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계 유형원 ‘반계수록’ 의 산실 | ||||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는 우반동(愚磻洞)이라고도 부르는 마을이다. 변산반도를 형성한 변산(邊山)의 산자락을 따라 질펀한 평야가 널려 있고, 평야에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많은 개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 우반동의 중앙으로 흐르는 냇물이 바로 반계(磻溪)라는 물줄기다.
세종 때의 유명한 청백리이자 이름 높은 정승이던 하정(夏亭) 유관(柳寬: 1346~1433)에게 임금이 내린 토지였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유관의 6대손인 유성민(柳成民)은 과거에 합격하여 형조정랑을 지낸 분이나, 선조가 물려준 땅을 찾아와 별장을 짓고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유성민의 사위이며 뒷날 반계 유형원의 고부(姑夫)이자 스승이던 동명(東溟) 김세렴(金世濂)의 시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런 이유로 유형원은 32세 이후로 할아버지가 자주 찾았던 우반동으로 이사와 정착하면서 ‘반계’라는 호를 사용했고, 그의 유명한 대저의 이름도 <반계수록>이라고 명명했다. 1622년 1월21일 외가인 소정릉동, 지금의 정동(貞洞)에서 성호 이익의 종조부인 이지완(李志完)의 외손자로 태어났다. 당시 정릉에 살던 여주 이씨 집안은 학문과 벼슬로 나라에서도 알아주며 떵떵거리던 집안이었고, 이지완의 아들이자 유형원의 외숙인 이원진(1594~1665)은 명문 출신으로 대단한 벼슬아치이자 큰 학자였다.
유성민의 사위인 김세렴은 호조판서를 지낸 고관으로 학문까지 높아 처조카인 유형원의 어린 시절에 학문을 가르쳐 준 스승이었다.
이미 과거에 합격하여 한림학사로 한창 이름을 날리던 아버지 유흠(1596~1623)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자결하는 불행을 맞았다. 반계는 두 살에 고아가 되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 그래서 유형원은 외숙과 고부(姑夫)의 보살핌으로 어린 시절에 학문을 익히고, 벼슬보다는 산야에 묻혀 지내는 처사(處士)로서의 삶을 택하게 되었다. 더구나 15세에 일어난 병자호란을 겪으며 아버지도 없이 조부모와 어머니를 모시고 피란 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고초와,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지는 국제질서의 변동 속의 어지러운 세상에서 물러나 미래의 설계를 위한 학문 연구에 몰두하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분위기가 있기도 했다. 벼슬의 뜻을 버리고 돈독하게 학문연구에만 몰두했다. 할아버지의 염원을 잊지 못해 33세에 진사과에 합격했지만, 대과에는 응하지 않았다.
우반동 변산의 산자락에 ‘반계서당’을 짓고 32세에서 52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실학의 비조’라는 호칭에 걸맞게 자기 이후의 모든 실학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반계수록>을 완성해놓았다.
31세에 시작하여 49세까지 19년에 걸친 기나긴 천착 속에 불멸의 명저가 탄생했으니, 반계서당이야말로 ‘반계수록’의 보금자리가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 평야가 널려 있어 삶도 궁핍하지 않았기에, 평생을 마칠 계획으로 부안으로 낙향한 유형원은 ‘부안에 도착하여’(到扶安)라는 시 한 수를 읊는다. 창문 열면 어부들 노랫소리 좋을씨고/ 베개 베고 누우면 노 젓는 소리 들리네 포구는 모두 큰 바다로 통했는데/ 먼 산은 절반이나 구름에 잠겼네 모래 위 갈매기 놀라지 않고 날지 않으니/ 저들과 어울려 함께 하며 살아야겠네.’
이 시 한 편을 읽어보면 그의 생각이 어디에 있고 어떤 삶을 살아가겠다는 조용한 뜻을 알기에 어렵지 않다. 산이 있고 물이 있고 바다가 있으며, 평야와 들이 있어 농사도 짓고 바닷고기도 낚아서 생활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있다. 사람을 보고도 놀라 날아가지 않는 갈매기들과 무리를 이루고 함께 살아가겠노라는, 자연과 전원을 그리워했던 생각이 여실하다.
죽은 지 100년 다 되는 1770년에야 ‘반계수록’이 간행되어 세상에 널리 퍼졌으나, 그 이외의 많은 저서들은 전해지는 것이 거의 없었다. 다행히 근래에 이우성 · 임형택 두 교수의 노력으로 ‘반계잡고’와 ‘반계일고’가 수집되어 간행되면서 그의 시문(詩文)도 얼마 정도는 읽어볼 수 있고, 그의 연보까지 간행되어 삶의 전체를 대강은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는 산속의 서재에 묻혀 글만 읽고 책만 쓰던 서생의 학자는 아니었다. ‘실학자’라는 명칭에 걸맞게, 그는 현실과 세상의 실상을 파악해야만 문제를 알아낼 수 있고, 그에 따라 해결할 대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래서 유형원은 글을 읽고 책을 쓰다가는 불현듯 일어나 조선 천지를 유람하는 여행길에 오르던 때가 많았다. 22세에는 경기도 여주로 이사가 살다가 고부 김세렴이 함경감사로 나가자 그를 찾아가 함경도 일대를 두루 유람하면서 역사의 옛터를 고루 살피기도 했다. 얼마 뒤에는 평안감사로 옮기자 그곳으로 찾아가 평안도 일대를 여행하며 고구려의 옛 도읍과 국토를 유람하기도 했다. 이 무렵 명나라가 완전히 멸망하자 정세 파악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면서 집에 안주하지 못하고 줄곧 여행길에 오르고 있었다. 29세에는 충청도 일대를 여행한다. 30세에는 처음으로 천하의 명산인 금강산에 올라 세상을 굽어본다. 이 무렵은 아직 조부가 생존하던 때로 명령에 따라 한 두 차례 과거에도 응시했으나 뜻대로 되지는 못했다. 그해에 조부가 세상을 떠났고, 마음 편하게 저술 작업에 착수한다. 상(喪)중에 ‘수록’의 저술에 착수했고, 32세에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본받아 글을 짓고 부안으로 낙향했다. 33세에는 진사시에 응시하려고 서울에 왔고, 34세에도 서울에 왔다. 35세에는 ‘여지지(輿地志)’라는 지리책을 저술했고, 36세에는 본격적으로 호남지방 일대를 두루 여행하면서 각 곳의 풍토와 물산을 모두 살폈다. 37~38세 무렵에는 정동직(鄭東稷) · 배상유(裵尙瑜) 등 친구들과 성리학에 대한 심도 깊은 학문토론을 계속하면서 자신의 철학적 기반을 다지기도 했다. 38세에 또 다시 호남지방 여행길에 올라 한 달이 넘는 긴 여행을 했다. 39세에는 딸을 시집보내기 위해 서울에 왔고, 40세에는 또 다시 영남지방 답사에 나섰다.
병자호란에 국왕이 청나라에 항복하고 삼전도비를 세운 그 치욕을 견디지 못하여 늘 괴로운 심정을 이기지 못했다. 그래서 41세에는 서울에 올라와 외가인 정동에 머무르면서 나라를 다시 일으킬 방략인 <중흥위략(中興偉略)>이란 책을 저술하기 시작했다. 끝내 완성은 보지 못했으나 그의 뜻은 매우 컸다고 한다. 그래서 청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준마를 기르며 말을 타고 하루에 300리를 달리는 기마연습을 했고, 좋은 활과 조총을 마련했으며 집안의 종들이나 마을 사람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200여 명의 군민들을 단련시켰다는 것이다. 전략가로서의 면모가 충분히 보이고 있다. 마침 스승이자 외숙인 태호 이원진이 세상을 떠나 장례를 치르고, 또 서로 만나기를 그렇게도 바라던 미수 허목 선생을 뵈려고 연천으로 찾아갔다. 그해가 1665년이니 44세의 장년인 학자 유형원과 71세의 원로 학자 허목의 해후가 이루어지던 순간이었다. 허목의 가까운 제자들이 모두 유형원의 친구들이어서 이미 간접적인 교류야 많았지만 실제로는 처음의 만남이었다. 근기학파의 개산조인 미수와 실학의 비조인 반계의 만남은 참으로 역사적인 만남이 아닐 수 없었다. ‘왕좌재(王佐才)’, 즉 임금을 도와 나라를 건질 수 있는 인재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고경(古經)으로 돌아가 현실을 개혁하자는 논리로 두 분의 의견이 모아졌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46세에 또 다시 반계는 미수를 찾아 경기도 연천을 방문한다. 며칠을 묵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세상을 구제할 토론을 거듭했다. 49세인 1670년에야 마침내 26권 13책의 <반계수록>이 완성되었고 그 대저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도 못한 52세인 1673년 3월19일 꼭두새벽에 아까운 나이로 대학자는 눈을 감고 말았다. |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에 있는 반계서당의 전경. 실학의 대저 ‘반계수록’은 이곳에서 쓰여졌다. /사진작가 이현석
- 토지공유 · 선거제 주창 … 묘소는 천대 -
한국 학술사에서의 의미로 보아 정말로 획기적인 책이다. 만권이 넘는 장서를 갖추고 불철주야 저술 작업을 계속했던 전라도 부안군의 우반동 ‘반계서당’은 그 책의 산실이었기에 참으로 뜻이 깊은 역사의 땅이고 사상의 고향이다. 그렇건만 보존이나 관리 상태는 너무도 등한하고 초라했다. 우리가 반계의 흔적을 찾느라 살펴볼 때의 심정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서당 건물의 관리도 부실하고, 그곳에 거주하며 식수로 사용했던 우물이 남아 있었지만 그 보존 상태는 정말로 한심했다. 그 저서가 조선후기 사회나 현재에 쉽게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음이 분명한데, 그 책의 산실이 그처럼 천대받는 모습은 참으로 처참한 마음을 자아내게 했다.
이제 정설로 자리 잡았듯이, 조선 실학의 1조(祖)는 반계 유형원이며 2조는 성호 이익이며 3조는 다산 정약용이다.
반계의 <반계수록>으로부터 조선의 실학사상은 본모습을 보였고, 그 이후의 실학자들은 대부분 반계의 경륜과 경세론(經世論) 및 경국제민(經國濟民)의 경제사상에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반계수록>의 서문을 짓고, ‘반계유선생전’이라는 전기를 지은 성호 이익이 가장 존숭하고 사숙했던 학자가 반계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지칠 줄 모르며 세상을 경륜하려던 뜻은 유독 반계옹에게서 볼 수 있네…”라는 시를 지어 반계의 학문을 찬양한 다산 정약용도 반계처럼 존숭한 선학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더구나 학파가 다르던 연암 박지원도 ‘허생전’에서 세상을 건질 대표적 인물로 반계를 거론했던 점으로 보면 그간의 사정을 알 만하다. 소론계의 대학자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과 그의 뛰어난 제자 덕촌(德村) 양득중(梁得中: 1665~1742)이었다. 학문적 역량으로 천거받아 은일 승지에까지 오른 분이 양득중이다. 이들 스승과 제자가 최초로 <반계수록>의 진가를 알아주어 끝내는 세상에 공간(公刊)되는 기회를 맞게 되었다. 윤증은 반계보다 7세 연하로, 83세이던 1711년에 <반계수록>을 읽고 크게 감동받고 책의 발문을 썼으니 반계가 타계한 38년 뒤의 일이었다. 그 글을 읽어보면 그 규모의 큼과 재식(才識)의 높음을 상상할 수 있다.… 세상을 경륜할 업무에 뜻이 있는 사람이 채택하여 실행할 수만 있다면 그대가 저술했던 공로는 그때에야 제대로 나타날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사라져버릴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하여 불멸의 저서가 될 것을 이미 윤증은 예언하고 있었다. 활용할 임자만 만나면 그 책은 천하국가를 다스릴 훌륭한 저서라고 평가를 내린 것이다. 임금에게 상소하여 책의 간행을 권하였다. 1741년 영조17년의 일인데, “근세의 선비 유형원이 법제를 강구하여 찬연스럽게 갖추어놓았습니다. 전제(田制)로부터 시작하여 교육문제, 관리등용문제, 관직 · 봉급 · 군사제도에 이르기까지의 세세한 것을 모두 거론하여 털끝 하나인들 빠뜨리지 않았습니다”라고 책의 가치를 나열하여 나라를 건질 계책으로 활용하기를 주장하였다. 이래서 반계가 타계한 97년 뒤인 1770년에 책은 간행될 수 있었다. 약산 오광운(吳光運)은 반계수록의 서문을 지은 바 있고 그의 일대기인 행장을 짓기도 하였다. 1746년에는 홍계희(洪啓禧)가 반계선생전을 지어 그 공덕을 상세히 나열하기도 하였다. 오광운은 “우리나라 같은 조그마한 나라를 위해서 설계했지만 그 범위가 넓고 커서 실제로 천하 만세에 유용한 책이다”라고 찬양하였다. 홍계희는 경세학이야 말할 것 없지만 반계는 성리학에도 밝아 경세학에 근본이 있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 성호는 나라를 다스리면서 당대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장 잘 알았던 사람으로 역사 이래 두 사람을 꼽는다면 율곡 이이와 반계 유형원이라고 확언을 했다. 세상을 경륜할 능력의 소유자도 율곡과 반계를 꼽은 성호의 주장은 옳았다. 그래서 성호는 “조선을 세운 이래로 세상을 경륜할 인재로 말하면 모두가 반계를 첫머리로 꼽는다”라는 높은 평가를 내렸다. 그의 저서 ‘지수염필(智水拈筆)’에서 조선 500년 동안 가치 높은 책으로 율곡 이이의 ‘성학집요’와 허준의 ‘동의보감’, 반계의 ‘반계수록’ 및 이만운의 ‘문헌비고’ 등 네 종류를 지목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를 경륜할 책으로 그 역량과 경륜은 비록 천백년 뒤라도 종당에는 실행할 날이 있을 것이다”라는 의미 있는 말을 남겼다. 현실적 타당성을 지녔고, 실제 일에서 반드시 실천할 논리를 지닌 경세서라고 평했다.
“천하를 다스리려면 공전(公田)제도와 공거(公擧)제도를 실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정치를 잘 해도 헛된 일이 되고 만다”라고 하여 통치원리로 토지의 공유와 인재발탁의 방법으로 공변된 천거제도 활용을 강조하였다. 요즘으로 말하면 토지 공개념과 선거제도를 통한 인재의 등용이니 얼마나 탁견의 예언인가. 대단한 발상이었다. 통치 원리가 어디에 있음을 밝히고 있다. 추천제도가 없이 글짓기나 경전 암송하는 과거를 통해서 인재를 뽑는 일 때문에 중세의 긴 밤이 계속된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기총론’, ‘논학물리’, ‘동사강목조례’, ‘군현제’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지금은 전하는 것이 많지 않다. 다행히 근래에 여기저기서 새로운 저서들이 나타나고 있어 다행스럽다. 특히 ‘병서’, ‘음양율려’, ‘성문(星文)’, ‘지리’ 등의 저서가 아직 전해지지 못함은 마음 아픈 일이다.
반계서당 아니고는 오직 그의 묘소가 유일한 유적지로 전한다. 1673년 5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반계. 처음에는 반계서당 뒤편에 임시로 장례를 치렀으나, 바로 그해에 아버지의 묘소 아래로 이장하였다. 당시로는 경기도 죽산현 죽산읍 북쪽 15리 지점인 용천리 정배산 기슭이었다. 28세의 꽃다운 나이로 억울한 죽음을 당했던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서인 듯 반계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 묘소 아래에 묻혀있다. 지금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산28-1의 산등성이에 편안히 누워계신다. 찾기가 너무 어려웠다. 변변한 표지판 하나 없어 산길을 헤매야했으니 힘이 들었다. 조그만 묘에 화려한 장식도 없었으나, 오래된 빗돌에 문인석이 우람하게 지키고 있어 그래도 덜 서운했다.
‘유명조선국 진사증집의겸진선 반계유선생형원지묘 (有名朝鮮國進士贈執義兼進善磻溪柳先生馨遠之墓)’라는 비의 전면 글씨에 그의 간단한 일대기를 적은 뒷면의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홍계희 작품이었다.
묘를 쓴 100년 다 되는 1768년에 죽산부사 유언지(兪彦摯)라는 분이 평소에 반계를 사모하던 터여서 부임하자마자 글을 지어 묘소에서 제를 올리고 여러 선비들의 도움을 받아 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 2년 뒤인 1770년에는 ‘수록’의 공간과 함께 통정대부 호조참의라는 높은 벼슬의 증직을 내렸으나 이미 세워놓은 비여서 예전의 벼슬을 기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숙부인에 증직된 부인 풍산심씨와 합장으로 금년까지 324년 동안 반계는 묘안에서 눈을 감고 <반계수록>에 담긴 공전(公田)제도와 공거(公擧)제도가 실현되기만 학수고대하며 누워 계실 것이다. 공리공론의 관념론에 사로잡혀 공언(空言)만 판치던 세상, 문약(文弱)하기 이를 데 없어 끝내 삼전도에서 인조대왕이 무릎을 꿇고 항복했던 치욕의 나라, 그런 나라를 그냥 두고 볼 수 없다고 분연히 일어나 나라를 새롭게 개혁하고 변혁시키려던 꿈을 품었다. 그 실현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 그 혼이 지금도 살아서 펄펄 뛰고 있는데, 그런 위대한 선구적 학자의 묘소가 그렇게 쓸쓸해서야 되겠는가. 오호통재로다. “반계선생은 호걸의 선비였다. 학문은 천인(天人)을 꿰뚫고 도(道)는 온 인류를 포용하고 있다.… 정치의 실무를 알게 해주는 요결(要訣)이며… 그 강령(綱領)의 웅장함과 절목(節目)의 치밀함은 읽는 이들이 절로 알리라”는 대찬을 바치고 있다. 그래서 부국강병의 길을 열고 남과 북을 통일하고 동과 서도 합해지는 위대한 경국제세(經國濟世)의 새 지평을 열어야 하리라.- 2007년 3월 9일 / 3월 16일 〈박석무 단국대 이사장 · 성균관대 석좌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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