

우리의 족보에는 신분 상승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줄 이름난 조상에 대한 조작, 가공 및

각종 투탁(投託)이 시도된 측면이 없지 않다.

과장과 분식을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한 잘못된 행태는 오늘날의 족보 편찬에도 예외는 아니다.

다산은 자신의 조상 문제에까지 공정함을 잃지 않았다. 다산의 정신이 지금도 필요한 이유다.

- 2007년 04/30, 한국, 박종진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