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척화(斥和)를 주장하며
항쟁했던 두 충신이 있었다.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선생이 그들이다.
이들 종가는 모두 후대에 이르러 종손이 나라의 죄를 입어
종통(宗統) 계승에 일대 위기를 맞았다.
청음 종가는 현재 13대를 내려와 있는데 5번의 양자가 있었다.
청음의 7대 종손에 김건순(金建淳)이라는 이가 있었다.
이 사람은 6대 종손이 세상을 뜬 뒤 입후되었다.
이를 ‘계후사손(繼後嗣孫)’이라고 한다.
문제는 이 사람이 사학(邪學, 天主學)의 죄를 입었다.
이 사건은 문중 뿐 아니라 국가적인 문제로 인식되어
결국 파양(罷養)에 이르렀다. 순조 1년(신유, 1801)의 일이었다.
동계 정온 선생의 종가는 15대로 내려와 있는데
그간 두 번의 양자가 있었다.
동계 종가에는 청음 종가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큰 사건이 있었다. 영조 대에 영남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반역 사건이다.
중심에 이인좌와 동계 정온의 현손인 정희량이 있었다.
정희량은 둘째아들이었기 때문에 종손은 아니었으나
종손의 아들로 종가 사람이었다. 결국 종가에서 역적이 난 셈이다.
이 사건을 ‘이인좌의 난’ 또는 영조 무신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무신난(戊申難)’이라고 부르는데,
정희량의 고향 지방에서는 ‘희량의 난’이라고도 한다.
당연히 역적의 집안 재산이 적몰되었다.
문제는 충신의 상징적인 집안이었던 동계 종가가 불천위 제사를 모시지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종가 유지 자체에 큰 위기를 맞았다.
영조 14년에 이르러서야 정승 송인명 등에 의해
역적은 역적이고 충신가의 종통을 끊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논의가 일어 마침내 관철되었다.
무신난 당시 죄를 입은 또 한 사람의 봉사손이 있다.
문묘에까지 배향된 정암 조광조의 봉사손 조문보(趙文普)였다.
조문보는 정암 조광조의 종손이었고, 그가 죄를 입고 죽었기에 대가 끊기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당시 조정에서는 “문묘에 종사한 선현의 제사가 끊어지는 것은 합당하지 않으니
의당 그 후손을 세워야 합니다”라 하였다.
가장 가슴 아픈 종가의 절손(絶孫)은 남명 조식 선생의 경우다.
남명 조식 선생은 퇴계 이황 선생과 함께 우리나라 영남 성리학의 양대 선생으로 유명하다.
퇴계가 경상북도를 중심으로 학문의 꽃을 피웠다면, 남명은 경상남도를 중심으로 의리의 빛을 드리웠다.
퇴계 종가는 몇 번의 양자가 있었지만 종통이 면면히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에 비해 동갑인 남명의 경우는 순조롭지 못했다.
수제자인 내암 정인홍이 북인정권의 영수(領袖)로 죄를 입은 것도 남명에게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남명 종가는 11대에 이르러 연 3대의 입후가 있었지만 종통이 순조롭게 계승되지 못해
현재는 종손이 없는 상태라 한다. 종가의 명운이 단절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를 절손(絶孫) 이라고 부른다.
조선 시대에는 이러한 상황을 만나면 국가적인 관심을 가지고 이를 논의해
봉사손을 세워 향화(香火)를 잇게 했다.
그나마 다행한 점은 남명의 불천위 제사는 그때마다 헌관을 세워 현재까지 지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가에서 면면히 종통을 계승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우리나라 역대 왕조의 왕통잇기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런데 대를 계승함은 물론 반가로서의 면모도 유지한 명문가가 있다.
안동의 고성 이씨 임청각 종가다. 21대 종손 이창수씨가 유일한 양자다.
그것도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한 때문이다.
고성 이씨 임청각 족보를 보자.
시조 이황(李璜)으로부터 씨족의 역사가 시작되어 8대손에 행촌 이암(1279-1364)이 났는데,
그는 고려 시대에 문하시중을 지냈고 당시를 대표하는 명필로 이름났다.
10대손에 이르러 이원(李原, 1368-1429)은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졌고
좌의정을 지냈을 뿐 아니라 청백리로도 명성이 높았다.
그는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처남이자 태재(泰齋) 유방선(柳方善, 1388-1443)의 장인이기도 하다.
그의 여섯째아들에 이증(李增)이란 이가 영산현감을 지내다 안동으로 낙향했다.
안동의 고성 이씨 입향조인 이증은 당시 지역을 대표하던 12인과 함께 우향계를 조직해
향촌사회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이증의 셋째아들이 임청각 이명이다.
이명의 여섯째아들인 반구옹 이굉은 부친인 임청각의 유지를 받들어 집을 맡았다.
이는 임청각 재세시 ‘여섯째아들에게 재산을 의탁한다’는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다.
여섯째집이 잘된다는 느낌이 있을 정도로 임청각의 가세가 좋았다.
다시 대를 이어 17대손인 석주 이상룡에 이르러 3형제였다가 그 이하 양대의 외동을 거쳐
20대에 이르러 다시 6형제의 번성함을 이루었다.
석주 이상룡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독립지사다.
조상찾기와 협잡
족보를 펴면 시조가 나오고 이름난 조상 즉 현조(顯祖)가 있다.
그런데 몇몇 명문가에서는 상계에 실전(失傳)이 있다. 휘(諱)자를 알 수 있는 정도면 그나마 다행이다.
휘자조차 모르는 경우가 있다.
이런 때 학식이 있는 후손들은 부단하게 자신의 뿌리에 대한 연구와 확인 작업이 이루어진다.
그 예가 대구 서씨(大丘 徐氏)와 나주 정씨(羅州 丁氏)의 상계(上系)찾기다.
대구 서씨는 1세 소윤공(少尹公)으로부터 7세 전객공(典客公)에 이르는 5세가 실전이다.
명문가인 대구 서씨 가에서는 선대의 휘자조차 소명하지 못해
국내외 문적과 금석문을 뒤지며 소목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 과정에 외부에서 무수한 조작 자료를 들이댔다. 그중의 하나가 금천사건(金川事件)이다.
“황해도 금천군 강북면에 서씨 묘가 있는데 주민들이 서거정 선분(先墳)이라고 하였다.
이에 숙종 22년(1696) 개성유수 서종태가 조사하였으나 소득이 없었다.
다시 영조 7년(1731) 개성유수 서명균과 황해도감사 서종옥에게 주민들이 지석(誌石)을 얻어 바쳤는데
전·후면에는 인도 글자와 같아 알 수 없었고 아래에 새긴 글자는 여덟 줄인데 모두 61글자였다.
서씨의 묘소는 틀림이 없으나 연대가 일치하지 않았다.”
명문가에 실전한 사실을 안 이들이 거짓으로 비석이나 지석을 날조하여 증거물로 제시해
종중을 현혹하고 대가를 요구하며 상을 받고자 한 것이다.
나주 정씨의 경우도 이와 유사하다.
나주 정씨에게는 아직도 미제로 남아 있는 압해도 고분의 피장자(被葬者) 정덕성(丁德盛) 설(說)과
상계(上系) 세계설(世系說) 논의가 분분하다.
쟁점은 진주시 평거동 44-2의 석갑산(石岬山) 고분군 피장자의 문제다.
다산 정약용은 증조부로부터 자신에까지 문헌 연구와 현지 답사 등을 벌인 결과,
이 고분군이 범정씨동조동근설(凡丁氏同祖同根說)의 신봉자인 낭혜라는 중의 날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고분은 1964년에 고고학자 고 김원룡 교수에 의해 재차 학계에 알려졌고
1968년 12월 국가사적 제164호로 지정되었다.
문제는 나주 정씨인 다산이 석갑산 정씨 고분은 명문의 자획으로 볼 때 날조라는 글을 남기고 있는 데도
지금까지 학계의 원로 교수들은 매듭을 짓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산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실학자다. 금석고증학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조상들에 대해 사실적으로 기록하는 가풍에 긍지를 가지면서
조상들의 기록을 중시하라고 자식들에게 말했다.
또한 국사나 야사, 다른 사람들의 문집에서 자신의 조상에 대한 문제가 나오면 그것을 기록했다가
책으로 만들어 가승(家乘: 집안의 역사)의 누락된 부분을 보충해 주기를 당부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무징(無徵)이면 불신(不信)’이라, 즉 ‘확실한 증거가 없으면 믿지 않는다’는
학문 태도를 가졌고 이를 자신의 조상 상계를 밝히는데 적용했다.
우리의 족보에는 신분 상승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줄 이름난 조상에 대한 조작, 가공 및
각종 투탁(投託)이 시도된 측면이 없지 않다.
과장과 분식을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한 잘못된 행태는 오늘날의 족보 편찬에도 예외는 아니다.
다산은 자신의 조상 문제에까지 공정함을 잃지 않았다. 다산의 정신이 지금도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