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장도장(粧刀匠), 도자장(刀子匠)

Gijuzzang Dream 2008. 1. 3. 23:59

 

 

 

 장도장(粧刀匠)

 

 

 

‘장도(粧刀)’란 사전에서는 칼집이 있는 작은 칼을 일컬으며,

주머니 속에 넣는 칼은 줌치칼 혹은 주머니 낭(囊 )자와 칼도(刀)자를 써서 ‘낭도(囊刀)’라 한다.

허리춤에 차고 옷고름에 차고 다니는 장도는 찬다하여 ‘패도(佩刀)’라 하며

사대부와 부녀자들이 생활용과 호신용으로 패용했던 길이 10~20㎝ 가량의 작은 칼을 말한다.

선비들은 자신의 충절을 이 패도로 지켰고

부녀자들은 유사시에 자신의 정절을 지키려는 상징으로 패용해 왔는데

후대에 와서는 하나의 장식용으로도 활용되었기 때문에 장도(粧刀)라고도 불리어지게 된 것이다.

 

특히 광양이 패도의 본고장이 된 것은

고려초부터 전란이나 사화를 피해 이곳에 피신해 온 선비들이 자신의 충절을 표시하기 위해

이를 손수 만들어 패용했고 자손들에게 그 기술을 익히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녀자들은 어지러운 전란이나 외세를 당했을 때 자신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가슴 속 깊이 간직한 패도로 자결한 예가 『동국신속삼강행실』등에서 볼 수 있다.

패도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칼자루나 칼집의 모양에 따라 다르다.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 60호 박용기 선생에 의하면

‘장도(粧刀)’가 ‘패도’와 ‘낭도’의 복합어로서

평소 몸에 치장한다하여 ‘치장(粧) 칼(刀)’, '장도'라 부른다고 한다.

 

부인용은 작고 일반용은 크며 또 장식재료의 종류에 따라 그 이름도 다르게 호칭된다.

우리 옛 선조들은 신분에 따라 각각 다른 종류의 칼을 몸에 지녀

신분의 등위를 가리는 목적으로 이용되었으며

이러한 칼의 형태는 외형 장식 재료에 따라 구분되고 그 재료들은 귀금속에 주안점을 두었다.

  

조선시대에는 경공장(京工匠)으로서 상의원(尙衣院)에 소속된 6명의 장인이

왕실에서 사용되는 장도(粧刀)를 전담하여 제작하였고,

일반 백성 사이에 널리 사용되었던 민수용은

광양, 곡성, 울산, 울진, 영주 등지에 분포되었던 사장(私匠)들에 의하여 충당되었다.

 

장도장(粧刀匠)도 본래 도자장(刀子匠)으로 분류되었으나

근래에는 환도(環刀)등 일반 도검류를 만드는 장인과 구분하여 장도장(粧刀匠)이라 일컫는다.

장도제작은 도자장, 소목장(小木匠), 조각장, 백동장(白銅匠)의 여러 기능으로 분업화 되어 있었지만

현재는 일괄 제작으로 전환 되었고 기능 역시 칼자루와 칼집을 치장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금, 은, 옥, 등의 보석과 상아, 물소뿔, 사슴뿔,

대추나무, 먹감나무, 오죽, 회양목 등의 나무 재료가 사용된다.

장도만들기는 전후 23종의 공정을 거쳐야 하는 잔손이 많이 가는 작업으로
제작 기간은 짧게는 3일에서 길게는 수백일이 소요된다.


장도의 명칭은 칼자루와 칼집의 표면을 장식한 재료와 형식 및 장식에 따라 붙여지며

꾸밈새로 쓰이는 장식에는 “갖은 장식”과 “맞배기”가 있는데 은(銀) 또는 백동을 쓴다.

 

- 장도의 각부 명칭(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제19권, 161p)

 

‘장도’는 실용성, 장신구, 예물용, 호신용 등 용도별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 중에 장도(粧刀)는 작아서

늘 허리춤에 차고 다니기에 편리하고 멋을 내기에 충분하므로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장도는 칼자루와 칼집의 재료에 따라서

은장도(銀粧刀), 목장도(木粧刀), 골장도(骨粧刀)로 나누어진다.

 

또, 칼자루와 칼집이 맞물리는 곳에 턱이 있는 것을 몽개칼, 없는 것을 맞배기라 하고

재료와 형태와 조각의 문양에 따라 이름이 불려지기도 하는데
즉, 먹감나무로 만들어졌으면 ‘흑시도’인데,

형태가 ‘을’자 모양이면 ‘흑시을자도’라고 불리어진다.

거북이의 등껍질로 칼집과 자루를 만들었으면 ‘대모장도’,

은으로 만들었으면 ‘은장도’, 옥으로 했으면 ‘옥장도’,

나무의 조각이 장생문이면 ‘장생문장도’, 석류조각이면 ‘석류문장도’라 불리운다.
칼집과 자루는 나무로 했지만 장식과 고리 등이 은이면 ‘은장장도’, 금이면 ‘금장장도’라 부른다.

 

형태에 의하여 

원통형을 평칼, 팔각으로 모가 난 것을 팔보장도 혹은 보재비칼이라 하고,

일자도(一字刀), 을자도(乙字刀) 가진을자도(乙字刀), 을자맞배기, 평맞배기

그리고 젓가락이 꽂힌 첨자도(籤子刀)로 분류된다.

어떤 것은 칼날이 없어 ‘벙어리 장도’라 하는데, 이것은

대개 작고 금과 은이나 보석으로 만들어져 순수하게 장식효과만을 노려

노리개에 다는 장도를 ‘패물장도’ 혹은 ‘노리개 장도’라고도 부른다.

 

또 칼집에 부착할 장식품은 금, 은, 백동 등의 재료를 녹인 다음 망치로 두들겨서 납작하게 만든다.
이렇게 하여 장식품이 다듬어지면 여기에 문양화한 국화, 여치, 메뚜기 등

우리의 전통적인 무늬를 접착시킨다.

장식에 문양이 있는 것을 갖은장석칼, 오동입사(烏銅入絲)한 것을 오동칼이라 하고

문양이 없는 것을 민자칼이라 한다.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 60호 광양장도박물관의 박용기 장도장은

칼날에 ‘일편심(一片心)’이라는 글귀를 지금까지 새겨 넣고 있는데

그 이유는 장도정신이 충, 효, 지조의 상징적 표현으로 후세에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한편, 무형문화재로 인정하여 장도공예기술 기능보유자인 경남 진주의 임차출씨는

장도의 칼 몸체를 벼르는 기법과 특히 은장도에 있어서 전통적인 문양을 조각하는 솜씨가 보기 드문

민속공예기능의 전승자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장도는 다른 나라에 비해 칼날이 작아

다분히 호신용이었거나 생활에서 잡다한 용무로 쓰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반면 중국의 칼은 실용주의로 그 목적이 강하며,

일본의 칼은 무기 문화인 반면 한국장도는 아름다움이 특징이다.

 

장도는 오래 써서 질이 잘 나면 날수록

그 색상이나 광택이 어떤 보석과도 견줄 수 없는 아름다운 멋을 지니는 공예품이다.

 

 

 

 광양 장도박물관

 

2006년 1월 24일 개관한 장도 전시관을 겸한 광양장도전수관은

전시관 2개소와 작업실, 아트숍, 세미나실, 체험학습실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추고 관람객을 맞고 있다. 
연중무휴로 운영되고 있는 박물관은

도암 박용기 선생의 평생숙원사업으로 전 재산을 광양시에 기부 체납하여

아들 박종군 관장이 위탁 운영하는 광양시의 공공 재산이다.

광양 장도박물관에는

박용기 선생이 14세 때부터 62년 동안 만들어 온 각종 장도와 세계 각국의 칼들이 전시되고 있으며

제1전시관에는 세계 각국의 도검과 영화 속의 칼, 판타지검, 현대 작가의 칼 등 100여 점이 전시

제2전시관에는 14세부터 만들어 온 장도장 박용기 선생의 작품과

우리나라의 오랜 유물 2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 

1978년 중요무용문화제 60호로 지정된 장도장 도암 박용기 선생은

'충절과 정절'의 상징인 장도 작품엔  ‘일편심(一片心)’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혼을 불어넣는 예술 ‘일편심(一片心)’

 

 

중요무형문화제 제60호 장도장 기능보유자 도암 박용기 명인

 

 

장도는 몸에 지니는 칼집이 있는 작은 칼을 말한다.

조상들의 정신과 멋, 솜씨가 한꺼번에 묻어나는 아름다운 공예품으로

‘충절과 정절'의 상징으로 잘 알려져 있다. 장도는 수년천의 역사를 간직하며

왕이나 왕비, 장군, 선비들로부터 사대부 아녀자, 서민들까지 폭넓은 사랑을 받아왔다.

 

장도는 시대에 따라 변화돼 온 조상의 미적 감각과 함께

부(富)와 권력을 표시하는 신분적인 기능이 숨겨져 있다.

선비들이 편지봉투나 화선지를 자르고, 과일도 깎고 어린 손자의 팽이를 다듬어 주거나 연을 만들어 줄 때 연살을 다듬기도 했으며 봄날 아녀자들이 나물을 캐는데도 사용했다고 한다.

광양읍 칠성리 광양장도전수관. 이곳은 5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장도(粧刀)가 탄생하는 곳이다.
전수관 안 1층에는 세계 각국의 도검과 영화속의 칼, 현대 작가의 칼 등이 눈에 들어온다.
특히 매직비전의 입체 영상물을 통해 한국 장도의 유래를 재연한 것이 흥미롭다.

그러나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장도이다. 칼이 아닌 차라리 보석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 듯하다.

장도 하나하나마다 화려함을 갖추고 있지만 그 안에는 은은함이 그대로 배어있다.

어떤 장도는 위엄 가득한 기풍이 흐르고 어떤 것은 앙증맞은 모습이다. 


지난 1978년 중요무형문화제 제60호로 지정된 장도 명인 도암 박용기옹(76).

박 명인은 지금도 작업실에서 창작을 불태우고 있다.

“세상에 칼은 많지만 정절과 의리, 충효의 정신이 담겨 있는 칼은 한국의 ‘장도’ 밖에 없다”는 그는

“지금까지 장도를 만들면서 정신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제작해 왔다”며

“장도에는 바로 사는 ‘도덕’이 담겨있다”고 말한다.

 

경제적으로 윤택한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손재주가 뛰어났던 박 명인은

어른들의 극심한 반대를 뒤로한 채 14세 때부터 고인이 된 광양의 유명한 패도장인 장익성 선생에게

기능을 전수 받아 장도장의 길에 들어섰다. 지금은 외아들인 종군(현 광양장도관 관장)에게

자기의 평생 동안 익힌 기능을 전수시켜 주고 있다.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장도를 만들었는데,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작품은 돈을 전혀 몰랐던 10대와 20대 초반에 만든 것들이라고 한다.


박 명인은 열네살 이후 손에서 칼을 놓아본 적도, 광양 땅을 떠난 적도 없다.

소학교 졸업 후 상급 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본격적으로 장도장의 길에 들어선 뒤

63년 외길 인생을 걷고 있다.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전국의 골동품, 박물관을 쫓아 다니면서

장도연구에 몰두했고 마침내 지난 1978년 대한민국 명장의 반열에 올랐다.

 

도암 선생이 평생을 바쳐온 장도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해 왔으며 여성의 정절과 결부돼 많은 일화를 갖고 있다.
시대에 따라 변화돼 온 조상의 미적 감각과 함께 富와 권력을 표시하는 신분적인 기능이 숨겨져 있다. 

장도는 수십 개의 공정을 거쳐야 하는 잔손질이 많이 가는 작업으로

짧게는 3일 길게는 1년이 걸리는 작품도 있다.

칼자루와 칼집을 만드는 재료는 금, 은, 옥, 비취, 밀화, 수정, 금강석, 황동에서부터

상아나 물소뿔, 사슴뿔, 오죽, 대추나무, 먹감나무, 회양목 등으로 다양하다.

 

이런 인고의 과정을 통해 현재 전시관에는 ‘오동상감 타원형첨자도’,  ‘금은장 매조문 갖은을자도’, 

‘대추나무 은장파초문 갖은 사각도’,  ‘은장십장생 문첨자도’,  ‘낙죽매화문장도’ 등

갖가지 형태의 작품으로 살아남아 있다.  


박 명인은 자신이 만든 칼날에 항상  ‘일편심(一片心)’이라는 글귀를 새겨 넣고 있다.

그는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되려면 꾸준히 한 우물을 파는 정신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고집과 인내를 가지고 온 정신의 혼을 쏟아 포기하지 않고 한길을 가다보면

결국 물을 볼 수 있다는 게 박 명인의 지론. 박 명인은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하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며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도암 선생은 “지금까지 칼을 만든게 아니라 정신을 만든다는 생각으로 장도를 제작해 왔다”면서

“장도에는 바로 사는 도덕이 담겨있다”고 말했다.

그는 “장도 제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전체적인 섬세함과 칼자루와 칼집의 비율

그리고 마지막 칼날의 강함과 부드러움의 조화다”고 말했다.

- 2007년 11월 7일 광양신문 / 남도일보에서

 

 

 

 

 은장도(銀粧刀)

 

        

 

은으로 만든 작은 칼. 평복에 차는 노리개의 하나이다.

남녀가 장도를 차는 풍습은 고려가 원나라에 복속한 뒤부터 시작되어 조선시대에는 널리 일반화되었다.

 

1498년(연산군 4)의 사치금제에서도 서인의 은장도 사용을 금하였으나 잘 시행되지 않아서,

1670년(현종 11)에는 유생 잡직 및 서인남녀 중 은장도를 차는 자를 논죄하라고까지 하였다.

이는 금과 은의 사용이 봉건사회에서 상하 · 존비 · 귀천을 가리는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명나라에 금 · 은의 공물을 바치지 않기 위한 조처로 취해진 것이었다.

 

여인에 있어서 은장도는 장식용으로뿐만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호신용으로도 사용되었다.

즉, 임진왜란 당시 항상 작은 장도를 지니고 있다가

유사시에 자결 혹은 상대를 공격하였다는 기록이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있다.

 

부녀자들이 장도를 노리개로 옷고름에 차면 패도(佩刀)라 하고,

주머니 속에 지닌 것은 낭도(囊刀)라 한다. 

패도의 크기는 큰 것은 전장 5촌, 도신(칼날)은 3촌 정도이고, 작은 것은 전장 3촌, 도신 1.5촌이며,

낭도는 전장 3촌, 도신 1.5촌 크기가 보통이었다.

은장도의 재료는 은이고 도신은 강철이며,

도신에 일편단심이라는 글씨를 문양화하여 새기기도 하였다.

또, 은젓가락이 달려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외부에서 식사하게 되는 경우 젓가락으로 사용하고,

또 음식 중독의 유무를 분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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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장도에 대한 이설>

은장도 제작에서 유일한 중요문화재 기능보유자인 박용기(朴龍基)씨의 아들 박종군(朴鍾君)씨가

장도(粧刀)를 중심으로 한 도검(刀劍) 연구 논문을 발표하였다.

박씨는 동국대에서 석사 학위 논문으로 이 논문을 썼는데,

종래의 장도에 관한 설과는 상당히 다른 내용이 들어 있다.

 

장도 사용은 몽고의 유습이라는 주장을 부인,

삼국시대부터 신분에 따라 종류가 다른 장도를 지녔으며,

용도도 호신용이라기보다는 장식적 의미가 컸다고 주장했다.

 

박씨는 장도의 이론적 연구와 함께 부친의 장도제작업을 계승하기 위해 전수자로서도 일하고 있다.

- 동아일보, 1990.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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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장도는 옛날 우리 여인네들이 자신에게 닥쳐오던 각종 위협과 유혹, 시련을 꿋꿋이 물리쳐 내고

몸과 마음을 지키고자 하는 버팀목이었다.

그런가 하면 봉건사회에서 여인네들이 안아야 했던 수많은 숙명과 질곡을 서러워하며

결국은 자신을 향해 찌르던 한 맺힌 항거의 징표이기도 했다.

- 일요신문

 

 

 

     신이나 삼아 줄 걸

슬픈 사연의올올이 아로새긴 육날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어서
질없는 이 머리털 엮어 드릴 걸
- 서정주의 ‘귀촉도’ 중에서

 

 

또 서정주의 시에서처럼 멀리 떠나는 사랑하는 이에게

나를 잊지 말라며 원한도 울음도 참으며 머리털을 잘라 신을 엮어줄 때

빼어드는 단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은장도는 옛 여인들의 가슴 깊숙한 곳에서 언제나 처절하게 그 시퍼런 날을 번쩍이고 있었다.

은장도란 은으로 장식한 장도(粧刀)로 장도란 치장되어 있는 작은 칼을 뜻한다.

원래 몽골의 영향을 받아 고려 후기부터 일반에 유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초에는 휴대용 도구처럼 실용적인 목적으로 남녀를 가리지 않고 휴대했다고 한다.

야외에서 간단히 물건을 자르거나 다듬고 나물을 캘 때도 사용했고

필요하면 호신용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시대에 들어서

여인들의 정절이 중요한 가치로 등장하면서 은장도는 여인들에게 절개를 상징하는 물건이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외적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려는 호신용으로 자리 잡으면서

양반집 규수라면 반드시 소지해야 할 물건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은장도도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 되자

호신용보다는 멋을 부리는 노리개처럼 인식되고

사대부 여인들의 사치품으로 변하면서 모양과 장식이 화려해지고 다양해졌다.

 

당시 여인들이 지녀야 할 세 가지 필수품을 들라면 빗과 거울 그리고 은장도였다.

여인들은 은장도에도 다양한 문양을 새겨 넣어

부귀영화와 수명장수를 빌고, 액을 물리치기를 바라며, 부부의 화합을 염원하기도 했다.

장도는 시대에 따라 그 길이가 변했지만

조선조 후기로 접어들며 남성용의 경우 보통 15cm 내외, 여성용의 경우 10cm 내외로 정착됐다.

재료로는 금, 은, 백동 등의 금속재 외에도 나무, 옥, 비취 등이 쓰였는데

칼자루와 칼집의 재료에 따라  

은장도 외에도 금장도(金粧刀), 목장도(木粧刀), 골장도(骨粧刀) 등의 종류가 있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은으로 꾸며진 은장도가

그 수수하며 단아한 모습과 은이 가지는 상징성 때문에 여인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장도는 또 형태에 따라 일자도(一字刀), 을자도(乙字刀)

그리고 젓가락이 꽂힌 첨자도(籤子刀)로 분류된다.

첨자도는 은이 독과 만나면 색이 변하는 성질을 이용,

음식에 독이 있는지를 살피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또 칼자루와 칼집이 맞물리는 곳에 턱이 있는 것을 몽개칼, 없는 것을 맞배기칼이라 하고

칼집이 원통형인 것을 평칼, 네모가 진 것을 사모장도,

팔각으로 모가 난 것을 팔모장도 또는 모잽이장도라 했다.

또한 형태에 따라 적절한 장식과 무늬가 아로새겨졌다.

남성용 장도는 글자, 산수(山水), 누각(樓閣), 운학(雲鶴), 박쥐 등

선비의 기상과 호운을 나타내는 것이 많고,

여성용은 꽃나무, 나뭇잎, 국화, 매화, 대나무, 난 등 여성 취향의 장식성 표현이 두드러졌다.

 

장도는 서울을 중심으로 하여 울산 영주 남원 등지에서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전라남도 광양 지방의 장도가 역사가 깊고 섬세하며

종류 또한 다양하여 한국적 우아함과 장식용으로 뛰어난 공예미를 자랑하고 있다.

 

장도는 칼자루와 칼집의 외부을 감싸고 있는 재료의 종류에 따라

은장도(銀粧刀), 목장도(木粧刀), 옥장도(玉粧刀) 등으로 나뉜다.

목장도와 옥장도에도 대부분 은으로 만든 장식이 들어간다.

예전에는 장도의 재료와 새겨지는 문양에 따라 신분의 고하를 드러내기도 했다고 한다.

 

장도에 새기는 문양과 옥 가공은 박씨가 직접 작업하지 않고

조각 분야의 장인인 김철주, 이재만씨가 담당한다.

 

은장도의 경우,

망치로 두드려 은판을 넓게 펴서 재단한 다음 붕사(硼砂)를 발라 접합시켜 칼자루의 외장을 만든다.

이 과정에서 장도의 모양을 결정짓는 것은 ‘보래’.

둥글게 감싼 은판을 보래 속에 끼워 넣고 망치로 두드려

원형, 사각형, 팔각형 등의 다양한 모양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박씨는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보래를 갖추고 있어야

주문한 사람의 취향대로 장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장도 장인들은 보래 욕심이 대단하다”고 말했다.

 광양장도박물관 공방에서

박용기씨와 문하생들이 칼을 만들고 있다.

 

장도를 제작하는 데 또 하나의 핵심적인 기술은 칼날의 열처리 기술. 박씨의 금속 열처리 기술은 전남 지역에서 유명했다.

 

연탄 소비가 많았던

1970년대에는 여수의 연탄공장에서 특별주문한 주형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현대의 장도는 공예품으로 제작되기 때문에 칼날을 세울 필요가 없지만

박씨는 칼날도 ‘무섭게’ 벼린다.

섭씨 800도의 열에 달군 날을 기름에 식히는 열처리를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

칼을 열처리 할 때는 날 부분만 살짝 기름에 담가 식혔다가

조금 뒤 날 전체를 담가 식혀야 제대로 된 칼이 만들어 진다.

이렇게 만든 장도의 날은 날카롭고 강하기 때문에

줄로 문질러도 미끈한 느낌이 있지만 칼등은 부드럽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를 구하라” 총력전

 

그러나 열처리를 하는 데 온도계를 쓰지 않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달궈진 쇠의 색깔을 보고 온도를 가늠한다.

박씨는 “빛이 많지도 적지도 않은 해질녘에 열처리 작업을 하면

발갛게 달아오른 칼날의 색깔이 제대로 드러난다”면서

“날의 색깔을 보고 온도를 알 수 있어야 진짜 장인”이라고 말했다.

결국 기본적인 기술이지만 수없는 경험이 있어야 제대로 칼날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장도의 날은 탄소 함유량이 비교적 높은 강철을 원료로 만든다.

철이 귀했던 1950~1960년대에는 자동차의 스프링을 녹여 날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서울에서 특별주문한 강철을 사용한다.

제대로 만들어진 칼날에는 ‘一片心(일편심)’과 박씨의 서명을 정으로 새겨 넣는다. 
 

칼자루를 만드는 재료로는 대추나무와 향나무, 흑단(검은 감나무) 등이 사용된다.

 

박씨는 대추나무와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70년대 중반 인근 마을 당산에 있던 대추나무가 벼락을 맞은 사건이 있었다.

그 나무를 구하기 위해 전남 지역의 목공예 장인들끼리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대추나무의 나무결과 색이 목공예품을 만드는 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데다,

벼락 맞은 나무는 완벽하게 건조되기 때문에 최상의 재료였다.

그러나 대추나무가 원래 귀신을 쫓는다는 얘기가 있어

마을 사람들이 수호신처럼 생각했기 때문에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벼락 맞은 대추나무가 소설에나 있지 실제로 보기는 흔하지 않지요.

동네 이장한테 술도 사주고 장도도 갖다 주고 하면서 구슬려 봐도 도저히 내놓을 생각을 안하는 겁니다.

그래서 마을회관을 지어주는 조건으로 밤에 몰래 베어 왔습니다.

그 나무로 10년 동안 장도를 만들었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그 나무의 가치가 1억원은 족히 넘었을 것 같습니다.”

 화로에서 칼날을 가열하고 있다.

 

이렇게 만든 장도는 가장 싼 것은 최하 10만원에서 1000만원을 훌쩍 넘어서는 예술작품으로 탄생한다.

그러나 판매는 박씨의 공방과 조달청에서 운영하는 문화상품관 등에서만 하기 때문에 판매량은 한 달에 10세트 미만이다.

장도를 사고 싶은 사람이 직접 광양의 공방으로 전화를 걸어 주문하는 경우도 많다. 대기업의 고위 간부나 부유층 여성이 주요 고객이라고 한다.

 

역대 대통령 중에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 대통령이 박씨가 만든 장도를 선물받았다. 박씨는 역대 대통령 중에 김대중 대통령을 가장 ‘문화적 식견’을 갖춘 지도자로 손꼽는다.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아 IMF시절 그렇게 어려울 때도 장인들에 대한 지원을 많이 했습니다. 또 문화재국을 문화재청으로 승격시키기도 했습니다.”

1978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박씨의 공방에는 100명이 넘는 문하생이 다녀갔다.

그러나 박씨의 기술을 제대로 전수받은 사람은 5명 안팎이다.

제대로 기술을 익히려면 15년 정도가 걸리지만

장도 기술은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박씨는 “요즘 같은 세상에 전통기술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처자식 굶겨가며 기술을 배우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느냐”며

“장인의 자식들도 기술을 전수받지 않으려는 판국에 그 사람들을 탓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전통공예도 자생적 경쟁력 갖춰야

 

박용기씨의 장도 기술은 아들 박종군(42)씨가 전수받았다.

동국대 미술학과를 졸업한 그는

‘한국의 도검에 관한 연구-장도를 중심으로’(1989)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종군씨도 명예로워 보이는 장인의 속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다.

박씨는 “초등학교 시절에는 광양 장날 아이스크림 팔아서 용돈을 벌어 써야 했고,

집에 찾아온 빚쟁이들에게 부모님이 외출했다고 둘러대는 게 내 일과였다”고 말했다.

 

박종군씨는 전통문화를 제대로 보전하기 위해서는

지금과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장도박물관을 만들어 장도 기술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한 사람도 바로 아들 종군씨다.

"기술은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하더라도 전통공예 나름의 판매망과 전수 시스템이 있어야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면서

"정부의 지원에만 의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스스로 경쟁력을 찾아야 할 시점이 됐다"고 말했다.

 

한편 광양장도박물관장 박종군씨의 아들 박남중(전남 광양중)은

제52회 전국과학전람회 학생작품지도 논문연구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였다.

`은장도를 만들 때 조상들은 왜 삭힌 오줌을 사용했을까'라는 제목으로

은장도와 관련된 연구로 전통장도공예문화의 과학적 해석을 하였으며 새로운 발전 방향을 모색하였다.

특히 전통적 장도제작기법 중 하나인 3년 삭힌 소변 착색의 지독한 냄새와 색의 번짐성의 단점을

보완한 신물질을 발명하여 전통공예문화의 획기적 새로운 발전을 시도하였다.

 

'한국 환도'의 맥은 끊어져 한병문, 임원중, 김일갑, 임차출씨 등이 맥 이어

 

우리나라의 무사와 군인들의 무기로 사용됐던 환도(環刀) 제작 기술은

일제시대에 맥이 끊어져 현재 전승되고 있는 것이 없다.

그러나 다행히 호신용, 장식용 칼인 장도의 기술은

몇 명되지 않는 장인들에 의해 각 지방에서 전수되고 있다.

각 지방의 장도는 모양과 재료가 상이하며

칼날에는 장도장(粧刀匠)마다 다른 글씨와 사인을 새겨 넣는다.


전라도 지방의 장도 제작 기술은

용기 씨와 한병문(韓炳文)씨가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 장도장으로 지정돼 전수가 이루어지고 있다.

한병문씨는 증조부 한기동씨로부터 낙죽(烙竹) 장도기법을 배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기능보유자이다.

백제의 문화유산으로 알려진 낙죽장도는 15내외의 대나무 표면에 인두로

구름, 산수, 사슴, 매화 등의 무늬를 새겨넣고

깨알같은 글씨로 중국 왕원지(王元之)의 황주죽기(黃州竹記)를 새겨넣는다.

칼날 표면에는 금상감을 하여 장식한다.

 

그 외에 경상도 지방의 대표적인 장도인 경북 울산 병영(兵營) 장도는 임원중(林元重)씨,

영풍 장도장 김일갑(金一甲 ·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5호)씨,

진주 장도장 임차출(林且出 ·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0호)씨 등이 유명하다.

 

한편, 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본도(日本刀)는 무사들이 사용하는 환도의 제작기법이 전승되어

세계적으로도 소장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칼의 제작 기법에서는 일본이 한국보다 한수 위라고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일본에서는 칼의 제조와 소지가 금지되고

수많은 일본도가 미군정에 압수되어 미국으로 보내졌다.

그러나 1953년에 “무기 등의 제조금지법”이 변경되어 이 시기에 처음으로 칼의 제작이 허용됐다.

이 때에 전통적인 도검 제작 기술의 완전한 복원이 이루어져

수많은 도공이 감상과 진검 수련을 위한 일본도를 제작하게 된다.

야쿠와 야스타케와 미나모토 노리히로는 전후 일본도의 명맥을 이어 온 장인으로 유명하다.

 

 

전통적으로 옥장도는 계급사회를 상징하는 장신구로서 신성시되어 왔으며 조선시대의 왕족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옥으로 만든 것을 소장하는 풍습도 있었다.

도암 박용기선생이 제작한

- ‘황옥금은장 갖은을자도(위)’

    (전장 170mm, 1978년 작)

- ‘백옥금은장 갖은팔각도’

    (전장 210mm, 1983년 작).

- 사진제공=광양 장도박물관

 

 

 

 - 대추나무금은장십장생문사각첨자도

    (전장 175mm, 2005년 작)

 

 - 배부른 원통형 장도

    (고려장도, 전장 250mm,  2000년 작)

 

 

 

 

 

 

 

 

 

 

 

 

      박용기씨가 만든 장도 - 팔각옥장도(위에서 3번째)는

      싯가 1000만원을 호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