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정조가 방문한 남한산성

Gijuzzang Dream 2008. 1. 18. 23:30

 

 

 

 

 

 

정조가 방문한 남한산성

 

 

 

최근 남한산성에 관한 보도를 자주 접하게 된다.

 

병자호란을 다룬 소설이 인기를 끌고 있고,

남한산성 안에 있는 행궁유적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통일신라기에 조성된 건물터와 기와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남한산성의 역사는 백제 온조왕 때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 백제 초기의 유적이나 유물부터 나타난다.

따라서 남한산성 곳곳에는

2천년 이상의 세월동안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번에 소개하려는 것은 정조가 남한산성을 방문하여 남긴 유적이다.

 

정조는 1779년(정조 3)에 도성을 벗어나 남한산성과 이천, 여주를 방문했다.

7박 8일에 이르는 장거리 여행이었는데, 여행의 목적지는 여주에 있는 효종의 영릉이었다.

효종은 선왕인 인조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당한 치욕을 갚기 위해 북벌을 추진하다가

1659년에 승하했다.

그런데 1779년은 그로부터 2주갑 즉 120주년이 되는 해였으므로, 이를 기념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그러나 정조의 여행지는 남한산성에 집중되어 있었다.

정조가 그 해 새해에 자신의 스승이자 측근 신하인 서명응을 수어사에 임명했다.

당시 남한산성은 수어사의 관할 하에 있었는데,

정조는 서명응을 이곳에 파견하여 남한산성의 제반 여건을 정비하고자 했다.

 

서명응은 이곳에 부임하자마자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수리했다.

성곽을 보수하는 공사는 1779년 3월에 시작되었는데, 6월 18일에 공사가 마무리되자

정조는 유공자를 포상했다.

이 때 광주부윤 이명중은 품계가 올라갔고, 서명응은 호랑이 가죽을 선물 받았다.

국왕이 신하에게 주는 최상의 상품이었다.

 

정조가 남한산성을 방문한 첫날은 8월 3일이었다.

이날 정조는 수어사 서명응의 안내를 받으면서 남문을 통해 입성했는데,

융복 위에 황금 장식이 달린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장수의 모습이었다.

정조는 남한산성에 있는 행궁의 정당에 올라 수어사, 광주부윤, 수어청 교련관을 불러

남한산성과 광주부의 현황을 물었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서있던 바로 그 자리에서였다.

정조의 질문은 광주부의 인구, 남한산성의 군사훈련과 재정 상황에 집중되었다.

 

정조가 남한산성을 다시 방문한 것은 8월 7일이었다.

이날 정조는 다시 수어사와 광주부윤을 만나 남한산성과 광주부의 현황을 물었는데,

방문지에 대한 사전 지식이 많았던 국왕의 질문이 매우 구체적이라 관리들을 긴장하게 했다.

 

8월 8일에 정조는 남한산성 연병관에서 문무과 별시를 보았는데,

국왕과 시험관들의 복장은 모두 융복이었다.

이날 정조는 승군들이 진을 펼치는 것을 보았고,

서양에서 전래된 홍이포 계열 화포의 발사 시험을 관람했다.

 

8월 9일에 정조는 남한산성 서장대에서 주, 야간 군사훈련을 참관했다.

이날 정조는 산성 내의 서성, 남성, 북성을 차례로 돌면서 성벽의 보수 상황을 점검하고

병자호란 당시의 쓰라린 역사를 회고했다.

정조는 백성들의 채무를 탕감하는 특별 조치도 시행했다.

정조가 20년간 쌓인 채권 문서를 가져와 백성들 앞에서 불태우게 하자

이를 지켜보던 백성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8월 10일에 정조는 남한산성을 출발하여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여행을 마친 정조는 서명응에게 두 가지 임무를 부여했다.

하나는 책자를 만드는 임무였는데,

국왕의 행차를 수행한 장수 및 군사들의 이름과 숫자, 이동 경로를 상세히 기록한

"배종록(陪從錄)"을 작성하고

남한산성에 관한 고사를 정리한 "남한산성지(南漢山城誌)"를 편찬하라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기념비를 만들라는 것이었는데,

남한산성의 동문과 남문 밖에

기해년(1779)에 국왕이 방문했음을 알리는 '기해주필(己亥駐禘)' 비석을 세우게 했다.

 

정조는 7박 8일 가운데 4박 5일을 남한산성에 머물렀다.

여주의 영릉을 방문하기 위해 이동한 시간을 제외하면

사실상 대부분의 시간을 남한산성에서 보낸 것이다.

정조가 남한산성을 방문한 것은 서울을 방어하는 남쪽 거점인 남한산성의 관리 상태를 확인하고

군사 조련을 점검함으로써 혹시나 있을지 모를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남한산성에는 정조의 방문과 관련된 유적 두 가지가 남아있다.

첫째는 수어장대 아래 언덕 위에 세워진 병암남성신수비(屛岩南城新修碑)다.

이 비는 정조가 방문하기 전 남한산성 성곽을 보수한 내용을 기록한 것인데,

공사비로 돈 1만 냥과 쌀 900석이 투입되었으며

공사를 마친 후 성 서쪽에서 돌을 구해다가 새겼다고 한다.

비문은 서명응이 지었고 글씨는 광주부윤 이명중이 썼다.

 

둘째는 남한산성 동문 밖에 세워져 있는 '기해주필' 비인데,

정조의 명령에 의해 서명응이 세운 것이다.

 

남한산성 지도

 

   

남성신수비(南城新修碑)

병암(屛岩)

 

   

■ 병암(屛岩)

수어장대에서 서문방향으로 약 200m 길 우측에 두 개의 돌로 되어 있다.

이 비문에는 정조 3년(1779) '남성신수기비문(南城新修記 碑文)'이 새겨져 있어 유명하다.

이 바위 우측에 '屛岩 李民夏十歲己未書' 라는 글귀가 있는 것으로 보아

'병암(屛岩)'의 글씨는 이민하가 10세 때에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병암 남성신수기 비(屛岩南城新修記 碑)

정조 3년(1779) 6월 18일부터 약 50여 일간에 걸쳐

수어사 서명응(徐命膺)의 지휘아래 남한산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는 금석문의 하나이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산성을 증, 개축하는데 돈1만냥과 쌀 900석의 재정을 투입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 감독관인 광주부윤 이명중의 지휘아래

벽돌, 석회 등을 구워 운반하는 관리와 보수할 곳을 18구역으로 나누어

담당한 18패장의 이름을 적어 놓은 것으로 보아

선조들의 건축실명제의 한 단면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금석문이다.

이 비문은 당시 수어사였던 서명응이 짓고, 광주부윤 이명중이 쓴 것이다.

 

 

■ 주필암(駐蹕岩)

정조는 즉위 후 영릉을 참배하는 길에 자주 남한산성에 행차하여

산성의 관리 실태와 주민들의 생활상 등 민의를 살핀 개혁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정조 임금이 쉬어갔던 장소라고 해서 당시 광주 유수였던 김종수가 '己亥駐蹕(기해주필)' 이라고

바위에 새긴 글씨가 이직도 뚜렷이 남아있어 그 사실을 잘 반증해 주고 있다.

 

기해주필에서 '주필(駐蹕)'이란 "임금이 거둥하는 중간에 어가를 세워 머무르는 것"을 말하며,

검복리 103-1번지에 위치한 주필암을 말한다.

남한산성 동문 밖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주필암이라 불리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 주변은 정조 3년(1779) 정조가 여주에 있는 영릉에 행차하던 길에 쉬었던 자리라고 한다.

한편 바위 근처 언덕 위에는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그 모양이 워낙 양산을 펴놓은 것 같아서 정조가 어여삐 여겨

 "저 소나무가 하도 절묘하여 과인이 정삼품의 벼슬을 내릴 것이니,

나무기둥에다가 옥관자를 붙여주도록 하시오"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 후로부터 마을 사람들은 이 소나무를 벼슬을 받은 소나무라 해서 '대부송(大夫松)'이라 부렀는데

정3품벼슬로서 대우받다가 지금은 고사한 송암정의 소나무였다고 한다. 

 

 

 

■ 국난극복 역사의 산증인 - 남한산성 

 

남양주시 예봉산과 하남시 검단산은 그 해발 높이가 공교롭게도 똑같이 685m이다.

그러나 두 산 사이에는 북한강, 남한강에 경안천이 더해진 한강이 흐르고 있다.

양쪽 높은 산 때문인 듯 협곡을 이루고 있는데

두물머리부터 서해에 이르도록 한강에서 가장 폭이 좁은 곳이다.

그래서 '뒤가 미어진다'는 뒤밑강, 두미협(斗尾峽)으로 부르고 있다.

위쪽에 팔당댐과 아래쪽에 팔당대교가 있는 사이 지점이 두미협 구간이다.

두미협 남쪽 검단산은 급경사를 이룬 북쪽에 비해

남쪽으로는 완만히 뻗어 내려와 광지원을 이루고 산세를 돌려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과 또 다른 검단산으로 이어진다.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거대한 산 덩어리인 셈이다.


◇ 남한산성의 누명

남한산성은 나라를 지키는 중요 방위선 역할을 담당해 왔다.

전쟁이 터질 때마다 싸움터가 되었는데 삼국시대부터 6·25 전쟁까지 숱한 전장이었다.

그 중에서도 병자호란은 남한산성을 가장 널리 알리는 데 앞장섰다.

병자호란에서의 남한산성을 두고 흔히 '굴욕적인 역사의 현장' 운운하지만 이는 왜곡된 시선이다.

조선 영조때 사람 이중환은 '택리지'에

“안쪽은 평평하고 얕지만 바깥쪽은 높고 험하며 청나라 군사들이 처음 왔을 때엔 칼날도 대보지 못하였다.

병자호란 때에도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인조가 성에서 내려간 까닭은 다만 양식이 적은데다 강화(江華)가 함락되었기 때문이었다”고 적었다.

곧 남한산성의 방어력과 관계없이 항복하였다는 것이다.

국제정세에 대한 인조임금과 당시 정치지도부의 오판과 미숙한 대응이

삼전도에서의 '삼배구고두'(세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번 조아리는)의 치욕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롯데월드 근처의 삼전도가 굴욕의 현장인 것이지

달포 가량을 항전한 남한산성이 누명을 쓸 이유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서흔남(徐欣男)이라는 천민과 승려 두청(斗淸)이 아무도 응하지 않는 전령을 자청,

쪽박을 들고 거지와 병자로 위장,

삼남과 강원지방에 왕의 밀지를 알리고 또한 그들의 장계를 숨겨 들어와 왕에게 전달한다.

뿐만 아니라 서흔남은 뛰어난 위장술로 적진을 왕래하며 적정을 보고하였고,

청군 3~4명을 살해까지 하며 가의대부 품계를 받기도 한다.

또 날씨가 매우 추워 성 위에 있던 군졸 가운데 얼어죽는 자가 있을 정도로 어려움을 겪을 때,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은 남한산성을 구원하러 온다. 그는 수원과 용인사이에 있는 광교산에 주둔,

전투에 이기고 전진하는 상황을 알려 성안의 사람들에게 안정을 찾아주었다.

당시 남한산성이 오래도록 포위되고 안팎이 막히고 단절된 상태라 더욱 반가운 일이었다.

국난을 당했을 때 나라를 이끌어 가는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냉엄한 현실인식과 국제정세의 올바른 판단일 것이다.

'명분'과 '실리'라는 두 수레바퀴를 어떻게 조화시키고 움직여 나가야 할 것인가?

병자호란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반복적으로 주고 있다.


◇ 동문 안은 천주교 성지

남한산성 동문 안은 광주 유수부 시절부터 감옥이 있던 곳이다.

이곳 사형장에서는 1839년부터 1843년까지와 1866년부터 1869년까지,

그리고 그 이전에도 천주교 신자들이 사형을 당하던 곳이다.

'살아서 들어간 동문 죽어서 나온 수구문'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350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하였다는 곳.


천진암과 주어사 등 성지로 인해 광주지역은 천주교 보급이 활발하였고

그만큼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었을 것이다.

'두미협'을 통과하던 배 안에서 사돈인 이벽(정약용 큰형의 처남)으로부터 천주교를 접한 정약용의 형제들,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은 또 다산의 매부가 아니던가?

이는 김대건 신부의 고향인 충남 당진(솔뫼) 근처와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의 고향 청양 근처에서 확산되었던 천주교 보급과

해당관아인 해미읍성에서 많은 순교자가 발생한 것과 무관치 않다.

그러나 철옹성을 100여년 동안이나 축성한다는 천진암 성지에 비해

이곳 동문 안 성지는 안내판만이 외로이 서있다. 그것도 녹이 슬어 서 있다.


◇ 생태, 역사 교육의 장

남한산성의 노른자위 남한 행궁은 이제 하나 하나 옛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호텔을 철거하면서까지 행궁의 복원을 추진하는 것이다. 역사의 현장으로서 교육의 마당이 되어야 한다.

또한 솔숲에 둘러 싸인 숭열전은

백제의 시조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면서 남한산성의 축성책임자 이서를 배향하고 있다.

그리고 현절사에서는 병자호란 후 심양에 인질로 끌려간 후 순절한 삼학사,

홍익한, 윤집, 오달제와 김상헌, 정운의 충절을 기릴 수 있을 것이다.

그 뿐인가. 침괘정, 청량당, 연무관 등을 둘러보며 남한산성의 중요성을 재확인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수어장대 앞에 서서 기개를 한껏 느껴보는 것도 좋으리라.

또 여기저기 줄지어 있거나 숨어있는 금석문을 찾아 한 글자 한 글자 더듬어 읽는 맛도 각별하다.

남한산성에는 절도 많다.

불심이 돈독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산성에 있는 절에 가서 고즈넉함을 맛보는 것도 썩 좋은 일이다.

더구나 이 곳의 절들은 대개 승병들이 있던 곳이고

국가의 위기를 정면으로 돌파하고자 한 호국의 상징 아닌가?

 

남한산성은 또 생태계의 보물창고이다.
미끈하게 뻗어 올라간 적송들의 군락이 있고

딱따구리가 리듬을 쳐주는가 하면 다람쥐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한다.

여름이면 반딧불이가 어둠을 밀어내고 들꽃이 끊이지 않고 피어 있는 곳!

남한산성에 대한 자랑이 끊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장이면서 신구대학 교수인 전보삼씨이다.

성안에 만해 기념관을 열어 만해 사상의 현창에도 애쓰고 있는 그는

성긴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남한산성의 앞날을 설계하고 실현하느라 하루해가 짧다.

산성 막걸리가 있어 등산객들의 목을 축여주고 맛깔스런 음식을 파는 곳이 많은 남한산성은

생태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수도권 사람들의 허파가 되어야 할 것이다.


◇ 순암 안정복 선생의 유허지에서

남한산성에서 동쪽으로 내려와 하남시 쪽으로 방향을 틀면 은고개가 나온다.

이 은고개 정상에서 왼쪽 계곡으로 들어가면 중부면 엄미리인데 계곡을 사이에 두고 장승을 세웠다.

그런데 이 부근이 초정 박제가 선생의 묘가 있는 곳이라는데 찾을 수 없었다.

서출이어서 묘조차 행방이 묘연한 것일까?

또 다른 실학자 순암 안정복 선생의 묘와

선생의 강학소였던 여택재(麗澤齋)가 산성 남쪽 아래 중대동에 있다.

종손 병선씨가 굳건하게 지키면서 순암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있는데

답사객에게 순암집이며 족보들을 거리낌없이 보여준다.

그러나 노거수에 맑은 내가 흐르며 한 폭의 산수화 같아야 할 이 곳에 전원주택이 번성해 있다.
산림을 깎아내고 국적도 모호한 전원주택을 짓는 모순은 우리시대의 또 다른 모순이 아닐까?

- 경기문화재단, 다시보는 경기산하 / 염상균 · 문화재답사 전문가

 

 

■ 남한산성을 답사한 정약용

 

대가가 영릉에 거둥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남한산성에 이르러 군대를 사열하면서 화전과 화포를 쏘았는데 삼가 구경했던 소감을 기술하다

 

----------------------------    다산 정약용

성 머리에 해가 지고 하늘이 어두워지니

각 영의 깃발 내리고 군악소리 멈췄는데

지척의 거리 행궁은 바다처럼 깊숙하고

어두운 연기 푸르른 산빛을 덮어쌌네

 

갑자기 옹기만한 커다란 불덩이들

동대의 주변에서 어지러이 날아 솟아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가고 날아오네

 

휘익휘익 흩어져 하늘이 온통 붉은 빛

혜성처럼 빨리 날아 남북이 어지럽네

나갈 적엔 붉은 용이 구슬 토해 거침없이 허공을 날아오르고

돌아올 땐 푸른 매가 날개 접고 쏜살같이 평야를 내리치누나

 

석가여래가 순식간 찰나경에 상서로운 빛을 쏘아 내니

아란보살이 좌우로 돌아보며 어리둥절하는 정경이로세

어떤 것은 온조궁의 궁터 앞에 떨어지고

어떤 것은 한의봉에 날아가서 불이 식네

 

화전 화포 나온 지 그리 멀지 않은데

그 제도는 당초에 서양에서 얻어 왔지

네덜란드 호준포가 유별나게 매섭다면

프랑스의 백자총은 더 한층 성능 좋네

 

효종께서 청나라 정벌하실 일념으로

기발한 무기 만들어 무력을 증강시키고

원 나라 왕 구천처럼 복수할 날 고대하니

덕이 높은 후대 임금 그 사업을 이으셨네

 

온 성안 사람들은 장난삼아 구경할 뿐

성인께서 하시는 일 어리석어 알지 못해

<국역다산시문집/ 민족문화추진회 편>

- 기주짱 내용 추가 / Gijuzzang Dre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