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의 47일간 기록

Gijuzzang Dream 2008. 1. 19. 02:40

 

 

 

 “ 그 시대, 그 상황 속에서 나라면 …… ”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의 대립상황에서>

 

 

 

 

 

 

 

 

1. 병자호란 (1636년)

  

1636년(인조 14년) 조선 조정에서는

청의 수도인 선양(심양)에서 누르하치의 여덟째아들 홍타이지(태종)가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고치고 황제로 즉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척화파(항전 주장)들은

“임진왜란을 명나라의 도움을 받아 치렀으니 그 의리에 보답하고 명나라를 도와야 하는데

개, 돼지만도 못한 오랑캐에게 황제라 할 수 없다.”했고,

 

주화파(화친 주장)들은

“명나라를 능가할 정도로 세력이 강해진 청나라 현실을 인정하여 무조건 배척하면 안된다.”고 하였다.

 

임금 인조는 척화파의 입장을 선택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강화도에서 청과 ‘형제의 나라’가 되겠다고 맺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친명배청” 곧 명나라를 은혜의 나라로, 청나라는 오랑캐의 나라로 무시하였다.

인조는 먼저 청과의 단교를 선언하였다.

 

그 결과 1636년 12월 2일.

청나라 칸(汗) 태종은 12만 대군을 이끌고 심양을 출발해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침입하였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인조는 전쟁을 예견하며 각 군사요지에 장수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모든 병력을 의주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곳에 위치한 산성들에 집결시켰던 조선군은

청군의 침입 사실을 알지 못했다.

더구나 임진강 이북의 방어를 책임진 도원수 김자점은 청군이 침입했다는 최초의 보고를 묵살하고

조정에 제때 알리지도 않았고, 적이 다가오자 싸우지도 않고 도주해 버렸다.

그런데 전쟁 발생 사실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적과의 싸움마저 회피하여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던

김자점은 병자호란 이후 인조 말년에 최고위직인 영의정까지 올랐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 14년(1636) 12월 13일

 

○ 도원수 김자점이 청나라 적병이 안주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김류가 군사를 소집하여 임금을 호위하게 해서 강화도로 들어갈 것을 청하였는데, 임금은 적이 반드시 깊이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니 잠시 정확한 보고를 기다려 보자고 하였다.

  

청군은 압록강을 건넌지 6일만에 개성을 지나 한양까지 이르렀고

결국 12월 14일 임금은 왕실 가족들과 종묘에 모셔져 있던 역대 국왕의 신주들을

강화도로 먼저 옮기도록 했다.

이어 임금도 강화도로 들어가려 했으나 청군이 이미 김포에서 강화도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해 버려

숭례문에서 인조는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 14년(1636) 12월 14

 

○ 청나라 적병이 이미 송도(개성)를 지났다고 알려오자, 마침내 파천(임금이 피난하는 것)하는 의논을 정하였다. 종묘사직의 신주와 빈궁을 받들고 먼저 강화도로 향하게 하였다.

 

○ 최명길에게 강화를 청하게 하고 임금은 남한산성에 도착, 강화도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임금의 가마가 숭례문에 도착했을 때 적이 이미 양철평(지금의 은평구 녹번동)까지 왔다는 소식을 접했으므로, 최명길을 보내어 오랑캐에게 강화를 청하면서 그들의 진격을 늦추게 하도록 하였다. 임금은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2. 남한산성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사적 57호)

  

남한산성은

앞에 강을 끼고 뒤에 산을 지고 있어서 적을 막기에 좋았지만 품이 좁고

안팎으로 통하는 길이 멀고 외가닥이어서 한번 막히면 갇혀서 뚫고 나가기가 어려운 형태였다.

또 아군이 성문을 닫아걸고 성첩을 지키면

멀리서 깊이 들어와 피곤한 적병이 강가의 너른 들에서 진을 치고 앉아 힘을 회복할 수 있고,

좌우가 막히고 가운데가 열려 적이 열린 곳을 막으면 나아가 칠 수가 없으며,

안팎이 통하지 못하여 원군을 불러들일 수가 없으며,

적이 성을 깨뜨리지 않고서도 말려 죽일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1636년 12월 16일 청나라 선봉군이 한강 삼전도 들판에 본진을 펼쳤고

성곽 근처에 매복진지를 만들어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1637년 1월 1일 청나라 칸(汗)이 도착하였으며

남한산성 아래 탄천에는 20만 청나라군을 집결시켜, 남한산성은 완전히 안팎이 막혀 고립되었다.

 

  

 

 

      

   

 

 

  

남한산성은 사적 57호로 석벽으로 된 산성이며, 성곽 총연장은 11.76 km 이며,

약 14 만평이다. 행정구역은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이다.

동서남북으로 4개의 문이 있으며, 정문은 남문으로 성남시 쪽에 위치해 있다.

성내에는 군사 1만 3000명이 절약해야 겨우 50일 정도 지탱할 수 있는 식량이 있었고,

의병과 명나라 원병은 기대할 수 없었으므로 청나라군과의 결전은 불가능하였다.

 

주전을 부르짖는 예조판서 김상헌과 화친을 제의하는 이조판서 최명길의 논쟁은

남한산성에서 내내 대립되었다.

두 대신 사이에서 영의정 김류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관망하는 자세를 보였다.

또 남한산성의 방어를 맡은 수어사 이시백은

‘성을 지키는 것만이 곧 성을 나가게 되는 것’이라며 책임을 다할 뿐이었다.

 

 

3. 최명길(화친을 주장한 주화파)과 김상헌(항전을 주장한 척화파)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와 싸우자는 ‘척화파’와 강화를 맺자는 ‘주화파’가 팽팽한 입씨름을 벌였을 때, 최명길은 주화파의 대표이고, 김상헌은 척화파의 대표였어. 김상헌과 최명길은 서로를 몹시 비난했단다.

김상헌은 최명길에게 오랑캐에 빌붙어 살려는 간신이라고 비난하고, 최명길은 김상헌에게 현실을 무시하고 껍데기뿐인 명분을 좇다가 나라를 망치는 사람이라고 비난했어.

 

결국 최명길은 청나라에 강화를 청하는 편지를 썼어. 그것을 본 김상헌이 화를 내며 편지를 북북 찢어버렸단다.

“선비의 아들로 어찌 이런 짓을 할 수 있단 말이오?”

그러자 최명길은 바닥에 흩어진 편지 조각을 주워 맞추면서 미소지었어.

“대감은 찢으시오. 나는 주워 맞추리다.”

 

그런데 훗날, 두 사람은 청나라 감옥에 함께 갇히는 신세가 되었어. 두 사람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같은 감방에 갇혔단다. 서로를 미워하던 두 사람은 그제야 상대방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었어. 편지를 찢은 김상현이나 조각 난 편지를 주워 맞춘 최명길, 비록 둘 다 방법은 달랐지만 나라를 위하는 마음만은 같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야. 두 사람은 시를 지어서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았어.

 

“그대 마음 차돌 같아 끝끝내 돌리기 어렵고, 내 가는 길 고리 같아 신념 따라 돈다.”

최명길이 이렇게 시를 짓자, 김상헌이 답했단다.

 

“성공과 실패는 하늘의 운수에 달렸으니 모름지기 의리로 돌아가야 하네

아침과 저녁을 뒤집을 수 있을망정 윗옷과 아래옷을 뒤집어 입을쏘냐 …….”

그제야 두 사람은 진심으로 화해하고 상대를 존중하게 되었어. 그리고 얼마 후 그들은 무사히 감옥에서 풀려났단다.

- 한국사편지 3권, 박은봉, 웅진닷컴, 159쪽

 

 

○ 주화파 - 최명길(1586-1647 / 선조 19~인조 25)

○ 척화파 - 김상헌(1570-1652 / 선조   3~효종  3)

 

1627년(인조 5) 후금(뒷날의 청나라)이 3만 군사로 황해도까지 밀려왔다. 정묘호란이었다.

이때 임금은 강화도로 피신하였지만 궁지에 몰리자 결국 강화를 제의하였다.

최명길은 강화도의 수비조차 힘든 상황을 보면서 강화가 불가피함을 주장하여

“형제의 나라”로 화의를 성립시켰는데, 후금군이 돌아간 뒤에는 많은 지탄을 받게 되었다.

 

1636년(인조 14) 음력 12월 9일 청의 대군은 또다시 압록강을 건너 진격해 왔다.

병자호란이 일어난 것이다.

방비를 갖추지 못한 채 척화를 내세우던 조선 조정은 정묘호란 때처럼 강화도로 파천하려 했으나,

이미 길이 끊겨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임금은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 47일간 남한산성에 있었다.

 

일찍부터 오로지 항전(척화파)을 부르짖는 조정에서

홀로 화친(주화파)을 주장하여 심한 비난을 받고 있던 최명길은,

청나라 대군과 싸워 지켜낼 적극적인 대책을 펴지 못한다면 도저히 지탱할 수 없음을 걱정하면서

현실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며 강력하게 화의를 계속하여 주장하고 나섰다.

“주전파의 말은 실천 불가능한 정의였으며, 주화파의 말은 실천 가능한 치욕이었다.”

 

척화파인 김상헌과 삼학사(오달제, 윤집, 홍익한)는 전형적인 친명파로

그들은 “명은 우리의 부모와 같은 나라이고 청은 그 부모를 죽인 원수와 같은 나라입니다.

우리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원수와 한 하늘아래 살 수 없습니다.”라고 끝까지 전쟁을 주장했고,

 

주화파인 최명길은 “전쟁을 하면 결국 다치는 것은 백성들입니다.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지금은 저들을 타일러 전쟁을 피해야합니다.”라고 주장했다.

 

1637년 1월 22일. 조선군은 제대로 저항도 못한 채 청군에 의해 강화도는 함락되었고,

피란했던 왕실 가족과 중신들은 전부 포로가 되었다.

 

1월 26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마침내 남한산성의 사기를 완전히 꺾었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 15년(1637) 1월 26일

 

○ 처음으로 강도(江都=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보고를 듣고 성 안의 사람들이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최명길이 아뢰기를,

“청나라 사람들이 매번 강화도를 공격하겠다고 하더니, 지금 정말 그렇게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울면서 말을 하지 못하였다.

… (생략) … 임금은 “사태가 달라졌다. 강화도에 갔던 왕족들이 모두 잡혔고 백관의 족속들도 청나라로 끌려가게 되었으니, 혼자 산들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보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결국, 1월 30일 인조가 삼전도로 직접 나가 청나라 칸(汗) 태종에게 항복하게 되었다.

이때 진행과정에서 김상헌(金尙憲)이 조선 측의 강화문서를 찢고 통곡하니,

이를 주워 모으면서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된다.”

라고 최명길은 말하였다.

주변에 있던 관료들은 “찢는 사람이 없어서도 안되고, 다시 주워 붙이는 사람이 없어서도 안된다” 했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 15년(1637) 1월 18일

 

○ 최명길이 마침내 국서를 다시 수정을 하였는데, 예조 판서 김상헌이 밖에서 들어와 그 글을 보고는 통곡하면서 찢어 버렸다.

 

후세 사람들은 강경한 김상헌을 ‘충절의인’이라고 칭송했고,

최명길은 항복문서를 작성해 ‘나라를 구한 사람’으로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김상헌은 항복을 거부해 나라를 어려움에 빠뜨렸고,

최명길은 임금이 청나라에 굴욕을 당하게 했으니 둘 다 관리로서 책임이 있다고 하였다.

 

 

4. 청 태종에게 인조의 항복

 

▲ <조선왕조실록> 인조 15년(1637) 1월 28일

 

○ 용골대가 칸(汗)의 글을 가지고 왔다.

“… 그래서 지금 지난날의 죄를 모두 용서하고 군신이 대대로 지킬 신의로 삼는 바이다. … 그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는데 짐이 다시 살아나게 하였으며, 거의 망해가는 그대의 나라를 온전하게 해주었다. 그대는 마땅히 국가를 다시 일으켜 준 은혜를 생각하라. 뒷날 자자손손토록 신의를 어기지 말도록 한다면 그대 나라가 영원히 안정될 것이다.” 고 하였다.

 

○ 용골대가 말하기를,

“삼전포(삼전도)에 이미 항복을 받는 단을 쌓았는데, 황제가 한양에서 나오셨으니, 내일은 이 의식을 거행해야 할 것이오.” 하니,

홍서봉이 말하기를,

“임금께서 곤룡포를 착용하고 계시는데, 당연히 이 복장으로 나가야 하겠지요?” 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 “곤룡포는 입을 수 없소.” 하였다.

홍서봉이 말하기를, “남문으로 나와야 하겠지요?” 하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죄를 지은 사람은 정문을 통해 나올 수 없소.” 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 15년(1637) 1월 30일

 

○ 임금(인조)이 남색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시종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을 통해 성을 나갔는데, 왕세자(소현세자)가 따랐다. 삼전도에 나아갔다. … (생략) …

 

멀리 바라보니 청나라 칸(汗) 태종이 계단이 아홉 개나 설치된 높다란 수항단 위에 앉아 있고 노랑색 장막과 노란색 일산을 펼치고 … 임금이 걸어서 진 앞에 이르니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칸(汗)의 말을 전하기를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하자, 임금은 “천은이 망극합니다.” 하였다. 들어가 단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임금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임금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게 하였다.

… (생략) …

임금이 하직하고 나오니, 빈궁 이하 사대부 가속으로 잡힌 자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다. 용골대가 황제에게 빈궁과 대군 부인에게 나와 절하도록 청하였으므로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는데, 사실은 나인이 대신하였다고 한다.

… (생략) …

임금이 밭 가운데 앉아 돌아가기를 기다렸는데 해질 무렵이 된 뒤에야 비로소 도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왕세자와 빈궁 및 두 대군과 부인은 모두 머물러 두도록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장차 북쪽으로 데리고 가려는 목적에서였다.

 

임금이 물러나 송파나루에서 배를 타고 건넜다. 당시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백관들이 앞 다투어 건너려고 어의를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오르기도 하였다. 사로잡힌 부녀들이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며 울부짖었다.

 

… 인정(밤 10시경)때가 되어서야 한양에 도달하여 창경궁 양화당으로 나아갔다.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란 중국에서 신하가 황제를 만날 때 갖추는 예로,

세 번 머리를 조아려 절하는데,

한 번 절할 때마다 이마를 땅바닥에 세 번씩 대는 오랑캐식 항복예식이다.

인조는 얼어붙은 땅바닥에 엎드려 수항단 위의 청 태종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 삼전도비(사적 101호)

1637년 1월 30일 조선의 16대 임금 인조는 피난처였던 남한산성을 나왔다.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의 예를 올리기 위해서였다. 병자호란 발발 후 남한산성 피난 47일 만이었다.

항복, 굴욕의 순간, 그날의 광경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주상 전하께서 남색(붉은 곤룡포가 아닌 옷색) 전복 차림으로 세자와 함께

서문(죄가 있는 자이니 정문인 남문이 아님)을 통해 성을 나섰다. …… (중략) ……

주상 전하께서 삼공육경(三公六卿, 삼정승과 육조판서)을 거느리시고 백보 가량 걸어가

평지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다)’ 의 예를 행하셨다.”

 

조선의 왕이 이민족 왕 앞에 머리를 조아린 곳은 삼전도(三田渡)이다.

삼전도는 조선시대 한강상류에 있던 나루이다. 오늘날의 위치로는 서울 송파구 석촌동이다.

  

병자호란이 끝난 1639년(인조 17), 청나라 태종이 조선의 항복을 받고 세운 기념비로

‘대청황제공덕비’가 정식 이름이다.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 삼전도(현재 송파구 석촌동)에 세웠다.

앞면에는 한문, 뒷면에는 만주어와 몽골어로 씌어 있다. 

   

16, 17세기 조선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으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고

관료들은 당쟁에 몰입해 있던 시기였다.

우리나라 백성으로서, 국경일도 다들 나름대로 중요하고 의미가 있지만,

결코 잊지 말아야 할 날을 꼽자면

‘정전협정일(1953. 7. 27)’, ‘국치일(國恥日, 1910. 8. 29)’, 을사늑약 (乙巳勒約, 1905. 11. 17)‘이다.

하나 더 ‘삼전도 항복(1637. 1. 30)’이다.

 

1592년 (선조 25) 임진왜란

1597년 (선조 30) 정유재란

…… 30 년 후 ……

1627년 (인조  5) 정묘호란

1636년 (인조 14) 병자호란

1636년 12월   2일 청 태종 홍타이지가 대군을 이끌고 심양을 출발

           12월   9일 청군이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옴

           12월 13일 청군의 침입이 조정에 알려짐

           12월 14일 청군이 개성을 통과, 인조, 남한산성으로 피함

           12월 16일 청나라 선봉군이 남한산성 포위

1637년   1월   1일 청 태종이 20 만 대군을 집결시킴

             1월 22일 강화도 함락

             1월 30일 인조, 삼전도에서 항복함

 

당시 남한산성내에는 군사가 1만 2천명이었고, 비축된 식량은 1만 6천석으로 1달치 양식이었다.

 

해가 바뀐 1637년 1월 2일부터 항복하기 전 1월 28일까지 국서가 양 진영을 수차례 오간 끝에,

처참할 정도로 용서와 자비를 구한 ‘흥정’ 으로 조선은 항복으로 왕조를 유지하게 되었다.

다행히도 항복절차는 제 2등 절목(두 번째 등급)으로 결정되었다.

 

첫 번째 등급은 ‘함벽여츤(銜璧輿櫬)’ 으로

항복한 군주가 손을 뒤로 결박 짓고 옥을 입에 물며 관(棺)을 등에 진다는 뜻의 항복의식이다.

이때의 함(銜)은 대개 '재갈'이라는 뜻으로 쓰이며 재갈 물리는 것을 말한다.

말이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나무를 물리는 것을 함매(銜枚)라 하는 것이 그 예이다.

 

 

  

위의 고지도를 통해 항복하러가는 길을 살펴볼 수 있다.

중앙 우측이 남한산성이고, 한강 3개의 나룻길 중에서 가운데가 송파나루로 보인다.

송파나루 근처에 삼전도가 있었다.

삼전도 언저리에 삼전도비(대청황제공덕비, 大淸皇帝功德碑)가 1639년에 세워졌는데,

훗날 청일전쟁 직후 고종이 강물에 빠뜨렸으나 일제가 다시 일으켜 세웠고,

1945년 광복되면서 땅속에 매몰했지만

1963년 홍수로 그 모습이 드러나 문교부가 지금 위치보다 조금 동남쪽으로 세웠다.

이후 송파대로 확장으로 인해 현재 위치에 세워졌다. 사적 101호로 지정되었다.

 

청나라 칸(汗)은 인조로부터 항복을 받은 뒤 사로잡은 포로들을 이끌고 철수길에 올랐다.

항복 후, 볼모로 인조의 세 아들[소현세자, 봉림대군(효종), 인평대군]과 삼학사를 포함시켰다. 

▲ <조선왕조실록> 인조 15년(1637) 2월 2일

 

청나라 칸(汗)이 삼전도에서 철군하여 북쪽으로 돌아가니, 인조가 살곶이다리에 나가 전송하였다. 칸(汗)은 높은 언덕에 앉아 인조를 제왕의 윗자리로 인도하여 앉게 하였는데, 도승지 이경직만 따라갔다.

 

청 태종은 철군하면서 포로 66만 명을 잡아갔다.

그러면서 조선인 포로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인조에게 또 다짐을 받아냈다.

“내가 끌고 가는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도망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

하지만 압록강을 건너 단 한 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뒤에 도망쳐 오는 포로는

조선 조정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

 

영토는 넓어지는데 인구가 부족했던 청은 조선인 포로들을 보배로 여겼다.

그리고 청나라로 끌려간 포로들은 훌륭한 노동력이자 값을 받고 팔 수 있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몸값을 받고 풀어주면 막대한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평민보다 양반을 더 많이 잡아갔다.

뒷날 몸값을 바치고 풀려난 숫자만 해도 무려 63만명이었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청나라에 끌려갔는지 짐작할 수 있다.

 

 

5. 병자호란 때의 주요인물

 

▲ 최명길(崔鳴吉) 1586(선조 19)~1647(인조 25)

본관은 전주. 자는 자겸, 호는 지천 · 창랑. 시호 : 문충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 1등이 되어 완성부원군에 봉하여졌으며,

이어 이조참판이 되어 비변사 유사당상, 홍문관 부제학, 사한부 대사헌 등을 거쳤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

강화도의 수비조차 힘든 상황을 대세로 보아 강화가 불가피함을 주장함으로써

화의가 성립되어 후금군이 돌아간 뒤 많은 지탄을 받았다.

 

1632년 이조판서, 1635년 호조판서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론을 펴 극렬한 비판을 받았다.

1636년(인조 14) 음력 12월 청의 대군은 압록강을 건너 서울로 진격해 왔다.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방비를 갖추지 못한 채 척화를 내세우던 조선 조정은

9년 전 정묘호란 때처럼 강화도로 파천하려 했으나,

이미 길이 끊겨 남한산성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인조는 1636년 12월 14일부터 이듬해 1637년 1월 30일까지 47일간 남한산성에 있었다.

 

일찍부터 오로지 항전(척화파)을 부르짖는 조정에서

홀로 화친(주화파)을 주장하여 심한 비난을 받았는데,

최명길은 청나라 20만 대군과 싸워 지켜낼 적극적인 대책을 펴지 못한다면

도저히 지탱할 수 없음을 걱정하면서 현실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며

강력하게 화의를 계속하여 주장하고 나섰다.

 

쓰러진 왕조의 들판에도 대의는 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며 결사항쟁을 고집한 척화파 김상헌,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삶의 영원성이 더 가치 있다고 주장한 주화파 최명길,

그 둘 사이에서 번민을 거듭하며 결단을 미루는 조선의 임금 인조.

결국 정세가 결정적으로 기울어져

다음해인 1637년 1월에 인조가 직접 나가 청태종에게 항복하게 되었다.

 

이때 진행과정에서 김상헌(金尙憲)이 조선 측의 강화문서를 찢고 통곡하니,

이를 주워 모으면서 “조정에 이 문서를 찢어버리는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하고,

또한 나 같은 자도 없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였다.

 

1642년 영의정을 지냈으며, 1645년 인조를 보필하다 죽었다.

그런데 그가 심양에 잡혀가서 비록 갇힌 몸이 되었으나 늠름한 태도로 시종일관 비굴한 빛이 없었다.

이때에 김상헌은 그의 늠름한 태도에

“공의 주화가 오로지 나라를 위한 충성에서 비롯한 것임”을 비로소 알고 마음으로 탄복하였다.

그 후로 김상헌은 자손들에게 최공 집안과 대대로 세의를 도모하라는 유언까지 남기었다고 전한다.

성리학과 문장에도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으며, 글씨에 있어서도 동기창체로 이름이 있었다.

저서로는 <지천집> 19권과 <지천주차> 2책 등이 있다. 박천의 지천사에 제향. 

 

▲ 김상헌(金尙憲) 1570(선조 3)~1652(효종 3)

본관은 안동. 서울출생, 자는 숙도, 호는 청음(淸陰) · 석실산인(양주 석실에 퇴귀해 있으면서 사용)

· 서간노인(만년에 안동에 은거하면서 사용). 시호: 문정

 

우의정 김상용의 동생인 김상헌은 3세때 큰아버지인 현감 대효에게 출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자

공신세력의 보합위주정치에 반대 시비와 선악의 엄격한 구별을 주장함으로써

서인 청서파의 영수가 되었다.

1635년 대사헌으로 재기용되자 군비의 확보와 북방 군사시설의 확충을 주장하였고,

이듬해 예조판서로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보필하여 남한산성에 들어가

최명길 등의 주화론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 화의가 성립되자

자결하려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경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 심양으로 압송되었다. 잡혀갈 때 남긴 시조가 그의 애국충절을 말해준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한편 심양에 잡혀온 그가 모진 심문과 고문에도 끝까지 굴하지 않자

결국 청나라는 그의 충절에 감동해 “당신은 의인이요” 하면서 돌려보낸다.

귀국 후 좌의정에 올랐다가 83세로 생을 마쳤다.

'조천록' · '남차록' · '청평록' · '설교집' · '남한기략' 등으로 구성된 <청음전집> 40여 권이 전한다.

   

▲ 삼학사 - 홍익한, 윤집, 오달제

척화파의 인물인 김상헌 정온 등과 더불어 병자호란의 중심적인 사람들

 

병자호란은 임진왜란과 더불어 양대 국난으로, 엄청난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입혔다.

광해군 때 만주에서 일어난 후금이 명을 침범하자 명은 조선에 원군을 요청한다.

광해군은 임진왜란때 도와준 명에 보답하고자 강홍립을 보내어 명군을 원조하지만,

형세를 보아 향배를 결정하라는 당부를 한다. 이렇게 중립적인 외교정책을 지향한다.

명에 대한 의리를 생각하면서도 실세로 떠오르는 후금에 대한 조선의 태도였다.

 

그러나 광해군(1575∼1641)은

형인 임해군과 동생인 영창대군, 선조의 장인인 연흥부원군 김제남(1562∼1613) 등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선조의 후궁)를 서궁에 유폐 시키는 등

패륜을 자행하여 국정이 문란하여졌다.

이에 김류, 최명길, 이귀 등이 1632년 3월 12일 능양군(후에 인조)을 받들고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강화로 귀양보낸다. 이것이 인조반정이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권을 자고 나서 후금에 대한 태도가 바뀌기 시작한다.

광해군 이전의 친명정책을 표방하기 시작한다.

1636년 2월 후금은 마부대와 용골대를 보내어

몽고의 부족장이 청태종에게 올린 존호의 글을 보이며 조선도 이와 같이 할 것을 요구한다.

 

이때 윤집, 홍익한, 오달제 등과 성균관 유생 김수홍 등 133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후금에서 보낸 사신을 참수하고 문서를 불살라 버릴 것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청과의 국교 단절까지 주장한다.

홍문관과 사간원에서도 주전론(후금과의 전쟁)을 주장한다.

인조 자신도 주전론을 좇아 후금에서 보낸 사신을 감시하니 사신들은 민가의 말을 빼앗아 도주한다.

 

청태종은 1636년 12월 2일에

12만의 대군을 이끌고 심양을 출발해 9일에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략한다.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의주에 있던 임경업 장군은 백마산성을 굳게 지켰으나,

적은 길을 우회하여 안주와 평양, 황주, 평산, 개성을 거쳐 곧바로 서울로 진격한다.

다급해진 조정은 주화론(후금과 화친하는 것)자 최명길을 적진에 보내어 시간을 얻는 한편,

두 왕자와 왕족들을 강화로 피난시킨다.

 

인조 자신도 소현세자와 함께 뒤를 따르려 했으나

이미 홍제원(지금의 홍제동)이 적에게 점령당해 강화도의 길이 막히게 된다.

이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장지 항전에 돌입하게 된다.

당시 남한산성의 방어 능력은 병사 1만 2천명, 식량은 2개월(1만 4천 3백여 섬)치 뿐이었다.

 

성 내에서는 김상헌과 삼학사(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의 주전론과

최명길의 주화론으로 나누어서 시국을 수습하려했다.

한편 적은 남한산성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고사 작전으로 성 내의 식량이 바닥나기를 기다린다.

12월의 혹한과 줄어드는 식량으로 성은 매우 혼란스러워진다.

 

1637년 1월 21일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인조는 주화론의 의견에 따라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게 된다.

 

인조는 서인의 외교정책에 따라 명을 존대하고 후금을 배척한 결과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을 발발케 하여 나라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했다.

잘못된 외교정책으로 큰 고난을 겪었지만

남한산성의 47일간의 외롭고 긴 항쟁을 통해서 우리 민족의 만족정신을 고취시켰다.

 

대표적인 인물이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이다.

이들은 척화파의 인물인 김상헌 정온 등과 더불어 병자호란의 중심적인 사람들이었다.

그 당시는 최명길 등이 병자호란의 중심적인 사람들이었다.

대세가 최명길 등 주화론이었지만,

민족적 의리와 자주적인 정신에서 이들의 행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현절사에는 5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1) 홍익한(洪翼漢) 1586(선조 19)~1637(인조 15)

본관은 남양, 자는 백승, 호는 화포 · 운옹,  시호 : 충정

오달제 · 윤집과 더불어 이른바 “병자 삼학사”의 한 사람

 

1636년 청나라가 조선을 속국시하는 모욕적인 조건을 내걸고 사신을 보내오자,

상소하여 제호를 참칭한 죄를 문책하고 그 사신들을 죽임으로써 모욕을 씻자고 주장하였다.

마침내 이 해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미처 강화로 피난가지 못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그는 최명길 등의 화의론을 극구 반대하였는데,

이 난으로 그의 두 아들과 사위가 모두 적의 칼에 죽었고,

아내와 며느리는 적에게 붙들렸으나 몸을 깨끗이 보존하고자 자결하였으며,

늙은 어머니와 딸 하나만이 살아남았다.

 

이듬해 화의가 성립되었는데, 조약이 거론될 때, 김상헌·오달제·김집 등과 척화를 주장하였다.

강화체결 이후 조정의 권유로 청군의 화를 피하기 위하여 평양부서윤으로 나갔으나,

청나라의 강요로 화친을 배척한 사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오달제·운집과 함께 청나라로 잡혀갔다.

그곳에 붙들려갔어도 문초하던 청장 용골대에게

“작년 봄에 네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소를 올려 너의 머리를 베자고 청한 것은 나 한사람뿐이다.”

하였고, 갖은 협박과 유혹에도 끝내 굽히지 않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그를 비롯한 삼학사가 살해된 정확한 날짜도 모르고 오래도록 감추어져 오다가

효종 때에 홍익한에게 도승지, 윤집에 부제학, 오달제에 좌승지를 추증하게 하였고,

숙종 19년(1663)에는 삼학사에게 영의정이 추증되어 그 절개를 기리게 되었다.

광주의 현절사, 강화의 충렬사, 평택의 포의사, 홍산의 창렬서원, 부안의 도동서원, 영천의 잠엄서원,

고령의 운천서원, 평양의 서산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화포집>, <북행록>, <서정록>이 있다.

 

(2) 윤 집(尹集) 1606(선조 39)~1637(인조 15)

본관은 남원. 자는 성백, 호는 임계 · 고산 · 현감,  시호:  충정

 

1636년(인조 14)에 이조정랑 · 부교리에 이어 교리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국왕과 조정 대신들이 남한산성으로 난을 피하였으나

청병에게 산성이 포위되어 정세가 극히 불리하게 되었다.

최명길 등이 화의로 위기를 극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때 오달제·홍익한 등과 함께 화친의 사신을 보내자고 주장하는 최명길의 목을 벨 것을 청하였으며,

최명길이 국왕의 뜻을 움직여 화친의 일을 성립시키고자 입대하여 승지와 사관을 물리치도록 청하자

이를 규탄하는 극렬한 내용의 상소문을 올렸다.

 

이 상소문에서 옛날 화친을 주장하여 사필의 베임을 피할 수 없었던 주회와 같은 대간도

감히 사관을 물리치지 못하였다고 극렬한 말로 규탄하는 한편,

국왕이 대연을 꺼리지 않고 오직 사특한 의논만을 옹호하고 간사한 신하만을 의지하면

마침내 나라를 잃어버리고 만다고 경고하였다.

 

화의가 성립되자 청나라측에서 척화론자의 처단을 주장하니

그는 오달제와 더불어 소를 올려 자진하여 척화론자로 나섰다.

청병에 의하여 끌려갈 때도 조금도 절개를 굽히지 아니하여

청병이 오히려 감복하여 존경하였다고 한다.

청나라에서 고문과 회유 등으로 그의 뜻을 돌리려 하였으나

몸을 굽히는 굴복의 모욕은 죽는 것보다 도리어 더한 모욕이라며 끝내 굴하지 않고 항변하다

마침내 심양성 서문밖에 끌려가 사형 당하였다.

세상에서는 오달제·홍익한과 더불어 삼학사라고 이른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 남한산성의 현절사, 강화의 충렬사, 평택의 포의사,

홍산의 창렬서원, 영천의 장엄서원, 고령의 운천서원에 제향되었다.

 

(3) 오달제(吳澾濟) 1609(광해군 1)~1637(인조 15) 

삼학사의 한 사람. 본관은 해주. 자는 이휘, 호는 추담. 시호: 충렬

 

1634년(인조 12) 26세에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전적·병조좌랑·시강원사서·정언·지평·수찬을 거쳐, 1636년에 부교리가 되었다.

이때 후금의 세력이 날로 커져 칭제건원하고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조선을 무섭게 위협하여 왔다.

이에 화친을 위하여 주화파 최명길 등의 주장으로 사신을 교환하게 되자,

임금을 속이고 삼사의 공의를 위협, 제지하여 임의로 사신을 보낸 최명길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겨울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와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인조가 청군에 항복하게 되자,

청나라측에서는 전쟁의 책임을 척화론자에게 돌려 이들을 찾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윤집과 더불어 자진하여 척화론자로 나서서 적진에 잡혀가 청나라로 끌려가게 되었다.

 

적장 용골대는 그의 뜻을 꺾기 위하여 처자를 거느리고 청나라에 와 살라고 회유하기도 하고,

또 협박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불의라고 하고

저들의 말을 쫓으면 오랑캐가 되고 마는 것이라 하여 끝까지 항변하였다.

마침내 심양성 서문 밖에서 윤집·홍익한과 함께 처형을 당하였다.

세상에서는 이들을 삼학사라고 하여 그들의 절개와 충성을 높이 기리게 되었다.

 

그는 묵매화에도 뛰어났는데, 어몽룡 · 조속 · 허목의 화풍을 따르면서도

명나라의 묵매화풍의 영향을받아 구도가 조금은 번잡한 감을 준다.

그의 그림은 <묵매도> 2점이 전하며,

이러한 구도의 묵매화는 뒤의 조지운 · 홍수주 · 박동진 · 조희룡 · 이공우 등의 묵매화에 영향을 주었다.

좌승지 ·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광주 남한산성의 현절사, 평택의 포의사, 홍산의 창열서원,

영천의 장엄서원, 고령의 운천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렬공유고>가 있다. 

 

 

6. 만약 그 시대였다면 ‘나’는 남한산성에서 어떤 행동을 하였을까?

 

 

병자호란이 일어난 가장 큰 이유는

당시 청나라에 의해 명나라가 멸망하는 시대의 흐름에서

조선 지배층이 국제정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흘러간 역사를 되돌아보는 것뿐만 아니라,

나라와 민족에게 다른 상대국과의 외교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그 중요함을 아는 시간이기도 하다.

지금이 만약 병자호란 당시 상황이라면,

남한산성에 있는 “나”는 청나라와 대립된 상황에서 어떤 생각으로 어떤 행동을 할까??

   

 

7. 청나라 여진족과 조선 한민족의 오늘날

1644년(인조 22) 청나라가 명나라를 멸망시켰던 당시 여진족(청)의 인구는 대략 50만,

한족(명)의 인구는 1억 5000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이후 여진족은 자신들보다 300배 가까이 많은 한족들을 300년 가까이 지배하였을 만큼

세력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오늘날, 만주에서는 700만 정도의 여진족이 한족에게 동화되어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더구나 그들의 고유의 말과 문자를 말하고 읽고 쓸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나 병자호란에서 청나라 칸(汗) 홍타이지에게 조선은 비록 항복했지만

한(韓)민족은 여전히 살아남아 오늘날 ‘대한민국’ 이라는 자랑스러운 국가와 문화를 이어가고 있다.

 

 

8. 참고로 찾아가보면 좋은 곳

(1) 남한산성

(2) 강화도

(3)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 삼전도비(대청황제공덕비)

 

 

9. 참고로 읽어보면 좋은 책

 

 

(1) 남한산성 굴욕의 47일, 윤용철, 서울교과서, 2007년

(2) 유충렬전, 김현양, 현암사, 2006년

(3) 조선의 여걸 박씨부인, 정출헌, 한겨레신문사, 2000년

 

(4) 심양일기(瀋陽日記), 소현세자, 봉림대군 등, 서울대 규장각 소장

필사본. 10책. 규장각도서.

 

1637년(인조 15) 정월 30일 인조가 남한산성을 나온 날부터 1644년(인조 22) 8월 18일,

즉 청나라 세조(世祖)가 베이징[北京]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날에

세자 등을 거느리고 청나라 태종의 능(陵)에 참배할 때까지의 기록이다.

일상생활 이외에도 세자가 청나라 태종을 따라 명(明)나라를 치는 데 종군(從軍)한 일,

관소(館所)에서 듣고 본 일 등을 자세히 기록하였다.

《심양장계(瀋陽狀啓)》와 함께 당시 청나라와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사료이다.

1921년 해제(解題)를 붙여 《만몽총서(萬夢叢書)》제9권에 수록되었고,

1936년 일본인 오자와 류지로[大澤龍二郎]가 《통속조선문고(通俗朝鮮文庫)》 제9집으로 간행하였다.

 

(5) 산성일기(山城日記), 작자 미상(조선 중기)의 일기, 1책. 한글필사본.

병자호란 당시의 일을 한글로 기록한 일기체 작품이다.

작자와 저작연대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대체로 다음 두 가지 견해가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나는 현종·숙종대 창작설이고, 또 하나는 효종대 작품으로 보는 견해이다.

작자에 대해서도 전자는 척화론자로 미관의 젊은이일 것이라는 견해인 데 반해,

후자는 당시 지식층 사람으로 궁인 혹은 사관의 한 사람일 것으로 추정한다.

 

낙선재본 · 국립중앙도서관본 · 구왕궁본(舊王宮本)의 세 가지가 있다.

남한산성이 포위되어 청군(淸軍)에게 항복하기까지 약 50여일간의 사실이

일기의 형태를 빌려 집중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역사적으로 정묘호란 이후 병자년 겨울 청군의 내침에서 비롯하여

정축년 정월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적고 있다.

2월 한(汗)의 철군, 소현세자(昭顯世子) · 봉림대군(鳳林大君) 일행의 심양(瀋陽)발 행, 인조의 환궁,

4월 조선사신이 청나라 황제에게 공물을 바친 일,

11월 삼전도(三田渡)에 청나라 황제의 송덕비를 건립하게 된 일까지 소상히 묘사되어 있다.

 

<산성일기>에 기술된 사실들을

역사 기록인 <병자록(丙子錄)>이나 <남한일기(南漢日記)>에서 찾아보면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작품은 병자호란 당시 직접 인조를 보호하여 실전에 참여하고,

투항하기까지 국가의 중요시책에 직접 참여했던 인물의 체험기가 아닌가 하는 인상이 짙다.

 

뿐만 아니라 <산성일기>의 작자는 문장에도 매우 능하여

상기한 역사적 사실을 발단에서 전개, 위기를 거쳐 대단원에 이르는 하나의 단편처럼 기술하고 있다.

처음에는 누르하치와 홍타시에 관한 풍자적이며 완만한 필법에서 출발한다.

점점 논조(論調)가 강해져서 양국을 오가는 감정이 상대적으로 시소를 타는 듯한 모습을 이루다가,

30일의 출성이 고비를 이루면서 차차 기울어진다.

 

이처럼 50여일의 긴 시간적 경과가 마치 한 숨을 몰아쉬는 듯한 긴박감으로 연결되어 있어,

독자로 하여금 굴욕적 망국의 역사적 사실 앞에 울분을 금치 못하게 하고 있다.

결국, <산성일기>는 역사적 사실의 날줄에,

작자의 병자호란을 보는 심리적 의도의 씨줄을 먹여 자아낸 한 폭의 피륙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역사적 가치보다도, 작품을 통해 작자가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시대적 상황의식이

아름다운 필체로 박진감 있게 표현되고 있어 문학적 가치를 더욱 높게 평가할 만한 작품이다.

 

(6) 산성일기(山城日記), 조선 인조 때 어느 궁녀(宮女)가 쓴 일기체 수필.

병자호란(丙子胡亂, 인조 14년)이 일어나자

한 궁녀가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한 때의 시말을 적었다.

산성일기는 ‘남한산성 일기’ 로

병자년(1636년) 12월 14일부터 이듬해 1월 30일 치욕적인 항복을 하기까지의

피난처인 남한산성에서의 행적이 주요 내용이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역사의 현장이다.

 

치욕적인 외교의 일면이 생생하게 객관적으로 기록되었고,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의 일까지도 상세히 씌어 있어 사적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녔다.

 

궁체본(宮體本)과 해서체본(楷書體本)의 두 가지가 있으며,

강한영(姜漢永)의 교주(校註)가 [현대문학](1958년 10월호, 59년 2ㆍ3ㆍ5ㆍ6월호)에 발표되었다.

 

작가 : 어느 궁녀

연대 : 병자호란 이후 - 인조 15년(1637)으로 추정

갈래 : 한글로 기록한 내간체인 일기, 궁중 수필

성격 : 기록문학, 궁중문학

표현 : 간결하고 중후한 궁중어 사용

문체 : 산문체, 내간체, 서사적 일기체

주제 : - 산성에 포위된 병자호란의 치욕

         - 남한산성에 포위된 우리 군사들의 최후의 항전

 

<산성일기>는 도입부와 중심부 및 종결부의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도입부에서는

청 태조 누루하치가 명나라로부터 용호장군(龍虎將軍)의 이름을 얻는데서 시작하여

47년간의 일을 짤막하게 설명하였다.

중심부는 병자년, 곧 1636년 12월 12일부터의 전쟁에서부터 시작하여 1637년 1월 30일,

임금이 세자와 함께 청의(靑衣)를 입고 서문으로 나가 삼전도에서 청나라에게 치욕적인 항복을 하고

한양으로 돌아오기까지 47일간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종결부는 그 이후 3년간의 일을 짧게 요약한 것이다.

①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 가는 과정

② 산성에서의 처절한 항쟁

③ 삼전도에서의 항복(降伏)

 

- 병자(丙子) 12월 17일-22일 : 소규모의 전투가 계속되는 중에 청군(淸軍)이 화친을 제의함.

- 병자(丙子) 12월 23일-26일 : 왕(仁祖)의 독전(督戰)과 적진에 세찬(歲饌)을 보냈으나 거절당함.

- 병자(丙子) 12월 27일-28일 : 근왕병(勤王兵)의 구원은 오지 않고, 김유(金瑬)는 패하다.

- 병자(丙子) 12월 29일 - 정축(丁丑) 1월 1일 : 청(淸)나라 태종(太宗)이 도착함.

- 정축(丁丑)   1월  2일 : 청(淸)으로부터 굴욕적인 서신을 받아오다.

 

[의의]

- 일기지만, 사적(私的)인 면이 없고, 객관적이며 서사적(敍事的)이어서

사적(史的)인 사실의 이면(裏面)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당시의 사실을 한글로 기록한 유일한 작품이다.

- 궁중 작품인 <계축일기(癸丑日記)>와 더불어 국문학사상 쌍벽을 이루는 일기체 작품이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가장 어려움을 당시 수행했던 어느 궁인이 실기(實記)한 것이라 하나 확실하지 않다.

전란(戰亂)의 현장을 기록한 이 작품은, 당시의 여러 사정을 알려주는 사료적 가치와 함께

사건을 간결하면서도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기록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지닌 작품으로,

이 부분은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사직을 지키려는 임금의 결연한 의지가 생생하게 나타나 있고,

소규모의 전투와 함께 적군이 화의를 청해 왔으나 응하지 않았음을 서술하고 있다.

 

또한 치욕적인 외교의 일면이 생생하게 객관적으로 기록되었고,

남한산성에서의 처절한 항전(抗戰) 및 굴욕적인 외교의 일면과 암울했던 역사의 이면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의 일까지도 상세히 씌어 있고,

당시에 권력을 장악한 김류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두드러지고 있다.

간결하면서도 생동적이고 긴장감 있게 그린 궁중수필이자 실기문학으로서의 가치가 더욱 큰 작품이다.

 

[내용풀이]

십칠일에 임금(上)께서 남대문에 좌정하고 앉으셔서(殿座) 애통한 뜻을 담은 교서(哀痛敎)를 내리시니

뜰에 가득하게 늘어선 여러 신하들이 울지 않는 사람이 없더라.

 

십팔일에 북문대장(北門大將) 원두표(元斗杓)가 적군을 맞받아 쳐나가서 싸워 도적 여섯 명을 죽이다.

성중 창고의 쌀과 피, 잡곡을 모두 합해야 겨우 일만 육천여 석이 있으니

군사 만 명의 한달(一朔) 양식은 되더라.

소금 간장 종이 면화 병장기며 기타 살림살이(什物)를 모두 이서(李曙)가 장만하여 둔 것을 쓰니

이서의 재주를 칭찬하더라.

 

십구일에 남문대장(南門大將) 구굉(具宏)이 군사를 내어 싸워 도적 이십여 명을 죽였다.

크게 바람이 불고 비가 오려 하더니 김청음(金淸陰)에게 명하여 성황신(城隍神)에게 제사를 올리니

즉시 그치고 비도 오지 않더라.

 

이십일에 적장 마부대(馬夫大)가 통역사(通使) 정명수(鄭命壽)를 보내어 화친하기를 언약할 때

성문을 열지 않고 성 위에서 말을 전하게 하였다.

 

이십일일에 어영별장(御營別將) 이기축(李起築)이 군사를 거느리고 도적 십여 명을 죽이고

동문대장(東門大將) 신경진(申景?)이 또 군사를 내어 도적을 죽였다.

 

이십이일에 또 마부대(馬夫大)가 통역사를 보내어 가로대

이제는 소현세자(東宮)를 볼모로 보내라고 하지 않을 터이니

만일 다른 왕자와 대신들을 볼모로 보낸다면 약속을 정(定)하여 화친하자 하였지만,

임금(上)께서 오히려 허락하지 않으셨다.

북문 어영군(北門 御營軍)이 도적 십여 명을 죽이고 신경진이 또 삼십여 명을 죽였다.

임금께서 내정(內廷)에서 음식을 베풀어 군사들을 위로하셨다.

 

이십삼일에 동서남문의 영문(營門)에서 군사를 내고 임금께서는 북문에서 싸움을 독촉하셨다.

 

이십사일에 큰 비(大雨)가 내리니,

성첩(城堞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지키는 군사들이 모두 옷을 적시고 얼어 죽은 사람이 많으니

임금이 세자(世子)와 함께 뜰 가운데에 서서 하늘께 빌어 가로대,

“오늘날 이렇게까지 이른 것은 우리 부자(父子)가 죄를 지었음이니

이 성의 군사들과 백성들(一城軍民)이 무슨 죄가 있으리오.

하늘(天道)께서는 우리 부자에게 재앙(禍)을 내리시고 원컨대 만민(萬民)을 살려주소서.”

여러 신하들이 안으로 드시기를 청하였지만 임금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더니,

얼마 있지 않아(未久) 비가 그치고 날씨가 차지 아니하니

성중의 사람들이 감격하여 울지 않은 사람이 없더라.

 

이십오일에 아주 추웠다(極寒).

조정 대신들(廟堂)이 적진에 사신을 보내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씀하시되,

“우리나라(我國)가 항상 화친한답시고 적들에게 속기만 하니, 이제 또 사신을 보내어

치욕(辱)이 될 줄을 알지만, 모든 의논이 이러하니 지금 때가 세시(歲時)라.

술과 고기를 보내고 은합(銀盒)에다 과일을 담아 보냄으로써 두터운 정(厚情)을 보인 후에

서로 만나 얘기하며(接談) 기색을 살피리라.” 하셨다.

 

이십육일에 이경직(李景稷), 김신국(金藎國)이 술과 고기, 은합을 가지고 적진에 들어가니

적장이 가로되,

“우리 군중(軍中)에서는 날마다 소를 잡고 보물이 산처럼 높이 쌓여 있으니 이따위 것을 무엇에 쓰리오.

네 나라 군신(君臣)들이 돌구멍에서 굶은 지 오래되었으니 가히 스스로 쓰는 것이 좋을 듯 하도다.”

하고 마침내 받지 않고 도로 보냈다.

 

이십칠일에 날마다 성중에 구원(救援)하러 오는 군사를 바라되 한 사람도 오는 사람이 없고

강원감사 조정호(趙廷虎)가 본도군(本道軍)이 다 모이지 못하였기에 양평(楊根)에 물러나

뒤에 오는 군사를 기다리고,

먼저 영장(營將) 권정길(權井吉)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領兵) 검단산성(黔丹山城)에 이르러

봉화(烽火)불을 올려 서로 응하게 하였다.

 

이십팔일에 체찰사(體察使) 김류(金瑬)가 친히 장졸들을 거느리고 북성에 가서 독전(督戰)함에

도적들이 방포(放砲)소리를 듣고 거짓으로 물러나며 적은 군사와 소 말을 남겨두고 물러나니,

이것은 우리를 유인하는 꾀라. 김류가 그것을 헤아리지 못하고 군사를 독촉하여 내려가 치라 하니

산성에 있는 군사들이 그 꾀를 알고 내려가지 아니하니

김류가 병방비장(兵房裨將) 유호에게 환도(環刀)를 주어

내려가지 않는 군사들을 어지럽게 찌르게 하니,

군사들이 내려가도 죽고 아니 내려가도 죽겠으므로 비로소 내려가 적진의 소와 말을 잡아들이되

적들이 본 척도 아니 하다가 우리 군사들이 성에서 다 내려오기를 기다려

적의 복병(伏兵)이 사방에서 내달리고 물러갔던 적병들이 내달아

잠깐동안에 우리 군사들을 다 죽이고 접전할 적에,

김류가 화약(火藥)을 아까워하여 한꺼번에 많이 주지를 않고 달라고 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주니,

때가 급하여 미처 화약을 청하지 못하고 조총(鳥銃)으로 서로 치다가 이기지 못하니

산길이 급하여 오르기 어려우니 이에 다 죽기에 이르렀다.

 

이십구일에 아무 일이 없었고, 삼십일에 큰바람이 불고 일기(日氣)가 참혹하게 나쁘더라.

이날 적들이 광나루 삼밧개 헌능 세 갈래 길로 병사를 나뉘어 진군하여 해가 저물도록 나아갈 새,

갈 때에는 크게 바람이 불고 적병이 수를 모를 정도로 많되,

큰눈이 이제 막 내렸는데 많은 수의 적병들(衆軍)이 들을 덮어 흰 눈빛 한 점도 보이지 않으니

그 수의 많음을 가히 알 수 있으리라.

적들은 그러하고 우리는 싸울 뜻이 없으니 구원하러 오는 군사는 오지 아니하고 달리 할 일이 없었는데,

행궁(行宮) 남쪽에 까치가 집(鵲巢)을 지으니 사람들마다 다 이를 바라보며 길조(吉兆)라고 하며

그 말을 서로 믿더라.

 

정축(丁丑)년 정월 초하룻날에 일식(日蝕)이 있었다.

광주목사(廣州牧使) 허휘(許徽)가 권모일기를 임금께 진상하고

백관(百官)들에게 두어 가래씩 보내었다.

아침에 선전관(宣傳官)으로 하여금 적진에 말을 전하게 하고

김신국(金藎國), 이경직(李景稷)을 보내려 하니, 적장이 대답하되,

청나라 왕(汗)이 어제 도착하여 지금 산성의 형세를 둘러보고 있으니

이후의 일은 이제 우리 장수들이 나설 바가 아니니 돌아갔다가 내일 다시 오라 하더라.

이날 오후에 동문 밖에 양산(陽傘) 두 개와 큰 기(旗)를 세웠더니,

이것이 바로 청나라 왕(汗)의 것이리라.

 

(7) 남한산성 굴욕의 47일, 윤용철 엮음, 서울교과서

<남한산성 굴욕의 47일>은 병자호란 당시의 전말을 다룬 역사 인문서이다.

철저한 사료에 의해서 호란의 발생 원인에서부터 남한산성 내의 상황, 밖의 상황,

호란이 끝나고 나서의 영향 등을 다루고 있다.

 

병자호란은 우리 역사에 있어 가장 치욕스런 사건 중의 하나다.

역사 이래 우리나라는 많은 외적의 침입을 당하고

근세에 이르러서 일본에 의해 국권 침탈 등 수난을 당하긴 했지만,

우리나라의 왕이 외국의 왕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술잔을 올린 적은 일찍이 없었기 때문이다. 즉 조선조의 인조가 유일무이하다.

 

물론 백제의 의자왕과 고구려의 영류왕이 당나라에 압송되었다는 설은 있지만,

머리를 조아린 기록은 없다.

 

역사는 늘 무수한 이야깃거리를 파생해낸다.

그렇게 파생되어 흘러넘치는 이야기들이 진실처럼 떠돌기도 한다.

이 책은 그러한 점에 철저히 눈을 감고 있다. 또한 엮은이의 추론을 삼가고 사실 전달에 주력하고 있다.

철저히 자료에 의존함으로써 독자들이 진실에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하고 있다.

 

엮은이는 이 책의 집필 근거를 나만갑의 <병자록>과 <조선왕조실록>에서 찾고 있다.

<병자록>의 저자 나만갑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옆에서 보좌하며

식량과 물품을 관리하던 양향사라는 직책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상황을 직접 접하고 가감 없이 기록했을 것이다.

즉 엮은이가 말하는 <병자록>의 진실성에 대한 근거이다.

또한 엮은이는 조선조의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을 철저히 들추어

병자호란 당시의 상황을 정리함으로써 신뢰를 더해준다.

 

이 책 <남한산성 굴욕의 47일>은 모두 4부로 구성되어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원인, 남한산성 안에서의 47일 동안 일어났던 생생한 이야기들,

산성 밖의 일, 전란 후에 병자호란으로 야기된 이야기들을 흥미 있게 구성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건조한 역사서가 아닌 대중의 읽을거리로 제공하고 있다.

또한 부록으로 등장인물들에 대한 약력 및 해설을 곁들임으로써 독자 서비스에 철저하다.

 

이 책을 읽다보면 당시와 오늘의 시대상황을 견주어 음미해볼만 한 대목이 많다.

국난에 처해 있으면서도 정치가들이 벌이는 탁상공론들이 오늘날과 하등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독자들 역시

주화파에 가담할 것인가, 척화파에 가담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안게 될 것이다.

역사는 늘 현재의 잣대만으로는 재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8) 남한산성(南漢山城), 김훈, 돌베개, 2007년

 

 . . . . . (생략) . . . . . 

남한산성은 앞에 강을 끼고 뒤에 산을 지고 있어서 적을 막기에 좋았지만 성의 지세가 물을 두르고 산에 기댄 장풍국(藏風局)이라고는 하지만 품이 좁고 안팎으로 통하는 길이 멀고 외가닥이어서 한번 막히면 갇혀서 뚫고 나가기가 어려우며 아군이 성문을 닫아걸고 성첩을 지키면 멀리서 깊이 들어와 피곤한 적병이 강가의 너른 들에서 진을 치고 앉아 힘을 회복할 수 있고 좌우가 막히고 가운데가 열려 적이 열린 곳을 막으면 목이 눌리고 성 밑이 가팔라서 안에서 웅크리고 견딜 수는 있으나 나아가 칠 수가 없으며 목이 눌리면 안팎이 통하지 못하여 원군을 불러서 부릴 수가 없으며 적이 성을 깨뜨리지 않고서도 말려 죽일 수 있는 곳이었다.

 

성 안의 먹을 것은 아껴 먹는다 해도 사십 오일이나 오십 일 정도의 분량이 남아있었다. 청병(淸兵)은 강가 삼전도 들판에 본진을 펼쳤고 성곽 근처에 매복진지를 만들어 놓았다. 그러므로 성은 안팎이 막혔다. 주전을 부르짖는 예조판서 김상헌과 화친을 간하는 이조판서 최명길의 논쟁은 이 기간 내내 이어진다. 남한산성에서 김상헌은 임금께 고한다. 화친이라 함은 국경을 사이에 두고 논할 수 있는 것이온데 지금 적들이 대병을 몰아 이처럼 깊이 들어왔으니 화친은 가당치 않사옵니다. 심양에서 예까지 내려온 적이 빈손으로 돌아갈 리도 없으니 화친은 곧 투항일 것이옵니다. 화친으로 적을 대하는 형식을 삼더라도 지킴으로써 내실을 돋우고 싸움으로써 맞서야만 화친의 길도 열릴 것이며 싸우기 지키지 않으면 화친할 길은 마침내 없을 것이옵니다.

 

이 말에 최명길이 바로 답한다. 예판의 말은 말로써 옳으나 그 헤아림이 얕사옵니다. 화친을 형식으로 내세우면서 적이 성을 서둘러 취하지 않음은 성을 말려서 뿌리 뽑으려는 뜻이 온데 앉아서 말라죽을 날을 기다릴 수는 없사옵니다. 안이 피폐하면 내실을 도모할 수 없고 내실이 없으면 어찌 나아가 싸울 수 있겠사옵니까.

두 대신 사이에서 영의정 김류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관망하는 자세로 일관한다.

   

“주전파의 말은 실천 불가능한 정의였으며, 주화파의 말은 실천 가능한 치욕이었다.”

 

쓰러진 왕조의 들판에도 대의는 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며 결사항쟁을 고집한 척화파 김상헌, 역적이라는 말을 들을지언정 삶의 영원성이 더 가치 있다, 삶의 영원성은 치욕을 덮어서 위로해줄 것이라고 주장한 주화파 최명길, 그 둘 사이에서 번민을 거듭하며 결단을 미루는 임금 인조. 그리고 전시총사령관인 영의정 김류의 복심을 숨긴 좌고우면, 산성의 방어를 책임진 수어사 이시백의 ‘수성(守城)이 곧 출성(出城)’이라는 헌걸찬 기상은 남한산성의 아수라를 한층 비극적으로 형상화한다.

 

47일간 갇힌 성 안의 무기력한 인조 앞에서 벌어진 주전파와 주화파의 치명적인 다툼 그리고 꺼져가는 조국의 운명 앞에서 고통 받는 민초들의 삶이 씨줄과 날줄이 돼 무섭도록 끈질긴 질감을 보여준다.

감당할 수 없는 역사이고, 씻을 수 없는 역사였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김씨는 ‘치욕을 기억하라(memento infamia)’고 한다. ‘삶은 치욕을 견디는 나날’이라고 한다.

‘살아남기 위해 불가피하게 더럽혀지는 인간들이 아름답다’고 한다.

역사는 삶과 죽음의 기록이다. 치욕의 역사는 살아 낸 삶의 이력이다.

이 치욕이 단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 미래형이 될 수 있음을 그는 에둘러 말하고 있다.

 

조선의 임금 인조가 남한산성에 머문 1636년 12월 14일부터 1637년 1월 30일까지를 배경으로 삼는다.

병자년 겨울, 청의 수십만 대군이 남한산성을 에워싼다.

청과 죽기로 싸우자는 김상헌과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니

청의 요구를 들어주며 화친하자는 최명길 사이에서 인조는 아무 선택도 하지 못하고 번민한다.

척화파와 주화파 사이에 벌어진 설전과 더불어 영의정 김류와 수어사 이시백의 활약이 보태지며

남한산성 일대를 중심으로 얽힌 역사가 작가 특유의 문장으로 펼쳐진다.

 

임금은 힘이 없고, 신료들은 주전파와 주화파로 갈려 끝도 없는 말싸움을 벌인다.

임금의 안위와 국가의 존망은 위태로운데

신료들은 실천으로 옮길 수 없는 말로써 날이 새고 말로써 날이 진다.

 

김훈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문장으로 발신(發身)한 대신들의 말은 기름진 뱀과 같았고, 흐린 날의 산맥과 같았다. 말로써 말을 건드리면 말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빠르게 꿈틀거리며 새로운 대열을 갖추었고, 똬리 틈새로 대가리를 치켜들어 혀를 내밀었다. 혀들은 맹렬한 불꽃으로 편전의 밤을 밝혔다. 묘당(廟堂)에 쌓인 말들은 대가리와 꼬리를 서로 엇물면서 떼뱀으로 뒤엉켰고, 보이지 않는 산택으로 치솟아 시야를 가로막고 출렁거렸다.”

 

소통과 실천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난 말들은 그 자체로 아무 의미도 없는 소리들로 무성할 따름이다.

제각기 명분과 실질을 내세워 대립하는 말들은

의미를 싣지 못한 까닭에 공중에서 엉켰다가 허무하게 사라진다.

그 무성한 말들에 사는 법이 담겨 있지 않기에 이 말들은 비루하다.

얼어 죽고 굶어죽는 군졸들조차

비루한 말들을 일으켜 국가 존망의 위기를 가리려는 신료들의 허망한 몸짓을 드러내놓고 비웃는다.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삶의 길이고, 가야 할 길이 죽음의 길일진대,

가지 말아야 할 길 앞에서 자존은 치욕으로 물들고,

가야 할 길 앞에서 명분은 죽음으로 덧없어지는 까닭에 인조의 무력함은 깊어진다.

그 두 길 위에서 신료들은 진퇴를 분별할 수 없는 임금의 무력함을

말로써 가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한다.

 

죽기로 싸우자는 김상헌의 길이나

적에게 화평을 구해 종묘사직을 살리자는 최명길의 길은 겉으로는 다르지만 실제로는 다르지 않다.

살고자 하는 길은 죽음으로 이어지고,

죽고자 하는 길은 치욕으로 이어지는데, 병자년 겨울 남한산성에서의 죽음과 치욕은 다르지 않다.

다만 임금이 가야 할 길이 치욕임을 알고 그 치욕을 명분으로 가리기 위해 말로써 싸운다.

봉건왕조 시대에 신료들의 삶과 죽음이 자신의 선택에 있지 않고,

임금이 감당해야 할 형편과 운명에 복속돼 있음을 아는 것이다.

 

 

 

- 이상 기주짱 정리

  (某 초등학교에서 역사논술을 담당, 진행하느라 정리하였던 교재 중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