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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연재자료)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19)-(20) 창계 임영

Gijuzzang Dream 2007. 12. 17. 13:59

  

 

 

 

 

 

 

 우국의 구도자 창계 임영의 삶과 사상  

 

 


- 하루 7번 자신을 돌아보다 -
# 8세에 시를 지은 신동(神童)

큰 빗방울 연잎에 떨어지니           大雨落蓮葉
하얀 옥구슬 푸른 쟁반에 구르네    白璧轉靑盤


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에 있는 창계서원 신도비.

창계 임영(1649~1696)이 여덟살 때에 지은 시다.

이런 시를 읽어보고 신동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임영은 외가가 서울에 있었다.

임천(林川) 조씨로 인조 때에 병조참판 벼슬을 지낸 데다 학문까지 높아 당대에 큰 명성을 날리던 죽음 조희일(竹陰 趙希逸)의 아들에 근수헌 조석형(近水軒 趙錫馨)이 있으니, 그분이 바로 임영의 외조부였다.

그의 집이 서울의 장의동(壯義洞 : 지금의 북악산 밑 경복고 일대)에 있었고, 임영은 거기에서 인조 26년에 태어났다.

남명 조식의 문인으로 글 잘하기로 이름이 높았고 벼슬도 승지에 오른 운강 조원(雲江 趙瑗)은 여류시인 이옥봉(李玉峯)의 남편으로 더 유명한 분인데,

그의 아들이 죽음 조희일이고, 죽음의 아들이 근수헌이다.

이 3대가 진사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조선의 명가로 그만한 집안이 없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으니, 그런 외가의 피를 이은 임영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재주를 드러냈다고 한다.

태어난 곳이야 서울이었지만 임영의 고향은 전라도 나주의 회진 마을이다.

지금은 나주시 다시면 회진리지만, 고려 때에는 회진 고을이었다.

관향이 나주이지만 임씨들을 회진 임씨라고 부르는데,

천재 시인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고향이어서 세상에 더욱 이름을 날린 마을이다.

회진은 백호를 비롯한 시인이 많이 배출되어 ‘시점(詩店)’이라는 이칭도 있었다.

 

기묘사화 때의 귀래정 임붕(林鵬)은 승지의 벼슬을 지내고 크게 의리를 지켜 이름이 높던 분인데,

후손들이 연달아 높은 벼슬에 오르고 시문에도 뛰어나 인물의 보고로 알려진 마을이었다.

백호 임제는 곧 귀래정의 손자이고 귀래정의 후손인 임영은 백호의 재종증손(再從曾孫)이니

바로 당내(堂內)의 친족이었다.

귀래정 임붕 이후의 회진 임씨의 학문과 벼슬은

임영과 같은 학자를 길러내기에 부족함이 없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

임붕의 손자로 백호는 물론 그의 사촌 아우 서(서)는 호가 석촌(石村)으로 문과에 급제한 뒤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하는 당대의 문사였으며,

서의 아들 담은 문과에 급제후 이조판서에 올라 시호가 충익공이니 임영에게는 재종조(再從祖)가 된다.

할아버지 타는 상주목사를 지냈고, 그의 아우로 임영의 종조할아버지인 위는 호가 동리(東里)인데

사계 김장생의 문인으로 학문이 높아 은일(隱逸)로 지평(持平)에 오른 당대의 학자였다.

임영은 소년시절에 대체로 그분의 슬하에서 학문을 익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아버지 일유(一儒)는 학행으로 천거받아 여러 고을의 원을 지내며 높은 치적을 올린 이름난 선비며,

어머니 조씨도 이름난 가문의 따님으로 식견이 높은 분이어서

천재적인 임영은 어려서부터 글을 익혀 시문에 뛰어나다는 명성을 얻었다.

문집에 실린 ‘영화(詠畵)’라는 제목의 시는 11세 때의 작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림을 보고 화제로 지은 것 같은데 시격이 뛰어나게 높아 보인다.

푸르고 푸른 큰 소나무 아래           蒼蒼長松下
그 사이에서 흰 구름이 솟는구나     白雲生其間
강가에서 낚시질 하는 사람            臨溪有釣客
아마도 부춘산의 강태공 아닐는지   恐是富春山


한 편의 시는 바로 한 폭의 그림이다.
11세 소년의 시로는 정말로 좋다.

 7~8세 때에 글을 대부분 깨쳤고 한글까지 쓰고 읽을 줄 알아 신동에 값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 10대에 도(道)를 찾아 나서다

고관대작의 지위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아버지께서 여러 벼슬과 여러 곳의 고을살이를 했던 관계로

임영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임소를 따라다니느라 전국의 각처에서 두루 거주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고향인 전라도 나주 회진에 터전을 두고 생활하였고 학문을 익혔지만,

역시 서울은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자주 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17세 때에 아버지의 명으로 당대의 학자 정관재 이단상(靜觀齋 李端相)의 문하에 들어가

돈독하게 도학(道學) 공부에 침잠한다.

월사 이정귀의 손자요, 백주 이명한의 아들인 정관재에게 학문을 익힌 임영은,

정관재의 소개로 18세에는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의 문하에 들어가 깊고 넓게 학문을 익혔다.

 

그 무렵에 정관재의 사위인 농암 김창협(金昌協)과 평생의 친구로 사귀게 되고,

정관재의 아들인 지촌 이희조(李喜朝)와도 죽마고우로 평생의 학문친구가 되었다.

높은 수준에 이른 학자로 명망이 높아지자

자연스럽게 당시의 학계 거물들인 우암 송시열이나 동춘당 송준길의 문하에도 출입하였고

명재 윤증(尹拯)과도 많은 학문적 토론이 있게 되었다.

이 무렵 창계는 확실히 구도자로서의 공부하는 자세를 갖추게 된다.

일반 학자들과는 다르게

창계는 ‘칠성례(七省例)’와 ‘일방권점획례(日傍圈點劃例)’라는 특별한 의식을 정해놓고

매일매일 착실하게 실천에 옮겼다는 것이다.

'칠성례'란 글자의 뜻대로 일곱 차례 반성의 기회를 갖는다는 것인데,

자신을 깨우치고 반성할 자료가 되는 글이나 격언을 선정해놓고

하루에 일곱 차례인, 새벽 · 조반을 들기 전후 · 정오 · 석식 전후 · 잠들기 직전의 시간에

자기반성의 기회를 갖는다는 것이다.

'일방권점획례'란 자아의 반성과 자기비판을 계속하는 일이다.

매일 자신이 행하고 말한 일을 적어놓고 행한 일과 말을 자기 스스로 비판해보는 일이다.

했던 일이나 말이 양심에 비추어 부족함이 없으면 동그라미를 치고,

양심에 거리낌이 있으면 획을 긋고, 잘한 일과 못한 일이 섞여 있으면 점을 찍어 표시해두고

자기 행위를 스스로 평가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는 학문태도를 견지하여

구도자로서의 명확한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이런 성찰이 계속되고 높은 수준의 학자들과 교유하면서

10대에 그의 학문은 뚜렷한 성과를 얻기에 이른다.

특히 자신의 내적 기반을 견실하게 닦은 뒤에 사회적 실천에 옮기려던 그의 공부와 수양의 자세는

성리학자들에게는 귀감이 되는 자세가 아닐 수 없었다.

# 18세에 진사과에 장원

창계의 벼슬살이는 화려했지만 벼슬에 종사한 기간은 매우 짧았다.

왕조실록에서 사관이 말했던 대로 ‘다퇴소진(多退少進)’,

즉 ‘물러남이야 많았지만 벼슬에 나아가기는 몇 차례 아니었다’라는 뜻이니,

그야말로 ‘난진이퇴(難進易退)’였다.

 

18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과에 장원하여 천하에 이름을 날렸고,

23세에 학문이 익은 뒤에야 문과에 높은 등급으로 합격하였으나 벼슬이 내리면 사직소를 올려

자신의 간절한 우국충정을 토로하면서 벼슬은 사양하기 다반사였다.

애초에 부귀영달에는 뜻이 없었고,

어떻게 하면 학문의 진리를 밝히고 양심적인 선비들이 대접받는 세상을 만들 것인가라는

우국의 마음만이 가슴에 담겨 있었기 때문에 좋은 벼슬일수록 응하지 않고 사직소만 올렸다.

 

성리학에 깊은 조예가 있던 창계는

조선의 대표적인 학자 퇴계와 율곡 선생의 학문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분들의 뜻을 세상에 밝히려는 내심으로 언제나 학문에 침잠하는 것이 그의 본령이었다.

 

더구나 창계가 활동하던 시기는 서인과 남인의 당파싸움이 치열하던 때이고

말년에는 서인 내부의 노론과 소론의 당파가 격렬히 싸우던 때여서

정직한 선비가 마음 놓고 벼슬할 기회가 아니던 때였다.

 

숙종 임금 초년에는 더구나 남인이 정권을 주도하여

서인계이던 창계는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할 기회가 있었다.

27세에서 31세 때까지 5년간 강원도 통천에 은거하면서 마음껏 경전연구에 시간을 보냈고,

숙종 6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물러가자 32세 때부터 청요(淸要)의 벼슬이 연이어 내려졌다.

# 대제학의 물망에도 오르다

35세에서 38세 때까지 부모상을 치르고 나자

의정부 사인(舍人), 검상(檢詳), 승정원 동부승지, 홍문관 부제학, 성균관 대사성 등의

고관의 벼슬이 내렸으나 취임하지는 않았고,

오직 임금과 경학을 강론하는 경연관으로 어전에 참석하여 높은 수준의 이론으로

임금을 계도한 공로가 있었다는 것이 사관의 평이었다.

 

얼마 뒤에는 이조참의·호조참의의 벼슬이 내리고

전라감사와 대사간·대사헌·개성유수·공조참판이 내렸으나 응하지 않았고,

개성유수에 마지못해 취임차 상경하여 모진 질병으로 숙종 22년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홍문관의 부제학이 내려졌을 때에는

조야에서 다음에는 대제학에 오르리라는 기대가 컸다는 것이 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 48세의 짧은 생애

송시열, 송준길, 이단상, 박세채 등 스승의 문하에서 학문을 넓혔고,

김창협·이희조 등의 동료들과 강학을 통해 경전의 연구와 성리학의 깊은 공부를 한

시대의 석학이던 창계는 48세라는 너무나 짧은 일생을 마치고 말았다.

 

익은 학문과 경륜으로 제자를 양성하고 세상을 건질 벼슬살이도 역임해야 했건만

그러한 시간적 여유를 얻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단명에 아픔을 이기지 못했던 동료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고향인 나주의 회진에 근거를 두고 학문을 연구하고 도를 구하는 일에 매진했기 때문에

당연히 그 일대의 많은 제자들이 운집하여 학단을 이룩함직도 했지만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으로 거처를 옮겨 다녔고 한 곳에 오래 머물지 못한 이유로

스승에 버금갈 만한 제자들이 나오지 못한 점도 애석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창계는 고봉 기대승 이후에 호남 출신으로는 최고의 학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비록 짧은 생애를 마쳤으나, ‘창계집’이라는 27권 14책의 방대한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27권 중에서 10권이 사우들과 주고받은 서간문인데,

이 서간문은 바로 창계의 대표적인 논학문자(論學文字)로 그의 사상과 철학은 물론

성리학과 경학의 구체적인 이론이 그대로 담겨있어,

조선 유학자에서 혁혁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농암 김창협은

창계의 서간문에 대하여 “퇴계 이후에 드문 글”이라고 평했던 것이다.


- 벼슬도 버리고 道를 구하다 -
 

나주임씨들의 제실이자 창계서원의 강당인 영성각(永成閣).

창계서원은 전남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신걸산 아래에 있다.

<사진작가 황헌만>


 

# 창랑대(滄浪臺)에서 학문연구

대사성·대사간·대사헌의 벼슬과 전라감사에 개성유수의 높은 지위도 모두 응하지 않고,

창계는 44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학문에만 전념하겠다고

고향인 회진고리(會津故里)에 ‘창랑대’라는 집을 짓고 다시 구도의 길에 접어들었다.

이러던 시절에 지은 시인 듯, ‘한중음(閒中吟)’이라는 7언 절구 다섯 수는

그의 시문학과 철리(哲理)가 겹해진 수준 높은 작품으로

그의 학문의 깊이가 어디쯤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성인도 다름 아닌 인륜(人倫)을 다함이라                   上聖無他只盡倫
조금이라도 물러서고 미룬다면 바로 사람이 아닐세       재生退托卽非人
하늘의 분수나 사물의 이치 본디부터 흠결이 없나니      天分物理元無欠
다만 사(私)만 용납하지 않는다면 바로 참이라네          但不容私便是眞

참(眞)을 추구하던 구도자 창계는 세상의 이치를 그렇게 밝혔다.

아무리 높은 성인이라도 일반 사람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적 도리인 인륜(人倫),

즉 효제(孝弟)를 제대로 실천만 한다면 성인의 지위에 오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조금이라도 물러서고 우물거리면 사람이 아니라니 얼마나 독한 말인가.

 

성인으로 가는 구도의 길에는 공(公)이 있을 뿐이지 사(私)는 있을 수 없다.

사만 이기고 공으로만 간다면 거기에 바로 참이 있고 진리가 있다는 뜻이다.

그의 진지함이 어느 정도인가를 그냥 짐작할 수 있다.

 

창랑대를 세우고 3년째에 세상을 떠났으니

더 긴 한세월이 있었다면 그의 경지가 어디쯤임을 알기도 어려웠으리라.

# 창계의 학문 세계

창계는 젊은 시절에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등 5인의 저술에서

대체(大體)에 관계되고 일용에 절실한 내용을 뽑아서

10여권으로 책자를 편찬하려는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동방문헌의 아름다움이 이에서 더할 수 없으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계획의 결과 ‘퇴계집’과 ‘율곡집’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독서차록(讀書箚錄)을 각각 남겼다.

 

그런 정도로 퇴계와 율곡에 대한 창계의 존모심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창계는 학문의 길을 내면적 심화에서 찾았던 터여서

이(理)의 주체성과 적극성을 요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이발(理發)에 사상의 근거를 둔 퇴계 쪽으로 기울고

기발(氣發)의 율곡 논리에는 덜 찬성하는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다.

“기가 아니면 발할 수 없다(非氣則不能發), 발하게 하는 것은 기다(發之者氣也)”라는 율곡의 학설은

성인이 다시 태어나도 고칠 수 없다고 믿던 율곡의 후학들에게,

창계의 주리적(主理的) 입장은 결코 달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창계의 그런 입장을

농암 김창협이나 절친한 친구이자 친척이던 졸수재(拙修齋) 조성기(趙聖期)는 찬성해 주었기 때문에

뒷날 ‘조선유학사’에서 현상윤(玄相允)은 창계 · 농암 · 졸수재 모두를

퇴계와 율곡의 이론을 절충했던 ‘절충파’라고 명명했다.

 

더구나 창계는 최근에 발견된 그의 편찬서인 ‘퇴계언행록’에서 보여주듯,

퇴계학을 기호학파에 매개해 준 역할을 공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퇴계학파와 율곡학파가 당파싸움에까지 연결되어 극심한 논쟁으로 치닫고 있을 때에

퇴계 학문을 깊숙이 연구한 결과로 그의 언행록을 편찬하여 알리려던 마음이

바로 극단으로 치닫는 분쟁을 조절하려는 뜻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해본다.

이 점은 그 당시에 한창 큰 싸움으로 전개되던 노론과 소론의 싸움에서도

창계는 그 뒤의 화란을 걱정하면서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조절하려 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여겨도 본다.

그러나 고질적인 당파싸움은 창계의 노력으로도 해결의 실마리는 풀리지 않았다.

 

그가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만 침잠하려던 뜻도,

근본적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당파싸움의 해독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상에 나가 벼슬해서 그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와 민족,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그렇게도 간절한 참된 선비였지만,

벼슬을 버리고 시골에 묻히려던 뜻을 그래서 버리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더구나 스승이던 약천 남구만이나 현석 박세채와 명재 윤증이 모두 소론의 입장에 섰고,

절친한 벗 명곡 최석정(明谷 崔錫鼎) 등이 소론으로 강한 주장을 펴면서

창계는 사후에도 소론계로 분류되어 그의 학문과 사상이 크게 현양되지 못하는 불행도 겪게 되었다.

# 농암 김창협의 창계 옹호

‘병제설(兵制說)’을 짓고, 호포(戶布)의 문제점을 지적한 상소를 올린 우국의 구도자 창계를

누구보다 이해해주고 옹호해준 사람은 노론계의 거물 학자 농암 김창협이었다.

 

청음 김상헌의 증손자로,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로, 영의정 김창집의 아우로

안동 김씨 벌열의 후예로 예조판서에 대제학에 오른 농암은

소년 시절에 서로 만난 창계의 죽마고우였다.

 

장인인 이단상의 제자요 처남인 이희조의 친구이던 창계였기에 처가에서 만난 두 사람은

정말로 다정한 학우요 지기지우였다.

48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창계가 세상을 뜨자 농암은 울면서 제문과 만사를 지어 바치고,

뒷날 ‘창계집’을 간행하자 서문을 지어 그의 탁월한 문장과 학문을 찬양하고

성리학의 높은 수준에 정곡을 찔러 분명하게 해설해 주었다.

 

농암은 창계의 인품과 학문을 글자 여덟자로 압축해서 설명했다.

‘소견자대 소존자실(所見者大 所存者實)’,

즉 ‘관찰한 바는 크고 간직한 바는 실(實)하다’라는 말은

한 사람의 학문 업적에 대한 평가로는 더할 수 없는 찬양의 말이다.

농암 김창협의 아우 삼연 김창흡도 대단한 명성의 학자였는데 창계를 높이 평가했고

영의정 남구만, 영의정 최석정 등도 모두 그의 인품과 학문을 찬양하면서

짧은 삶에 한없이 애석한 뜻을 표해 마지않았다.

 

왕조실록에도 그의 졸기(卒記)를 통해 경전에 깊은 연구가 있었고

임금을 보도(輔導)함에 큰 공이 있는 강설을 했다는 평가를 했다.

# 창계의 유적지를 찾아서

지난 8월 하순 우리 일행은 창계 임영의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

더위도 한창인데 국지성 집중호우가 쏟아져 여행길은 막막했지만,

천우신조인지 억수로 쏟아지던 비도 유적지에 이르면 그쳐서 탐방에는 큰 불편이 없었다.

우리는 창계의 후손 임형택 교수의 안내를 받으며

먼저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신걸산 아래의 ‘창계서원’을 찾았다.

 

창계가 세상을 떠난 16년 뒤인 1711년 고향인 회진 마을에

후학들이 창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창계서원을 건립했다.

그러나 회진에는 그 서원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다.

그 서원은 1767년 화재로 소실되자 다시면 가운리의 선산 아래로 옮겼고

그 서원은 1868년 고종 5년에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고 말았다.

창계가 세상을 떠난 304년 뒤인 1999년

마침내 후손들과 유림들의 힘으로 가운리 옛 서원터에 오늘의 창계서원이 복원되었다.

가운리의 신걸산은 나주임씨의 세장지(世葬地)다.

귀래정 임붕, 백호 임제 등 임씨의 현조(顯祖)들의 묘소가 즐비하고

영성각(永成閣)이라는 제실(祭室)이 높다랗게 서 있다.

그 입구에는 창계의 신도비가 우람하게 서 있다.

 

이조판서에 홍문관·예문관을 겸한 대제학 이덕수(李德壽)의 글로 최근의 명필 여초 김응현의 글씨다.

영성각 뒤로 창계사(滄溪祠)라는 신실이 있고 그 곁에는 매계영당(梅溪影堂)이 있다.

일찍 세상을 떠난 형님을 못 잊고 청도 군수 시절에 형님 창계의 문집을 간행했고,

창계 사후의 모든 일을 제대로 처리해준 창계의 아우 매계(梅溪) 임정(林淨)의 영정을 모신 곳이

바로 매계의 영당이다.

매계 임정의 노력이 없었다면 창계의 사후 일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형님에 그런 아우가 있었음은 300년이 지난 오늘에도 형제의 정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창계의 묘소는 애초에 나주에서 가까운 함평 땅에 모셔졌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오늘의 묘소가 있는 영암군 금정면 월평리 학송마을의 뒷산에 이장하여

300년이 가깝도록 거기에 계신다.

 

형님을 위해서 온 정성을 바친 아우 매계의 공이 보이듯,

창계 묘소 앞의 빗돌은 중국에서 구입한 것인데,

아우 매계가 빗돌만 구해놓고 세우지 못했던 것을 뒤에 후손들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빗돌의 질이 너무 좋아, 3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새 빗돌처럼 완전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도를 구하고 진리만 찾으며 사느라, 벼슬도 버리고 부(富)도 멀리했던 창계의 성품대로

묘소도 소박하고 단아했다. 한창 묘소에 풀이 우거져 있을 때이건만

우리 일행이 찾아간다는 이야기에, 후손들이 동원되어 말끔하게 벌초한 모습에서

후손들의 따스한 정이 흐르고 있었다.

300년이 지났어도 후손들에게 창계의 피는 흐르고 있고,

도와 진리가 묻혀서 세상은 온통 인륜이 망가진 현실이지만,

창계가 실천하려고 밝혀 둔 인륜의 정당한 도리와 공정한 세상의 삶은 그의 저서에 그대로 살아있다.

호남의 학자로 고봉 기대승과 한말의 노사 기정진 사이에

호남의 학맥을 이어준 대표적 학자가 창계 임영이다.

 

그만한 학자의 유적지는 초라했고, 그만한 학자에 대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고

그분에 대한 기념사업 하나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세상이 이렇게 야박해서야 되겠는가.

고관대작도 초개처럼 버리고 학문과 진리, 도와 인생의 원리만 밝히며 살았던 창계.

그에 대한 업적을 현양하고 그의 뜻을 기리는 어떤 일이라도 일어나기만 빌고 빌 뿐이다.
- 2007년 10월 12일, / 박석무 단국대 이사장 · 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