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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에 숨겨진 과학의 비밀] 3. 창조적 과학의 전개

Gijuzzang Dream 2008. 1. 12. 00:37

 
 
 
[문화유산에 숨겨진 과학의 비밀 ③]
한국 문화유산, 전통과학의 새로운 조명

 

 

글 : 전상운(문화재위원, 전 성신여자대학교 총장)

   
창조적 과학의 전개

 

 

한국의 고대과학에서 통일신라시대는

비교적 많은 기록과 유물이 알려져 화려하게 조명되는 시기이다.

이 시대의 한국인은 과학과 기술에서 많은 창조적 발전을 이룩했다.

한반도의 통일과 함께 삼국의 과학기술의 전통이 상승되고

중국에서 당나라의 높은 과학문명이 영향을 준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그것들을 잘 수용하여 신라의 과학과 기술을 창조해 내는데 성공했다.
석굴암과 청동 범종(梵鍾), 그리고 다라니경 등은 그 대표적인 유물이다.

신라의 기술자들이 남긴 8세기 최고의 건조물인 석굴암은

그 뛰어난 기하학적 조형 설계와 축조기술의 비범함으로

한국 고대 건축기술의 정화라고 평가되고 있다.

석굴암은 의심할 여지없이 중국의 석굴사원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그것이 자연의 암벽에 조영된 데 대하여,

석굴암은 원과 구, 그리고 삼각형, 육각형, 팔각형에 이르는 모든 구성법을 자유로이 조화시켜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게 축조한 인조 석굴이다.

경주의 석굴사원은 완벽한 기하학적 설계를 바탕으로 조성되었다.

그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세련된 의장 계획과 훌륭한 조형기술에서

우리는 신라 공장(工匠)의 과학과 만나게 된다.


이렇게 미(美)의 창조자로서의 신라 공장의 과학과 기술은

또 하나 한없이 아름다운 범종을 만들어 냈다.

그들은 중국 고대의 종과 탁(鐸)을 결합하여 신라 특유의 형식을 가진 종을 만든 것이다.

 

종을 거는 고리인 용뉴(龍紐)에 붙인 공명용 음관(音管)이 그것이다.
또 신라의 기술자들은 종의 주조를 좋게 하기 위해서 황동을 만들었다고 한다.

중국의 유명한 박물학서인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本草鋼目)』에

“페르시아 동(銅)은 거울을 만드는 데 좋고, 신라동(新羅銅)은 종을 만드는 데 좋다.”고

씌어 있는 것도 이 사실을 밑받침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성덕대왕신종

 

지금 국립경주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는 유명한 성덕대왕신종은 771년에 주조된 것인데,

높이 3.3m, 무게가 약 20톤의 거대한 종으로,

그 형태의 장중함과 문양의 미려한 배치 등은 신라 범종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신라 범종은 형태가 단정하며 아름답고, 종소리가 청아하여

길게 트인 은은한 여운으로 우리의 심금을 울려 준다.

그것은 청동 주조물의 조형미를 가장 훌륭하게 창출해 낸

신라 기술자들의 합금 주조 기술의 소산이다.

 
신라의 공장(工匠)들은 8세기 전반기에 목판인쇄를 시작했다.

1966년에 우연히 발견된 다라니경 두루마리는

705년에서 751년 사이에 닥종이에 목판으로 인쇄된 것으로 판명되어,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인쇄물로 인정되고 있다.

한국 학계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의 출현을

인쇄기술이 한국에서 시작된 사실을 밑받침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것은 현존하는 자료에 의거하는 한,

 인쇄기술의 발명은 중국에서보다 신라에서 먼저 이루어졌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신라의 기술이 8세기 전반에 목판인쇄를 해낼 수 있는 수준으로까지 성숙하였다는 사실은

기술사적으로 큰 의의를 가진다.


이 목판인쇄 기술 발명의 배경에는 신라의 뛰어난 종이 제조 기술이 있었다.

1995년에 화엄사 석탑에서 발견된 불경 두루마리는

아름다운 백색을 그대로 간직한 얇고 질긴 닥종이로 알려지고 있다.

그 당시 중국에서 높이 평가된 신라 종이인 것이다.

이 종이는 지금까지 발견된 어느 신라 종이보다 제조 당시의 상태를 잘 보존하고 있어,

신라 종이 제작 기술의 우수함을 실증하고 있다.

 

일본의 「백만탑다라니경(百萬塔陀羅尼經)」은

틀림없이 신라인이 전한 기술에 의하여 이루어졌을 것이다.

일본에서의 목판인쇄는 그 후 끊어졌지만,

한국에서는 계속되어 청동활자 인쇄술의 발명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그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의 하나로

5세기경까지 백제에서 성립하여 일본에 전파된 혁신적 농업기술을 꼽을 수 있다.

백제인은 그 기술을 일본에 전했고,

그 영향은 산업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적 변혁으로까지 파급되었다.

고려, 과학과 기술의 혁신을 일궈내다.

직지


고려의 과학과 기술은 말할 나위도 없이 신라 과학기술의 전통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밖으로는 송·원의 과학기술과 문화의 영향과 자극을 크게 받았다.

이슬람 과학기술 문화의 영향도 직접·간접으로 나타나고 있다.

 

고려의 기술적 발전을 대표하는 것은

목판인쇄의 발전, 청동 활자 인쇄기술의 발명과 고려청자의 개발이다.


고려의 목판인쇄는

송판본을 몹시도 좋아했던 지배층의 귀족적 취향을 충족시키려던 서예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잘 알려지고 있는 바와 같이,

불경(佛經)의 조판으로서 불력(佛力)의 도움을 받아

거란(契丹)과 몽고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구하려던 종교적인 기원에서 시작되고 발전하였다.

지금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훌륭한 최고(最古)의 목판으로 널리 알려진

고려의 팔만대장경도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팔만대장경 판목은 인쇄용 목판기술이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까지 발전한

완벽한 제작 솜씨를 가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 13세기 초에 발명된 청동 활자 인쇄술은

목판인쇄의 발전과는 전혀 다른 요구에 의해서 생겨났다.

그것은 책의 수요가 중국에 비해서 훨씬 적었던 고려의 실정에서

여러 종류의 책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양의 판목(板木)과 시간과 노동력을 필요로 했다.

고려의 장인들은 이 문제를 금속 인쇄기술의 발명으로 해결했다.


중국에서는 11세기에 필승(畢昇)이 도활자(陶活字) 인쇄술을 발명했으나,

금속활자는 14세기에 이르러서도

주조의 어려움과 적당한 잉크와 종이를 만들 수 없어서 실용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고려의 기술로는 그것들이 가능했다.

고려의 기술자들은

청동으로 활자를 부어 만드는 데 필요한 모래 거푸집의 제조 기술을 알고 있었고,

청동 활자에 적합한 유성(油性)먹과 질이 좋은 종이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고려의 기술자들은

목판이나 목활자에서 청동 활자로 인쇄하는 새로운 기술개발을 시도한 것이다.

이것은 커다란 기술혁신이었다.


고려인은 이렇게 해서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하였다.

그 기술의 핵심인 청동 활자를 주조하는 모래 거푸집을 고려의 공장(工匠)이 발명한 것이다.

그것은 인쇄술 발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공헌이었다.


고려의 도공들은 중국에 이어 자기(磁器)를 만드는 기술을 개발했다.

그것은 신라의 요업기술이 발전시킨

매우 훌륭한 옹기그릇 제조기술의 전통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흔히 신라토기라고 하는 독특한 경질 토기는,

그 마지막 기술의 단계에선 토기라기보다는

도기와 자기의 중간 단계까지 도달한 훌륭한 것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청자상감국화무늬병


고려의 청자 제조기술은 이러한 기술의 바탕 위에

그 당시 최첨단 기술이었던 송 자기(宋 磁器)의 영향을 받아서 발달한 것이다.

그러나 그 기술은 송자기의 제조기술을 능가하는 아름다움을 창조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고려의 공장들이 그 때까지 금속 공예품에만 쓰이던 기술인 상감기법을

자기에 응용한 독특한 수법을 개발한 것은

자기 제조기술에서 새로운 경지를 연 특필할 만한 발전이었다.

이와 같이 청자의 기술은 송나라에서 도입되었지만

그것은 선진 문화를 수용하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단순한 모방은 아니었다. 고려청자에는 한국인이 개발하여 발전시킨 요업기술의 전통과,

중국인이 나타내지 못한 독특한 미적 감각이 표현되고 있다.


고려청자는 화려하지 않으며 기교적이 아니다.

자연스러운 선과 우아한 멋을 지닌 디자인은 송, 원의 청자와 뚜렷하게 구별된다.


천문학과 의약학도 그 전의 왕조들에서처럼 고려 과학의 기둥이었다.

다만 지리학을 더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의 천문학은 관측천문학에서의 주목할 만한 업적과

고려의 역법체계를 세우기 위한 노력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고려사』 「천문지」에는 475년간의 관측기록이 집약되어 있다.

고려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천문 관측이 독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려의 천문 관리들은 면밀하고 정확한 관측을 조직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들은 고려 말까지 87회의 혜성 관측 기록을 남겼다.
그 기록 중에는 또 132회에 달하는 일식의 관측기록이 있는데,

이것들은 중세 이슬람 천문학자들이 남긴 기록에 필적한다.

또 태양 흑점의 관측 기록들은 특히 주목된다.

그것은 ‘일중흑자(日中黑子)’라고 표현되고 있는데,

예를 들면, 1151년 3월 2일 “태양에 흑자(黑子)가 있다. 그 크기는 계란만하다.”는 기록을 비롯하여,

1024년부터 1383년 사이에 34회에 달하고 있다.


고려 의약학의 성립도 고려 과학의 주요한 성과로 꼽을 수 있다.

한국에서 의약학이 체계적으로 기초가 잡힌 시기는

대체로 6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는 삼국의 전성시대였다.

도홍경(陶弘景)의 『본초경집주(本草經集註)』에는 11종의 한국산 의약이 나타나고 있으며,

10세기 일본의 유명한 의서인 『의심방(醫心方)』에는

백제와 신라의 의서에서 처방이 인용되고 있다.

 

9세기에 이르면 22종의 한국산 의약이 중국과 일본의 의서에 나타난다.

고려의 의약학은 이러한 전통 위에 성립하였다.

그리고 10세기에는 국립의학교가 창립되고, 의원(醫員)의 국가시험 제도가 시행되었다.

그 후 12세기에서 13세기에는 송 의학(宋 醫學)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향약방(鄕藥方)’이라 불리는 고려 독자의 처방이 출현하였다.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 3권이 그것이다.

이 의서는 고려산 약재에 의한 처방을 중심으로 한 것이어서,

그 때까지 한국에 전래된 의약학 지식의 결산이었다.

여기에는 180종의 고려산 의약에 대한 명칭과 약의 성질 및 채집 방법 등이 설명되어 있다.

이제 고려에서 고려산 의약에 의한 고려의 의서가 저술된 것이다.


고려의 산업기술 중에서 우리가 놓칠 수 없는 또 다른 몇 가지 중요한 발전이 있다.

금속공예기술과 나전칠기공예, 그리고 화약과 화포 및 무명의 출현이 그것이다.

고려의 금속기술은 신라의 기술적 전통을 이어 받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전개되었다.
고려의 기술자들은 놋이라고 불리는 우수한 청동합금을 발전시켰다.

아름다운 황금색 놋그릇이 한국인의 식기로 크게 보급되기 시작되었고,

청동거울이 대량으로 생산되어 고려인 생활 속에 자리 잡았다.


이러한 청동기술의 전개는 마침내 거대한 주철 불상을 출현케 했다.

9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 제조된, 철을 부어 만든 불상들은

그 뛰어난 주조기술과 용접기술에서 고려의 주철기술이 최고의 수준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남아있는 몇 개의 커다란 철불은 청동불상을 방불케 할 정도로 훌륭하게 주조된 것이다.


고려에는 14세기 전반기에 화약과 화포가 출현했다.

그 당시 중국에서 극비에 부치고 있었던 화약제조의 비밀을 최무선이 재발명해 낸 것이다.

중국에서 대외적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았던 기술을 고려 사람이 빼낸 것이 또 하나 있다.

목면(木綿)의 기술이다.

14세기에 중국에 갔다 온 문익점이 목화 씨앗을 몰래 가지고 돌아와서

자기 고향에서 재배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것은 고려 사람들의 생활에 혁신적 변화를 일으킨 커다란 사건이었다.

무명옷과 솜옷, 솜이불을 쓰게 되고 배의 돛을 무명천으로 만들게 되면서

고려의 경제 전반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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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래실에서 발간한 [문화유산에 숨겨진 과학의 비밀] 에서 발췌한 내용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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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일 2007-10-12 문화재청, 문화재포커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