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조선 성리학 본산 도산서원 | ||||||||
공자가 창시하고 맹자가 확대하여 동양의 정통학문으로 발전된 유학, 이름하여 수사학(洙泗學)이라 일컬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새로운 사상과 학설이 첨가되며 발전도 했으나 때로는 침체에 빠지기도 했다. 마침내 송나라에 이르러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나와 끝내는 성리학이라는 철학사상으로 자리잡았다. 고려 말엽에 중국에서 전래된 성리학은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의 학문적 업적이 더해지면서 조선왕조로 승계되었다.
정치와 학문의 기조로 여기면서 통치원리로 정착시켰다. 전국의 모든 고을에 향교를 세워 공자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을 짓고, 유학을 강(講)하는 명륜당과 동재 · 서재를 세워 선비들을 양성해냈다. 그야말로 유교천국의 나라가 세워진 셈이다. 중종 31년인 1536년에 강원 강릉의 북평촌에서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태어나면서 조선의 성리학은 양대 산맥을 줄기로 하여 참으로 혁혁한 발전을 이룩하게 된다. 이른바 영남학파는 퇴계를 존숭하는 학파로, 기호학파는 율곡의 학통을 이으면서 조선 성리학의 두 큰 학맥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어머니 박씨부인에게서 가정교육을, 숙부 송재 이우(李堣, 1469∼1517)공으로부터 글을 배우며 학문의 기초는 모두 닦을 수 있었다. 12세에 숙부에게서 ‘논어’를 배웠다는 기록으로 보면 10세 전후에 벌써 학문이 크게 성취되었음을 알게 된다. 20세에 ‘주역’에 몰두하여 밥 먹고 잠자는 일까지 잊을 정도였다는 연보의 기록으로 보아도, 약관에 학문이 익었음을 알게 해준다. 34세에는 어머니의 소원대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가 시작되었다. 급제 직후 한림학사가 되었으나 편찮으신 어머니를 뵈려고 휴가를 얻어 고향으로 내려왔으니 37세에 끝내 어머니가 타계하고 말았다. 39세에는 옥당벼슬에 오르니 홍문관 부수찬으로 임명받았다. 그래서 언제나 ‘난진이퇴(難進易退)’였다. 벼슬에 나아가기는 어렵게 여기고, 벼슬에서 물러나는 일은 쉽게 여겼다는 뜻이다. 마음이 항상 학문연구와 산림(山林)에 있었으나 선비로서 벼슬을 철저히 단념할 수가 없어 임금의 부름에 마지못해 응했다. 휴가를 얻어 고향에 돌아오면서부터 이미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귀향할 생각을 했다고 한다.
46세 때에 장인상을 당해 하향한 뒤 관직에서 해임되고는 고향에 은거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46세 부터는 벼슬을 받아도 나가는 경우보다는 사직소를 올리고 부임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50세부터 오늘의 도산서원 터에 하나씩 집을 지으면서 은거생활의 기반을 마련했으니 최초에 지은 집이 퇴계라는 개울의 서쪽에 있는 ‘한서암(寒棲菴)’이었다. 그 무렵 좌윤(左尹)벼슬에 있던 형인 이해(李瀣)가 억울하게 유배가다가 도중에 세상을 떠나자 벼슬할 생각은 더 이상 갖지 않게 되었다. 53세에는 대사성, 54세에는 형조참의, 56세에는 홍문관 부제학, 58세에는 공조참판, 66세에는 공조판서에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해서 내리기도 하였다. 69세에도 의정부 우찬성이라는 정승 다음의 벼슬을 내렸으나 출사하지 않고 상소를 올려 사직을 허락받을 수 있었다. 대략의 벼슬살이 경력이다. 50세의 2월에 처음으로 퇴계의 서쪽에 집을 짓고 생활하기 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무렵부터 본격적인 은거생활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고향의 선배인 농암 이현보를 찾아가 시를 짓고 함께 즐기던 생활의 기록이 있고, 이 무렵에 지은 시 한편은 바로 그 무렵 자신의 심경을 제대로 읊고 있다.
제목이 ‘퇴계(退溪)’라는 시다. 벼슬에서 물러나 경치 좋은 시냇가에 살 곳을 정해놓으니 몸이야 무척 편안하지만, 행여 학문연구에 등한할까 걱정이 많음을 토로하고 있다.
공자가 개울가에서 흐르는 물을 보면서, “가는 것이 저것들과 같구나”라고 탄식했다는 ‘논어’의 글귀가 있다. 당한 그 순간에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세월은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경계의 뜻이어서, 퇴계도 흐르는 물가에 이르고 보니 허송세월해서는 안된다는 반성의 마음이 앞선다는 생각을 읊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 해인 51세에 계상서당(溪上書堂)에 생활하면서 그 무렵 학자들이 글을 물으려고 찾아오는 수효가 늘어나자 도산서당을 영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러던 어느날 조선의 천재로 조야에 이름을 날리던 젊은 학자 율곡 이이가 도산으로 퇴계선생을 찾아뵙는다.
퇴계와 율곡의 참으로 역사적인 만남이다. ‘퇴계집’에는 기록이 없으나 ‘율곡집’에는 그들의 만남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봄에 예안의 도산으로 퇴계 이황선생을 찾아뵙다’라는 대목에서 자세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해는 율곡의 나이 23세이고 퇴계는 58세의 노숙한 당대의 대학자였다.
1558년의 봄이었다. 평소에 그렇게 흠모하며 뵙고 싶던 퇴계, 강릉 외가로 가는 도중에 도산으로 향했다. 그래서 ‘마침내 찾아뵙다’라는 표현을 썼으리라. 벼슬에서 물러나 제제다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던 계상서당에 은거하던 퇴계. 근엄한 노학자를 뵙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 율곡은 우선 시 한수를 올려 바친다. 공자가 학문을 연구하고 강학을 했던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에서 흘러나왔고, 산은 주자학이 완성된 무이산의 줄기에서 뻗어 나왔다면, 공자의 학문과 주자의 성리학이 모아진 곳이 바로 퇴계선생이 살고 있는 퇴계라는 시냇가의 집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면서 퇴계선생의 그런 높고 큰 학문을 듣고 배우려고 찾아왔지 그냥 시간을 보내며 놀다가려고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데에, 퇴계의 높은 학덕과 율곡의 구도정신이 함께 표현되었다고 보인다. 학문이 깊고 시를 잘하던 퇴계가 그냥 시를 받고만 말 것인가. 퇴계도 즉각 율곡의 시에 화답하는 시를 짓는다. 기묘명현이던 진사 신명화(申命和)의 외손자로 신사임당의 아들이던 율곡은 세상에서 천재로 소문이 파다하던 젊은이였기에 퇴계도 이미 그의 이름을 기억했나 보다.
그래서 율곡의 수작을 들어보고 올린 시를 읽어보자,
“비로소 이름 아래 헛된 선비 없음을 알겠네”라며 율곡의 재주를 칭찬해주고, 곧바로 23세의 젊은 천재에게 어른으로서의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정학(正學)의 공부에 열심히 노력하여 학문이 제대로 익으면, 마치 잘 자라는 곡식에서 피가 자라지 못하듯이 잡된 학문은 끼어들지 못한다고 하여 한때 불교공부에 몰두했던 율곡에게 넌지시 정학에 분발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흘러다니는 티끌이 있다면 아무리 거울을 닦고 갈아도 맑게 남아있지 않는 것이니 잡된 생각을 버려야만 맑은 마음이 유지될 수 있다는 뜻을 밝혀주고 있다. 그러면서 공자와 주자에 비긴 과장된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겸손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있었다. 대단한 학자들의 대화였다.
#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
퇴계 선생의 학문과 사상이 담긴 ‘퇴계집’을 읽어보며, 그의 학문의 본산인 도산서원 일대를 둘러보고 그가 태어난 마을인 안동 온계리(溫溪里)의 퇴실과 수백 년 동안 누워계시는 묘소를 돌아보고 종손(宗孫)들이 터를 지키며 살아오는 퇴계종택을 둘러보면서, 위대한 학자의 흔적은 사라질 수 없는 것이라는 큰 교훈을 느끼게 했다. 태어난 지 500년이 넘은 학자! 유적지가 비교적 잘 보존되고 정돈되어 있었다. 역사를 외면하고 선현들의 업적을 소홀하게 여기는 현대인의 풍속에서, 그 정도로 퇴계유적지가 존재해 있음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후손과 후학들의 노력으로 보아져 고마운 뜻을 전해드리고 싶다.
누가 뭐라 해도 퇴계야말로 조선 제일의 성리학자임은 명확한 사실이다. 그의 일급 제자 고봉 기대승(奇大升)이 퇴계의 이기철학에 문제를 제기하며 7년 동안이나 편지를 통해 학술논쟁을 벌인 찬란한 전통이 있고, 까마득한 후배 율곡 이이가 ‘이발(理發)’이라는 두 글자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높은 학술논쟁을 벌였지만, 퇴계학단의 끈질긴 변론과 세력의 힘으로 퇴계학설의 비중은 조선 성리학의 대표적 지위를 유지하는데 흔들림이 없었다. 물론 이러한 논리가 확정되기까지에는 고봉 기대승의 학설이 첨가된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율곡 이이는 사단이나 칠정은 모두가 “기가 발해서 이가 탄다”는 말이야 옳지만 ‘이발(理發)’은 나타날 수 없는 현상이라고 분명한 반대를 표했다. 그야말로 당동벌이(黨同伐異)의 치열한 싸움이 전개된 지 200년, 다산 정약용은 두 학파의 논쟁을 종식시키는 훌륭한 답안이자, 자신의 철학으로 이기논쟁의 새로운 틀을 만들어냈다. 그의 ‘이발기발변(理發氣發辨)’이라는 짤막한 두 편의 논문은 ‘학자들이 이런 뜻을 살펴 깊이 실천하기’를 염원하면서 논쟁의 종결을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산은 퇴계가 말하는 이(理)와 기(氣)는 율곡이 말하는 이(理)와 기(氣)와는 뜻이 다르다는 것이다. 퇴계는 ‘전취(專就)’하여 ‘이기’를 사용했고 율곡은 ‘총집(總執)’하여 ‘이기’를 사용했으니 누구는 옳고 누구는 그르다고 할 수 없이 퇴계는 퇴계대로, 율곡은 율곡대로 ‘이기’를 사용하여 자기대로의 학설을 폈던 것이니, 여기서 시비를 가리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다산은 오랫동안 전개되던 두 학자의 시비에 대한 결론을 맺어, 퇴계도 옳고 율곡도 옳다는 윈윈의 멋진 이론을 도출해내기에 이르렀다. (退溪一生用力於治心養性之功)”라고 하여 성리학자임을 분명히 하였다.
성호 이익(李瀷)은 ‘논경장(論更張)’이라는 글에서 ‘대체로 국조 이래 현실정치에서 힘써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가장 잘 알았던 사람 (蓋國朝以來識務之最)’은 바로 율곡 이이였다는 평을 내렸다. 퇴계는 성리학자의 최고봉이고 율곡은 성리학과 함께 통치원리까지 가장 잘 알았던 학자라던 다산과 성호의 평을 오늘의 우리가 이해한다면 그런 실익 없는 논쟁은 끝나리라 믿어진다.
퇴계는 충실한 주자학의 계승자였다. 선비라면 의당 학문을 연구하여 백성들에게 혜택을 주는 택민(澤民)의 공(功)을 저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어머니와 형들의 권유에 의해 과거에도 응시하여 급제하였고, 벼슬살이도 했던 퇴계, 그라고 택민의 공을 생각하지 않았으리오마는 허약한 몸으로 언제나 병고에 시달리면서, 그는 충실한 주자의 제자가 되어 ‘치심양성(治心養性)’의 성리학 논리를 후생들에게 가르쳐주는 공(功)도 만만찮은 일이라고 여기고 그런 논리의 개발과 연구에 일생을 바친 학자였음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도산서원 일대를 산책해보면, 퇴계가 얼마나 심신수양에 마음을 기울이면서 건물 하나, 연못 하나, 자연 경관 하나하나를 설계하고 배치했는지를 알기에 어렵지 않다. 거기에서 퇴계의 이상(理想)이 무엇이었나를 짐작할 수도 있다. ‘수양에 의해 본성을 실현함으로써 도덕적 가치를 충분히 실천하는 인간상’이었다는 학자들의 연구결과에 동의해도 될 것 같다. 다름 아닌 ‘거경(居敬)’과 ‘궁리(窮理)’의 길이었다. 경(敬)에 살며 이치를 궁구함, 바로 그것에 퇴계는 생을 걸고, 도산서원 일대라는 아름답고 고적한 산천과 강산을 사랑하면서 70 평생의 세월을 보냈다.
도산서원 일대를 수도(修道)의 공간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세심한 배려 속에 모든 건물을 퇴계의 뜻대로 조성했다고 한다. 도산서당은 퇴계 생전의 강학(講學)하던 곳이요, 도산서원은 퇴계 사후 후학들이 맨 위에 상덕사(尙德祠)를 짓고 퇴계의 신주를 모시며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한 사당까지 합해진 전체의 이름이다. 서당은 세 칸인데, ‘완락재(玩樂齋)’라 이름 했다. 주자의 글에서 인용했다. ‘중용’이나 ‘대학’의 오묘한 뜻을 즐기며 완상하겠노라는 글에서 따왔다고 한다.
동쪽의 한 칸은 ‘암서헌(巖棲軒)’인데, 이것도 주자의 ‘운곡(雲谷)’이라는 시에서 얻어온 글귀다. 산속에 깃들어 살면서 조그마한 효험이라도 얻겠다는 의미였다. 지금도 덩실하게 서있는 건물의 이름도 모두 거경·궁리를 통한 수양의 길에 도움 되는 내용을 이름으로 삼았다.
‘시습재(時習齋)’, ‘지숙료(止宿寮)’가 그러하고, ‘관란헌(觀瀾軒)’이니 ‘농운정사(瀧雲精舍)’가 모두 그런 뜻에서 얻어진 이름이었다. 그 동쪽에 있는 우물에 ‘몽천(蒙泉)’이라 이름하고, 몽천 위쪽의 산기슭에 매화·소나무·대나무·국화를 심어 놓고 ‘절우사(節友社)’라 했으며, 사립문은 ‘유정문(幽貞門)’ 동네 어귀는 ‘곡구암(谷口巖)’이라 했다. 또 여기저기에 대(臺)를 만들어 ‘천연대(天然臺)’,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라 하고, 시내의 한 줄기는 ‘탁영담(濯纓潭)’이라, 그 가운데 있는 편편한 바위는 ‘반타석(盤陀石)’이라 이름 했으니, 모두가 수도· 수양과 관계없는 것이 없고, 도학적 함의를 지니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모든 세상의 욕심은 다 버리고 오로지 학문연구, 거경·궁리에 생애를 바치기로 마음먹고, 도산서당 일원을 수양의 도장으로 꾸미고 7언 절구 18수의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짓고 겸하여 ‘도산기(陶山記)’라는 산문을 지어 자신의 입장을 넉넉하게 밝혔다.
품격 높은 시에 격조 높은 산문은 퇴계의 학문과 인품을 옴소롬히 보여주고 있다. ‘반타석(盤陀石)’이라는 시는 정말로 좋다. 천고의 편편한 바위는 구르지 않다니 千古盤陀不轉傾 그런 어려운 난리 속에서도 학문을 향한 염원을 못 버리고 은거하면서 거경·궁리만 일삼았던 퇴계. 마치 개울 가운데의 편편한 바위가, 홍수가 질 때는 몸을 숨겼다가도 끝내 구르지 않다가 물이 가라앉아 개울에 평화가 오면 다시 분명한 모습으로 드러나듯, 숨어살면서도 자신의 주체성을 잃지 않고 끝까지 버티며 살았던 자신의 생애를 읊은 시가 바로 그런 시가 아닐까. 지금도 반타석은 개울 가운데에 의젓이 버티고 있으며, 500년 동안 퇴계학문이 버티고 숨 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산림(山林)에 즐거움을 느끼고 살아가는 은자, 그러면서 그 즐거움은 도의를 즐기고 심성(心性)을 기르는 즐거움이었으니 역시 성리학자다운 글이었다. 23세의 청년으로 58세의 노선생을 찾아뵈었던 율곡 이이, 퇴계의 부음을 듣고 통곡하면서 만사를 짓고 제문을 올려 바쳤다.
그는 퇴계를 이렇게 평했다. “선생은 세상의 유종(儒宗)이 되셨다. 정암 조광조 이후에 견줄 만한 사람이 없다. 재조(才調)와 기국(器局)은 혹 정암에 미치지 못한다 해도 의리를 탐구하고 정미(精微)함을 다한데 이르러서는 정암 또한 미칠 수 없는 정도였다”(‘퇴계유사’) 라고 했다.
학자와 시인으로 유명하고 영의정을 지낸 사암 박순(朴淳)은 “정학(正學)을 천명하고 후생을 인도해주어 공자 · 맹자 · 정자 · 주자의 도가 우리 조선에서 찬란하게 다시 밝혀지게 했던 분은 오직 선생 한 사람뿐이었다 ”(‘퇴계묘지명’) 라는 평은 가장 고전적인 퇴계에 대한 찬양으로 정론(正論)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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