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국의 구도자 창계 임영의 삶과 사상
| |||||
# 창랑대(滄浪臺)에서 학문연구 창계는 44세의 나이에 세상을 등지고 학문에만 전념하겠다고 고향인 회진고리(會津故里)에 ‘창랑대’라는 집을 짓고 다시 구도의 길에 접어들었다. 이러던 시절에 지은 시인 듯, ‘한중음(閒中吟)’이라는 7언 절구 다섯 수는 그의 시문학과 철리(哲理)가 겹해진 수준 높은 작품으로 그의 학문의 깊이가 어디쯤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무리 높은 성인이라도 일반 사람과 다를 게 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적 도리인 인륜(人倫), 즉 효제(孝弟)를 제대로 실천만 한다면 성인의 지위에 오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조금이라도 물러서고 우물거리면 사람이 아니라니 얼마나 독한 말인가.
성인으로 가는 구도의 길에는 공(公)이 있을 뿐이지 사(私)는 있을 수 없다. 사만 이기고 공으로만 간다면 거기에 바로 참이 있고 진리가 있다는 뜻이다. 그의 진지함이 어느 정도인가를 그냥 짐작할 수 있다.
창랑대를 세우고 3년째에 세상을 떠났으니 더 긴 한세월이 있었다면 그의 경지가 어디쯤임을 알기도 어려웠으리라. 정암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등 5인의 저술에서 대체(大體)에 관계되고 일용에 절실한 내용을 뽑아서 10여권으로 책자를 편찬하려는 계획을 세운 적이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동방문헌의 아름다움이 이에서 더할 수 없으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 계획의 결과 ‘퇴계집’과 ‘율곡집’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독서차록(讀書箚錄)을 각각 남겼다.
그런 정도로 퇴계와 율곡에 대한 창계의 존모심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창계는 학문의 길을 내면적 심화에서 찾았던 터여서 이(理)의 주체성과 적극성을 요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때문에 이발(理發)에 사상의 근거를 둔 퇴계 쪽으로 기울고 기발(氣發)의 율곡 논리에는 덜 찬성하는 입장을 견지하게 되었다. 성인이 다시 태어나도 고칠 수 없다고 믿던 율곡의 후학들에게, 창계의 주리적(主理的) 입장은 결코 달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창계의 그런 입장을 농암 김창협이나 절친한 친구이자 친척이던 졸수재(拙修齋) 조성기(趙聖期)는 찬성해 주었기 때문에 뒷날 ‘조선유학사’에서 현상윤(玄相允)은 창계 · 농암 · 졸수재 모두를 퇴계와 율곡의 이론을 절충했던 ‘절충파’라고 명명했다.
더구나 창계는 최근에 발견된 그의 편찬서인 ‘퇴계언행록’에서 보여주듯, 퇴계학을 기호학파에 매개해 준 역할을 공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퇴계학파와 율곡학파가 당파싸움에까지 연결되어 극심한 논쟁으로 치닫고 있을 때에 퇴계 학문을 깊숙이 연구한 결과로 그의 언행록을 편찬하여 알리려던 마음이 바로 극단으로 치닫는 분쟁을 조절하려는 뜻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해본다. 창계는 그 뒤의 화란을 걱정하면서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조절하려 했던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여겨도 본다. 그러나 고질적인 당파싸움은 창계의 노력으로도 해결의 실마리는 풀리지 않았다.
그가 벼슬을 버리고 학문에만 침잠하려던 뜻도, 근본적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당파싸움의 해독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상에 나가 벼슬해서 그런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와 민족,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마음이 그렇게도 간절한 참된 선비였지만, 벼슬을 버리고 시골에 묻히려던 뜻을 그래서 버리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절친한 벗 명곡 최석정(明谷 崔錫鼎) 등이 소론으로 강한 주장을 펴면서 창계는 사후에도 소론계로 분류되어 그의 학문과 사상이 크게 현양되지 못하는 불행도 겪게 되었다. 누구보다 이해해주고 옹호해준 사람은 노론계의 거물 학자 농암 김창협이었다.
청음 김상헌의 증손자로, 영의정 김수항의 아들로, 영의정 김창집의 아우로 안동 김씨 벌열의 후예로 예조판서에 대제학에 오른 농암은 소년 시절에 서로 만난 창계의 죽마고우였다.
장인인 이단상의 제자요 처남인 이희조의 친구이던 창계였기에 처가에서 만난 두 사람은 정말로 다정한 학우요 지기지우였다. 48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창계가 세상을 뜨자 농암은 울면서 제문과 만사를 지어 바치고, 뒷날 ‘창계집’을 간행하자 서문을 지어 그의 탁월한 문장과 학문을 찬양하고 성리학의 높은 수준에 정곡을 찔러 분명하게 해설해 주었다.
농암은 창계의 인품과 학문을 글자 여덟자로 압축해서 설명했다. ‘소견자대 소존자실(所見者大 所存者實)’, 즉 ‘관찰한 바는 크고 간직한 바는 실(實)하다’라는 말은 한 사람의 학문 업적에 대한 평가로는 더할 수 없는 찬양의 말이다. 영의정 남구만, 영의정 최석정 등도 모두 그의 인품과 학문을 찬양하면서 짧은 삶에 한없이 애석한 뜻을 표해 마지않았다.
왕조실록에도 그의 졸기(卒記)를 통해 경전에 깊은 연구가 있었고 임금을 보도(輔導)함에 큰 공이 있는 강설을 했다는 평가를 했다. 더위도 한창인데 국지성 집중호우가 쏟아져 여행길은 막막했지만, 천우신조인지 억수로 쏟아지던 비도 유적지에 이르면 그쳐서 탐방에는 큰 불편이 없었다. 우리는 창계의 후손 임형택 교수의 안내를 받으며 먼저 나주시 다시면 가운리 신걸산 아래의 ‘창계서원’을 찾았다.
창계가 세상을 떠난 16년 뒤인 1711년 고향인 회진 마을에 후학들이 창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창계서원을 건립했다. 그러나 회진에는 그 서원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다. 그 서원은 1767년 화재로 소실되자 다시면 가운리의 선산 아래로 옮겼고 그 서원은 1868년 고종 5년에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고 말았다. 창계가 세상을 떠난 304년 뒤인 1999년 마침내 후손들과 유림들의 힘으로 가운리 옛 서원터에 오늘의 창계서원이 복원되었다. 귀래정 임붕, 백호 임제 등 임씨의 현조(顯祖)들의 묘소가 즐비하고 영성각(永成閣)이라는 제실(祭室)이 높다랗게 서 있다. 그 입구에는 창계의 신도비가 우람하게 서 있다.
이조판서에 홍문관·예문관을 겸한 대제학 이덕수(李德壽)의 글로 최근의 명필 여초 김응현의 글씨다. 영성각 뒤로 창계사(滄溪祠)라는 신실이 있고 그 곁에는 매계영당(梅溪影堂)이 있다. 일찍 세상을 떠난 형님을 못 잊고 청도 군수 시절에 형님 창계의 문집을 간행했고, 창계 사후의 모든 일을 제대로 처리해준 창계의 아우 매계(梅溪) 임정(林淨)의 영정을 모신 곳이 바로 매계의 영당이다. 매계 임정의 노력이 없었다면 창계의 사후 일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런 형님에 그런 아우가 있었음은 300년이 지난 오늘에도 형제의 정이 따뜻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오늘의 묘소가 있는 영암군 금정면 월평리 학송마을의 뒷산에 이장하여 300년이 가깝도록 거기에 계신다.
형님을 위해서 온 정성을 바친 아우 매계의 공이 보이듯, 창계 묘소 앞의 빗돌은 중국에서 구입한 것인데, 아우 매계가 빗돌만 구해놓고 세우지 못했던 것을 뒤에 후손들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빗돌의 질이 너무 좋아, 300년이 지난 오늘에도 새 빗돌처럼 완전한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묘소도 소박하고 단아했다. 한창 묘소에 풀이 우거져 있을 때이건만 우리 일행이 찾아간다는 이야기에, 후손들이 동원되어 말끔하게 벌초한 모습에서 후손들의 따스한 정이 흐르고 있었다. 300년이 지났어도 후손들에게 창계의 피는 흐르고 있고, 도와 진리가 묻혀서 세상은 온통 인륜이 망가진 현실이지만, 창계가 실천하려고 밝혀 둔 인륜의 정당한 도리와 공정한 세상의 삶은 그의 저서에 그대로 살아있다. 호남의 학맥을 이어준 대표적 학자가 창계 임영이다.
그만한 학자의 유적지는 초라했고, 그만한 학자에 대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고 그분에 대한 기념사업 하나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세상이 이렇게 야박해서야 되겠는가. 고관대작도 초개처럼 버리고 학문과 진리, 도와 인생의 원리만 밝히며 살았던 창계. 그에 대한 업적을 현양하고 그의 뜻을 기리는 어떤 일이라도 일어나기만 빌고 빌 뿐이다.
|
'지켜(연재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23)-(24) 노사 기정진 (0) | 2007.12.17 |
---|---|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21)-(22) 화서 이항로 (0) | 2007.12.17 |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17)-(18) 시인 정치가 박순 (0) | 2007.12.17 |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15)-(16) 구암 한백겸 : 실학적 역사학 창시 (0) | 2007.12.17 |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13)-(14) 율곡 이이 (0) | 2007.12.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