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문화유산에 숨겨진 과학의 비밀] 1. 우리 문화유산, 그 빛나는 과학

Gijuzzang Dream 2008. 1. 11. 19:01

 

 


 

[문화유산에 숨겨진 과학의 비밀 ①]

 

한국 문화유산, 전통과학의 새로운 조명

 

 

글 : 전상운(문화재위원, 전 성신여자대학교 총장)

  
 
우리 문화유산, 그 빛나는 과학


 


우리나라의 고려청자는 천하에 유명한 것이고,

이 충무공의 거북선도 철갑선 가운데는 천하에서 가장 먼저 만든 것이다.

교서관(校書館)의 금속활자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낸 것이다.

만약 우리나라 사람들이 깊이 연구하고 또 연구하여 편리한 방법을 경영하였더라면,

이 시대에 이르러 천만 가지 사물에 관한 세계 만국의 명예가 우리나라로 돌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후배들이 앞 사람들의 옛 제도를 윤색치 못하였다.

(유길준, 『서유견문』 중에서)

유길준의 『서유견문』을 읽고 필자는 무척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홍이섭의 『조선과학사』는

내 학문의 나침반을 우리나라를 향해 바로 잡아주는 계기가 되었다.

젊은 애국심과 민족적 자각과 자존심을 심어주고, 뜨거운 정열을 내 가슴에서 불타게 했던 것이다.

 

나는 곧바로 우리 전통과학의 과학적 창조성을,

과학사로서 학문적으로 논하는 글을 쓰자고 마음먹었다.
1960년대 초, 필자는 세 편의 논문을 썼다.

그 중 하나는 미국 예일대 과학사학과 주임교수였던 프라이스의 요청으로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혼천시계(渾天時計)를 조사, 고증하는 내용이었다.

프라이스는 중국 과학사의 세계적 대가인 조세프 니덤과 공동연구의 일환으로

조선시대 천문시계를 연구·고증하길 원했다.

이런 연유로 일본의 과학사학자를 통해 의뢰를 받은 나는 몇 달 동안,

그야말로 침식을 잊은 노력 끝에 혼천시계를 연구하게 되었다.

 

 

이 논문은 나중에 니덤이 존 메이저 등과 공저로 펴낸 『조선왕조 서운관의 역사』에

혼천시계가 한 챕터로 크게 소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도 우리 나라에서는 이런 논문을 학술지에 실어주겠다는 데가 없었다.

결국 일본 과학사학회지 『과학사 연구』에 논문을 싣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한국 과학사’는 나를 묘한 흥분 속에 빠뜨리며,

그 매력에 푹 빠지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학문 연구가 이렇게 재밌고 즐거울 수가…….’


 

우리의 문화유산 속에서 과학이 태동하다.


문화민족으로서의 한국인은 과학과 기술의 역사에 있어서 창조적 전통을 이룩했다.

한국 과학의 역사는 중국의 거대한 전통과학의 도도한 흐름에서 볼 때,

실질적으로 중국 과학사의 한 지류라고 할 수 있고, 또 그 변형이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의 과학과 기술은 거의 모든 경우, 한국인에게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국인은 한국인의 과학기술을 전개했고,

한국의 자연, 기후와 풍토에 어울리는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중국의 선진적인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언제나 진취적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한국인에게 편리하고 그 자연에 조화되게 변형된 것이다.

한국은 50만 년 전에 구석기 문화가 있었으며,

구석기인이 쓰던 도구 중에는 동부 아시아에서는 거의 발견된 일이 없는 것이 있다.

또 기원전 6천 년경부터는 신석기시대의 문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한국의 신석기인은 중국과는 다른 북방계통의 인종이다.

이들 신석기인의 혈통은, 구석기인과는 달리 끊이지 않고 이어져서

한국민족의 형성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오랜 역사적인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

서로 융합되고 또 청동기시대의 새 요소들과 결합되어 한국민족을 형성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창조성이 빛을 발한 청동기 미술의 과학기술

 

국보 제161호,청동신수경(靑銅神獸鏡 ),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기원전 1천 년 전부터 한반도에 있었던 청동기 문화는 중국의 과학문명과는 다른 북방계 문화의 영향에 의하여 발전한 것이었고, 비교적 기술 수준이 높았다.

 

그러한 토착 기술의 전통 위에 중국의 과학과 기술이 들어왔다.

 

그래서 한국인은 중국의 그것을 언제나 한국적인 것으로 변용하고 개량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더욱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려고 시도했다.

대표적인 청동기로는 청동검과 청동거울을 들 수 있다.

비파모양 청동검과 한국형 청동검, 그리고 2개의 꼭지가 달린 굵은 줄무늬 청동거울과

가는 줄무늬 청동거울은 한국의 독특한 청동기이다.

이 독특한 형식의 청동검과 청동거울은 청동기시대 지배자들의 권력의 상징물이거나

종교적인 의식에 쓰는 의기(儀器)였을 것이다.

이것들은 청동방울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서 신기(神器)로서 종교적 상징물이 되었다.

이 청동기들은 디자인이 매우 독특하고 주조 기술이 뛰어나서

한국의 청동기 기술이 높은 수준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기원전 5∼4세기의 가는 줄무늬 청동거울은

그 기하학적 디자인과 정교한 주조 기술의 우수함에서 놀라운 솜씨를 발휘한 유물로 주목된다.

직경 21cm의 이 청동거울에는 0.3mm 간격의 가는 평행선이 1만3천 개 그려져 있는데,

그 선들은 수많은 동심원과 그 원들을 등분하여 생긴 직사각형과 정사각형,

그리고 삼각형들이 정확하게 제도되어 있다.

여기서 컴퍼스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이와 비슷한 가는 줄무늬 청동거울은 한국에는 여러 개가 남아 있지만,

일본을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는 발견된 일이 없다.

  

2400년 전 청동거울 ‘신비한 비밀’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의 ‘초정밀 문양’ 제작 비법 실마리 나왔다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지금으로부터 2400년 전 한반도에 최첨단 나노 기술이 존재했다면 믿을 수 있을까.

기원전 4세기 무렵 청동기 시대에 만든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多紐細汶鏡)은

이 시기 한반도에 동아시아 최고 수준의 정밀 기술이 존재했음을 웅변하는 유물이다.

다뉴세문경 제작 방법의 비밀을 풀기 위해 지금껏 수차례 복원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을 정도다.

다뉴세문경은 청동기 후기에서 초기 철기 시대에 유행한 청동 거울이다.

다뉴(多紐)란 뉴(끈으로 묶을 수 있는 고리)가 여러 개 달려 있다는 뜻으로,

거울 뒷면에 달려 있는 고리 때문에 붙은 명칭이다.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에는 두 개의 고리가 달려 있는데,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이 고리에 끈을 걸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거울 뒷면에는 직선과 원으로 이루어진 기하학적 문양을 새겼다.

세문(細汶)은 이 문양이 정밀하다는 뜻에서 붙은 것으로,

무늬가 굵고 거친 거울은 따로 다뉴조문경(多紐粗汶境)이라고 부른다.

다뉴조문경은 청동기 전기에 많이 사용되었다.

지름 21㎝ 공간에 수많은 선과 원 새겨

 
다뉴세문경은 중국 동북 지방과 러시아 연해주를 비롯하여 한반도 전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일본에서도 같은 종류의 청동 거울이 발견된다.

숭실대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숭실대 국보경)은

1960년대 충남 지역에서 발견된 것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100여 점의 다뉴세문경 중

가장 크고 정교하게 만든 것이다. 숭실대 국보경은 한때 출토지가 강원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고(故) 한병삼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의 말을 빌려

국보경은 원래 논산훈련소에서 참호를 파던 군인들이 발견했는데

중간상인에게 넘어가는 과정에서 강원도에서 발견한 것으로 둔갑했다고 전했다.

국보 다뉴세문경의 비밀은 무엇보다도 문양의 정교함에 있다.

국보 다뉴세문경은 지금껏 발견된 것 중 가장 크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지름이 21.2㎝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좁은 공간에 무려 1만3000개가 넘는

정교한 선과 100여 개의 동심원이 새겨져 있다.

선과 선 사이의 간격은 불과 0.3㎜에 불과한데다, 원과 직선이 복잡하게 교차하면서

기하학적인 아름다움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현대 최고의 숙련된 제도사가 확대경과 초정밀 제도 기구의 도움을 받아 그린다고 하더라도

쉽지 않은 작업이다. 오로지 육안과 초보적인 수준의 기구에 의존해서 이처럼 정교한 문양을

그렸다는 것 때문에 신비감은 물론, 후대에 만들어졌다는 위조 논란까지 일고 있는 것이다.

위) 수많은 직선을 이어서 그린 다뉴세문경의 삼각 문양.

아래) 다뉴세문경 외구의 동심원.

<국립중앙박물관>

국보 다뉴세문경의 또 한 가지 놀라운 점은 그것이 거푸집에 청동을 부어 만든 주물 작품이라는 점이다.

도안이 아무리 정밀하더라도 그 도안을 바탕으로 주물을 떠내기 위해서는 고도의 주물 기술이 필요하다.

주물 기술에 문제가 있을 경우 도안의 정교함이 희생되어 최종적으로 만들어낸 거울이 도안과 같은 수준의 정밀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거푸집이 출토된 적이 없기 때문에 거푸집의 재질과 형태는 더욱더 수수께끼에 휩싸여 있었다.

지난 10월 16일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이 개최한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 과학적 보존 처리’ 학술대회에서 다뉴세문경의 제작 비밀을 풀 수 있는 실마리가 나왔다.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이 발표한

두 개의 논문이 그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지난해 7월 숭실대 기독교박물관의 의뢰를 받아 올해 8월까지

거울 표면이 갈라지는 현상이 발생한 다뉴세문경에 대한 보존 처리를 진행하면서

제작 방법을 규명했다. 보존과학팀은 이 과정에서 국보경을 발견 당시와 같은 19개의 파편으로

분리하고 파편의 단면을 X-선형광분석기와 입체 현미경 등을 동원하여 분석했다.

다뉴세문경 제작의 비밀을 푸는 관건은

주석과 구리의 비율, 거푸집의 재질, 문양 제도 방법 등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우선 국보 다뉴세문경은 구리와 주석의 비율이 매우 이상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구리와 주석의 비율이 중요한 것은 주석 함유량이 많을수록 거울의 반사율이 높아지지만

주석 함유량이 일정 비율을 초과하면 인장 강도가 급격하게 떨어져

작은 충격만으로도 쉽게 깨지기 때문이다.

보존과학팀에 따르면 다뉴세문경의 구리 대 주석 비율은 65.7 : 34.3으로

다른 청동 거울에 비해 주석 함유량이 높은 편이고,

제작 당시 거울면의 빛깔은 은백색에 가까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거푸집의 재료는 모래인 것으로 밝혀졌다.

지금까지 거푸집의 재질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많았다.

몇 차례 복원 시도에서도 동판이나 납 등에 무늬를 새긴 뒤 밀랍판으로 눌러 모양을 본뜨는

방법을 사용했으나 최종 주물에서 무늬가 망가지는 등 좋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보존과학팀은 거울 면과 문양 면에 걸쳐 있는 주조 당시 발생한 결함 부위를 분석했을 때

거푸집에 사용한 주물사(거푸집 모래)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함으로써

거푸집의 재질이 모래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나 완성된 거울의 단면에 모래가 밀려 올라간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거푸집이 그리 튼튼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만3000여 개의 선과 100여 개의 동심원을 0.3㎜ 간격으로 어떻게 그려냈는지는

가장 큰 관심거리다. 보존과학팀은 화상분석기로 21개의 원에 대해 반지름을 구한 결과,

반지름 분포가 동일한 경향을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토대로 미루어볼 때 이 원들은 다치구를 만들어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종의 컴퍼스로 여러 개의 바늘을 갖고 있어 한 번에 여러 개의 원을 그릴 수 있는 기구)

컴퍼스를 사용하여 한 번에 원을 하나씩 그린다면

이처럼 일정한 분포의 반지름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보존과학팀은 또 각각의 선과 동심원이 어떤 순서로 그려졌는지에 대해서도 분석을 내놓았다.

거품집 재료는 모래로 추정

 
그러나 해결되지 않은 부분 또한 많다.

우선 다치구를 사용하여 원을 그렸다고는 하지만

그 다치구를 어떻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다.

1㎝ 길이 안에 무려 20개의 바늘을 박아야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초정밀 기계의 도움 없이 어떻게 다치구를 만들어냈는지는 수수께끼다.

또한 직선과 동심원이 그려진 순서를 추정했다고 하지만

확대경이나 초정밀 제도 기구의 도움 없이 청동기 시대의 장인이 어떻게 그처럼 복잡한 문양을

그려냈는지도 상상력의 영역에 있다. 무엇보다도 제작 방법에 대한 이론적인 분석과

실제 복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현대의 장인이 실제 복원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그 비밀이 완전히 풀렸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몇 년 전 다뉴세문경 복원에 도전했던 한 장인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다”라면서

그 정밀한 제작 기술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위대한 예술 작품은 분석할수록 더 많은 비밀을 드러낸다.

국보 제141호 다뉴세문경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비밀을 간직한 채

현대인들에게 지속적인 찬탄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
- 2008 11/11   위클리경향 799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

 

 

 

한국의 청동기에서 또 하나 독특한 것으로 비파모양 청동검과,

후기에 나타난 한국형 청동검을 들 수 있다.

독특하고 세련된 디자인과 뛰어난 주조기술에서

그 시기의 다른 지역의 청동기 기술을 능가하고 있다.

기원전 4세기경에 출현한 이 한국형 청동검들은 돌 거푸집을 써서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일본에서 발견된 것들 중에는 한꺼번에 수십 자루가 차곡차곡 묻혀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이 한국형 청동검은 의기(儀器)로서뿐만 아니고, 실제로 동물을 찌르는 데도 사용되었다.

한국인이 만든 청동기에는 초기의 것부터 아연-청동 합금으로 된 것들이 나타나고 있다.

장식용이나 의식용으로 쓰는 청동기를 황금빛으로 빛나게 하기 위해서

구리, 주석, 납에 아연을 섞는 기술을 개발한 것이다.

 

 

중국에서는 아연-청동 합금으로 된 청동기가 한(漢)나라 때에 이르기까지 발견되지 않는다.

기술적인 어려움 때문에 중국에서는 개발되지 않았던 합금기술을

한국의 청동기인은 그들의 필요에 따라서 발전시키고 있었다.

한국의 청동기시대 기술자들이 진흙 거푸집과 함께 돌 거푸집을 많이 써서

청동기를 주조했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하다.

한국에서 많이 발견되는 돌 거푸집이 중국에서는 드물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울산의 바위그림과, 수만 기에 이르는 고인돌은

동아시아에서 한국인의 청동기문화가 독특하였음을 나타내는 중요한 유산이다.

 

울산의 거대한 바위그림은 그 지역의 청동기인이 본 자연의 모습이 실감나게 담겨있다.

이러한 암각화는 구석기시대부터 그려진 것으로 나타나지만

가장 두드러진 것은 신석기시대부터였고, 청동기시대에 와서 가장 많이 제작되었다.

 

또한 큰 바위를 세워 만든 청동기인의 무덤인 고인돌이

한국인 문화권 안에 그렇게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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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래실에서 발간한 [문화유산에 숨겨진 과학의 비밀]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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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일 2007-09-28, 문화재청 문화재포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