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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9)-(10)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

Gijuzzang Dream 2007. 12. 17. 13:58

 

 

 

 

 

 

 오성대감 이항복의 유적지를 찾아서

- 떡잎부터 유별났던 국난타개 영웅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에 있는 화산서원.

오성부원군 이항복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1635년 창건된 서원으로

고종시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렸다가 1971년 복원되었다.(사진작가, 황헌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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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종가기행

 

慶州 李氏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

 

 

한음家와 우의 지금도 이어져

14대종손 이상욱(李相旭) 씨, 선친 1·4 후퇴 때 실종 … 불천위 등 제사 옛 법도 그대로

 

경주 이씨(慶州李氏)의 시조는 이알평으로 신라 좌명공신이었다.

그는 박혁거세가 왕이 된 후 아찬에 올랐다 한다.

경주 이씨는 14개파로 크게 나누어지며 백사 이항복 집은 상서공파에 속한다.

 

경주 이씨 출신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이는

고려 시대의 익재 이제현과 조선 시대의 백사 이항복이다.

백사의 후손으로 저명한 이는 좌의정 이태좌(李台佐, 둘째아들의 증손자),

소론사대신(少論四大臣) 중의 한 사람인 이광좌(李光佐),

순조 때의 영의정 이경일(李敬一, 6대 종손) 등이 있다.

이태좌의 아들은 영의정 이종성(李宗城)이다.

 

백사 이항복의 14대 종손 이상욱(李相旭, 1942년생) 씨를 처음 만난 곳은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加山面) 금현리(金峴里)에서였다.

그곳은 백사의 호성공신 사패지(賜牌地)로 백사의 영정각과 묘소, 신도비가 있다.

바로 옆에는 작지 않은 규모의 건물이 골조 공사를 끝낸 채 있었다. 건물의 용도가 궁금했다.

 

“문중 전시관을 짓고 있는데, 10년이 넘었지만 아직 완공하지 못했습니다.

형편이 되는 대로 짓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이곳은 유물 전시관과 종인들의 회합 장소로 쓸 생각입니다.

그래서 규모를 좀 크게 잡았어요. 모든 비용을 제가 마련하고 있어 공사에 어려움이 많습니다.”

 

종손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뜻은 깊지만 우산이공(愚公移山)과 같은 도전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열심히 일하면 집 세 채 정도를 짓고 간다고 한다. 물론 개인 집이다.

그렇다면 지금 종손이 짓는 개인집 10여 채 규모의 건물은 종손 자부담으로는 힘에 벅차다.

그래도 종손은 가쁜 숨을 쉬면서도 이제 9부 능선을 넘어 완공을 눈앞에 두었다.

이런 일에는 내조가 필수적일 터. 개인의 편안함만 추구한다면 성사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함께 인사한 종부를 한참 바라보았다. 밝은 모습으로 문득 ‘부덕(婦德)’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참 인기 없는 단어이지만

가문을 지키고 씨족의 화목을 도모하는 데는 이보다 나은 덕목이 없다고 생각한다.

 

종부 풍양조씨(趙丙熙, 1946년생)는 충북 음성 주덕 출신으로 충북 민선 도지사를 지낸 이의 손녀라 했다.

넉넉한 마음과 지혜로움을 함께 가진 우리 시대의 종부요 어머니상이다.

 

종손은 한음 이덕형 종가와의 인연에 대해 언급했다.

“우리 집은 한음가(漢陰家)와는 세의(世誼)가 있어요. 저도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고요.

우리 어머니도 한음 종손의 어머니와 같은 풍산 홍씨예요. 유명한 모당 홍이상 선생 자손이지요.

그래서 특별히 친하게 지내셨어요.

제 외가가 혜화동에 있었는데, 한음 종손이 위당 정인보 선생의 따님인 정양완 씨의 제자였어요.

우리 집은 위당가와 친해서 한음 종손과도 친했죠. 우리는 말띠 동갑이기도 하구요.”

 

종손은 충청도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전에 서울 계동으로 이사한 뒤 창신동, 현저동, 재동 등지에서 살았다.

종손은 아버지와 같은 재동국민학교를 나와 한양중·고를 거쳐 한양대학교 전기과(61학번)를 졸업했다.

제대 후에는 줄곧 자영업에 종사했는데 73년부터는 선영 인근에서 목축업을 하기도 했다.

처음 만났던 금현리 양옥 주택은 당시 종손이 목장을 경영하면서 지은 집이다.

 

종손의 선고인 경우(卿雨, 1918년생)씨는 2대 독자로 8세 때 부친(鍾逵)을 여의고

할아버지(圭桓) 슬하에서 자라다 11세 때 할아버지마저 여의는 아픔을 겪었다.

종순의 조부는 명석해 고종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조부가 고종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증조부께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경기도 관찰사를 지낸 집안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조부는 8세 때 참봉 벼슬을 받았다 한다.

영민했던 선친은 일가의 도움으로 제2고보(지금의 慶福高)를 나와

진명 출신인 홍희자(洪禧子, 종손의 모친) 여사와 결혼했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법정대(法政大) 경제학부를 마쳤다.

광복 이후 은행에 근무하던 선친은 일가인 이시영(李始榮, 1869-1953, 부통령)의 소개로

신흥대학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다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역시 일가인 이종찬 장군(1916-1983, 3군 참모총장)의 추천으로 육군 소위로 현지 임관했다.

 

“3사단 기갑부대에 근무하셨는데 9·28수복 후에는 계동 집에 다녀가시기도 했어요.

그러다 1·4후퇴 무렵 소식이 끊겼고 육본 기록에는 실종으로 처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망극한 일입니다.”

 

종손의 아픈 상처가 순간 드러났다. 당시 선친의 나이 34세, 종손은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1·4후퇴 때 부친의 생사도 모르는 어린 종손은

백사의 신주를 어깨에 책가방처럼 메고 피난길에 올랐다.

종손의 4남매 중 막내 여동생이 부산에서 세상을 떠난 아픔도 겪었다.

 

백사 종가에는 불천위 제사를 비롯한 여러 제사를 옛 법도에 맞게 모시고 있다.

이 집은 여기에 더해 '생신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음력 10월 15일 아침 묘소 앞 영당에서 모시는 생일 제사는

제수로 생미나리, 생무, 생두부와 호도, 밤, 은행을 껍질 그대로 쓴다.

특이한 점은 떡국으로 음복을 한다.

 

종손의 모친인 홍 여사는 교육 받은 신여성이었다.

그래서 일찍 남편과 헤어지고도 종가를 반듯하게 지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명가집 내림 손맛>이란 제목의 책자에 소개까지 되기도 했을 정도로 음식에도 조예가 있었다.

이 명가의 내림 손맛은 이제 현 종부인 풍양 조씨에게 대물림되었다.

종부는 이미 된장 맛으로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포천 오성대감 터전 한쪽에 전통 메주를 무수히 달아 둔 모습이 인상적이다.

춘삼월이면 이 메주도 종부의 손을 거쳐 맛나게 익어 된장이 될 것이다.

 

종손에게 들은 홍 여사의 일화가 있다.

홍 여사는 이곳에서 멀리 않은 곳에 있는 반남 박씨 서계 박세당 종가와 인척관계에 있었다.

서계 종가는 아늑한 수락산 기슭에 은행나무를 많이 심었다.

그 은행나무에서 딴 은행으로 자손들의 대학 등록금을 대는 것을 본 홍 여사는

은행 한 말을 가져다 모종해서 집 주변에 심었다.

그때가 손자를 본 해였다. 내심 손자의 등록금을 생각한 것이다.  

그 뜻을 제대로 이루지는 못했지만 평생을 조상과 자손을 위해 살았다.

“이제 제가 그 은행을 따서 문충공 선조의 생신차례에 쓰고 어머니 기제사에도 올립니다.”

사려깊은 노종부의 처사다. 재차 종손이 살고 있는 청담동의 한 아파트를 찾았다.

종가에서 백사 친필 천자문을 배관한 것은 가슴 뛰는 일이었다.

 

백사가 손자를 위해 직접 쓴 천자문

 

천자문의 마지막 장에는 정미년(1607, 선조 40) 여름, 손자 시중(時中)에게 준다고 썼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50노인이 땀을 흘리며 힘들여 쓴 이 책을 함부로 던져버리지 말 것을 당부했다는 점이다.

이는 퇴계 이황이 그의 손자 안도(安道)가

글자를 알기 시작했다는 아들의 편지를 받고 서울 우사(寓舍)에서 기쁜 마음으로 천자문을 쓴 것과

동일한 맥락이다. 백사가 손자를 위해 천자문을 쓸 당시는 52세였다.

 

백사는 이를 50노인으로 표현했다.

손자를 위해 정성을 다해 천자문을 쓴 심정은 시공을 초월해 공감되는 바로,

가문의 전통과 문화를 이어가려는 거룩한 장면이다.

이 책은 퇴계의 해서 천자문과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의 해서와 초서 천자문의 맥을 잇는 것으로

서예사적으로도 매우 의미가 있는 사료다.

 

종손은 슬하에 2남2녀를 두었다.

차종손 이근형(李槿炯, 1973년생)은 한양공대와 동대학원을 나와 컴퓨터 회사에 다니며,

둘째아들 이관형(李冠炯, 1979년생) 역시 대학에서 기계설비를 전공한 공학도다.

큰딸 이영란(李英蘭, 1974년생)은 이화여대와 동대학원(컴퓨터 전공)을 졸업해 직장생활을 하고 있고,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한 작은 딸 이선미(李先渼, 1978년생)는 재학 중 행정고시를 합격해

현재 사무관으로 근무하고 있다.

 

 

△ 이항복 1556년(명종 11)-1618년(광해군 10)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 동강(東岡), 필운(弼雲), 청화진인(淸化眞人),

시호는 문충(文忠), 봉호는 오성(鰲城)

 

 

임란 등 숱한 國亂극복 큰 공… 병조판서 5번 맡아

 

백사는 서울 서부 양생방(養生坊)에서 태어나 9세 때 부친상을, 16세 때 모친상을 당했다.

19세에 영가부원군 권율(1537-1599)의 사위가 된다.

권율은 임진왜란 7년간 조선 군대의 최고 지휘관으로 활약해 선무공신 1등에 책록된 이다.

권율은 사위보다 2년 늦은 1582년 식년문과에 급제해

임진왜란 내내 병조판서로 있던 사위인 백사의 지휘를 받았다.

 

사위도 난후에 호성공신 1등과 오성부원군에 책록되었다.

어떤 면에서는 사위와 장인이 안팎에서 계획을 세우고 일선에서 실천해

미증유의 국난을 슬기롭게 극복했다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 한 분을 더 기억할 필요가 있다. 금남군(錦南君) 정충신(鄭忠信)이다.

현재 광주시 도청 앞에서 발산교에 이르는 도로명 '금남로'는 그의 군호를 쓴 것이다.

그는 백사가 발굴해 가르쳐 후일 손아래 동서가 된 이다.

국난을 이들 세 사람의 옹서(翁壻, 장인과 사이)가 감당한 것이다.

   

백사의 일생을 통해 보면 세 가지 큰 시련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첫째가 임진왜란, 둘째가 정응태 무고사건(1596),

그리고 마지막이 영창대군 사사(賜死)와 인목대비 폐서인(廢庶人) 사건이다.

백사는 이들 사건에 대해 온갖 정성과 지혜를 경주했으며 목숨까지 바쳐 구제하고자 했다.

임진왜란 때는 줄곧 도승지와 병조판서, 우의정을 맡으며 전란을 극복했다.

일반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임란 못지않은 위기상황은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의 무고 사건이다.

 

정응태는 명나라 구원병 책임자로 와 있던 양호 장군과 마찰을 빚으며

‘조선이 일본과 짜고 명나라를 침공할 것이다’고 허위로 보고를 했다.

만약 명나라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조선으로서는 망국으로 가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이에 백사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 당시 공조참판)를 부사로,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을 서장관으로 대동하고 연경으로 건너가 원만하게 이 문제를 매듭지었다.

도리어 정응태를 파직까지 시키는 등 빛나는 외교성과를 거두었다.

 

끝으로, 계축옥사(癸丑獄事, 1613년)의 시련이다.

계축옥사는 광해군 5년(계축)에 정인홍과 이이첨 등 대북파가

유영경 등 소북파를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무옥(誣獄, 거짓으로 얽어 만든 옥사)을 말한다.

“소북파들이 선조의 적자(嫡子)이며 김제남의 외손자인 영창대군을 옹립해 광해군을 몰아내려고 한다”

고 대북파들이 역적 문제를 제기했다.

이로 인해 김제남을 사사하고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유배해 증살(蒸殺)함과 아울러

인목대비(仁穆大妃, 선조의 비, 김제남의 딸)를 서궁(西宮, 지금의 덕수궁)에 유폐시켰다.

당시 백사의 나이는 58세로 훈련도감 도제조와 체찰사 직에 있었다.

 

또한 그해에 평생 지기였던 한음 이덕형을 잃는 아픔도 겪었다.

43세에 우의정이 된 백사는 이미 십여 년간 정승의 반열에 있었음은 물론

호성 1등공신에 오성부원군에 책록된 국가의 원로대신이었다.

조정의 뜻있는 신하들과 재야 사림들은 모두 오성의 입장을 주시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계축옥사를 대해 백사는 입장 표명을 유보했다.

“나라에 장차 큰 일이 있을 것이니 그때가 내가 죽는 날일세,

만약 영창대군을 위해서 죽는다면 그것은 군자의 참된 용기를 손상하는 것일세.”

 

백사는 의미심장한 말만 되풀이했다.

예견대로 과연 국모를 폐위하는 반인륜적인 사건이 발발하자

비로소 글을 올려 극력 부당함을 간했고 광해군은 크게 노하여 아주 먼 변두리 땅으로 귀양을 보냈다.

광해군 9년 11월 24일의 일이었다.

 

광해군은 국가의 원로대신이 정면으로 자신의 뜻을 거스르자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계축년으로부터 4년 뒤의 일로 당시 백사는 62세(광해군 9년)였다.

이때 중풍이 재발하여 반신불수의 몸이 됐다. 조정은 백사의 신병 처리에 당황했다.

 

광해군 9년 12월 16일 백사를 위리안치시키라는 명이 떨어진 이후

17일 용강, 18일 흥해, 21일 창성, 24일 경원, 28일 남쪽의 다른 도, 28일 삼수로 오락가락하다

해를 넘겨 1월 6일에는 “대신이 아무리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변경에 둘 수 없다.

길주나 북청 등지로 고쳐 정하라”고 했다.

마침내 1월 6일 북청으로 유배해 그해 5월 13일 유배지에서 삶을 마감했다.

이에 국왕은 5월 18일에 이덕형의 예에 따라 관작을 회복시켜주고 예장을 함은 물론

경유지마다 관에서 운구에 협조할 것을 명했다.

 

“철령 노픈 봉에 쉬여 넘는 져 구름아

고신의 원루를 비사마 띄어다가

님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본들 어떠리.”

 

널리 알려진 백사가 지은 시조다.

철령(677m)은 광주산맥에 있는 고개로 북청 유배길에서 만났고 살아서 다시 넘지 못한 고개다.

이 작품을 읽노라면 떨어지는 외로운 신하(孤臣)의 원통한 눈물(寃淚)이 느껴진다.

 

 

야사를 보면,

백사는 국왕 선조에게 내밀하게 말 그림 한 장을 받은 적이 있다.

이는 후일 인조가 되는 능양군이 어린 시절 그려 국왕인 선조에게 올린 것이었다.

이를 가지고 있던 백사는 유배를 떠나면서

자신의 안부를 걱정하는 김유(1571-1648)에게 간수를 부탁했다.

김유는 말은 하지 않았어도 은밀하게 전하는 사연 모를 이 그림을 걸어두고 소중하게 다루었다.

 

하루는 반듯한 선비가 비를 피하느라 안채로 들어와 이 그림을 보았는데,

이 사람이 그림을 그린 당사자로 후일의 인조였다.

인조는 자신이 그려 선조에게 바친 그림을 보관하고 있던 김유에게

선조의 뜻이 전해진 것을 감지해 신임했고,

김유는 백사가 자신에게 전한 그림의 참 의미를 깨달아 인조반정을 주도했다.

김유는 후일 이귀 등과 협력해 반정에 성공했고 영의정과 정사공신1등에 올랐던 승평부원군이다.

 

엄동설한에 중풍까지 얻은 몸으로 불모의 땅 북청으로 유배를 떠나는 창졸지간에도

나라의 먼 앞날까지 걱정하고 그 방책까지 은밀하게 제시했던 63세의 백사는

분명 오늘날 우리가 본받아야할 진정한 원로다.

이러한 모습을 계곡 장유는 백사문집 서문에서,

“천지간에 간기(間氣, 특출한 정기로 주로 500년에 한 번 나타난다고 한다)를 타고난 존재다”라 했다.

 

 

오성과 한음의 일화 

 

오성이 활달하고 호기가 있었다면 한음은 차분함과 위엄을 갖추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 두 사람은 조선 최고의 공직자며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중국 고사를 능가하는 오한지교(鰲漢之交)를 맺어

후대에 우도(友道)란 이런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다.

 

이들의 우도는 단순한 친목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를 통해 난세에 ‘중흥의 위업’을 이루었기 때문에 오늘까지 박수를 받고 있다.

5년 선배인 백사는 임진왜란 시기에 병조판서를 5번, 원수 1번, 체찰사를 2번 지냈고

한음은 병조판서 2번, 체찰사 2번, 훈련도감 제조 2번을 지냈다.

이들은 문장가로서도 나라에 기여했고,

아울러 어떠한 업무를 맡겨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겸비했다.

이러한 능력의 소유자를 ‘통재(通才)’라 한다. 이에 해당하는 대표적 인물이 이들과 서애 류성룡이다.

 

백사와 한음의 장인 역시 유명하다.

백사의 장인이 권율이고 한음은 북인의 영수 아계 이산해다.

절친한 친구인 백사가 한음이 세상을 떠난 해에 북인 정권 인사들에 의해 핍박을 받고

그 몇 해 후 유배돼 쓸쓸히 세상을 마친 것은 얄궂은 운명을 곱씹게 한다.

 

한음은 20세에 문과에 급제하는데,

이때 이항복(24세)과 계은(溪隱) 이정립(李廷立, 1556-1595, 24세)이 동방이었다.

후대에 이들을 ‘경진삼리(庚辰三李)’라 하여 경진년에 급제한 세 사람이라 칭송했다.

벼슬길 역시 두 사람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한음은 31세에 양관 대제학이 되었는데, 이는 대제학 최연소 기록이다.

 

병조판서는 백사가 한음보다 1년 앞선 37세 때였고, 그 이듬해에 33세로 한음이 그 직을 맡았다.

당시는 임진왜란이 발발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였다.

우의정은 한음이 6개월 빨랐고 영의정은 백사가 2년 빨랐다.

이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이들의 관계는 1613년 한음이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끝난다.

당시 백사는 58세로 북인 정권이 일으킨 계축옥사의 참담한 희생양이 되었다.

 

백사의 저술은

강릉(문하생들이 주도, 1629), 진주(정충신이 주도, 1635), 경상감영(5대손 이종성이 주도, 1726)에서

각각 간행되었다. 현재 문집 15책이 남아 있다.

생애는 연보 및 계곡 장유가 쓴 행장과 상촌 신흠이 쓴 신도비명을 통해 살필 수 있다.

 

백사가 살았던 서울 인왕산 줄기의 필운대(弼雲臺)에는

암각서와 함께 후손인 귤산 이유원(1814-1888)의 제시가 남아 있다.

현 배화여고 뒤뜰 암벽이다. 이 주변에는 생가터와 옹달샘 정자터 등이 남아 있다.

사후에 유배지인 북청과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에 있는 화산서원(花山書院, 경기도 기념물 제46호) 등지에 배향되었다.

 

   

 

  

 

 조선의 청백리, 이항복과 이원익

 

 

예나 지금이나 위정자들의 곧고 바른 치세가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고

국민을 태평하게 하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고 이치다.

 

지금도 유용하게 쓰이는 청백리라는 말은

과거 특별히 국가에 의해 선발된 깨끗하고 유능한 관리를 뜻한다.

정확히 말하면 청백리는 작고한 사람들에 대한 호칭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는 염근리라는 호칭이 붙여졌다.

 

청백리나 염근리로 선발되면 당사자는 진급이나 보직에 특전을 받았고,

후손들에게도 벼슬을 주는 등 많은 혜택이 있었다.

문치를 바탕으로 관료제가 통치제도의 핵심이었던 조선시대에는

모두 217명의 청백리가 배출되었다.

조선의 대표적인 청백리였던 이항복과 이원익을 통해 오늘날, 청백리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충과 의, 강직한 선비의 기개 백사 이항복

 

이항복은 명종11년(1556)에 태어나서

광해군 10년(1618)에 북청의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항복의 본관은 경주이며,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 필운(弼雲)이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공로로

오성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오성(鰲城)이라 부르고 있다.

벗인 이덕형과 더불어 오성과 한음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항복은 당파에 휩쓸리지 않는 곧은 성품으로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대사간 이발(李潑)이 파당을 만들려는 것을 공박하였다가 비난을 받고 세 차례나 사직하려 했으나 선조가 허락하지 않고 특명으로 옥당에 머물게 한 적도 있었다.

 

1591년,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로 송강 정철(鄭澈)의 논죄가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정철을 찾는 사람이 없었으나, 그는 좌승지의 신분으로 날마다 그를 찾아가 면담을 했는데, 이 때문에 공격을 받고 파직되기도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광해군이 즉위하며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이때부터 이항복의 삶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그는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의 살해음모를 반대하다가 북인파의 공격을 받고 사의를 표했으나

수리되지 않았다.

또한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배향을 반대한 바 있어

성균관유생들이 들고 일어나 정인홍의 처벌을 요구했다가

도리어 유생들이 구금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도 이항복이 나서서 겨우 광해군을 설득하여 해결하게 된다.

이로 인해 그에 대한 정인홍 일당의 공격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선조의 장인 김제남 일가의 멸문지환, 선조의 적자였던 영창대군의 살해 등

북인파의 흉계가 이어졌고, 그때마다 이항복은 홀연히 나서서 극렬하게 반대하였다.

광해군 5년(1613)에는 인재천거를 잘못하였다는 북인파들의 공격을 피해

별장 동강정사(東岡精舍)를 새로 짓고 동강노인(東岡老人)으로 자칭하면서 지냈는데,

이때 광해군은 정인홍 일파의 격렬한 파직처벌의 요구를 누르고

좌의정에서 중추부로 자리만 옮기게 하였다.

그러나 1617년에 인목대비의 폐위에 맞서 싸우다가

1618년에 관직이 삭탈되고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훗날 이정구는 그를 평하기를

“그가 관직에 있기 40년, 누구 한 사람 당색에 물들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지만

오직 그만은 초연히 중립을 지켜 공평히 처세하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에게서 당색이란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또한 그의 문장은 이러한 기품에서 이루어졌으니 뛰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라고 하며 그의 기품과 인격을 칭송하였다.


40년 재상에 초가삼간도 없네 오리 이원익

 

이원익(1547~1634)의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이다.

나라에 공이 많아 궤장(机杖)을 하사받고, 완평부원군의 칭호를 받았으며,

죽은 후에는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정직하고 검소했으며, 바른 몸가짐으로 ‘오리정승’이라는 친근한 명칭으로

당대 백성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며, 가는 곳마다 치적이 드높았다.

관서지방에 두 번 부임했는데,

평안도 백성들이 그를 존경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선조 때 내직으로 들어와 재상이 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면직되었고

다시 광해군 초기에 재상이 되었으나 정사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스스로 사직하기도 했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폐위하려하자 소장을 올려 대비에게 효성을 다할 것을 청하였는데,

이에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홍천으로 귀향을 보냈다.

그러나 그의 명망을 중하게 여겨 심한 형벌을 내리지는 못했다고 한다.

인조반정이 성공하고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제일 먼저 그를 천거하여 재상으로 삼고 매우 신임하였다.

이원익이 늙어 직무를 맡을 수 없게 되자, 사직하고 금천의 집으로 낙향하였는데

그의 집은 비바람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몇 칸의 초가집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떨어진 갓에 베옷을 입고 쓸쓸히 지냈다.

주변의 그 누구도 그가 재상인 줄 몰랐다.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인조는 세자를 보내 조문하게 하고 승지를 보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그런데 승지가 돌아와서 하는 말이

“그 집에 가보니 두어 칸의 띠집이었고, 그나마 비바람을 가릴 수도 없는 낡은 집이었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그래. 40년 동안 재상을 하면서 초가삼간도 장만하지 못했단 말이냐?”

인조는 감회어린 심정으로 장례식에 필요한 물품 일체를 하사했다고 한다.

이처럼 청렴했던 이원익은 22세에 승문원부정자의 직을 시작으로 평생을 관직에서 보냈다.

누구의 환심을 사거나 세태에 영합하려하지 않았고 묵묵히 맡은 업무들을 물 흐르듯 처리했다.

젊었을 적, 중국에서 온 사신이 이원익의 인품을 바라보고 통역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의 행동이 단정함과 그 마음씀씀이가 자상한 것을 볼 때,

틀림없이 소년 재상이 될 것이다”라고 탄복하였다고 한다.

훗날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내직인 정언으로 진출하게 되었고,

선조 29년(1596) 49세의 나이로 처음으로 영의정이 되었다.

1628년(인조 6) 이원익은

연풍현감으로 부임하는 손자 수약(守約)에게

'서여손수약부연풍현(書與孫守約赴延豊縣)'이라는 당부의 글을 써준다.

목민관으로서 백성을 다스릴 때 유념해야 할 덕목을 정리한 것으로

자신이 지방관으로 근무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들이다.

너의 아버지는 전후 고을을 맡을 때마다

청렴과 간명(簡明)으로 백성을 보호한다고 여러 번 임금에게 알려졌다.

너는 네 아버지의 아들이니, 마땅히 마음에 새겨 자신을 가지고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말라.

⊙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몸을 닦는 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
⊙ 천하의 실정을 안 다음에야 천하의 일을 이룰 수 있다.
⊙ 일에 임했을 때 지나친 분노를 경계하고, 서서히 일의 실정을 파악하라.
⊙ 사람을 다스림에 상벌이 없을 수가 없으니,

    착한 자에게는 상을 주고, 악한 자는 벌을 주어야 한다.
⊙ 하나의 이익을 일으키는 것이 하나의 폐단을 제거하는 것만 못하고,

    한 가지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 한 가지 일을 줄이는 것만 못하다.
⊙ 읍중에 일이 있거든 노련한 관리와 연로한 인민에게 물어서 인정에 합하기를 힘써야 하고,

    거만을 부리고 자신이 옳다고 하여 민심을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
⊙ 백성은 마땅히 어루만지고 은혜를 베풀어야하고,

    관속을 대우하는 것도 너무 각박하게 해서는 안 된다.
⊙ 모든 일은 마땅히 때에 따라 마음을 다해야 한다. 어찌 일일이 지휘할 수가 있겠느냐?

- 남정우, 문화재청, 월간문화재사랑, 2008-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