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11)-(12) 한음 이덕형

Gijuzzang Dream 2007. 12. 17. 13:58

 

 

 

 

 

 한음 이덕형의 생애와 흔적을 찾아서

- 국난극복의 ‘臣’ -

 

한음 이덕형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와

집터임을 알려주는 유허비(오른쪽).


한음 이덕형(1561~1613)은

이름만 나오면 바로 오성대감 백사 이항복과 연결되는 학자요, 문인이었다.

겸하여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던 정치가로서 널리 알려진 역사적 인물이다.

 

조선 중기에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당해

오성과 한음이라는 두 정치가의 충성심과 지혜 때문에

망하기 직전의 나라가 중흥(中興)의 터전을 마련할 수 있었음은

현재까지의 정설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백사 이항복(1556~1618)은 한음의 5세 연상이었고,

한음보다 5년 뒤에 63세로 세상을 떠났으니, 한음보다 10년을 더 살았던 분이다.

 

한음 연보의 기록으로 보면 한음이 18세인 때 23세의 오성과 친구로서의 사귐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이 두 사람은 젊은 나이에 만난 친구가 친형제보다 더 가까운 우정을 키우면서

죽는 날까지 서로를 가장 잘 알아주던 지기(知己)였다.

두 사람의 아름다운 우정과 협력 때문에 위기에 처한 나라가 건져질 수 있었다면,

이 두 사람의 우정과 지혜의 공유만으로도 한 편의 역사서가 이룩될 수 있는 멋진 자료다.

이 나라의 역사에 그런 멋진 인간관계가 실재했다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조금 높은 지위에 있다는 사람들, 조금 학식이 있고 아는 것이 많다고 하는 사람들 사이일수록

서로를 시기하고 반목하거나, 어느 새 서로를 등지며 불화와 배신을 일삼으며

추악한 비방과 악담으로 조용할 날 없이 싸움질만 하는 사례를 볼 때,

오성과 한음의 멋진 우정의 유산은 정말로 값지고 본받아야 할 시대적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오성의 유적지를 찾은 다음 바로 한음의 생애를 되짚어 보면서

그의 유적지를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소인들이 권력을 농단하면서 광해군의 패악스러운 정치가 계속되자 강력히 항의하던 한음 이덕형은

탈관삭직되어 사제(私第)가 있던 당시의 광주(廣州) 땅,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 사제(莎堤) 마을에서 칩거하고 있다가

병이 도져 끝내 세상을 뜨고 말았다.

 

광해군의 패정에 항의하다가 양주의 노원(蘆原)에 물러나 있던 오성대감 이항복은

한음의 부음을 듣고 곧바로 사제로 찾아가 유가족들과 함께 곡(哭)하고

한음의 시신을 염습해주고 돌아갔다고 한다.

죽음에 이르는 날까지 그들은 아름다운 정을 잊지 않았으며,

한음의 묘지명(墓誌銘)을 지어 백사는 한음의 높은 학덕을 제대로 평가해주는 일로

그들의 우정을 마무리하기도 했다.

# 한음의 가계

광주(廣州) 이씨인 한음의 가계는 대단한 명문이다.

려말엽에 포은 정몽주와 함께 했던 이집(李集)은

호가 둔촌(遁村:오늘의 둔촌동에서 살았다)이며 직신(直臣)으로 큰 명성을 얻었던 분이다.

그 아래로 이인손(李仁孫)·이극균(李克均) 부자는 정승의 지위에 올랐다.

이극균은 연산군의 무오사화에 참살당한 어진 정승으로 세상에 유명했으니

그의 5대손이 바로 한음이다.

 

여러 곳의 원님을 지낸 아버지 이민성(李民聖)과

영의정 유전(柳琠)의 누이동생이었던 어머니 유씨(柳氏)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당시의 서울 성명방(誠明坊 : 지금의 남대문과 필동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영특한 두뇌를 타고난 한음은 소년 시절에 벌써 글 잘하고 얌전하기로 이름 났고

그를 만나본 어느 누구도 그의 뛰어난 문장과 인품에 감동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14세 때에 외숙인 영의정 유전의 집이 있는 포천의 외가에서 지낼 때

당대의 글 잘하기로 이름 높던 양사언(楊士彦)·양사준(楊士俊)·양사기(楊士奇) 형제들과 어울렸다.

양사언의 시에 화답하여,

 

“들은 넓어 저녁빛 엷게 깔리는데 / 물이 맑자 산그림자 가득해라 /

녹음 속에 하이얀 연기 이는데 / 아름다운 풀언덕에 두세채 집이로세

(野闊暮光薄 水明山影多 綠陰白煙起 芳草兩三家)”라고 읊자,

 

봉래 양사언은 “그대는 나의 스승이지 맞수가 아닐세”라고 말하며

뛰어난 한음의 글 솜씨에 탄복했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도 전해지면서,

한음의 시는 조선시대에 계속 교과서에 실려서 인구에 회자하는 시가 되었다.

# 31세에 대제학에 오르다

어린 시절부터 시 잘하고 글 잘 짓던 한음은 18세에 생원시에 수석하고

진사시에는 3등으로 합격하여 온 나라에 이름을 펄펄 날렸다.

17세에 뛰어난 예언가(豫言家) 토정(土亭) 이지함(李之함)의 눈에 들어

토정의 조카인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이산해는 당대의 문장가이자 영의정으로 한음의 장인이 되었다.

관상을 잘 보던 토정이 한음은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을 예언하면서 사위로 삼으라고 권하여

조카인 이산해가 한음을 사위로 삼았다는 이야기도 그대로 전해져서 기록으로 남아 있다.

마침내 20세에 문과에 급제하는데, 이때에 25세인 백사 이항복도 문과에 급제했고,

한음의 집안 형님인 이정립(李廷立 : 뒤에 광림군(光林君)에 봉해지고 참판에 오름)도 급제하여,

‘세 이씨’가 바로 그들이었다.

동방(同榜)으로 급제한 이 세 사람은

뒤에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나란히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함께 옥당인 홍문관에 들어가 승승장구로 벼슬길이 트이게 된다.

등급이야 정승의 아래이지만 선비들을 통솔하고 학술과 문장의 주도권을 쥔 대제학이라는 벼슬은

조선 시절에는 선비들이 가장 선망하는 벼슬이었다.

판서급의 지위로 학문에 뛰어나고 문장에도 능해서

만조백관의 추앙을 받아야만 그 지위에 오르기 때문에

대체로 노성(老成)한 벼슬아치들이 발탁되게 마련인데,

31세의 젊디젊은 나이에 한음은 대제학의 지위에 올랐다.

나이도 젊고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듭 사양했지만, 예조참판에 겸직으로 임명되었으니

조선 500년 동안 31세의 대제학은 한음이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만큼 그의 역량은 뛰어났고 학문과 문장도 그런 수준에 이르렀다는 것을 방증해주고 있다.

32세에는 대사헌의 직책으로 있으면서 임진왜란을 만났다.

좌의정으로 서애 유성룡이 있었고 도승지로 이항복이 일하고 있을 때여서

이들이 전략을 세우고 지혜를 짜내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조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의주로 선조대왕의 파천을 감행하고

끝내는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는 일을 그들이 수행했다.

 

백사 이항복은 임금과 함께 먼저 평양에 도착했고,

왜군의 진영에 들어가 그들과 담판하다가 혼자 남게 된 한음은

뒤에 혼자서 평양에 도착하자 숙소도 없어 백사의 숙소에 동숙하면서

전쟁에 대비할 전략을 세웠다는 이야기는 감동적인 일이었다고 전해진다.

백사와 한음은 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기로 마음 먹고

우선 명나라에 원군을 간청하는 일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의견을 모아 함께 건의하자 명의 원군을 청하기로 정했고

그 대표자로 한음이 선정되어 명나라를 향해 길을 재촉했다.

한음이 명나라로 떠나던 광경은 정말로 비장했다.

한음을 보내려고 남문 밖으로 나온 백사에게,

한음은 말이 한필이어서 하루에 이틀의 거리를 달리 수 없음을 한탄하자

백사는 타고 있던 말을 풀어주면서

“원군을 청하여 함께 오지 않으면 그대는 나를 쌓인 시체더미에서나 찾아야지

살아서는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오”라고 간곡히 당부하자,

 

“원병을 청해내지 못하면 나는 뼈를 반드시 중국의 노룡산 속에 묻고

다시는 압록강을 건너지 않을 것이오”라고 한음이 굳은 결의를 보였다는 것이다.

 

이들 두 충신의 확고한 의지 때문에

명나라는 조선에 파병하여 임진왜란의 급한 불을 어느 정도 끌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이던가.


 

한음의 신도비명을 이가원 교수가 한글로 번역한 비문을 새긴 기념비.

 


# 38세에 정승에 오르다

임진왜란의 참상은 필설로 다 말할 수 없다.

사실상 나라는 망한 상태였고 인민의 고통과 시름은 형언할 길이 없을 정도였다.

결국 명나라 군대의 힘으로 평양성이 탈환되고 끝내 한양이 수복되어 임금이 서울로 돌아왔지만

죽음의 도시인 서울은 사람이 살아갈 곳이 아니었다.

 

덕망 높은 신하들인 서애 유성룡, 오리 이원익이 힘을 합해주고

백사와 한음이 손을 맞잡고 중흥의 일에 앞장섰기 때문에 그나마도 나라의 형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전란 중에 여러 판서를 역임하던 한음은

38세의 4월에 왕족 아니고는 처음으로 가장 젊은 나이에 우의정에 오른다.

이 일도 역사에 드문 일이다.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는 동안 숱한 모함과 반목의 갈등을 겪으면서도

그는 오직 나라와 국민을 살려내려는 하나의 마음으로 충성을 다 바쳤다.

정유재란까지 겹쳐 7년의 긴긴 전쟁을 대신의 지위에서 겪은 한음은

갈고 닦은 학문과 인품을 최대한 활용해서 국난 극복에 생애를 바쳤다.

광해군의 폭정을 만나 그는 그렇게 아끼고 사랑했던 나라에서 탈관삭직이라는 고난에 처해야 했다.

어버이를 봉양하려고 마련한 운길산 수종사 아랫마을인 송촌리의 사제마을에

두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어놓고 아직 무성하게 자라나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유유히 흐르는 용진강(북한강)을 바라보면서 53세의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0년이 가까워오는 오늘,

우리가 찾은 송촌리의 사제마을에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풍우에 시달려 부러지고 찢겨,

한 그루는 밑동만 겨우 살아있고, 한 그루는 그래도 노거수로 살아 황량한 마을에

한음이 살았던 집터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다산 정약용의 고향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춘천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양수리가 나오고

거기서 북쪽으로 나 있는 강이 북한강인데, 용진강(龍津江)이라고도 부른다.

 

한음 이덕형의 유적지는 그 용진나루를 양쪽으로 하여 두 군데에 널려 있다.

다산이 자신의 집안 정원으로 여기면서 자주 찾았던 운길산의 수종사에서

멀리 떨어진 용진나루 위의 마을이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이고

옛날에는 사제(莎堤)라 부르던 마을이다.

 

다른 하나는 사제마을에서 볼 때 북한강 너머 양평군에 있는 한음의 묘소이다.

한음의 15대 종손인 이시우(李時佑)씨의 안내로

이시우씨의 집 뒷산에 고즈넉이 잠들어 계신 한음의 묘소를 찾았다.

6년 만 지나면 돌아가신 지 400년이 되도록 긴긴 세월

한음은 그의 부인 이씨와 합장으로 그곳에 누워 계신다.

애초에는 한음의 부인 이씨의 묘소가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그해 9월에 강원도 안협(安峽)에 피란 중이던 이씨는

왜적이 접근하자 28세의 꽃다운 나이로 순절하는 비운을 당한다.

그런 전란 중에도 정신이 똑바르던 한음은 순절한 부인의 시신을 챙겨

바로 지금의 묘소인 경기도 양근군 중은동(中隱洞) 산등성이에 장사지냈다.

중은사(中隱寺)라는 이름난 절이 있던 맞은편의 산이었다.

지금은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라 부르는 마을이지만 중은사는 터만 남았고

중은사 절터에 있는 아름드리 큰 느티나무만 한음을 알고 있는 듯 녹음이 짙을 뿐이다.


뒷날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한음은 부인의 묘소 위에 모시고, 자신이 죽으면 부인과 합장하라는 유언에 따라 지금은 부부가 어버이 묘소 아래에 함께 계신다.

 

한음 집안 어른이던 영의정 이준경의 묘소도 근처에 있어 그 골짜기는 정승골로 불리던 곳인데, 정승이던 한음이 또 그곳에 묻혀 ‘정승골’의 이름은 더 유명해질 수밖에 없었다.

# 임진왜란의 공, 일제 때 보복당해

묘소의 유적지에는 당대의 대제학 용주(龍州) 조경(趙絅)이 지은 한음의 신도비가 비각 속에 수백 년을 버티며 세워져 있다.

 

임진왜란 때에 한음의 반(反) 일본정신에 속상했던 일인들은 일제시대에 한음에게 보복하는 심정으로 신도비를 근처의 개울 속에 처넣었다.

 

왜경이 무서워 아무도 손을 쓰지 못하다가 해방된 뒤에야 후손들의 힘으로 다시 신도비를 꺼내다 세웠고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비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그러나 수십 년을 물속에서 닳았던 탓인지 세워진 빗돌이 낡고 닳아 글자는 거의 읽을 수 없는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더구나 후손의 이야기에 의하면 한음의 공훈에 보답하려 나라에서 내린 그 많던 사패지도

일제 때 강제로 대부분 강탈당하여 땅 한 평 없는 신세라고 하였다. 이 얼마나 비통한 일인가.

종손의 말에 의하면 묘소를 관리할 힘도 없었는데

문중에서 노력하여 겨우 묘소 인근에 토지가 약간 마련되어

신도비각과 영정각이 세워져 유적지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고 하였다.

 

 

당당한 풍채와 늠름한 모습의 한음 영정은

백사 이항복의 영정을 그린 화가 이신흠(李信欽 : 1570~1631)의 솜씨로 그려져

오랜 전란의 와중에도 종손들의 노력으로 원본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지금에는 모사본까지 많이 전해져 쉽게 접할 수 있다.

# 노계 박인로와 함께 노닐은 사제마을

임진왜란에 그만한 공을 세운 한음은 광해군 시절에도 임금의 총애는 식지 않았다.

그러나 소인배들의 무고와 질투로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다.

 

45세인 1605년 무렵에 복잡한 서울을 떠나 편히 쉴 별서(別墅·별장)로 마련한 곳이

한강을 기준으로 부모님 묘소와 반대편 10여리 거리인 용진강 위의 사제마을이었다.

노후의 휴양지로, 아버지를 편히 모실 장소로,

아내의 묘소를 찾기에 가까운 곳이라는 이유로 그곳에 정착하였다.

그곳은 한강을 끼고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져 있다.

백사 이외에도 당대의 귀인과 명인들이 경치도 즐기고 한음과의 대화를 위해 찾아오던 곳이다.

백사 이항복 다음으로 친했던 사람은 승장(僧將)으로 유명한 송운대사(松雲大師)였다.

그들의 주고받은 편지나 송운이 세상을 뜨자 한음이 바친 제문을 보면

그들이 함께 왜적 퇴치에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짜낸 자취를 찾을 수 있다.

말년을 함께 지낸 노계 박인로(朴仁老)는

한음과 동갑내기로 무관인 만호(萬戶)라는 하급관료였으나

생각과 사상이 같았기에 그들은 가장 가까운 벗으로 아름다운 우정을 나누었다.

가사(歌辭)에 뛰어난 박인로는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는데,

그의 유명한 ‘사제곡(莎堤曲)’은 한음이 사제마을에 거주할 때 찾아와 즐기면서 지은 곡이라니

대단한 우정으로 여겨진다.

어떤 경우(한음문집의 기록)에는 한음이 지어서 박인로에게 주었다고도 하는데

박인로 문집에는 노계의 작품으로 실려 있다.

사제곡의 내용은 충성심 높은 한음이 중상모략으로 탈관삭직되어 병든 몸으로 산골에 머물면서

자신보다는 나라와 임금을 염려하는 우국지사로서의 모습이 담겨있다.

사제마을에 거처하던 한음의 집은 ‘대아당(大雅堂)’이라는 당호를 내걸고

서실은 ‘애일(愛日)’, 마루는 ‘진일(眞佚)’이라 이름 짓고

따로 ‘이로정(怡老亭)’과 ‘읍수정(읍秀亭)’의 정자를 지어

시를 짓고 편히 쉬면서 손님을 맞을 장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가 심었다는 두 그루의 은행나무와 말을 탈 때 오르던 노둣돌 하나가 그대로 남아 있을 뿐이다.

풍우와 세월은 모든 것을 망각으로 사라지게 하였으니 명인의 흔적이 너무나 초라했다.

# 혁혁한 한음의 공, 역사는 증명한다

한음의 묘소에서 가까운 중은사 옛날의 절터에는 한음의 역사가 있다.

그의 후배로 큰 학자이자 벼슬아치이던 용주 조경이 한음의 일대기인 신도비문을 지었는데

이가원 박사의 번역으로 전문이 중은사 절터에 커다란 비석으로 세워져 있다.

 

최근에 후손들의 노력으로 세워졌다니 400년을 이어오는 후손들의 위선심이 정말로 따뜻하다.

 

용주 조경은 그 글에서 이원익·이항복·이덕형 세 정승이

임진왜란을 당해 망해가는 나라를 서로 힘을 합쳐 중흥시켰다고 칭송했다.

그러면서 한음이 “나라가 있는 줄만 알고 자신의 몸이 있음은 알지 못했다(知有國而不知有身)”라며

한음의 애국충정을 찬양하였다.

쌓은 학문과 축적한 지혜를 총동원하여

자신의 몸을 잊고 나라와 백성을 건지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는 평가였다.

일생의 지기 백사 이항복은

한음의 묘비문에서 한음의 지식과 인품, 사람됨과 높은 인격을 찬양하면서

그에 대한 바른 역사적 평가를 제대로 남겼다.

“근세에 율곡이 돌아가시자 성균관의 학도들이나 말단 군졸들까지 모여들어 슬프게 울었고,

서애 유성룡의 죽음에도 저자사람들까지 모여들어 울었으며,

지금 한음공의 이름이 탄핵에 걸려 처벌하자고 빗발치는 상소가 올려지는데

한음이 죽자 꼭 같은 일이 벌어졌다.

도대체 무슨 은혜를 베풀었기에 위아래 사람 모두가 그렇게 울고 있다는 것인가.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성인이 말했듯이 산 사람에게서는 뜻을 뺏을 수 없듯이

죽은 사람에게서는 명성을 빼앗을 수 없어서 그렇다”라고 설명하면서

한음의 훌륭한 명성도 빼앗지 못했기 때문에 남녀노소가 죽음 앞에서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한음과 친했던 친구이며 영남의 대유(大儒)이던 창석(蒼石) 이준(李埈)은

한음의 행장을 짓고 문집에 발문을 지어 그의 위대한 업적을 제대로 찬양하였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는 또 시장(諡狀)을 지어 그의 일생을 정리하였으니,

이만하면 한음은 뒤에 죽은 사람들에 의하여 영원히 죽지 않을 업적의 평가를 받기에 충분하였다.

# 다산 정약용의 찬양문

한음이 세상을 떠난 지 150년 뒤에 태어난 한음의 7대 후손에

실학자 복암(茯菴) 이기양(李基讓)이 있다.

바로 그와 막역하게 지냈던 조선 최고의 학자 다산 정약용은

한음의 화상(畵像)에 바치는 찬양의 글을 지었다.

아마 자신이 살던 곳과 가까운 수종사 아래서 살았던 한음이어서

더 가까운 마음으로 찬양사를 바쳤는지도 모른다.

젊은 나이에 높은 정승 지위에 올랐으나
백성들은 노성한 선비로 우러렀네
임금의 은총 가슴을 맡길 듯이 친숙했으나
벗들이야 포의한사처럼 가까이 여겼네
유언비어가 몸을 죽일 듯했어도
임금의 마음의 본심을 꿰뚫어 알아주었네

뼈를 깎는 무서운 상소를 올려도
어리석은 임금 광해도 내쫓지 못했네
높은 충성심과 큰 절개가
모두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면
아무리 하늘과 귀신이 돌보고 보살폈어도
누가 그에게 그런 큰 복을 내렸으랴

아름답다 풍성한 광대뼈에 윤기나는 보조개
큰 체구에 근엄함까지 갖추었으니
뒷세상의 사람들
그 누가 감히 공경하지 않을 건가 (故領議政漢陰李公畵像贊)

이만하면 한음 평생의 업적은 제대로 기록되었다.

다만 아무도 그런 글을 읽지도 않고 그런 글이 있는 줄도 모른다.

위인들의 업적이 이렇게 무시당하고 천대받아야 되겠는가.

백사의 ‘묘지명’, 창석의 ‘행장’,

용주의 ‘신도비명’에 다산의 ‘화상찬’이면

넉넉한 평자들을 만나 올바른 평가를 받았다고 보인다.

그러나 그의 유적지를 살펴본 느낌은 너무나 허전하고 서운하다.

용진나루 위에, 운길산 산자락에 흔적이 겨우 남은 사제의 ‘대아당’이 복원되어

그가 평생의 지기 백사나 노계와 나라를 걱정하고

세상을 경륜할 계책을 세우던 우국충정의 본뜻을 기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음의 5대조 이극균으로부터, 15대 종손 이시우씨 그리고 그 분의 손자에 이르기까지

22대의 종통(宗統)이 적장손(嫡長孫)으로 이어져 왔다.

이토록 혈통이 이어지는 것은 세상에 드문 일이다.

그런 순수한 혈맥이 힘을 발휘하여 한음의 혼이 국태민안의 큰 역할을 해줄 것만 빌고 바란다.
- 2007년 6월 8일, 6월 15일, 경향 / 박석무, 단국대 이사장 · 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