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의 혼이 서려있는 자운산 자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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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분단의 아픔 흐느끼는가 -
조선왕조 선조 17년(1584) 음력 정월 율곡이 세상을 떠나자 그해 3월 어느 날 자운산 기슭에 장사지낸 지 어언 423년, 이 긴긴 세월동안 학자이자 경세가이며 우국충정의 애국자이던 그의 혼백은 아직도 산자락을 휘돌며 살아계신 것만 같았다.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자운서원(紫雲書院) 일대를 돌아보면서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면서 역사를 한 단계 끌어올리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다가, 49세라는 너무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던 한 학자의 양심 앞에 머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 강변인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는 율곡의 선향이자 영원한 고향이었다. 도도히 물이 흐르는 강변에는 오래된 수목들이 연륜을 자랑하는데 거기에 우뚝 서서 남북의 통일만 기원하는 듯, ‘화석정(花石亭)’이라는 정자가 숲속에 우람하게 떠있다. 율곡의 5대 할아버지 이명신(李明晨)이라는 분이 세워 병란 때에 소실되고 말았지만 후손들의 따뜻한 정은 다시 세우고 또 세웠다. 율곡이 어린 시절 이래 생을 마칠 때까지 틈만 나면 찾아가 시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며 회포를 풀었던 바로 그 정자가 ‘화석정’이다. 바로 율곡이 8세 때 공부하다가 바람 쏘이려고 정자에 올라 무심코 읊은 시다. 어린 천재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런 나이에 그런 시를 읊겠는가. 가을에 지은 율곡의 시와는 다르게 한창 녹음이 짙은 여름의 경치는, 물도 푸르지 않고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기러기의 울음도 들리지 않으며, 남북의 분단을 서러워하는 강물만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이름에 걸맞게, 우리가 찾아간 그날도, 주변의 모든 산에는 밤꽃으로 하얗게 물들어 있었고, 우거진 밤나무가 지천으로 깔려있어, 짙은 밤꽃의 향기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밤골’이라는 율곡의 이름이 거기서 나왔고 고향마을의 이름을 따라 ‘율곡’이라는 호가 나왔다고 한다.
율곡리는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李元秀·벼슬은 감찰)의 고향이다. 율곡의 아버지는 강릉의 경포대 곁의 천하절경에 살던 사임당 신씨에게 장가들었다. 사임당 신씨의 친정어머니 이씨(李氏)가 기묘사화때의 의리를 지켰던 진사 신명화(申命和)의 부인으로 거처하던 곳이 바로 그 유명한 ‘오죽헌(烏竹軒)’이라는 신씨네 별서였다.
율곡은 신사임당이 거처하던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꿈에 흑룡이 하늘로 오르는 꿈을 꾸고 임신하여 출생하였기 때문에 그가 태어난 방이 ‘몽룡실’이고 아이 때의 이름이 ‘현룡(見龍)’이었다. 그래서 태생지는 바로 강릉이었다. 강릉이라는 도시는 바닷가의 아름답기 그지없는 곳이지만, 그 중에서도 경포대 근처의 오죽헌 일대는 세상에 없는 경치 좋은 곳이다. 그런 산과 강의 기운을 타고 난 율곡, 그가 애초에 천재였음은 모든 기록이 증명해주고 있다. 더구나 시문과 서화에 뛰어난 사임당 신씨의 교육을 받고 자란 때문에, 8세 때의 시에서 보는 바처럼 그의 글 솜씨는 세상에서 이름을 날리기에 넉넉하였다. 그는 아홉번의 시험에 모두 합격하여 ‘구도장원(九度壯元)’이라는 별칭을 얻었으며, 벼슬길에 오른 이후로는 참으로 온 정성을 다 해 임금을 바른길로 인도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이끌기 위해서 몸과 마음을 다 바쳤던 일생이었다.
# 퇴계를 선학으로 모신 율곡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학자로서야 퇴계와 율곡을 거명하는 일은 참으로 지당하다.
조선은 정치이념을 유교로 정하고 주자학의 다른 이름인 성리학을 학문의 가장 높은 위치에 놓았던 나라였다. 그렇다면 이런 학문의 대표자는 당연히 퇴계와 율곡이다.
이기론(理氣論)에서 견해를 일치시키지 못했던 퇴계와 율곡은 참으로 미묘한 견해의 차이로 퇴계는 영남학파의 종장(宗匠)이 되었고, 율곡은 기호학파의 종장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 두 학자의 인간적 신뢰나 상호간의 존경심은 요즘 세상의 인간관계와는 분명히 달랐다. 학문적 견해의 차이로 원수가 되고 당파로 나뉘어 싸우는 일은, 그들 두 분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요즘의 정파싸움이나 학자들 간의 싸움과는 본질을 달리했던 것이 그분들의 훌륭한 인간관계였다. 이틀 동안을 묵으면서 희대의 두 학자는 가슴을 열고 학문과 철학을 논하고 시를 짓고 마음을 합하면서 인생을 토론하였다.
율곡은 먼저 퇴계의 높은 학문에 감탄하여 퇴계의 학문연원이 바로 공자와 주자에서 흘러왔다는 높은 찬사의 시를 올려 바치자, 퇴계가 답한 시를 보면 얼마나 돈독한 관계가 이룩되었나를 방증해주고 있다. 더구나 율곡은 19세의 1년 동안을 불교에 심취하여 금강산에서 지내다가 다시 환속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13세에 진사과 초시에 ‘천도책(天道策)’이라는 수준 높은 철학논문을 지어 합격했던 율곡의 명성은 퇴계도 이미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이틀 동안 함께 자고 묵으면서 긴긴 토론을 계속해보고 사람됨을 제대로 알아본다. “비로소 이름 아래 헛된 선배가 없음을 알았노라”라는 찬사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일이 있을 때마다 편지로 퇴계의 의견을 묻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퇴계는 친절한 답변을 해주었고, 불교에서 과감히 벗어나와 유교로 되돌아 온 용기를 높이 평가해주는 글을 보내기도 했었다.
한때 율곡이 불교와 관계했음을 뒷날의 당쟁파들은 트집잡아 온갖 비방을 했지만 퇴계 같은 대학자는 애초에 율곡의 반성을 그냥 수용하고 전혀 문제 삼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남을 해치고 헐뜯기 좋아하던 당파 사람들은 그 점을 율곡의 약점으로 여겨 시비를 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파주의 옛 이름이 파평이다. 파평윤씨의 시조 윤관 장군은 파주가 낳은 고려 때의 최고 인물이다.
율곡은 물론 율곡과 버금가는 학자 우계(牛溪) 성혼(成渾)이 또 파주 출신이다. 세종 때의 유명한 청백리 황희정승이 노닐었던 반구정(伴鷗亭)도 파주에 있다. 율곡과 우계는 우계가 한살 위이지만 이들은 10대 때 사귀어 평생을 사귄 친구이자 도반(道伴)으로 영원한 학문토론의 훌륭한 상대자였다. 그러나 약간의 학문적 견해의 차이가 있어 수없이 많은 편지로 오랜 논쟁을 계속했지만 우정에는 한치의 차이 없이 돈독한 애정을 유지한 아름다운 만남을 이룩했다. 둘이 함께 화석정에 올라 시를 짓고 학문을 토론했으며, 세상이 시끄러운 세태에 분개하면서 어떻게 해야 나라를 제대로 이끌어 갈 것인가도 깊숙하게 토론하였다. 22세에 곡산 노씨와 결혼한 율곡은 처가인 황해도 해주도 출입하는데 해주의 석담(石潭)에는 구곡(九曲)의 아름다운 경치의 명승지가 있다.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율곡이라서 그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되어 그곳에 은병정사(隱屛精舍)라는 정자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칠 서재이자 만년에는 은퇴할 장소로 여겼다. 외조모가 계시던 강릉의 오죽헌, 화석정이 있던 고향 율곡리, 서재가 있던 해주의 석담구곡을 기회 있을 때마다 찾으며 살았던 것이 율곡의 일생이었다. 이조, 호조, 병조판서에 대제학을 역임하고 정승 다음의 우찬성에 올랐으나 반대파들의 탄핵에 시달리느라 제대로 경륜을 펼칠 기회는 많지 않았다. 청주목사와 황해감사의 지방관도 지냈으나 경세의 경륜을 펼 시간은 언제나 부족했다. 이전투구의 정치판보다는 고요한 ‘은병정사’에서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길러낼 욕심은 많았다. 그렇지만 49세라는 너무나 짧은 생애 때문에 그렇게도 경장(更張)하고 싶던 조선을 제대로 바꾸지 못하고 타계하여 자운산자락에 혼백이 남아 맴돌고 있으리니, 천재의 짧은 삶을 무덤 앞에서 애통해 할 수밖에 없었다.
- 학문과 정치 모두 밝았던 ‘大賢’-
# 조선의 대표적 학자와 정치가 그러나 높은 수준의 학문 경지에 이르렀으면서도 수준 높은 정치가의 반열에 오른 분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딱 한 사람이 그런 경지에 이르렀으니 바로 율곡 이이였다. 조정에 들어와서는 두려움 없이 군주에게 올바른 정책을 건의하여 국태민안의 세상을 만들기에 온 정력을 바쳤고, 전야(田野)에 물러나서는 학자들을 모아서 가르치는 스승이 되어 조선 성리학의 찬란한 꽃을 피우게 했던 최고 수준의 학자 지위에 올랐다. 그의 학문적 저술은 한편으로는 학술논문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통치의 방책을 열거한 정책대안서였다.
그가 20세에 금강산에서 돌아와 다시 유교의 진리를 통해 현실문제를 타개하겠다던 튼실한 각오를 설파한 글이 다름 아닌 그의 ‘자경문’(自警文)이다. 11조항으로 된 그 글의 첫째 조항은 “먼저 뜻을 크게 세워 성인(聖人)의 행실을 본받기로 한다. 털끝 하나인들 미치지 못하면 내가 하려던 일을 마치지 못했다고 하겠다”라는 목표를 세웠다.
그 뒤 벼슬하면서는 본격적으로 높은 수준의 학문적 업적을 바탕에 깔고 현실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을 올린다.
34세의 9월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임금께 올리는데 그 무렵에 가장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시무’(時務)와 ‘무실’(務實)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급선무의 정치가 어떤 것인가를 명확히 밝혔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시무’가 어떤 것인가를 계속하여 상소로도 올렸다.
39세에는 ‘만언봉사’(萬言封事)라는 길고 긴 상소문을 올린다. 국가 근심거리가 7종류에 이른다고 세세하게 설명하여 개선책을 강구하라는 요구사항을 열거하였다. ‘성학집요’(聖學輯要)라는 평생의 대작인 저서를 임금께 바친다. 바로 이 책이야말로 율곡이 학자이자 정치가를 겸한 ‘대현’(大賢)임을 명확하게 증명해주는 저서다. 이 책은 율곡이 경서(經書)와 사서(史書)에서 학문과 정사(政事)에 절실하게 요구되는 말들을 골라 뽑아 자신의 견해를 첨부하여 저작한 책이다. ‘학문과 정사’, 학자이면서도 정치가임을 증명해주는 말이다. “이 책은 참으로 필요한 책이다. 이건 부제학(율곡)의 말이 아니라 바로 성현의 말씀이다. 바른 정치에 절실하게 도움이 되겠지만, 나같이 불민한 임금으로 행하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다” 라고 말했다는 내용만 보아도 그 책이 지닌 내용과 가치가 어떤지를 설명해주고 있다.
조선 후기의 홍한주라는 학자는 그의 저서 ‘지수염필’(智水拈筆)이라는 책에서 조선의 3대저서로 ‘성학집요’ ‘동의보감’ ‘반계수록’을 열거한 바 있는데 타당한 견해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율곡의 저서에 ‘격몽요결’이 있다. 42세 때에 해주의 석담에 은거하면서 글을 배우는 사람을 위해서 지은 책이다. 필자가 어려서 마을 서당에서 배웠던 책의 하나다.
‘격몽요결’은 바로 조선시대 어린이들이 배웠던 교과서의 대표적인 책이었다. 사서오경을 배우기 전의 초학입문서로서 그만한 영향을 미친 책도 많지 않았다.
율곡의 저서로 빼놓을 수 없는 책의 하나는 46세에 완성한 ‘경연일기’(經筵日記)다. 벼슬하던 시절에 조정에서 일어난 일이나 임금과의 대화를 빠짐없이 기록하여 후인들이 귀감으로 삼기를 바라서 지은 일종의 역사서였다. 이 책도 학문과 정치가 함께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다. 대제학의 지위에 있으면서 마친 저술이다. 바로 앞의 해인 48세의 한 해는 참으로 바쁘고 분주한 해였다.
병조판서의 임무로 시작된 그해 2월에는 ‘시무6조’(時務六條)의 상소를 올려 시급히 해결할 문제를 진언했다.
첫째 어진이를 등용하시오, 둘째 군대와 백성을 제대로 키우시오. 셋째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마련하시오, 넷째 국경을 견고하게 지키시오, 다섯째 전쟁에 나갈 군마(軍馬)를 충분하게 길러야 합니다, 마지막 여섯 번째는 교화(敎化)를 밝히시오.
4월에는 또 ‘봉사’(封事)를 올려 그동안 주장했던 폐정(弊政)개혁을 다시 반복해서 요구하였다. 공안(貢案)의 개혁을 주장하고 군적(軍籍)을 고치며 군현을 합병하여 공직자 수를 줄이고 관찰사의 임기를 보장하여 제대로 지방을 다스릴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요구였다.
더 절실한 주장에는 서얼제도를 폐지하고 천민이나 노비 중에서 능력 있는 사람은 발탁해서 나라 일을 맡겨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무렵에는 또 ‘찬집청’(纂輯廳)이라는 관청을 신설하여 국가에서 서적 편찬사업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전에는 ‘경제사(經濟司)’를 신설해서 국가경제의 전담부서로 활용해야 한다고 방안을 내놓았다. 이런 주장의 설명에는 ‘필무실학’(必務實學)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궁행심득’(躬行心得)해야 한다고 했다. 반드시 실학에 힘써서 몸소 행하고 마음으로 체득해야 한다는 실천의지를 강조한 것이다. 이 무렵의 10만 양병설의 주장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다. 산림에 숨어서 벼슬을 싫어했던 학자들에게도 경종을 울렸고, 아무런 능력 없이 과거에 급제하여 녹이나 받아먹는 벼슬아치들에게도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학자가 율곡이었다.
학문을 연구하고 성현을 배워서 경국제세(經國濟世)의 대업을 성취할 책임이 지식인들에게 있음을 충분하게 설파하고 몸소 행동으로 보여준 조선의 대표적 학자가 바로 율곡이었다.
그래서 먼 뒷날 위대한 실학자 성호 이익은 그의 논문 ‘논경장’(論更張)이라는 글에서, “근세의 이율곡 같은 분은 경장(更張: 국가개혁)을 자주 말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옳게 여기지를 않았다. 지금 고찰해보니 명쾌하고 절실한 주장이어서 열에 8~9는 모두 실행이 가능한 주장이었다. 대체로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식무(識務: 현실정치에서 가장 시급한 일)를 가장 잘 이해한 분은 율곡이었다”라는 말을 했다. 학문만 연구하던 서생이 아니라 높은 학식으로 세상을 경륜할 가장 큰 역량을 지닌 분이 율곡이었다는 것이다. 퇴계학파 다음으로 율곡학파도 대단했다. 제자들의 면면에서 그냥 학파의 성대함을 짐작할 수 있다. 사계 김장생, 중봉 조헌, 수몽 정엽, 묵재 이귀 등 대단한 학자들이 율곡의 문하다. 특히 사계 김장생은 율곡의 가장 큰 제자로 율곡의 일대기인 ‘행장’을 저작하여 평생의 학문과 정사를 유감없이 서술하였다.
사계는 율곡행장에서 결론으로 “고려 말엽에 문충공 정몽주 선생이 처음으로 도학(道學)을 열어 명유들이 이어져 조선에 와서 번창한다. 그러나 학문이 높고 밝은 데에 이르고 재주가 경국제세의 역량을 감당할 만하고 의리로써 벼슬에 나아가고 물러났던 사람에는 조광조와 율곡 두 분이었다”라고 평가하고 율곡이야말로 만세토록 태평성대의 나라를 세우려 했으니 그 공로가 원대하다고 말하겠다 하였다. "반백의 나이도 못된 49세에 세상을 떠나 당시에 본인의 뜻을 다 이룩하지는 못했지만, 그 분이 설교입언(設敎立言)한 내용은 후학들을 계몽해주기에 충분했고 유풍여운은 쇠잔해지는 풍속을 용동시키기에 넉넉했으니 당시에 율곡의 도(道)가 제대로 행해지지는 못했으나 율곡의 은택은 무궁토록 후세에 미치리라" 고 글을 맺었다. 율곡, 서애 유성룡, 한음 이덕형이 세상을 떴을 때 가장 많은 백성들이 통곡했노라 했는데, 학문과 정치에 모두 밝았던 이항복은 율곡의 신도비를 지었다.
자운산 일대를 둘러보면 율곡의 묘소와 자운서원 입구에 신도비가 비각 속에 늠름하게 서 있다. 풍우에 마모되어 글자야 정확하게 판독하기 어렵지만 학문과 정치에 두루 밝았던 율곡의 일생을 넉넉하게 기술했음이 분명하다. 6·25에 소실되고 1970년에 다시 세워진 ‘자운서원’에는 묘정비(廟庭碑)가 우람하게 서 있다. 율곡-사계(김장생)의 기호학파를 확대개편하여 대학파를 이룩했던 사계의 제자 우암 송시열의 찬란한 학문과 문장이 그 묘정비에 새겨져 있다. 율곡학파의 뛰어난 계승자로서 기호학파의 대세력을 이룩한 우암의 문장 솜씨는 여기에서 충분히 발휘되었다. 율곡의 위대함도 유감없이 기술된 글이 바로 그 묘정비문이다. 우계 성혼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어 평생토록 사모하던 정몽주 · 조광조 · 이황 등의 혼백과 함께 조선팔도의 모든 고을의 향교인 공자 사당에 배향되어 만인의 존경을 받고 있다. - 2007년 7월 6일, 7월 13일 경향 / 박석무, 단국대 이사장·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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