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학적 역사학 창시 한백겸 | ||||||||||
-역사지리 천년 길 튼 ‘현학’ -
일세의 학자 구암(久菴) 한백겸(韓百謙 : 1552~1615)이 눈을 감고 세상을 떠났다. 향년 64세로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았건만, 벼슬도 버리고 학문에만 몰두하여 후학의 양성에 힘을 기울이다가 샛강과 한강이 합해지던 서울의 서교(西郊)인 수색 근처의 물이촌(勿移村) 사제(私第)에서 뜻을 못 이루고 타계하고 말았다. 몸져 누워있던 병중에도 그는 끝내 세상에 영원히 전해질 책 한 권을 완성했으니 숨을 거두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 책이 뒷날 조선시대 역사지리학의 선구적 역할을 했던 그 유명한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라는 책이었다.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등 국가에서 간행했던 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사관과 독창적인 견해로 조선의 역사지리를 개인의 힘으로 정리한 저서는 바로 한백겸의 ‘동국지리지’가 최초였다. 이 한 권의 책이야말로 후대의 학자들에게 역사지리에 대한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킨 학문적 업적으로 평가받기에 이르렀다. “오직 근세의 한백겸이 변론했던 바가 천년동안 정해지지 못했던 것을 깊이 알아냈으니 그분의 학설에 의해서 확정한다”라고 말하면서 한백겸의 삼한설(三韓說)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반계가 인정한 학자라면 그분의 학문적 깊이를 알 만하지 않은가.
뒷세상의 여암 신경준, 순암 안정복 등도 한백겸 학설에서 일정분의 영향을 받았음이 확인되고 있다. 실학의 집대성자 다산 정약용도 그의 저서 ‘강역고’에서 “한백겸의 학설은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이라고 단정하여 높은 수준의 학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역사지리학의 초창기 연구과정이어서 불충분한 자료 때문에, 한백겸도 많은 부분에서 오류가 지적되고 있지만, 특히 그가 확정한 한강이남의 삼한설(三韓說: 마한 · 진한 · 변한이 한강 이남에 있었다는 학설)은 모든 실학자들이 대체로 긍정했던 부분이었다. 고조선이 만주나 중국 일대에까지 미쳤다는 학설도 한백겸의 주장으로 많은 실학자들이 그대로 인정한 학설이어서 한백겸의 독창적인 견해가 훌륭했음을 입증해주고 있다. 불과 한 편의 논문에 지나지 않은 책이지만 그의 독창성과 비판정신이 가득한 학문적 태도 때문에 그만한 영향을 미친 저술이 되었다.
한백겸의 학문적 업적으로 ‘동국지리지’에 못지않은 ‘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과 ‘기전도(箕田圖)’라는 짤막한 논문과 도면 하나를 빼놓을 수 없다. ‘기전도’는 기자(箕子)의 정전(井田)제도가 평양에 유적으로 남아있음을 증명한 그림으로 ‘기전도설발’(유근)과 ‘기전도설후어’(허성)라는 짧은 해설이 붙은 그림이다. 유제설과 이 그림이 후대의 토지제도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음이 연구결과에서 증명되고 있다. ‘반계수록’이나 ‘경세유표’ 등의 토지정책의 핵심은 토지소유의 균등화로 분배의 공정을 기하자는 것인데, 주자(朱子)가 부인하여 일반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환영받지 못하던 정전제가 한백겸의 실증적 연구결과를 통해 실재(實在)가 밝혀져 공전제(公田制)의 확충을 주장하던 실학자들에게 학설의 증빙자료로서의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겸은 젊어서 죽고 준겸은 뒤에 인조대왕의 장인으로 인조반정 이후에는 큰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던 당대의 고관대작이자 대문장가로 이름이 높던 분이었다.
아우 한준겸이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어머니를 임지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병환 소식을 들은 한백겸이 어머니 문병 차 평양을 찾아간다. 그러던 시절에 말로만 전하던 기자의 정전제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던 한백겸은 평양일대를 답사하여 정전제의 실재를 확인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렸고 ‘기전유제설’이라는 논문을 써서 공전제도를 주장하는 근거를 삼을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뒤에 다산 정약용의 비판을 받지만 정(井)자의 모양이 아니고 전(田)자의 모형이었다고 한백겸은 그림으로 그렸다.
다산은 ‘발기자정전도(跋箕子井田圖)’라는 글에서 기자의 도읍지가 평양이었다는 명확한 증거도 없고 정전제가 전(田)자의 모양일 이유도 없음을 들어 믿을 수 없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백겸의 비판정신과 실증주의적인 학문태도에는 분명히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그의 주장이 반드시 옳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당시의 학문적 수준에 비추어볼 때 그의 주장은 실로 놀랍도록 참신한 새 학설이었다. 그러기에 그의 주장은 반계 유형원,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등 여러 실학자들의 전제개혁론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구암유고·동국지리지 서문)라고 평하여 한백겸의 이론이 후대에 미친 영향을 말해주었다. 당대의 영의정으로 학문과 문장이 뛰어나 대제학을 지냈고 뒤에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진 백사 이항복이 최초에 통곡한 사람이다.
백사는 구암보다 4년 뒤에 태어나 3년을 더 살다간 친구인데 구암의 죽음에 제문을 바쳤다. 우선 구암이 당대의 주역연구의 큰 학자라고 칭송했다. 모든 경서에 두루 밝았으나 유독 주역에 깊은 연구가 있어 당시의 세상에서 모두 그가 큰 주역학자임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친구로 대제학에 이조판서를 지낸 큰 학자로 우복 정경세(鄭經世)가 있는데, 그도 뒤에 구암의 묘갈명(신도비명)을 지어 구암이 당대의 주역학자로 국가에서 간행한 ‘주역전의(周易傳義)’라는 책의 교정을 맡았다고 말하면서 뛰어난 주역연구의 업적을 찬양하였다. 한백겸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 가마섬(釜島:佳麻島) 마을의 입구에 신도비로 우람하게 서있다.
신도비를 안고 산등성이로 오르면 우선 문천군수(文川郡守)를 지낸 한백겸의 조부 한여필(韓汝弼) 부부의 묘소가 나온다. 바로 그분이 강원도 원주의 부론면 노림리에 터를 잡고 은거하면서 한백겸의 고향이 되었고 유명한 기호지방의 남인 대가인 한씨들의 세거지가 되었다.
노림리에서 섬강을 건너면 여주 땅인데 여주 땅에 한여필의 묘소가 있게 되면서, 한백겸의 아버지인 판관(判官) 한효윤(韓孝胤) 부부의 묘소도 있고, 그 맨 위에 도장(到葬)으로 한백겸 부부의 묘소가 있는 한씨들의 선산이 되었다.
정경세의 비문은 한백겸의 일생과 학문적 업적을 넉넉하게 기술하여 그의 삶과 인품을 충분히 파악하게 해준다. 조선초기에 고관대작이 연이어 배출되어 나라 안에서 큰 명성이 있던 성씨다.
조선왕조의 개국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한상경(韓尙敬)이 유명한 선조다. 한상경의 손자 한계희(韓繼禧)는 좌찬성의 고관에 올랐고 그 뒤로도 계속 벼슬하는 후손들이 이어졌다. 그 뒤 한동안 큰 벼슬이 없었는데 마침내 한백겸 형제가 나오면서 다시 크게 번창한다.
한백겸은 젊은 시절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화담 서경덕의 제자이던 습정(習靜) 민순(閔純)의 문하에 들어가 돈독하게 학문연마에 젊음을 바친다. 아버지야 판관벼슬에 일찍 세상을 떴으나 계부인 한효순은 고관대작으로 정승의 지위에 올라 많은 시비가 있던 분이다.
아우 한준겸은 문장에 뛰어난 고관으로 일세에 성망이 높던 분이었으나 한백겸은 과거시험에는 응하지 않고도 학문으로 천거 받아 호조좌랑 · 형조좌랑을 거쳐 황해도의 안악현감으로 2년여의 목민관 생활을 하면서 백성의 아픔을 몸소 느끼게 된다. 다시 함종현령을 지내고 영월군수에 부임했다. 51세에는 청주목사를 지내고 통정대부 당상관에 오른다. 장례원 판결사의 당상관직을 수행하고 호조참의라는 벼슬에 이른다. 60세에는 파주목사로 제수 받으나 사직하고 마지막 생애를 학문연구에 몰두한다. 죽음이 다가오는 64세의 마지막 순간에 그의 명저인 ‘동국지리지’의 저작을 마치고 1남 1녀의 자녀를 두고 세상을 떠난다.
자신의 아버지가 여러 고을의 목민관을 지냈기에 자신이 아버지 시중을 들면서 목민술을 익혔고, 또 자신이 곡산도호부사라는 목민관을 지낸 경험이 있었기에 목민관들의 지침서인 목민심서를 저술한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한백겸도 여러 고을의 목민관을 지낸 덕분으로 일반 백성들의 고통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다. 이른바 지방의 특산물을 나라에 공물로 바치는 패악스러운 제도 때문에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열거하였다. 바로 이러한 공물변통의 주장은 당시의 대관이던 이원익이 받아들여 강력히 주장하자 공물제도를 개선한 대동법으로 바꾸고 뒷날 김육의 정책으로 반영되어 대동법을 시행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아우 한준겸도 임금의 장인이자 대문장가로 큰 이름을 날렸으나, 역사는 그들 모두를 역력히 기억해주지 않는다.
오직 높은 학자적 태도로 훌륭한 저술인 ‘동국지리지’와 ‘기전도’·‘기전유제설’이라는 논문을 남긴 한백겸만을 역사는 영원히 기억해주고 있다.
학자와 학문, 그것만이 고관대작의 지위도 능가할 수 있고, 이름도 영원하게 역사에 남길 수 있음을 알게 해준다.
다만 아우 한준겸은 고관대작이면서 인조대왕의 장인으로 남인계로 활동했기에 구암도 남인계로 분류되고 또 그 후손들은 대부분 남인으로 활동했다.
기호지방은 세력판도로 볼 때 대체로 서인계열에서 노론이나 소론으로 갈려 노론이나 소론으로 행세하는 집안은 많았으나 경상도 일대를 제외한 지역에서 남인이 크게 번성한 집안은 많지 않았다. 유독 구암과 유천(柳川) 한준겸의 후손들이 남인으로는 명망을 유지하면서 가문을 크게 현양시킨 집안이었다. 그래서 세상에서 칭하기를 원주의 노림리(魯林里·노숲) 한씨를 기호의 남인 명가라고 부르고 있다.
특히 구암의 후손에는 정승과 판서가 즐비하게 배출돼 고관대작의 가문이 되었고 구암의 높은 학자적 명성으로 학문을 잇는 후손들도 많았다. 구암의 7대손 한치응(韓致應)은 다산 정약용의 막역한 친구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판서와 한성판윤에 이르렀고 함경도 관찰사로 재직 중에 세상을 떴다.
신유옥사로 다산의 동료들이 대부분 피해를 입고 벼슬에서 물러나거나 귀양살이를 했고, 아니면 참형을 당했지만, 한치응만은 큰 피해를 입지 않고 벼슬이 승승장구 올라 고관대작에 이르렀다. 그의 양자 진정(鎭庭)이 또 병조판서에 오르고, 그의 아들 돈원(敦源)이 병조판서에 올라 3대 병조판서의 전통을 세우기도 했다.
돈원의 아들과 손자도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정자(正字)와 교리(校理)에 임명되었다. 일찍 세상을 떠났으나 이름은 크게 얻었던 분들이다. 우리가 찾은 원주와 여주의 한백겸 유적지는 역시 역사의 땅이자 사상의 고향이었다.
한백겸은 비록 서울에서 태어나 샛강과 한강이 만나는 어디쯤의 물이촌(오늘의 수색이나 상암동 어디쯤)에서 운명했지만 할아버지 때부터 은거하며 살았던 원주의 부론면 노림리가 그의 고향이었다.
우리가 찾은 노림리는 어마어마했다던 한백겸 종가의 옛자취를 잃고, 옛터에 반한옥 반양옥의 종가가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모습이었다. 마을이 오래됨을 증명하듯 몇 그루의 당산나무가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나는 한백겸을 아노라고 뽐냈지만 말을 못하니 무엇을 알아볼 수가 있겠는가. 종가에서 조금 떨어진 부론면 흥호리(興湖里) 월봉(月峯)마을에 자신의 종가가 있었다. 종가라야 터만 남았고, 양옥 한 채가 종가 터와 주변의 산소들을 관리하는 관리인이 사는 집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3대 병조판서가 살았던 집이건만 집의 빈터에는 후손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월봉 한기악(韓基岳)의 기념비 하나가 초라하게 서 있었다. 바로 집 앞에는 한치응의 손자로 병조판서이던 한돈원의 묘소가 있었다. 한돈원은 한기악의 증조부가 되고 한민구 · 한홍구 교수는 바로 한기악의 손자들이다. 섬강 주변에 몇 집안의 남인 고가들이 있다. 흥호리에서 멀지 않는 우담(愚潭)마을은 다산 정약용의 방계 선조인 우담 정시한(丁時翰)의 고향이다. 숙종 때 재야의 대학자 정시한은 다산의 학문에도 영향을 끼쳤다.
우담의 현손(玄孫)이 바로 홍문제학에 형조판서를 지낸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다. 번암 채제공의 친구로 다산의 집안과는 가까운 일가이자 다산의 선학으로 정조의 치세에 큰 역할을 했던 학자 관인이었다. 바로 흥호리와 우담 마을이 남인의 명성을 높이 올린 마을이었다. 섬강의 아름다운 풍광과 지령(地靈)으로 인물을 배출한 곳이었으리라. 섬강에 가마솥 같은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은 섬강이 돌아서 흐르기 때문에 섬과 같이 보여 부도(釜島)라 칭하거나 우리말인 가마섬(佳麻島)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우람한 신도비를 둘러본다. 풍수설에 의하여 거북의 머리를 틀어올렸고, 그 거북이 위에 거대한 비석이 바로 구암의 신도비다. 당대의 대제학 우복 정경세의 글에, 명필가이자 판서를 지낸 죽남(竹南) 오준(吳竣)이 글씨를 썼고, 충신이자 전서(篆書)의 대가 선원 김상용(金尙容)의 당질인 참찬(參贊) 김광욱(金光煜)의 전서로 새긴 비였다. 빗돌도 질이 좋아 400년의 세월에도 글씨를 대부분 알아볼 수 있었으니 국보급의 유물이 아닐 수 없었다. 거대한 문인석에 선비의 묘소로는 부족함이 없게 잘 관리됐다. 한백겸의 아들 한흥일이 우의정이었고, 아우 한준겸이 인조대왕의 국구였기에 그곳 일대는 대부분 한씨 소유의 사패지였다고 한다. 지금이야 토지제도의 변천으로 얼마남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광활한 산야가 대부분 한씨들의 종중 소유라니 역시 대단했다. 당시만 해도 노림리나 흥호리에서 가마섬 마을을 찾으려면 섬강의 나루를 건너면 됐다. 지금은 나루터나 나룻배는 없어졌어도 샛길까지 아무리 좁은 길도 모두 포장되어 차로 움직이는 데는 전혀 불편이 없었다. 이런 것이 바로 문명의 이기가 아니던가.
아들이 정승에 오르고 조카딸이 왕비에 오르자 한백겸은 뒷날 영의정에 증직되고 자신이 온갖 노력을 기울여 세운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을 모신 칠봉서원(七峯書院)에 배향된다.
운곡 원천석은 원주의 치악산에 숨어살면서 조선 초기 선비들이 변절하던 시절에 절의를 끝까지 지킨 지조 높은 선비였다. 태종이 3번이나 원주의 치악산까지 찾아와 벼슬하기를 권했으나 끝내 거절하고 도를 지키고 학문에 힘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영혼을 위로하고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원주에 세운 서원이 바로 칠봉서원이다. 이 서원의 건립에는 한백겸의 공이 컸다. 뒷세상의 후학들이 구암의 학덕과 서원 세운 공을 기리려고 그 서원에 배향했으나 대원군 시절에 훼철된 이후 지금은 종적도 없어져 후손들도 찾을 길이 없다고 해서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구암은 ‘구암유고(久菴遺稿)’와 ‘동국지리지’라는 저서를 남겼다. 문집의 서문과 발문에 기록된 대로 병란을 거치며 대부분의 유고가 분실되고 없어져 겨우 남은 것을 수습하여 간행한 책이어서 분량도 적고 내용도 많지 않다. 구암을 실학자로 명명하기는 쉽지 않다. 그의 학문 내용은 분명히 실학사상의 발단을 마련한 점은 충분하다. 기자정전제에 대한 그림과 유제설을 통해 토지개혁사상의 기틀은 열었으나, 자신이 토지개혁사상을 마련하지는 못했다.
지리서를 통해 역사지리학의 단서를 열었고, 국가 경영에 국토와 나라의 강토, 국경과 지역의 경계 및 관방 시설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밝혔지만 역사지리서로의 흠결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한 역사지리서를 소재로 해서 반계나 성호, 다산의 역사지리학이 본궤도에 오르도록 선구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기전도에 비판을 가한 다산의 뜻으로도 구암을 실학자로 부르기에는 부족했다. 주자의 성리학이나 정전제의 논쟁에 비판을 가하면서 실증적 방법을 통한 새로운 학문 경향을 모색했으니 대단한 창의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구암이 세속의 학자들 태도에 문제를 삼고 비판의식과 개혁적인 학문 경향을 나타낸 점은 구암 사후 학자들이 올바르게 평가해 준 기록이 있다.
당대의 문장가이자 학자이면서 대제학에 판서를 지낸 택당 이식(李植)은 구암의 후배였다. 그가 ‘구암유고’의 서문에서 명백하게 밝혔다. ‘다만 상수(象數)의 변화나 제도의 마땅함 여부에는 연구가 매우 깊어 옛 사람들의 학설에 구애받지 않았다. 이러한 견해는 비록 정자나 주자를 믿는 전통적 제자들과는 서로간에 동이(同異)가 있을 수 있다’ 라고 말하여 정자나 주자의 학설에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인정하고, 뛰어난 재주와 가정의 온축된 학문과 예절에 능숙한 학자여서 문제될 것이 없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택당 이식이 참으로 올바르게 구암의 학문을 인정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소론의 박세당, 남인의 윤휴 등이 뒷날 주자학의 문제점에 비판을 가하고, 먼 훗날 남인의 다산 정약용이 사서오경의 성리학적 해석에 문제점을 지적하여 새로운 경학체계를 세웠으니 구암의 학문태도와 비판정신은 조선 후기 학술사에서 역시 선구적 역할을 했다는 주장은 옳다. 그래서 반계나 성호의 학문 경향에도 자극을 주었던 구암의 학문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선구적 지위에 있다는 평가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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