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표충사(경남 밀양)와 사명대사의 "춘계향사"

Gijuzzang Dream 2008. 1. 2. 18:54

 

 

 

 

 

 사명대사 기려 호국정신 살린다

 

표충사 주지 청운스님, 우국충절 되새기는 ‘사명대전’ 지역축제로 자리 잡아

표충사 청운 주지스님.


10월 10일 임진왜란 때 승병의 발상지인 호국고찰 표충사(경남 밀양시 단장면)를 찾은 시간은

거의 저녁 9시가 되어서다. 산중 사찰은 고요 그 자체였다. 이미 산사는 잠에 들었을 시간이다.

표충사 청운 주지 스님을 만나기 위해 안내받은 곳은

스님들이 도량에 정진하는 절 방 한 켠에 있는 주지 스님의 내실이었다.

방문객을 맞은 것은 먹물을 말리기 위해 걸개에 걸어놓은 서필이었다.

'서기만당(瑞氣滿堂 · 상서로운 기운이 방에 가득하다)'이라고 씌어 있었다. 묵향이 짙게 배어나왔다.

또 다른 켠에는 다기(茶器)들이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었다.

묵향(墨香)과 다향(茶香)이 어우러져 천년 고찰의 고풍스러움을 더하는 듯했다.

이 방에 자리 잡은 것만 해도 상서로운 기운에 휩싸이는 듯했다.

그러나 어느 절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게 이 방에 있었다.
사명대사의 영정이다.

이 영정은 표충사와 사명대사의 인연의 끝을 상징한다. 상징은 늘 밖으로 외연화하게 마련이다.

 

다른 사찰에 없는 표충사의 행사가 바로 그것이다.

 

서산대사와 사명대사 그리고 기허대사의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 있는 천년고찰 표충사에서

임진왜란 때 호국의 선봉에 섰던 이들을 기리기 위해 스님과 유림이 함께 제사를 지낸다.

춘계향사(春季享祀)가 그것이다. 벌써 528회나 이어지고 있다.

해마다 봄과 가을 두 차례 제사를 지냈으니 264년의 역사를 가진 행사다.

올해는 10월 13일부터 이틀 동안 이곳에서 열렸다.

청운스님은 춘계향사와 별개로 사명대사를 기리기 위해

‘사명대전’ 을 봉행하는 행사를 지난해 가을에 만들었다. 올 10월 행사는 3번째다.

사명대사의 이름을 붙인 것이지만 백척간두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몸을 바친 호국영령을

추모하는 호국 평화의 축제인 셈이다. 첫날 입재식을 시작으로

다도 시연과 표충사의 사계, 사자평 산 · 들 · 늪의 신비 등을 주제로 한 사진 전시회와

표충사 수장고 유품 전시 등의 행사가 진행됐다.

“영조대왕 이후로 임금과 유림와 승려가 떠받치던 곳이 표충사입니다.

사찰 뒷산이 사명대사가 의병을 훈련시키던 훈련장이었죠.

승병과 의병이 없었으면 임진왜란은 승리하지 못한 전쟁입니다.”


‘춘계향사’ 264년째 호국영령 추도

춘계향사를 주제하고 사명대전을 봉행하는 표충사 주지인 청운스님의 감회는 새롭기만 한 듯했다.

이 춘계향사는 국민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까지는 표충사와 밀양에 있는 유림들의 행사였다.

 

2005년 1월 표충사로 부임한 청운스님은 산사를 찾는 관광객들의 얘기를 엿듣게 됐다.

 ‘춘계향사’ 안내 현수막을 본,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한 무리의 관광객이

“향사가 뭐고, 죽은 사람에게 향 피워주는 기가”라고 말한 것이다.

 

청운스님은 아마도 그 관광객이 밀양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밀양조차 춘계향제와 사명대사를 모르나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게 ‘사명대제’를 만든 계기가 됐다.

지난 10월 13일 경남 밀양 표충사에서 승려와 유림들이 함께

사명대사 등을 기리기 위한 춘계향사를 지내고 있다.

 


임진왜란 때 승병 훈련 장소로 유명

사명대사의 영정.

청운스님은 춘계향사를 국민축제로 만들며

‘호국불교의 정신을 회복하자’고 결심했다.

 

청운스님은 “표충사는 사명대사의 숭고한 업적과 애국애족의 호국정신이 서려 있는 곳”이라면서

 

“표충사는 조국과 민족의 숱한 애환과 흥망성쇠를 같이하며 진정으로 우리 역사의 혼이신 사명대사를 호국의 성사로 모시고 있다”고 말했다.

 

청운스님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시대에서 그 분이 어떻게 살았는지는 삶의 지표가 된다”면서

“종교를 떠나 우국 충정을 기릴 뿐 아니라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행사”라고 말했다.

이렇게 시작한 ‘사명대전’은 벌써 밀양을 대표하는 지역축제로 자리 잡았다.

청운스님이 ‘호국축전’을 기획한 것은 표충사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표충사는 신라의 삼국통일과 부국강병을 기원하는 뜻에서 세워졌다.

원효대사는 천왕산(현재의 제약산)을 지나다가 죽림 사이로 오색 창연한 광명이 비치는 모습을 보고

“여기가 내가 찾는 지세”라면서 죽림사(竹林寺)를 창건했다.

 

원효대사의 아들인 일연이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집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삼국통일시대 흥덕왕은 직접 죽림사를 ‘영정사(靈井寺)’로 개칭했다.

나병에 걸린 셋째 아들을 비롯한 수많은 환자를 치료한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고려 때로 넘어와서 영정사는 ‘동방 제일의 선사’로 불렀다.

보국국사(승려로서는 가장 높은 직)가 이 절의 주지로 있었으며

한때 1000명이 넘는 승려가 도량을 닦았다고 한다.

민중과 나라를 위한다는 호국불교의 정신은 표충사의 역사에 면면히 배어 있는 것이다.

특히 백의민족의 최대 위기 중 하나로 꼽히는 임진왜란 때 그 빛은 더욱 빛났다.

표충사는 호국대성 사명대사가 승병을 훈련시킨 곳(규정소)이다.

임진왜란 발발 23일 만에 평양성이 왜군에 넘어갔다. 걸어서도 가기 어려울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다.

동 · 서인, 소·노론으로 갈려 사색당파에 빠져 있던 조선은

방어다운 방어 한 번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밀렸다.

 

지원 요청을 받은 명나라가

“조선이 왜군과 힘을 합쳐서 명나라를 치기 위한 것”이라고 오해했을 정도다.

선조대왕은 의주로 피난을 떠났다.

 

훗날 영조대왕은 사명대사에게 ‘표충’이라는 충호를 내렸다.

뒷날 사명대사의 제사와 위폐를 이곳으로 모시면서

절의 이름도 사명대사의 충호를 따 ‘표충사’로 바뀐 것이다.

일제 압박기에 표충사를 통도사의 말사로 격하시켰다.

사명대사 등 우국지사를 기리는 데 대한 불만의 표시였다.

청운스님은

“서산대사는 사명대사에게 자신의 법력을 넘겨주려 하면서

‘법맥을 이어주겠는가 아니면 백성을 구원하겠는가’라고 물었다.

사명대사는 ‘중생의 구제 없는 법맥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승병 발기를 청원했다”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법맥은 언기스님에게 넘어갔다.

사명은 의주에 있는 왕에게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서 도량만 고집할 수 없다.

승려도 전부 일어나 왜적을 물리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왕은 매우 기뻐하면서 사명대사를 8도승문대장으로 임명했다.

의병과 승병은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했다. 그러기를 7개월,

그때서야 명나라도 조선의 위태로움을 알고 지원병을 보냈다.

청운스님은
승병 전투 상황, 일본과 강화협상에서 사명대사와 덕천가강의 담판,

덕천가강의 아들이 사명대사의 제자가 된 이야기, 사명의 영의정 발탁과 퇴진의 과정,

사명대사에게 ‘표충’이라는 충호 하사 과정을 낱낱이 설명했다.

 

고고한 스님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은 알지”라며 초등학교 교장선생님 같은 말씨로

현대적 의미의 우국충정을 역설했다.

그 의미는 춘향대제를 유림과 승려들이 함께 지낸 것과도 맞닿아 있다.

 

청운스님은

“자존심 강한 유림들도 사명대사가 승려 이전에 ‘거룩한 선조’로 존경을 표시하고 본을 받으려는 것”

이라면서 “사명대사의 삶은 오늘에도 교훈을 준다”고 말했다.

 

고승은 사명대사의 삶을 ‘무소유의 행적’이라고 말했다.

청운스님은 표충사 이곳저곳에 묻어나는 사명대사의 삶을 체험한다면

국가를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국민다운 국민의 틀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2007 10/23   뉴스메이커 746호 /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

 

 

 

 

 

관음전과 나란히 있는 명부전은

지옥의 어두운(冥) 곳(府)을 관장한다는 뜻이며

저승의 유명계(幽冥界)를 사찰 속으로 옮겨놓은 법당이다.

지장보살을 위수(爲首)로 봉안하고 있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이라고도 하고

유명계의 심판관인 지옥의 시왕(十王)을 거느리고 있다하여

시왕전이라고도 한다.

명부전과 상노전(上盧殿 : 법당에 예경을 올리는 노전 스님이 거처하는 곳) 사이에는 작은 대문이 있다.

삐걱 소리가 나는 문을 열고 나서면 산죽과 잡목이 우거진 숲사이로 희미한 오솔길이 나있다. 오솔길을 따라가면 선방에서 수도를 하는 스님들이 손수 가꾸는 흙 냄새 그윽한 텃밭이 있고, 재약산에서 발원하여 층층폭포와 홍룡폭포에서 하얀 포말을 일으킨 맑은 계곡수가 흐르고 있다.

현재의 일주문과 천왕문이 들어서기 전에는 홍제교를 건너 오른쪽으로 남계천을 따라오다가 계곡을 건너 등산길을 재촉하기도 했고 우화루와 종루 사이로 정문이 나있어 대광전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절집으로 들어갔다.

표충사에는 영정사 당시에 15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내원암 진불암 한계암 서상암 적조암 봉주사 운주암 영춘암 등 9개가 있다.

수충루를 나와 산책로를 따라 100m쯤 발걸음을 옮기면 효봉대종사(曉峰大宗師) 사리탑이 있다.

수행과 자비 교화로써 일생을 보낸 효봉스님은 남다른 수행으로 치열한 삶을 살다 만일루에서 1963년 열반했는데, 사리탑과 비문을 이곳에 세웠다.

일반적인 사리탑과는 달리 자연석 바위를 기단부(基壇部)로 하고 탑신부(塔神部)도 자연석으로 하였다.

기단부 앞에는 배례석으로 보이는 돌 위에 염원을 담은 올망졸망한 돌탑이 즐비하다.

자연석 기단부는 속이 비어있다는 낭설을 들은 사람들이 소리가 나는지 확인키 위해 돌멩이로 두드린 하얀 자국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사리탑 담장 옆으로 옛 고사리분교터를 거쳐 재약산 억새 평원으로 가는 등산로가 있다.

죽림 터널을 통과하여 재약산으로 오르는 오솔길은 늦가을이면 수북이 쌓여있는 낙엽을 밟는 느낌이 푸근하다.

돌담장에는 산길을 알리는 울긋불긋한 산악회 리본들이 달려있고 빛바랜 판자에 써놓은 시 한수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개울에 발을 씻고 산빛 보며 눈을 씻네/

부질없는 부귀영화 꿈꾸지 않거니/ 이밖에 다시 무얼 구하리.」

사리탑을 지나면 암자로 가는 길이다. 한낮에도 햇빛이 보이지 않는 울창한 잡목이 우거진 숲 사이에 암자로 가는 이정표가 있다.

금강폭포와 함께 있는 한계암은 1.2km지점에 있고 금강폭포 위에 꼭꼭 숨어있는 서상암은 1.5km 지점에 위치한다.

한계암과 서상암으로 가는 길은 계곡속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오르내리며 한참동안 걸어야 한다.

한낮에도 적막감만 감도는 한계암은 금강폭포를 흘러내리는 물소리만 등산객들의 땀을 식혀주고 마당 한켠에 있는 샘에서는 쉴새없이 맑은 물이 흘러 내린다.

한계암에는 수도에 정진하는 스님의 고무신이 항상 가지런히 놓여있고 조촐한 장독대와 운반 수단으로 쓰이는 지게가 암자를 지키고 있다.

한계암에서 재약산 사자봉으로 이어지는 길을 300m쯤 따라가면 계곡 속에 작은 텃밭이 있고 숲속에 숨바꼭질하듯 서상암이 숨어 있다.

이정표에서 가까운 100m쯤에 내원암이 있고 200m지점에 진불암이 있다.

내원암은 300년전에 지어진 법당을 비롯한 목조 건물 3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2000년 12월 17일 누전으로 추정되는 화재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법당 뒤편에 있는 산신각과 독성각만이 남아있고 화재로 사라져 버린 자리에는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서 아름다운 우리 건축의 옛 정취는 오간데 없다. 내원암 커다란 감나무에 아직도 떨어지지 않고 달려있는 홍시, 바람을 막아주는 죽림만 변함없이 객들을 맞아주고 있다.

화재로 잃어버린 내원암 법당 문화유산 보존 책임이 어디 절집에만 있겠는가?

경남신문 2002.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