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대사 기려 호국정신 살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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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 주지 청운스님, 우국충절 되새기는 ‘사명대전’ 지역축제로 자리 잡아
거의 저녁 9시가 되어서다. 산중 사찰은 고요 그 자체였다. 이미 산사는 잠에 들었을 시간이다. 스님들이 도량에 정진하는 절 방 한 켠에 있는 주지 스님의 내실이었다. 방문객을 맞은 것은 먹물을 말리기 위해 걸개에 걸어놓은 서필이었다. '서기만당(瑞氣滿堂 · 상서로운 기운이 방에 가득하다)'이라고 씌어 있었다. 묵향이 짙게 배어나왔다. 또 다른 켠에는 다기(茶器)들이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었다. 묵향(墨香)과 다향(茶香)이 어우러져 천년 고찰의 고풍스러움을 더하는 듯했다. 이 방에 자리 잡은 것만 해도 상서로운 기운에 휩싸이는 듯했다. 이 영정은 표충사와 사명대사의 인연의 끝을 상징한다. 상징은 늘 밖으로 외연화하게 마련이다.
다른 사찰에 없는 표충사의 행사가 바로 그것이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그리고 기허대사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는 천년고찰 표충사에서 임진왜란 때 호국의 선봉에 섰던 이들을 기리기 위해 스님과 유림이 함께 제사를 지낸다. 춘계향사(春季享祀)가 그것이다. 벌써 528회나 이어지고 있다. 해마다 봄과 가을 두 차례 제사를 지냈으니 264년의 역사를 가진 행사다. 올해는 10월 13일부터 이틀 동안 이곳에서 열렸다. ‘사명대전’ 을 봉행하는 행사를 지난해 가을에 만들었다. 올 10월 행사는 3번째다. 사명대사의 이름을 붙인 것이지만 백척간두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몸을 바친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호국 평화의 축제인 셈이다. 첫날 입재식을 시작으로 다도 시연과 표충사의 사계, 사자평 산 · 들 · 늪의 신비 등을 주제로 한 사진 전시회와 표충사 수장고 유품 전시 등의 행사가 진행됐다. 사찰 뒷산이 사명대사가 의병을 훈련시키던 훈련장이었죠. 승병과 의병이 없었으면 임진왜란은 승리하지 못한 전쟁입니다.”
이 춘계향사는 국민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까지는 표충사와 밀양에 있는 유림들의 행사였다.
2005년 1월 표충사로 부임한 청운스님은 산사를 찾는 관광객들의 얘기를 엿듣게 됐다. ‘춘계향사’ 안내 현수막을 본,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한 무리의 관광객이 “향사가 뭐고, 죽은 사람에게 향 피워주는 기가”라고 말한 것이다.
청운스님은 아마도 그 관광객이 밀양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밀양조차 춘계향제와 사명대사를 모르나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게 ‘사명대제’를 만든 계기가 됐다.
청운스님은 춘계향사를 국민축제로 만들며 ‘호국불교의 정신을 회복하자’고 결심했다.
청운스님은 “표충사는 사명대사의 숭고한 업적과 애국애족의 호국정신이 서려 있는 곳”이라면서
“표충사는 조국과 민족의 숱한 애환과 흥망성쇠를 같이하며 진정으로 우리 역사의 혼이신 사명대사를 호국의 성사로 모시고 있다”고 말했다.
청운스님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시대에서 그 분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삶의 지표가 된다”면서 “종교를 떠나 우국 충정을 기릴 뿐 아니라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행사”라고 말했다. 이렇게 시작한 ‘사명대전’은 벌써 밀양을 대표하는 지역축제로 자리 잡았다.
표충사는 신라의 삼국통일과 부국강병을 기원하는 뜻에서 세워졌다. 원효대사는 천왕산(현재의 제약산)을 지나다가 죽림 사이로 오색 창연한 광명이 비치는 모습을 보고 “여기가 내가 찾는 지세”라면서 죽림사(竹林寺)를 창건했다.
원효대사의 아들인 일연이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집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삼국통일시대 흥덕왕은 직접 죽림사를 ‘영정사(靈井寺)’로 개칭했다. 나병에 걸린 셋째 아들을 비롯한 수많은 환자를 치료한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고려 때로 넘어와서 영정사는 ‘동방 제일의 선사’로 불렀다. 보국국사(승려로서는 가장 높은 직)가 이 절의 주지로 있었으며 한때 1000명이 넘는 승려가 도량을 닦았다고 한다. 민중과 나라를 위한다는 호국불교의 정신은 표충사의 역사에 면면히 배어 있는 것이다. 특히 백의민족의 최대 위기 중 하나로 꼽히는 임진왜란 때 그 빛은 더욱 빛났다. 임진왜란 발발 23일 만에 평양성이 왜군에 넘어갔다. 걸어서도 가기 어려울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다. 동 · 서인, 소·노론으로 갈려 사색당파에 빠져 있던 조선은 방어다운 방어 한 번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밀렸다.
지원 요청을 받은 명나라가 “조선이 왜군과 힘을 합쳐서 명나라를 치기 위한 것”이라고 오해했을 정도다. 선조대왕은 의주로 피난을 떠났다.
훗날 영조대왕은 사명대사에게 ‘표충’이라는 충호를 내렸다. 뒷날 사명대사의 제사와 위폐를 이곳으로 모시면서 절의 이름도 사명대사의 충호를 따 ‘표충사’로 바뀐 것이다. 일제 압박기에 표충사를 통도사의 말사로 격하시켰다. 사명대사 등 우국지사를 기리는 데 대한 불만의 표시였다. “서산대사는 사명대사에게 자신의 법력을 넘겨주려 하면서 ‘법맥을 이어주겠는가 아니면 백성을 구원하겠는가’라고 물었다. 사명대사는 ‘중생의 구제 없는 법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승병 발기를 청원했다” 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법맥은 언기스님에게 넘어갔다. 사명은 의주에 있는 왕에게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서 도량만 고집할 수 없다. 승려도 전부 일어나 왜적을 물리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왕은 매우 기뻐하면서 사명대사를 8도승문대장으로 임명했다. 의병과 승병은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했다. 그러기를 7개월, 그때서야 명나라도 조선의 위태로움을 알고 지원병을 보냈다. 덕천가강의 아들이 사명대사의 제자가 된 이야기, 사명의 영의정 발탁과 퇴진의 과정, 사명대사에게 ‘표충’이라는 충호 하사 과정을 낱낱이 설명했다.
고고한 스님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은 알지”라며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같은 말씨로 현대적 의미의 우국충정을 역설했다. 그 의미는 춘향대제를 유림과 승려들이 함께 지낸 것과도 맞닿아 있다.
청운스님은 “자존심 강한 유림들도 사명대사가 승려 이전에 ‘거룩한 선조’로 존경을 표시하고 본을 받으려는 것” 이라면서 “사명대사의 삶은 오늘에도 교훈을 준다”고 말했다.
고승은 사명대사의 삶을 ‘무소유의 행적’이라고 말했다. 청운스님은 표충사 이곳저곳에 묻어나는 사명대사의 삶을 체험한다면 국가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국민다운 국민의 틀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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