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 떠나고(답사)

인천이야기 - 인천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Gijuzzang Dream 2007. 12. 24.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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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천은 ‘도시혁명’ 중

 

 

세계는 지금 ‘도시혁명’ 중이다.

혁명과제는 ‘도시를 상품화하라’는 것이다.

거의 20년 전부터 시작된 세계화와 함께 불어온 바람이다.

세계 70여 국가에서 180여 도시가 상품화 작전에 돌입했다. 작전명은 다양하다. ‘국제자유도시’ ‘경제자유구역’ ‘경제특구’ 등.

하지만 목표는 단 하나다.

도시경쟁력을 높여 국가성장 자원으로 삼자는 것이다.

 

한국도 뒤늦게 경쟁의 대열에 합류했다.

4년 전 경제자유구역이라는 이름으로 인천과 부산 그리고 전남 광양이 이 경쟁에 뛰어들었다.

 

한마디로 ‘세계로 통하는 도시상품’을 만들겠다는 얘기다.

 

특히 인천은 ‘바다에 그리는 한국의 미래와 비전’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여의도의 70배에 이르는 바다를 매립하고 있다. 그 위에 동북아의 사람과 화물, 정보가 집결하는 밑그림을 그려가고 있다.

 

도시상품도 제품력이 뒷받침해주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 제품의 품질이 세계에 인정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품질 인천’의 승부수는 무엇일까.
-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

 

 

 

 2. [인천 이야기]

‘버려진 땅’에서 ‘황금의 땅 엘도라도’로 변모하는 인천


 

토박이 시인 김윤식이 말하는 인천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순박하게 살아온 인천 역사가 역동성의 원천

   1992년. 북성동 차이나타운,

   1994년. 동구 수도국산 일대,

   1994년. 남구 숭의 로터리와 종합운동장 부근,

   1995년 월미도 (사진 위부터)

인천 이야기라고 하면, 특히 인천의 과거 이야기라고 하면 비류 백제 때로 거슬러올라가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아니면 우리가 흔히 입에 올리는 풍운과 격동의 시대, 즉 개항 무렵의 일부터 말해야 할까.

 

물론 이 글은 역사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과거라는 시대 구분이나 연대에 그렇게 크게 얽매이지 않아도 된다.

 

더구나 ‘인천의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말해달라고 요구한다면, 이는 대체로 ‘현재’의 발전을 은근히 자부하면서 그것이 미래에까지 분명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감을 내면에 깔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러니까 현재의 발전을 대비(對比)할 수 있는, 어려웠거나 어두웠던 ‘현재 바로 직전의 지난날’이면 여기서 원하는 ‘과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천이 지니고 있는 ‘현재의 발전’은 무엇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2009년 인천세계도시엑스포와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을 들 수 있을까? 이들도 틀림없이 인천의 발전상을 드러내는 하나의 요소기는 하다.

인천공항, 인천대교 또한 인천의 성장을 증명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여기에 덧붙여 인천경제자유구역의 건설을 들면 어떨까?

이는 비류 백제 이후 인천이 세계로 도약하는, 이른바 인천 유사 이래 대역사(大役事)기 때문이다.

“조수가 11m나 오르내리는 제물포의 정박지는 낮 동안엔 질퍽거리는 진흙 뻘과 다름이 없다.

모래톱에 있는 좁은 도랑인 정박지는 현대적인 용량의 배 5척을 수용할 수 있다.

눈에 띄는 것은 진흙뿐이고, 마을 뒤편의 낮은 언덕은 칙칙한 고동색이었으며, 부슬비까지 뿌리고 있었지만 제물포는 예상했던 것보다 나아 보였다.

<중략>

정박지에서 바라보면, 제물포는 바닷가의 한 모서리를 따라 뿔뿔이 흩어져 있는 초라한 집들의 덩어리였다.

흰색 칠을 한, 나무로 된 집들이 드문드문 불모의 언덕에 서 있었다.

이 주택가는 숲이 조금 우거진 언덕 가장자리에 불편하고 보잘것없는 영국 부영사관 건물이 있는 저지대로부터, 크고 장식적인 일본식 찻집과 정원, 신사가 있는 언덕까지 뻗어 있었다.

독일 상인의 집, 영국 교회, 언덕에 있는 코프페 주교의 초라한 선교소, 커다란 일본 총영사관, 몇몇 새로운 공공건물만 겨우 두드러져 보였다.”

 

이것은 1894년 우리나라를 방문한 영국 왕립지리학회 최초의 여성 회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인천항에 상륙하여 적은 인상기다.

 

조금만 더 읽어보자.


초라한 토막이 전부였던 제물포의 추억

“독자들은 아마 한국인이 제물포 어디에 있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사실 난 그들을 잊어버렸다.

왜냐하면 그들의 비중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인 거주지가 서울로 가는 큰 길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인의 마을은 그 바깥에 위치한다. 영국 교회가 서 있는 언덕 아래로부터 그 언덕을 타고 오르며,

더러운 샛길을 거쳐 닿을 수 있는 모든 암층 위에 한국인들의 토막이 꽉 들어차 있다.

주요 도로에서는 아버지들의 무기력을 본뜨고 있는 때 묻은 아이들의 조용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개항 10년 뒤인 1894년,

인천항에서 밀려나 일본 동네 한 구석에 얹혀살 듯하던 우리의 모습은

이렇게 조수가 11m나 오르내리는 바다 진흙 뻘과 칙칙하고 초라한 집들과

더러운 샛길을 거쳐 닿을 수 있는 토막과 무기력과 때 묻은 아이들이 전부였다.

 

이번에는 인천 사람의 기록을 보자.

 

“인천 발전의 태동은 일본 세력의 강화에서 비롯했으니,

일인 거류민단과 청국(淸國) 화교들이 인천 경제를 좌우했고,

일본 세력에 붙좇던 한국인이 인천 한인 사회의 경제권을 장악한 것이다.

일본말을 잘하는 영남 사람들이 약삭빠르게 진출해서 근업소(勤業所)를 창설했고,

그 다음은 지리적으로 인접한 강화와 수원 그리고 충남의 서산과 태안이며

조선조 때 혜택을 받지 못해 경제적으로 약진 분투했던 개성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서울 태생과 인천 원주민의 경제 발전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사람이 드물었던 제물포는 점점 인구가 늘어 무역항, 상업도시, 공업지대로 발전했다.

살기 좋은 ‘제밀’이란 말이 돌아 러일전쟁 후 노동인구가 인천으로 모여들었고,

대일무역의 주종인 쌀 수출이 늘어남에 따라 정미공장이 들어서 조선 말 관가에 토색당하고,

통감부 시절 이후 토지마저 빼앗긴 영세농과 소작인들이

소위 산업 예비군으로 정미소 직공이 되거나 칠통마당(옛 경기도경찰국 뒤 선창가)의 목도꾼(두 사람

또는 그 이상이 짝이 되어 뒷덜미에 몽둥이를 얹어 무거운 물건을 나르는 일꾼)이 되어

구름처럼 모여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막걸리 집, 선술집 등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식당이 날로 발전했고,

지게꾼, 인력거꾼이 신상(紳商)들과 술잔을 드는 데 조금도 겁을 내지 않았다.

한쪽으로는 미두장(米豆場)이 생겨 서울과 호남 부자들의 주머니를 털었고,

해산물 가공품이 대종을 이루었던 대중국 무역으로 중국인이 여러 방면에 진출했다.”

 

그 무렵 산업화와 함께 외지 인구의 유입으로 정신 없이 돌아가기 시작하는 인천의 상황을

언론인이었던 고일(高逸) 선생은 이렇게 저서 ‘인천석금(仁川昔今)’에 적고 있다.

 

“우리 선대는 아는 것도 변변하지 못하면서 뚝심마저 없어

자기 터전인 인천을 타국인에게 내주고 더부살이로 살았다.

특히 힘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으면서 신분의식만 앞섰던 인천 사람-인천부사청(仁川府使廳) 관내에 살던 사람-은 타관사람이 모여서 제물포를 차지하는 것을 먼발치에서 외면한 채 지내왔다.

 

말하자면 인천 사람 아닌 사람들이 일본이 주동이 되어 청인과 양인이 함께 만들어 낸 제물포에서

25년이란 세월을 그들에게 얹혀 힘겹게 살면서 인천의 터를 잡았다.

그것도 모자라서인지 그 후 25년을 인천부윤(仁川府尹) 밑에서

일본의 종으로 고생을 밥 먹듯이 하면서 지냈던 것이다. 이것이 개항 풍경의 전모다.”


개항 후 130년간 희생해온 인천, 보상받아야

갯벌을 매립한 송도국제도시(2·4공구)의 현재 모습

‘인천 한 세기’

‘개항 후의 인천풍경’

이 두 책의 저자로 의사요 향토사가면서 우리 인천의 대표적 지성이었던 신태범(愼兌範) 박사가 기술한 이 내용이야말로 우리 인천인의 과거를 참으로 적확하게 설명한다.

가난했던 인천, 남이 주인이었던 인천이 그 아픈 과거를 뒤로 한 채 오늘날 이 나라에서 가장 역동적(力動的)이며 가장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고 있다.

대역사의 그 원동력, 그 에너지는 무엇일까.

어떤 역사의 맨 밑 뿌리에서 그런 역동을, 그런 정력을 분출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신 박사가 앞의 책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후세에 자랑할 만한 명분이 뚜렷한 행적은 남기지 못했을지언정 간사하고 악독한 일인과 음흉하고 잔인한 청인이 쥐고 흔들던 막막한 항구에서 이렇다 할 아무 도움도 없이 악착스럽게 뿌리를 내린 우리 선대의 공로는 우러러 받들어야 마땅하다.”

 

“지금의 용현동 유공저유소 자리였을 것이다.

당시 POL이라고 부르던 미군 유류창을 출발한 휘발유 드럼 운반 트럭들은 옛 장안극장 위쪽 숭의동 308번지 일대를 관통하는 샛길을 통해 경인 국도로 나서는데 이 사거리에서 일단 정지를 했다가 부평 쪽으로 우회전했다.

이 길은 약 15도 정도 경사져 있어서 트럭들은 그다지 빠른 속도를 내지 않고 달렸다.

사거리에 도달하기 직전, 트럭이 더욱 속력을 줄일 무렵

골목에 숨어 있던 청년들이 두 명씩 트럭에 기어오르는 것이다.

운전석의 미군 운전병은 이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채 그냥 앞만 보고 사라지고,

그러면 골목에서 득달같이 구루마가 나오고 드럼통은 거기에 실려 어디론지 사라지는 것이었다.”

몇 해 전에 썼던 졸고(拙稿)도 읽어본다.

 

1950년대, 이런 시절도 분명 우리 인천은 겪었다. 그렇다.

바로 이런 것들이 솔직한 우리 인천의 역사요, 힘이며, 저력이었다. 난센스가 아니다.

오늘 같은 인천의 발전은 진정 그 같은 눈물 나는 과거사 위에

270만 시민의 타오르는 내재의 에너지를 집합한 데서 나온 것이다.


인천경제자유구역 개발 확실히 해야

개항 이후 13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인천은 실로 이 나라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아니 희생을 했다.

한 가지만 보라. 인천은 이 나라 경제 건설과 부흥을 위해, 안보를 책임지기 위해

변변한 해안선 하나 가지지 못한 채, 아니 다 빼앗긴 채 살아왔다.

산업화, 공업화에 따른 희생이었고, 국토분단의 뼈아픈 선물이었다.

이제 그런 역사의 보상으로서도 인천은 도시 엑스포도 열어야 하고 아시안 게임도 개최해야 하며

송도신도시, 영종도, 청라경제자유구역의 건설을 확실한 현실로 이룩해야 한다.

 

인천인들은 두 팔을 펼치고, 큰 목소리로,

비류 이후 가장 눈부신 희망과 도도한 자부심을 말해야 한다.

인천의 미래를 구태여 여기서 이야기할 것은 없을 것이다.

미래는 오늘 다음에 이어진다.

하여 오늘을, 현재를 충실히 살면 그것이 미래의 답(答)이기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답은 분명 장밋빛으로 피어 아름답게 결실을 맺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또 다시 오늘의 인천 모습 위에 옛 인천의 풍경을 오버랩해보는 심사는

넘치는 행복감과, 인천에 대한 지극히 대견스러운 심정의 역설적 표현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김윤식 / 1947년 인천 출생. 제물포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현대문학’ 시 추천으로 등단. 현 인천문인협회장
시집 『고래를 기다리며』 『북어. 2』 『사랑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마음이 저문 종소리를 울리고 있다는 것이다』 『옥탑방으로 이사하다』
기타 저서 『간추린 인천사』 『인천은 불타고 있는가』 『월미도 이야기』 (이상 공저)

 

 

 

 3. [인천의 미래] 인천은 사람과 기업과 돈을 부른다

 

여의도 70배의 동북아 비즈니스 허브 조성…

최적의 주거 · 기업환경 위해 송도 · 영종 · 청라 개발

‘Asia’s No.1 Gateway’

동북아 허브의 백년대계를 꿈꾸는 인천의 캐치프레이즈다.

 

소통과 교류의 중심으로 세계적 기업도시로 거듭 태어나겠다는 전략을 압축하고 있다.

 

인천 경제자유구역 프로젝트는 ‘서해안’이라는 공간개념과 ‘세계화 시대’라는 시간적 개념이 결합된, 집약적 국가발전전략이며 신성장 동력의 핵심사업이다.

 

세계의 경제축이 동북아로 옮겨오고 있다.

그 혜택권에 직접적으로 노출된 지역이 바로 서해안 지역이다.

세계에서 아메리카 대륙이 13조4000억 달러, 유럽연합(EU)이 12조3000억 달러, 한·중·일 동북아 3국이 10조9000억 달러의 경제규모를 갖고 있다. 세계경제의 3대 축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국가 전체 총사업체의 46%가 서울 · 인천 · 경기 즉 서해안 경제권에 밀집해 있다. 서해안 시대의 첨병인 인천은 성장동력의 잠재력이 커서 국제 비즈니스 중심도시로 도약할 수 있는 기초적 여건을 갖추고 있다는 얘기다.

서해안의 관문인 인천은 지정학적 우수성마저 갖고 있다.

인천은 비행기로 3시간 이내에 인구 100만 명 이상의 도시 61개에 접근할 수 있다.

1일 서비스가 가능한 인구는 무려 50억 명에 이른다.

이는 세계적 관심을 끌고 있는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에 못지않은 지리적 잇점이다.

더욱이 남북평화협력 시대의 최대 수혜자로 인천이 부상하고 있다.

10·4 남북정상회담의 핵심 합의사항인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의 공동어로수역과

평화수역, 해주 경제특구도 모두 대북경제협력의 전진기지로 인천의 부가가치를 높이는 요인들이다.

세계화는 이미 시대정신이 된 지 오래다.

경제단위는 국가의 개념을 넘었다.

자본 · 상품 · 인력뿐 아니라 모든 ‘거래 가능한 것’들은 국가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

이런 세계화를 뒷받침하던 제도도 여러 형태로 변화를 보이고 있다.

GATT로 대표되던 ‘관세협정’이 NAFTA·EU로 상징되는 지역경제통합으로,

다시 개별 국가 간 자유무역협정인 FTA로 변화해가고 있다.

이런 시대적 흐름에 인천, 아니 인천경제자유구역이 선발주자로 나서 대응하고 있다.


인천경제자유구역, 지리적 · 산업적 성공 잠재력 커

 

2004년 12월 ‘경제자유무역법 중 개정법률안’이 국회를 통과, 본격적으로 ‘인천개발’이 시작됐다.

이런 소통과 교류의 시대에 인천이 경제자유구역을 앞세워 국가의 중심이 되겠다는 전략이다.

 

이를 위해 인천은 여의도의 70배나 되는 209.4㎢(6333만 평)의 바다를 매립, 그 위에 ‘인텔리전트 시티’ ‘생태도시’ ‘디자인 도시’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런 ‘도시개발’의 3대 축은 송도국제도시, 영종도공항도시 그리고 청라타운이다.

송도국제도시는 바다를 메워 만든 여의도의 18배(1611만 평)나 되는 대평원 위에

홍콩이나 상하이 푸둥 같은 국제 비즈니스 도시를 일궈내는 대역사다.

 

한쪽에서는 계속 바다를 메워나가고 있고,

다른 한쪽에선 세계 5번째로 긴 사장교인 인천대교(총연장 21.27㎞),

아시아 트레이드 타워 · 송도컨벤션센터 · 송도국제학교 · 중앙공원 건설 작업이 한창이다.

이중 173만 평에 이르는 국제업무 지구개발은 송도지구의 선도 프로젝트다.

이곳에 송도의 랜드마크인 151층의 인천타워도 들어설 예정이다.

사실 ‘송도 개발’이 인천경제자유구역의 발단이 됐다.

송도 매립은 1994년부터 시작됐다.

송도 앞바다에 모래를 퍼붓던 시절인 2002년 미국 게일사와 포스코건설이 합작,

송도국제도시개발유한회사(NSIC)를 설립해서

2014년까지 오피스빌딩, 학교, 병원 등 비스니스 지원 기능을 갖춘 자족형 국제도시를 개발하기 위해

인천시와 토지 공급계약을 하면서 사실상 인천경제자유구역 구상은 구체화됐다.

여기에 2001년 영종도 국제공항의 개항도 일조했음은 물론이다.

세계는 지금 에어월드가 화두다. 공항 물류의 시대라는 뜻이다.

‘영종도공항도시’는 이런 흐름에 부합하도록 설계됐다.

2001년 개항한 인천국제공항은 현재 세계 61개 항공사, 40개국 139개 도시를 연결하고 있다.

누적 여객수 7억 명, 화물처리 능력은 세계 3위로 운송량이 1000만t을 넘어섰다.

2008년 제2활주로가 완공되면 1억 명의 여객수송도 가능할 전망이다.

또 허브공항의 척도로 가늠되는 환적률도 2006년 48%로 아시아 최고 수준이다.

지난해 개장한 30만 평의 물류단지에는

개항 첫해에 10개의 글로벌 기업을 포함한 66개 물류기업이 입주했다.

이 같은 인천국제공항이 위치한 영종지구는 4184만 평으로,

공항 자유무역지구(1700만평)와 물류첨단산업단지(120만 평) 용유 · 무의 단지(213만 평) 등으로

개발된다. 인천공항과 송도의 인천신항이 연결되면 그 시너지 효과는 매우 클 것으로 기대한다.

명실상부하게 하늘과 바다가 이어지는 아시아 물류 및 서비스 허브가 되는 것이다.

영종도는 아직 개발 초기 단계다. 영종도국제공항공사는 제5활주로까지 계획하고 있다.

청라타운에는 인구 9만 명이 입주할 수 있는 주거단지와 테마파크가 들어간다.

국제금융단지와 스포츠·레저 단지도 조성할 예정이다.

서울과 가깝고 교통의 중심지임을 염두에 둔 계획이다.

궁극적으로는 서울 인구를 끌어들이는 전국의 시범도시로 성장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청라타운의 개발은 3조3000억 원의 경제파급 효과와 3만7000개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기대된다.

2020년까지 이 3개 사업이 완성되면 484만 명의 고용 창출과

128조 원에 달하는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파급 효과가 발생할 것이다.

이는 매년 국내총생산 1%의 성장과 0.2~0.3%의 실업률을 낮추는 효과를 지닌다.

그러나 외국자본과 결합해서 국제도시를 만드는 최초의 사업 성공 여부는

결국 계획된 외국 투자유치를 성공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 인천경제자유구역에 유치한 외국 기업은 24건에 342억 달러다.

지난 10월 17일 미국의 UTC(미국 20위, 세계 126위, 21만 명 종업원) MOU 체결 등

투자유치 마케팅을 위한 ‘세리머니’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외자유치가 부진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강용진 외국어대 EU연구소 연구위원은

“아직 투자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면서

“이런 속도라면 인천경제자유구역의 성공을 확신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5년 6월 인천송도테크노파크 갯벌타워에서 열린 인천경제자유구역회의에 참석하여 토론을 주재하고 있다.

투자 여건은 외국인이 주거할 수 있는 환경과 함께 편하게 기업할 수 있는 여건을 말한다.

 

인천경제자유구역 김장근 정책기획팀장도 이에 동의한다.

그는 “외국 기업과 자본유치에도 순서가 있다”면서 “정주 여건이 마련되면 투자 유치가 활발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인천경제자유구역청도 제도적인 문제에 대해선 할 말이 많다.

이환균 청장은 “경제자유구역에 자유가 없다”고 말했다.

 

수도권 규제가 ‘예외적이고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경제자유구역’이어도

‘예외’와 ‘특별’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더나아가 투자환경 개선과 규제개혁을 풀어야 한다는 주장인 셈이다.

이는 실제적인 투자유치 과정에서도 난감한 형태로 벌어지고 있다.

인천의 랜드마크가 될 것이라고 자랑했던 ‘인천타워’(115층)가 허가가 나지 않고 있다.

주거용 복합건물에 호텔 등 특정한 사업시설이 들어갈 수 없다는 단서조항 때문이다.

김장근 팀장은 “빨리 법적 보완조치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문제는 외국 기업에 대한 국내 기업의 역차별이다.

진일수 인천대 동북아물류대학원장은 한 토론회에서

“국내 기업이 들어가지 못하는데 외국 기업이 들어오겠느냐”고 반문하면서

“국내 기업에도 외국 기업과 같은 조건으로 지원해줘야 인천경제자유구역이 성공할 수 있을 것”

이라고 말했다.


수도권 규제완화 없이 경제자유구역 성공 못해

현행 제도에서는 외국투자를 위한 ‘외자투자법’상 외국기업에게

취득세, 등록세, 지방세를 파격적으로 경감해주고 있다.

이는 사실상 국내 기업에 대한 역차별이다.

김장근 팀장은 “최근에 투자 관심을 가진 국내외 기업들 중에서도

‘삼성이 인천경제자유구역에 투자할 계획이 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면서

“그런 질문에 할 말이 없다”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2006년 6월 16일 송도국제도시와 영종도,

    인천공항을 연결하는 인천대교 상량식이 열렸다.

이 같은 법적 문제뿐 아니라 국가정책적 차원에서도 전혀 경제자유구역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그 한 예가 정부가 이달 초에 발표한 국토균형발전 시안. 이 정부정책은 234개 기초자치단체를 발전 · 성장 · 정체 · 침체지역의 4그룹으로 구분, 중앙정부의 재원지원, 세제혜택 등을 달리한다는 게 골자다.

 

이 시안에 따르면, 청라지구와 송도 7~11공구는 과밀억제권역으로 지정됐다.

이 때문에 입주 기업에는 취득세, 등록세가 3배나 중과된다.

재산세는 5년간 5배가 부과된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의 한 관계자는

“중앙정부가 경제자유구역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부족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같은 사정은 인천과 함께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된 부산도 마찬가지다.

 

부산의 한 관계자는

“지정된 경제자유구역 내에 개발제한구역, 문화재 구역 등이 적지 않게 포함됨에 따라

실질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땅은 얼마 되지 않는다”면서

“일각에선 경제자유구역 지정을 취소하자는 얘기가 나올 정도”라고 말했다.

투자 여건과 정주 여건은 결코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문제다.

동전의 앞면과 뒷면과 같은 관계라는 것은 송도국제학교 개교 연기 가능성에서도 알 수 있다.

김장근 팀장은 “학생 유치문제가 생각보다 어려운 모양”이라면서

“송도국제학교 건립 책임을 맡고 있는 송도국제도시개발유한회사(NSIC) 일각에선

내년 하반기로 예정했던 송도국제학교의 개교를 미루자는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직까지 어떤 이유든 세계의 규범을 인천에 적용하지 못한 것이다.

한국의 폐쇄적 사회문화가 세계시장에 내놓은 인천에도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갯벌 위에 우뚝 서고 있는 거대한 빌딩을 보면서 한국이 산업화된 나라임을 확인한다.

그러나 갯벌 위에 세운 도시에 외국인이 몰려오기 위해서는

산업화의 역량에 세계적 규범과 문화를 접목시켜야 한다.

이는 국가 성장모델로 지정한 중앙정부와 이를 책임지고 추진하고 있는 인천,

그리고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물론 우리 국민 모두의 숙제인 셈이다.
-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

 

 

 

 

 4. [인천의 모델 두바이]  비전이 두바이를 만들었다


“미래를 바꾸지 않으면 노예상태로 머문다”
- 세이크 모하메드 -

두바이 인공섬 팜 주메니라


 

두바이는 중동지역 아랍에미리트연합(UAE) 7개 토호국 중

수도 아부다비 다음으로 면적(3885㎢)이 넓은 국가다.

수도인 두바이는 1970년대부터 고갈되어가는 석유 중심의 경제구조를

2011년까지 완전 탈피하고자

물류 허브, 비즈니스 허브, 관광 허브, 금융 허브, 지식산업 허브 생존전략을 단계별로 구상하고

강력한 추진력으로 하나씩 실현해나가고 있다.

불모지의 뜨거운 사막을 전 세계가 주목하는 동시다발 개발 성장지로 일구어낸 두바이의 성공요인을

‘인천개조’를 직접 담당하고 있는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의 입장에서 들여다봤다. <편집자주〉


불모의 사막을 유토피아로 만든 아랍에미리트의 수도 두바이

두바이는 지리적으로 유럽, 아시아, 태평양을 연결하는 지정학적 관문에 위치하고 있고,

유가 급등과 9·11테러 사태로 주변 산유국 오일머니와 러시아 지하경제 자금이 유입되어

자금이 풍부하다.

두바이는 이슬람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실용적 자본주의를 추구하여

서구화된 문화를 형성함으로써 비즈니스 요건을 충족시켜주고 있다.

독립왕정국가 아랍에미리트의 대통령 세이크 모하메드는

꿈의 개발 계획을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강력한 리더십으로

최근의 호황기를 최대한 확장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첫 방문지인 KOTRA 중동 · 아프리카 지역본부의 한 관계자는

두바이의 성공 요인을 8가지로 압축했다.

① 개발사업으로 사업 기회 풍부

② 중동지역 경제력의 뒷받침

③ 중국시장 진입 거점으로 유리

④ 다른 중동국가에 비해 안전하고 낮은 가격

⑤ 마케팅에 유명 브랜드 활용

⑥ 쇼핑 프로그램의 탄력적 운영

⑦ 5% 관세 이외에 무세금

⑧ 저렴한 노동력 이용 가능 등이다.

 

그는 “우리가 두바이로부터 배워야 할 점은

주변 경쟁국보다 차별화되고 유리한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즉 조세 혜택을 주고 투자가치를 높일 수 있는 사업을 추진하는 등

잠재적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바이의 대표적 자유무역지대 제벨알리를 담당하는 JAFZA도 방문했다.

안내자는 9917만㎡(3,000만 평) 규모의 제벨알리를 통해

외자유치를 통한 자국경제 활성화, 중계무역 중심지 구축 목표 달성,

성공한 세계적 글로벌 기업 500개 중 이곳에서 130개 발굴,

1985년 당시 입주업체 19개 사에서 2006년 10월 현재 5500개 사로

290배 증가 등의 성과를 이루었다고 했다.

즉 예전에는 기업들이 신청하는 대로 입주가 가능했으나

지금은 선별과정을 거쳐 입주를 허가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5500개 외국 기업이 두바이에 투자, 개발 초기의 290배

(위)세계 최초의 7성 호텔이 있는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

(아래)안상수 인천시장과 두바이 JAFZA인터내셔널 술란 회장이 지난해 11월 투자 협력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제벨알리 성공 요인은 4무(無)와 2다(多)로 알려져 있다.

 

4無로는 무세금, 무제한 외환거래, 무스폰서(스폰서 제도: 아랍 국가는 원칙적으로 외국 자본이 49% 이상 투자할 수 없고, 자국 기업이나 개인을 후원자로 둬야 사업이 가능한 제도), 무노동 쟁의를 꼽을 수 있다.

 

2多로는 다양하고 편리한 지원 시스템으로 항만과 공항을 통한 물류망 구축, 관세청 등 도시 운영에 필요한 모든 기관이 자유구역 내에 입주해 업무처리가 신속하고 정확하다는 것이다.

방문지 중 3개의 대규모 인공 섬을 만들어 종합관광레저타운을 조성하는 팜 아일랜드에서는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을 체험할 수 있었다.

달에서도 식별이 가능해 세계 8번째 불가사의라고 불리는 이 사업은 실제로 보니 발상 자체가 놀라울 뿐이었다.

 

세계 최고층 빌딩 버즈 두바이 공사는 국내 기업인 삼성건설이 짓고 있어서 내심 반가웠고, 높이 700m 이상으로 그 규모에 놀랐다.

최고층 빌딩 공사가 어렵지 않을까 우려했지만 공사 현장이 무지진 대로 융기된 지질구조기 때문에 얕게는 수m의 모래층만 걷어내면 암반층이 형성돼 있어 공사 지질구조로는 양호하다는 것이다.

 


인천 성공 위해선 절박함과 생존의지가 전제돼야

두바이를 다녀오고 난 소감은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는 엄청난 공사에 놀라웠다.

반면에 눈에 보이지 않는 부작용이나 거품이 있을 것이라는 의구심도 들었다.

하지만 지질구조는 사막지대 두바이에게는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장점인 것이다.

 

두 번째로는 두바이는 문화와 콘텐츠, IT나 BT, 금융, 대학 등

공간마다 21세기가 요구하는 것을 모두 담아내고 있었다.

바이를 방문하는 어떤 사업가든 모든 활동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는 생명체가 살기 힘든 사막이지만 북쪽 페르시아만의 보존 자연은 해안 휴양지로,

내륙은 비즈니스센터로 구축해놓으면서

어떤 계절이든 어디에 있든 간에 일을 하고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두바이의 앞날에 대해서는 긍정론과 부정론이 교차하고 있다.

중동과 아프리카로 진출하고자 하는 글로벌 기업 유치를 통한 선점,

무제한 외환거래, 향후 지속적인 개발과 성장 가능성 등이 긍정론의 근거다.

부정론은 동시다발공사로

건물과잉, 거품경제, 사회 인프라 미비, 노동환경 열악에 따른 불만 고조 등이다.

인천경제자유구역은 비즈니스, IT와 BT, 물류, 지식기반 중심이라는 기존 전략에

더욱 매력적인 이슈들을 창조해내야 할 것이다.

 

인천경제자유구역은 두바이의 신화창조와 거품경제 논란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동아시아권의 경제 허브 도시 조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사업을 추진하는 데 면밀한 계획이 필요하다.

 

인천경제자유구역은 지정학적 위치, IT 강국이라는 국가 이미지, 항만과 물류 등

다른 경쟁국과 차별화된 잠재력을 잘 결합시키면

세계 속의 매력 있는 경제도시로 급부상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미래는 ‘실패하면 죽는다’는 절박함

그리고 ‘죽지 않기 위해 성공해야 한다’는 생존의지에 달려 있다.

 

두바이의 성공을 이끌고 있는 세이크 모하메드가 한 발언이 생각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그는 ‘아랍 동지들에게 고하는 말’에서

“당신들이 변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당신들이 변화를 당한다.

미래를 바꾸려고 시도하지 않는 사람은 과거의 노예 상태로 머무르게 될 것이다”라고 일갈했다.
- 김종엽〈인천경제자유구역청 도시관리과〉

 

 

 

 

 

 5. [경제자유구역 비교 분석]

인천 · 부산 · 광양 특구, 지역특화된 도시설계 추진


지역맞춤형 외자유치 통해 1190조 원 생산 유발 효과 기대

광양만 야경


1950년 9월 15일 새벽. 작전명 ‘크로마이트’(Operation Chromite).

더글라스 맥아더가 이끄는 미 제1해병사단과 제7보병사단, 그리고 대한민국 해병대가

인천항구 해변에서 북한 인민군을 맹공격을 가했다.

 

미군은 내륙으로 이동해 서울을 수복했고

부산 교두보까지 연결되는 북한군의 병참선도 차단했다.

이와 동시에 미 제8군은 부산 교두보로부터 돌파를 개시했다.

이러한 한·미연합군의 연합작전과 맥아더 장군의 기습으로

북한군을 효과적으로 섬멸할 수 있었다.

크로마이트 작전, 즉 인천상륙작전은 역사상 최고의 상륙작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불행히도 세계인의 뇌리에 각인된 인천은 전쟁의 현장이었다.

57년이 지난 오늘 인천은 전쟁의 상흔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새로운 신천지로

세계인에게 다가가고 있다.

동북아 허브를 지향하는 인천은 6000여만 평의 갯벌에 세계적 국제공항과 항만,

국제학교와 각종 레저휴양 시설을 만들어

전 세계의 비즈니스맨과 다국적기업들을 ‘초대’하고 있다.

 

인천이 ‘공산화 위기에서 벗어난 자유상징’에서 ‘경제자유구역’(Free Economic Zone)으로

대변신을 하고 있는 중이다.

 

‘경제자유구역’은 기존의 ‘수출자유지역’과는 개념이 다르다.

마산 등 수출자유지역은

우리나라가 과거 수출 위주의 정책을 펴면서

외국의 원자재 수입과 수출품 통관절차의 간소화을 위해 설치한 제도라면

 

‘경제자유구역’은 국내 기업과 세계 기업이 함께 어우러지는 국제도시를 표방하는 게 특징이다.

홍콩, 싱가포르, 아일랜드, 중국 등은 20여 년 전부터 ‘국제도시화’를 추진해왔다.

현재 세계 180개 도시가 국제화를 ‘지상목표’로 도시 개조를 추진 중이다.

정부는 2003년 인천, 부산·진해, 전남 광양을 경제자유구역으로 지정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경제자유구역이란 우리가 새로운 선진사회를 만드는 패러다임의 시도이며

국가 생존과 관련된 프로젝트”라고 역설했다.

 

인천은 물류와 비즈니스, 부산은 물류와 첨단부품, 광양은 복합 레저타운 등

특화된 지정 목표 아래 각 지역에 어울리는 맞춤형 외자유치 임무를 부여받은 것이다.

경제자유구역을 통해 도시개발과 투자유치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

국가발전의 동력으로 삼겠다는 게 자유경제구역을 지정한 취지였다.

 

한마디로 외국 기업에 경제자유구역에서 돈 벌 기회를 제공하고

그 대가로 국부를 재창출하겠다는 것이다.

정부가 기대하고 있는 경제자유구역 지정 효과는 무려 1196조 원(생산 유발 효과)이나 된다.

그에 따른 고용 유발 효과도 237만 명에 이른다.


기반시설 미비, 낮은 인지도로 외자유치 불만스러운 수준

2003년 8월 국내 최초로 지정된 인천경제자유구역은

송도, 영종, 청라지구 일원 등 3개 지구의 6336만 평 부지에

총사업비 14조7610억 원을 들여서

오는 2020년까지 49만여 명을 수용하는 기반시설을 조성하게 된다.

이 구역은 공항 · 항만과 연계된 금융 중심의 국제 업무 · 교류 거점 신도시를 비롯

IT·BT 등 미래 고부가가치 지식정보산업 R&D 허브, 국제적인 레저 · 관광단지 등이 조성된다.

 

2003년 10월 지정된 부산 · 진해 경제자유구역은

부산 강서구와 경남 진해시 일부 등 모두 104.1㎢(3154만 평) 규모에 이른다.

이곳에는 신항만 · 웅동 · 두동 · 명지 · 지사 지역 등 5개 권역별로 나눠

2020년까지 물류 수송, 첨단부품 생산기지, 메카트로닉스 산업, 항공물류,

외국자본전용 첨단산업기지 등이 집중적으로 들어서게 된다.

 

광양만권 경제자유구역은

전남 광양·여수·순천시 등 2311만 평과 경남 하동군 380만 평 등 모두 2691만 평에 이른다.

2007년부터 본격적인 개발에 들어가 오는 2013년까지 13조7500억 원을 투자해

국제업무, 상업, 주거 및 교육, 연구, 관광위락지구 등을 조성하는 등

광양항을 중국·동북아 환적화물 중심의 국제 해양물류 거점으로 개발한다.

하지만 처음의 거창한 계획에 비해 투자유치를 받은 지난 4년 동안의 실적은 기대 이하였다.

부산 · 진해의 경우 당초 계획을 200억 달러로 잡았지만 현재까지의 실적은 4분의 1에 불과하다.

부산 · 진해 경제자유구역청의 조영택 유치기획팀장은

“인천과 부산 · 진해, 광양만권 경제자유구역의 출발선이 다르다”면서

“인천은 부동산 개발에 초점이 맞춰져 상대적으로 외자유치 규모가 크다”고 말했다.

 

인천은 지금까지 342억 달러, 부산 · 진해는 45억 달러, 광양만은 30억 달러 수준이다.

그러나 순수 FRD(외국인 직접투자)는

광양만이 4억6000만 달러, 부산 · 진해가 4억5000만 달러, 인천이 2억6000달러라고 한다.


정부 지원과 각종 규제 해소가 급선무

부산 · 진해 경제자유구역청

광양만권의 경우는 기반시설 미비 등으로 인한 부진으로 총투자 건수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기반시설이 취약한 데다 부산과 인천에 비해 취약한 재정상황도 광양만권이 고전하고 있는 원인이다.

광양만권 경제자유구역청의 최우식 투자기획팀장은 “최근 수도권 기업의 지방이전이 활발하지만 전남지역은 사각지대”라면서 “이런 상황에서 전남에 대한 국고지원 확대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전남의 재정자립도는 10%대에 머물고 있다.

인천의 경우도 총사업비 규모는 크지만

아직까지 실질적인 외국인 직접투자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 정주 · 기업환경조성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한 인천경제자유구역청 관계자는

“전체 투자금액 중 외국인의 투자금액 대부분은 미정인 경우가 많다”며

“대부분이 국내 기업과 합작으로 이뤄지는 탓에 직접 들어오는 외자는 많지 않다”고 고백했다.

정부는 최근 기존의 인천, 부산 · 진해, 광양만권 등 3개 경제자유구역 이외에

별도의 지역에 2~3곳의 경제자유구역을 지정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런 재경부의 움직임에 대해 인천 등 3개 경제자유구역 도시는

현재 시행하고 있는 경제자유구역 관련 정책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추가 지정할 경우 자칫 ‘힘’이 분산돼 모든 곳을 그르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경제자유구역청의 한 관계자는

“정부의 추가 지정 의지가 워낙 강력하다”며

“기존 구역에 대한 지원도 빈약한 상태에서 집중은 안 하고 또다시 추가 지정을 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국력 분산”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경제자유구역으로 추가 지정이 검토되는 지역은 

평택 · 당진 일대의 ‘황해경제자유구역’과

전북의 새만금 · 고군산열도 · 김제공항 일대,

그리고 대구 · 경북의 금호강 유역 일원 등 3곳이다.

 

정부의 논리는 중국도 동해안에 많은 경제특구를 만들고 있고,

국토균형 발전을 꾀해야 하고, 지역 간 경쟁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는 점 등을 내세우고 있다.

 

인천발전연구원 이왕기 연구기획실장은

“원천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도 경제자유구역에서 원스톱 서비스가 이뤄지지 않고,

각 정부부처끼리의 업무 비협조, 재정지원 부족 등의 각종 문제점을 해소하는 것이

추가 지정 문제보다 더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 김태열 기획위원 yolkim@kyunghyang.com

 

 

 

  

 6. [인천의 랜드마크]

상전벽해의 인천, 더 높게 더 크게 더 화려하게



인천의 명물, 인천대교 · 인천타워 · WTC빌딩

인천대교 조감도


‘상전벽해(桑田碧海),’ 최근의 인천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가장 적합한 말이다.

과거 인천의 상징은

월미도나 송도유원지, 차이나타운,

인천상륙작전으로 상징되는 중앙공원(자유공원)과 맥아더 장군 동상 정도였다.

하지만 꽤 오랜만에 찾는 사람이라면 천지가 개벽할 만큼 변하고 있는 인천을 보게 될 것이다.

 

일산이나 분당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의 아파트 군락들,

바다를 메운 매립지에 들어서고 있는 수많은 초고층 빌딩,

어디가 끝인지 도무지 보이지 않는 바다 위의 고속도로라고 불리는 인천대교의 공사현장….

영종과 송도, 청라지구에서 펼쳐 보이는 인천의 변신은 그야말로 ‘한 편의 파노라마’를 보는 듯하다.

영종과 송도, 청라지구에서 건설되는 수많은 빌딩 중에서도

‘Asia’s NO.1 Gateway(아시아의 제1 관문) 인천’을 대표할 만한 랜드마크 건축물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랜드마크 프로젝트는 100층 안팎의 마천루 개발,

50층 안팎의 복합빌딩을 포함한 대규모 복합단지, 미니 신도시급 도시개발 등

사업비용이 수천 억 원에서 수조 원대에 달하는 초대형 부동산 개발 사업을 말한다.

사업 규모나 건물 층수 등이 기록적이어서 해당 지역에서 강한 상징성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우선 세계 10대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인천대교는

우리나라 건설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대역사(大役事)다.

영국 건설 전문지 ‘컨스트럭션 뉴스’는

지난해 인천대교를 세계 최고층 빌딩인 ‘버즈 두바이’,

미국 그랜드캐년의 공중 유리 교량인 ‘스카이 워크’ 등과 더불어

세계 토목계의 ‘경이로운 10대 프로젝트’로 선정한 바 있다.

서해를 가로지르는 인천대교의 공사 현장은

사진으로만 봐도 감동을 주고 보는 사람을 압도하게 만드는 걸작이다.


인천대교, ‘경이로운 프로젝트’에 선정돼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금문교, 호주 시드니의 하버 브리지,

일본 오다이바에 있는 레인보우 브리지 등은 다리가 도시를 상징할 만큼 세계적 ‘명물’로 꼽힌다.

이미 세계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인천 국제공항과 송도국제도시를 연결하는 인천대교는

인천이 왜 ‘Asia’s NO.1 Gateway’라는 수식어를 갖게 되었는지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2005년 첫 삽을 뜬 이후 현재까지 57%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는 인천대교는

국내에서 가장 긴 다리로 길이가 12.3㎞에 달한다.

인천대교의 주 경간(교각과 교각 사이 공중에 떠 있는 부분의 길이)이 800m에 달한다.

인천대교 프로젝트는 인천 앞바다를 가로지르며

현재의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와 제2경인고속도로를 연결하는 대규모 사업계획이다.

 

우리나라의 관문인 인천국제공항과 송도국제도시를 잇는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공사로서,

제3경인고속도로로 이어지는 송도해안도로와 연결되는 노선을 포함한다.

국내에서 가장 크고 긴 다리가 될 인천대교는 사장교로는 세계에서 5번째로 긴 다리다.

 

2005년 7월에 착공해 2009년 10월 완공을 목표로 진행 중인 인천대교는

인천국제공항과 송도국제도시를 잇는 사장교로 총 1조2700억 원의 공사비를 투입한,

총연장 12.3㎞(왕복 6차선, 교량폭 31.4m)의 해상 사장교다.

 

인천대교를 사장교로 건설하는 이유는 앵커리지를 조성하기에 다리 양끝 지반이 약하기 때문이다.

2009년 10월 개통 예정인 인천대교는

민간사업시행자가 민간자본을 투자하는 민자구간(12.34㎞)과

정부에서 국가예산을 투입하는 국고구간(8.93㎞)으로 나누어 건설하고 있다.

시공을 맡은 삼성JV의 김화수 소장은

“이번 인천대교의 시공은 첨단 신공법의 경연장임은 물론

국내 기술력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인천타워, 세계 두 번째 높은 빌딩 될 것

순수 국내기술인 패스트 트랙(fast-track), 해상매스 콘크리트 타설 공법,

콘크리트 주탑 급속 시공공법 등은 이번 공사에서 사용하는 최첨단 공법으로

국내 교량 건설의 수준을 대외적으로 과시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인천대교 건설사업단의 한 관계자는

“인천대교는 수도권 지역에서 인천국제공항까지 물류비 절감은 물론

동북아 물류 비즈니스 중심국가를 실현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할 것으로 기대한다”

고 말했다.

인천을 대표하는 또 다른 랜드마크로는

인천대교 옆에 위치한 송도국제도시에 2010년에 세울 151층 규모의 인천타워를 꼽을 수 있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과 복합 프로젝트를 개발하기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미국의 포트만 컨소시엄은 110억 달러를 투자하기로 결정했다.

 

인천타워는 쌍둥이 타워형 빌딩을 포함,

호텔, 문화시설, 해양 · 레저시설, 업무·주거시설을 갖출 예정이다.

빌딩 자체가 신개념의 복합도시라고 할 수 있다.

 

인천타워 주변 약 73만㎡의 인공호수를 포함, 풍부한 녹지공간이 조성된다.

17만㎡ 부지에 600m 높이의 쌍둥이 빌딩은

오피스 30%, 주거시설 30%, 300실 규모의 호텔, 도심형 콘도, 스카이 라운지 등이 들어서

거주와 비즈니스, 레포츠를 한곳에 묶어 국제도시로서 인천의 면모를 새롭게 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인천타워를 건립하는 데 따른 문제점도 현실적인 논란은 있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인천타워를 업무와 상업용으로 겸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지만

현행 건축법은 숙박, 위락시설이 주택과 함께 들어설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천타워를 착공하기 위해서는

건축법에 예외 규정을 두거나 건물의 용도를 일부 변경하는 등 해결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인천타워 조감도

2010년에 완공할 예정인 151층 규모의 인천타워는

높이만 610m로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에 짓고 있는 160층 규모의 ‘버즈 두바이’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빌딩으로 기록될 예정이다.

 

인천타워의 연면적은 52만㎡로 축구장 40개 규모인 데다

국내 최고층 건물인 264m 높이의 타워팰리스(69층) 빌딩보다 두 배 이상 높다.

세 번째로 인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하게 될 건축물로는

국제 금융 허브로 건설하는 청라지구의 중심부에 들어설 77층짜리 월드트레이드센터(WTC) 쌍둥이 빌딩이다.

 

81만㎡에 달하는 청라지구에는 WTC 트윈빌딩과 컨벤션센터를 비롯해 호텔, 상업, 문화시설, 외국인 전용 주거시설 등을 갖춘 비즈니스복합단지를 건설할 예정이다.

 

청라지역에는 WTCA(세계무역센터협회) 아시아태평양본부와

리만브라더스, 차더스, 크레디트스위스 등 세계적인 금융기관들과

노벨자선기금, 윌리엄&해리엇 풀브라이트센터 등 공공기관,

주메이라그룹, 소넨블린-골드만 등 부동산 개발업체, 옥스퍼드메디컬아트센터 등이

대거 들어설 전망이다.  

상업시설에는 세계 1위의 도매유통업체인 웨스트필드와 전지전자유통업체인 씨멘스도 입점한다.

 

또한 미국 라스베이거스 등 세계적으로 13개의 카지노를 운영하는 해라 엔터테인먼트와

이건희 삼성 회장이 치료를 받은 텍사스 대학의 MD앤더슨 암센터,

네바다주립대 호텔경영대학 등을 청라지구에 유치하는 방안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관계자는 “청라지구 WTC는 WTCA가 전 세계 네트워크를 통해 금융기관들을 대거 유치,

동북아 국제 금융의 랜드마크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일각에선 WTC 청라컨소시엄의 실체와 사업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컨소시엄의 주요 구성원인 WTC 에너지그룹이

전남 여수와 강원 춘천에서도 국제 무역센터를 추진했다가

사업 자체를 백지화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 김태열 기획위원 yolkim@kyunghyang.com

 

- 2007 10/30 경향,  뉴스메이커 747호

 

 

 

 

 

 성호 이익과 윤동규

 

김문식(단국대 사학과 교수)

 

인천이라 하면 우리는 흔히 개항과 함께 만들어진 근대도시를 떠올린다.

1876년 일본의 무력시위에 굴복한 조선정부가 강화도에서 수호조약을 체결한 이후

인천항이 개항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인천은 우리 근대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1875년에 일본 군함이 나타나 폭격을 가한 곳은 영종도였고,

미국, 영국, 독일과 통상조약을 맺은 곳은 화도진이었다.

이후 인천의 제물포는 서양의 근대문물을 받아들이는 관문으로 기능했다.

 

그런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인천은 고대부터 대외교역의 거점으로 기능했다.

삼국시대 초기에 인천은 미추홀이라 불렸는데

주몽의 아들인 비류가 이곳에 터를 잡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한성백제는 중국의 동진과 교역을 했는데,

동진으로 향하는 해로의 출발지는 인천시 남구 능허대 아래에 있는 한나루[大津]였다.

 

또한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와 왕래가 활발했는데,

이때에는 서해에 있는 자연도(紫燕島)가 중간기항지가 이용되었다.

자연도는 현재 인천공항이 위치한 영종도를 말하는데,

이미 고려 때부터 교통 요지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고려시대에 인천에는 인주이씨가 번성하여 5명의 왕비가 배출되었고,

이자겸이나 이인로 같은 인물도 이 집안에서 나왔다.

 

조선시대로 들어오면서 해상을 통한 대외교역이 막혀버렸고

이에 따라 인천은 대외교역의 요지라는 기능을 상실했다.

그러나 인천에는 도호부가 설치되어 관내 10개 면을 다스리는 중심지가 되었는데,

현재 문학산 자락에 남아있는 인천도호부 청사는 그 일부를 보여준다.

 

윤동규는 인천이 배출한 조선시대의 유학자이다.

1695년생인 윤동규는 원래 서울 용산동에서 태어났지만

얼마 있다가 소성 즉 인천의 도남촌으로 거주지를 옮겼다.

그의 호인 소남(邵南)은 인천의 옛 지명인 소성(邵城)과 거주지였던 도남촌(桃南村)에서

한 글자씩을 따온 것이다.

윤동규는 17살이 되던 1711년에 안산에 거주하던 이익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고,

이후 50년 동안 인천에서 안산으로의 출입을 계속했다.

이익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로는 윤동규, 이병휴, 신후담, 안정복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윤동규는 제일 먼저 이익의 제자가 되어 스승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윤동규가 스승을 얼마나 극진히 모셨는지는 안정복이 작성한 행장에 잘 나타난다.

 

신미년 가을에 이 선생(이익)께서 병환이 나 정복(안정복)이 가서 뵈었는데,

선생(윤동규)께서 병시중을 들고 있었다.

약재 올리는 일을 직접 살펴보고 코와 가래, 대소변을 받아낼 때에도

자신이 직접 부축하여 지극한 공경으로 정성스럽게 하였다.

밤이 되어도 옷을 벗지 않은 것이 여러 날이었는데 조금도 태만하거나 소홀한 기색이 없었다.

이로 인해 정복은 선생의 정성스러운 뜻이 천성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되었고,

스승을 섬기고 어른을 섬기는 도리를 알게 되었다.

 

윤동규는 이익의 제자 가운데 최연장자로서 스승이 사망한 후 학파를 이끌었고,

학문은 주자학에 바탕을 두고 이황에서 이익으로 이어지는 학설을 충실히 계승했다.

따라서 학문적으로 새로운 주장을 많이 펼치지는 않았다.

그는 고대사에 등장하는 네 강의 위치를 고증하는「사수변(四水辨)」을 작성하여

역사지리에 해박한 지식을 보여주었는데,

여기에는 여진의 침략을 물리치고 9성을 개척한 윤관 장군의 24세손이라는 점이 작용했다.

또한 윤동규는 이황의 언행을 정리한 책자의 이름을 ‘이자수어(李子粹語)’로 정했는데,

여기에는 공자, 맹자, 주자와 마찬가지로 이황을 ‘이자(李子)’로 부르자는 의지가 담겨있었다.

 

이익이 사망하자 윤동규는 스승의 문집을 편찬하는 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최근 윤동규의 후손이 보관해 오던 문집과 편지글이 인천 시립박물관에 기증되었다.

박물관의 2층 역사실에 가면 ‘도림동 파평 윤씨 소남종택 고문서’ 코너가 있는데,

이곳에는 윤동규의 문집과 고문서 이외에도 그가 착용했던 안경, 호패가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1천여 통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진 그의 편지글을 아직까지 소개되지 못하고 있다.

18세기 인천과 안산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펼쳐진 성호학파 학자들의 생생한 기록이

하루빨리 정리되어 공개되는 날을 기다린다.

- 경기문화재단,

 

 

 

 

 

 

 

 소서노의 인천을 찾아

 

테크노파크는 ‘백제 건국의 추억’ 을 알까

관교동 향교에서 바라본 문학산 능선.

오른쪽 산정상이 미사일지휘통제소 군부대가 들어서있는 문학산성이다.

사진에 보이는 이 일대가 바로 ‘2000년의 고도(古都), 미추홀’이다. ⓒ 김민수


 

# 사극 주몽과 인천

 

미추홀로 추정되는 관교동과 문학동 일대

(구글 어스 위성사진에 기초해 작성)

TV사극 ‘주몽’은 대단한 인기만큼 여파도 컸다. 기록적인 시청률로 이후 ‘대조영’과 ‘태왕사신기’에 이르는 고대사 사극 열풍의 기폭제가 되었다. 사실 주몽은 허술한 고증과 드라마의 재미를 위한 역사 왜곡의 문제도 다소 있었다. 그러나 멋진 주인공들과 배역들의 호연 덕에 2000년 전 인물들을 환생시켜 큰 울림을 주었다. 주몽도 매력적이었지만, 특히 그를 고구려 건국 시조로 만든 협력자이자 훗날 백제를 건국한 여걸 소서노는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인천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왜 뜬금없이 사극 주몽과 소서노를 말하는지 의아해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 도시의 기원은 고대사의 인물 소서노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기원전 1세기, 역사에 최초로 등장한 인천의 옛 지명 미추홀(彌雛忽)은 소서노와 그의 큰아들 비류가 고구려를 떠나와 터를 잡은 도읍지였다.

이렇듯 뿌리 깊은 인천의 역사는 오늘날 ‘인천’하면

‘차이나타운, 연안부두, 유원지, 잿빛 공단’이나 떠올리는 이들에게는 딴 나라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 소서노와 두 아들

 

문학산성 남사면에 방치된 유허. ⓒ 김민수

인천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買召忽縣) 또는 미추홀이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삼국유사’에 “미추홀은 인주(仁州, 고려시대 인천의 이름)”라는 말에서도 확인된다. 도대체 매소홀과 미추홀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사극 주몽만큼이나 흥미로운 백제 건국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먼저 ‘삼국사기’를 보면 소서노의 두 아들, 즉 장남 비류(沸流)와 차남 온조(溫祚) 중 누구를 백제의 시조로 보는 가에 따른 ‘비류설과 온조설’, 두 계보가 나온다.

비류설에 따르면, 소서노는 졸본인 연타발의 딸로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추모왕(鄒牟王) 혹은 주몽과 재혼해 고구려 건국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주몽이 북부여에서 만난 예씨 부인과 낳은 아들 유류(孺留, 유리)가 나타나자,

그를 태자로 세워 왕위를 잇게 했다.

이에 대왕에게 혹이 될 것을 염려한 장남 비류가 아우 온조에게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따로 나라를 세우자”고 설득해

어머니와 무리들을 이끌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살게 되었다고 한다.

반면 온조설에는 소서노에 대한 언급이 없다.

다만 주몽이 졸본부여의 둘째 딸(소서노)과 결혼해 낳은 두 아들, 비류와 온조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다. 이 둘은 유류가 태자로 책봉되자 가신과 백성들을 이끌고 남하해,

비류는 하남에 도읍을 정하자는 가신들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바닷가 미추홀에 터를 잡았고,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십제(十濟)로 했다.

땅이 습하고 물이 짠 미추홀과 달리 위례가 안정되고 백성들이 편안한 모습을 보고

비류가 후회하며 죽자 비류의 백성들이 위례로 와 국호를 백제로 고쳤다는 것이다.

 

# 미추홀과 매소홀의
 

‘해동지도’의 인천부(조선시대).

인천부 읍치의 장소적 특성을 살리기 위해 남쪽 방향을 위로 그리고 서쪽 해안선을 오른쪽에 표시했다. <서울대규장각 소장>

비록 온조설이 소서노의 남하 여부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는다 해도 소서노 역시 유류의 태자 책봉으로 불편했을 것이고, 비류설대로 두 아들과 함께 남하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삼국사기’에 고구려를 떠나는 소서노와 주몽의 이별에 관해 아무 언급도 없다는 점이다.

과연 고구려 건국의 협력자로서 서로를 끔찍이 여겼던 이 둘은 어떻게 헤어졌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에 나온다.

소서노는 고구려를 떠날 뜻을 “추모왕에게 청해 많은 금은보화를 나누어 갖고 두 아들과 오간, 마려 등 18인을 데리고 낙랑국을 지나 마한으로 들어갔다. … 소서노가 마한왕에게 뇌물을 바치고

서북쪽 백리의 미추홀과 하북 위례홀(지금의 서울) 등지를 얻어

소서노가 왕이라 칭하고 국호를 백제라 하였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단재는 소서노가 두 아들과 남하해 백제의 건국시조로서 여왕이 되었다고 서술했다.

고구려 건국의 주역으로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 미추홀의 의미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즉 추모왕이 헤어질 때 금은보화를 나눠주며 행복을 빌어주었듯이,

미추홀은 ‘추모왕(雛) 주몽의 축복이 두루 널리 지속될(彌) 것을 약속한 땅(忽)’으로 해석될 수 있다.

또한 소서노가 마한왕에게 뇌물을 주고 미추홀과 하북 위례홀 등의 땅을 얻었다고 했듯이,

매소홀(買召忽)이란 말 그대로 ‘소서노가 마한으로부터 구매해 얻은 땅’인 셈이다.

 

이처럼 인천은 단지 부두와 공단의 회색 먼지만 가득한 서울의 위성도시가 결코 아닌 것이다.

이곳엔 이 천년 묵은 고대사와 소서노의 숨결이 새겨져 있다. 


# 문학산성, 전술네트워크의 전진기지

과연 인천의 원형인 미추홀은 구체적으로 어디인가?

인천 시사관련 자료는 미추홀의 위치를

‘세종실록지리지’, ‘여지도서’ 등에 기초해 문학산성이라고 지목한다.

실제로 이 산성은 능허대 등의 유적과 함께 여러 고지도에 등장한다.

문학산 정상에 축성된 문학산성은 미추홀의 존재를 입증하는 핵심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산성은 흙으로 쌓은 내성과 산 정상 부위의 가파른 자연 지형을 이용해 외성을 돌로 축성한

소위 ‘테뫼식 성곽’ 구조로 알려져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산성은

“남산고성(南山古城)이라고 불리며, 돌로 쌓아 둘레가 430척”이라고 전한다.

인천시 시사편찬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1997년 실시한 지표조사 결과

처음에는 토성이던 것이 삼국말 혹은 통일신라를 거치면서 석성으로 개축되었고,

이것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성내에는 토축의 내성, 봉수대, 비류의 우물터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현재 문학산성 안에는 미사일통제소 군부대가 주둔해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되어 있다.

다만 등산로를 따라 산성의 언저리를 더듬을 수 있을 뿐.

필자는 70여년 전 인천이 낳은 미학자 우현 고유섭 선생이 그랬듯이,

추풍이 건 듯 부는 어느 날 문학산 고개의 등산로를 따라 헤맸다.

우현은 ‘애상의 청춘일기(1936)’에서 “미추홀의 옛 도읍을 찾아 문학산 고개에서 한참을 헤매다가

인생의 적막을 느꼈다”고 했다. 그가 밟았던 고개는 바로 ‘삼호현’, 곧 사모지 고개였을 것이다.

나는 이 고개의 동편 등산로를 따라 산성을 답사했다.

산성으로 향하는 능선은 마치 꿈틀거리는 뱀처럼 이어졌다. 결코 얕잡아 볼 지형이 아니었다.

산성 주변에 다다르자 산의 경사가 매우 급해진다.

아마도 임진왜란 때 이 산성에서 왜군과 맞서 싸운 인천부사 김민선이 승리했던 것도

이 탁월한 지형 덕분이리라.

남쪽 구간은 북쪽에 비해 상대적으로 접근이 쉬워 성벽이 많이 훼손된 채 방치되어 있었다.

이를 목격한 순간 내게도 쓸쓸한 적막감이 밀려왔다.

역설적으로 오늘날 문학산성이 미사일지휘 통제소로 재활용(?)되고 있는 것은

이 지역에서 산성의 전술적 기능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매우 중요함을 입증한다.

이는 문학산성이 해양방어체제적 성격에 비추어, 주변 일대를 연결한 복합적 방어체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 동국대 사학과 윤명철 교수의 견해와도 일치되는 부분이다.

즉 문학산성은 방어에 유리한 지형뿐만 아니라 주변의 여러 산봉우리와 신호를 교환하는 봉수대를

갖고 있어 미추홀을 복합적으로 방어한 전술 네트워크의 전진기지였던 것이다.

문학산 사모지고개 너머의 남쪽 전경. 가운데 청량산이 보인다.

이 산자락의 오른편 뒤에 백제의 항구 능허대가 있다.

멀리 서쪽으로 인천대교가 보인다.

청량산 왼편에 멀리 건설 중인 송도신도시 테크노파크가 보인다. ⓒ 김민수


# 고도(古都) 미추홀을 찾아

미추홀은 현 문학동과 관교동 사이의 땅에 도읍을 정하고

문학산성을 중심으로 여러 방어체제를 구축한 고대 도시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문학경기장 북문 앞을 지나는 도로 ‘관교로’를 조금 지나면

인천도호부청사와 인천향교가 나온다.

도호부청사는 원래 문학초등학교 교정에 있었던 것을 현 위치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공간적으로 문학초등학교 자리가 미추홀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곳은 문학산성을 남산으로 두고,

중국 교역의 바닷길이 시작되는 능허대로 넘어가는 사모지고개와 가까워 유사시 산성에 주둔해

고개로 넘어오는 적을 효과적으로 차단하는 배후 기지로서의 장소성을 갖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시대 지도들이 말해준다.
예컨대 해동지도는 남쪽 방향을 위로 그려 서쪽 해안선을 오른쪽에 표시한 게 특징이다.

지도의 방향을 이렇게 그린 것은 인천부 읍치의 타고난 장소성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서다.

여기서 인천도호부 관아는 문학산성을 ‘남산’으로 정면에 바라보고 있다.

문학산 정상의 봉우리를 에워싼 이 테뫼식 산성에는 ‘문학산성봉수(文鶴山城烽燧)’라고 표시되어 있다.

특히 이 지도는 읍치와 문학산성을 중심으로 주변의 산을 겹겹이 그려

공간과 장소의 전술적 중요성을 강조했다.

문학산성 너머 남쪽에는 해안선과 만나는 청량산과

백제가 중국 동진과 교역을 하며 사신을 보낸 항구 능허대가 표시돼 있다.

마지막으로 붉은 색의 교통로가 객사와 학산서원을 지나 사모지고개를 넘어 남쪽 바닷가로 향하고 있다.

나는 해 저무는 문학산에서 멀리 남쪽 매립지에서 펼쳐지고 있는

인천경제자유구역(IFEZ) 송도신도시를 바라보았다.
역사는 허물어져 방기된 채 나뒹굴어도 상관없는 2000살배기 문학산성의 잔해와 같은 것이 아니다.

땅이 무른 갯벌매립지에선 지반 침하현상을 염려해야 하듯,

부실한 역사의식 속에서는 튼실한 도시문화의 향기를 호흡할 수 없기 때문이다.
 - 2007년 10월 04일 [한국 도시디자인 탐사]
 - 김민수,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

 

 

 

 

 

 

  

 개항기 인천의 유산

 
‘국제도시 원형’ 훼손하는 짝퉁 복원

해방후 만국공원에서 자유공원으로 명칭이 바뀐 각국공원.

멀리 맥아더 동상이 보인다.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맥아더 동상은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이나

월미도의 인천상륙지점 해안선 부근으로 이전되어야 한다. ⓒ 김민수


옛 인천은 비류백제가 터 잡은 문학산 일대 인천도호부가 중심이었다.

그러나 19세기 말에 이르러 그 중심은 응봉산 일대 제물포로 바뀌었다.

이는 1882년 화도진에서 체결된 한미 수호통상조약에 이어

제물포 개항과 조계지 설정에 따른 결과였다.

오늘날 송학동, 송월동, 만석동 일대 46만2000㎡(약 14만평)의 제물포에 외국인들이

자유롭게 거주할 수 있는 조계지가 마련되었다.

그렇다면 개항 전후 제물포의 경관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 제물포의 옛 경관

1933년 ‘인천부사(仁川府史)’의 서문에서

인천부윤 마쓰시마 기요시(松島淸)는 이렇게 운을 뗐다.

“개항 당시 어떤 부락도 없고 일개 해변에 지나지 않았던 인천항이

일본 덕에 조선 내 제2의 무역항이 되었다.”

그는 제물포의 옛 경관과 비교하며, 일본의 식민통치와 자신의 업적을 공치사했던 것이다.

오늘날 인천시가 경제자유구역 송도신도시의 발전을 옛 인천과 대비시켜 부각시킬 때

즐겨 쓰는 방법과 유사해 보인다. 그런데 하고 많은 이름 중에 ‘송도’ 신도시에

왜 하필 인천부윤 마쓰시마의 이름 ‘松島’를 붙여놓았을까?

송도유원지나 송도신도시엔 눈을 씻고 봐도 소나무 섬이 없지 않은가.

개항 당시 일개 황량한 해변에 지나지 않았다는 마쓰시마의 말과 달리

제물포는 원래 군사적 요충지였다.

응봉산 남사면의 제물 포구에서 서쪽으로 뻗어나간 해안선 끝은 괭이새 부리처럼 튀어나와

‘괭이부리’ 곶이라 불렸는데, 오늘날 중구 북성동 일대에 해당된다.

‘동국여지승람’ 관방조에 따르면 “제물량영(濟物梁營), 부 서쪽 19리 되는 곳에 있으며

수군만호(水軍萬戶) 한 사람이 있다”라고 나온다.

여기서 ‘수군만호’란 수군의 종4품 무관직으로

보통 120~150명 규모의 진영(鎭營) 병력을 통솔하는 지휘관을 뜻한다.

실제로 강화와 김포로 향하는 바다 길목에 위치한 이곳은

영종진, 초지진과 함께 해안방어의 요지였다.

비록 효종 7년(1656)에 강화도 동쪽 해안으로 진영이 옮겨졌지만,

개항 즈음 포대가 제물포에 설치되면서 해안 방어지로서의 역할은 지속되었던 것이다.

제물포의 경관이 담긴 1879년에 제작된 ‘화도진도(花島鎭圖)’에는

‘괭이부리’ 곶 남쪽과 북쪽에 포대와 가옥들이 그려져 있어 단순한 해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원래 화도진은 고종이 1878년 어영대장 신정회에게 명해

제물포 일대 해안경계를 위해 세운 진지였다.

그러나 개항과 함께 조계지가 들어서자 설치 목적을 상실하고

한·미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장소로만 기억될 뿐이다.

마치 허무하게 임무가 사라진 영화 ‘실미도’ 속 군인들의 운명처럼….

사바찐이 제작한 ‘인천제물포각국조계지도(1888)’.

 손정목, ‘한국개항기 도시변화과정연구’, 154쪽에서 인용.


 

# 서양인이 본 제물포

제물포는 강화도조약(1876) 체결 후 부산과 원산에 이어 세 번째로 ‘어렵게’ 개항했다.

서울과 가까운 지리적 조건과 미곡 등 물자반출로 인한 물가앙등을 우려한 조선정부의 반대로 개항 교섭이 6년이나 지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항 후 각국조계장정 체결(1884)에 따라 제물포는 국제 조약항구로 변모해 갔다.

이 당시 제물포의 경관은 서양인들이 경탄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예컨대 조선에서 취재활동을 한 최초의 독일인 기자 지그프리트 겐테(Siegfried Genthe)는

이렇게 말했다.

 

“푸른 하늘과 바다는 물론 아름다운 만이 있는 해변과 섬이 인상적이다.

각자의 운명에 따라 이곳까지 온 제물포의 동료들은,

지구 한 모퉁이에서 더 없이 매력적이고 멋진 전경을 매일 즐기고 있는 셈이다.

제물포 개항 축하연에서 발표된 대로, 모든 사람들의 소망이 이뤄진다면,

이곳 서해안의 항구는 중국의 다른 어느 항구보다 앞서가는 최고의 조약 항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이 글은 기자이자 지리학자인 겐테가 1901년 10월부터 1년간 쾰른 신문에 연재한

조선여행기의 일부이다. 그는 높은 언덕에 자리 잡은 ‘제물포클럽(현 중구문화원)’에서

독일,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인들과 친분을 쌓으며 인천의 밝은 미래를 점치고 있었다.

겐테가 본 제물포는 앞서 1888년 조선에 온 프랑스의 여행가 샤를 루이 바라에게도

인상적인 곳이었다. 그는 지난 부산2편(본지 2007년 9월21자)에서 소개했듯이,

한반도를 최초로 종단한 서양인이었다.

그는 ‘조선종단기’에서 “경탄할 광경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것은 내 평생 처음 보는 아름다운 경관이었다”라고 했다.

그의 눈에는 제물포가 “해안선과 항구를 이루는 섬들을 따라 아기자기한 산봉우리들이

다채롭게 솟아 있었고, 항구 전체를 녹원(鹿苑)의 둥지처럼 완벽하게 감싸 안은 가운데

마침 떠오르는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고 비쳤다


# 개항장과 각국조계지

‘구일본18은행 인천지점’을 복원해 새로 개관한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 김민수

 

이처럼 개항기 제물포는 서양인들에게 환상적인 전경으로 비쳐졌다. 물론 이러한 시선 속에는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의 감성이 담겨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개항 이후 응봉산 너머 북쪽 조선전환국 일대(현 인천여고 일대) ‘북촌’에 살았던 조선인들에게는 고단한 삶의 현장일 뿐이었다. 그들은 점차 ‘남촌’의 일본인 거류지가 확장됨에 따라 소작권을 빼앗기고 부두 노동으로 생계를 잇는 도시 빈민으로 전락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경성이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촌과 남촌으로 나뉘어 일본인들이 남촌에 살았듯이,

인천에도 개항 이후 응봉산을 사이에 둔 북촌과 남촌간의 ‘차별의 벽’이 있었다.

훗날 한국의 대도시 내에 존재하는 공간적 불균형의 원형인 셈이다.

이처럼 제물포는 정치·외교적으로 조선 진출과 주권 침략의 음모가 교차한 열강의 접점이자

새로운 희망과 이국적인 장소가 되었다.

한편 잡종적인 자본과 노동이 뒤섞인 국제 항구도시로 변모해 갔다.

이 점에서 개항장 인천의 성격은 부산과 차이가 있다.

부산이 주로 일본인 전관거류지를 중심으로 일본에 독점적 지위를 부여했던 반면,

인천은 국제개항장으로서의 면모와 성격이 강했다.

즉, 일본조계(1883·9)와 청국조계(1884·4) 설정에 이어 1884년 10월에 체결된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에 따라 각국 조계지를 중심으로 도시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일본·미국·영국·독일·청국 5개국이, 얼마 후 프랑스와 러시아가 조선 진출에 합류했다.

또한 거류지 차입에 있어 각국 조계지 내에 일본인전관거류지는

36만3000㎡(약 11만평) 규모인 부산에 비해 현저히 작은 7,000평에 불과했다.

이는 인천에선 부산과 달리 일본의 독주가 견제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각국조계지도에는 일본조계지를 중심으로

서쪽에 청국조계지, 나머지에 각국조계지가 설정되었다(사진1).

인천부사에 따르면, 조계지는 A, B, C, D의 네 지구로 구분되어

각 지구에 따라 건축물의 재료와 유형은 물론 소요 비용의 한도까지 명시되었다.

개항기 도시 변화 과정을 연구한 손정목 교수는 이것이 오늘날 도시계획법과 건축법에 규정한 미관지구나 방화지구제도를 규정한 최초의 사례였다고 한다.

이는 각국조계지에 공동 관리기구로서 이른바 신동공사(神董公司)라는 거류지회가 조직되어

가능했던 것으로 규정위반 시 벌금도 부과했다고 한다.

이로써 응봉산 일대에는 앞서 겐테가 언급한 제물포클럽뿐만 아니라

영국 영사관, 러시아 영사관, 세창양행 사택 등의 서양식 건물들이 세워져

이국적인 정취를 자아냈다.

뿐만 아니라 응봉산에는 일명 만국공원이라 불린 ‘각국공원(各國公園)’도 조성되었다.

이는 1888년 각국 조계장정에 따라 조성된 한국 최초의 서구식 공원이었다.

이 공원을 디자인한 인물은 고종이 초청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Sabatin)으로,

건축사가 김정동 교수에 따르면,

인천 해관에 소속된 기사로서 위에 언급한 ‘각국조계지도’를 작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1883년 여름 고종이 경운궁 내의 정관헌 설계와 관청건물의 건축을 맡아달라는

초빙 친서를 보내 그해 9월 조선에 입국했다고 한다.

청·일 조계지 경계계단.

이곳은 공자상과 석등의 설치로

본래 계단의 원형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다. ⓒ 김민수

 


# 복원, 짝퉁과 진품 사이

각국공원은 1914년 조계제도가 철폐된 후 일제 강점기에 ‘서공원’이라 불렸다.

해방 후에는 만국공원으로 불리다가, 1957년 9월 맥아더 동상이 이곳에 세워지면서

자유공원으로 바뀌게 된다. 이는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공적을 기념하기 위한 것인데

하필 10월3일 ‘개천절’에 만국공원을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인천 개항에 따른 각국공원의 의미는 오늘날 인천시가 사활을 걸고 추진하고 있는

경제자유구역(IFEZ)의 원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이러한 역사를 이해한다면 중구 구도심 일대에 바로잡아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다.

 

첫째는 ‘청·일 조계지 경계계단’의 단순 도식적인 디자인이다.

이 돌계단은 양쪽으로 옛 청국 · 일본조계지를 구분하면서

각국공원으로 향하는 역사적인 장소에 위치해 있다.

한데 얼마 전에 중구청이 계단에 뜬금없이 ‘공자 석상’을 세워 이곳을 마치 공자의 사당처럼

조성하더니 설상가상 계단 양쪽에 중국과 일본식 석등을 세워

계단의 형태와 의미를 크게 훼손시켜 놓았다.

본래 계단의 원형이 지녔던 넉넉한 운치는 사라지고 조잡함만 남았다.

 

둘째는 맥아더 동상의 위치 문제다.

공간적으로 각국공원의 상징성은 맥아더 동상과 맞지 않는다.

연수구 옥련동의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이나 월미도공원의 인천상륙지점으로 옮기고,

현재 자유공원을 본래 각국공원의 의미를 회복시켜

국제도시 인천을 상징하는 장소로 삼았으면 한다.

그러나 최근 인천시가 개항기 각국공원에 있던 건물 5채를 270억원을 들여

복원할 계획을 내놓아 인천인들이 염원했던 진정한 복원의 방향을 심각하게 왜곡시켜 놓았다.

고증자료도 없이 본래 위치도 아닌 곳에 복원을 감행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각국공원은 영화 세트장 내지는 테마 파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이미 중구청 앞거리 옛 일본조계지에는

엉성하게 외양만 일본풍으로 바꾼 짝퉁 일본인거리가 조성되어 있지 않은가.

 

그러나 최근 중앙동에 개관한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은

진품 복원과 그 활용의 예를 잘 보여준다.

이 건물은 1890년 준공된 ‘구일본18은행 인천지점’으로 그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복원공사를 거쳐 개항 당시 인천항과 조계지의 풍경 및 주요 근대건축물들을

축소 모델로 복원해 전시 및 교육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진품 건물에서 우러나온 생생한 역사를 짝퉁이 어찌 대신할 수 있겠는가.
- 2007년 10월 1, 경향, [한국 도시디자인 탐사]
- 김민수, 서울대 디자인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