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15. 임진진 下

Gijuzzang Dream 2007. 12. 9. 13:54

 

 

 

 

 

 (15) 임진진 (下)  

1592년 5월17일 이곳 임진진에서 펼쳐진 임진강 전투는 ‘한심 스토리’의 전형이다.

무기력한 조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군대 다루기를 봄날 놀이하듯 하니 어찌 패하지 않겠는가?”
임진왜란 반성의 기록(‘징비록’)을 남긴 서애 유성룡의 한탄이다.

“순찰사들은 모두 문인 출신이었다. 병무에 익숙하지 않았고, …요지(要地)를 지키지도 못했으며….”
한때는 철옹성(산성)을 쌓고, 필살의 청야전법을 쓰면서

수와 당나라 같은 제국을 망하게 하거나 번번이 골탕먹인 게 우리 민족인데….

농업국가이자 유교국가인 조선의 방어체제는 어설펐다.

선조가 피란길에 머물렀던 파주 진동면 동파역. 북행에 나섰던 외교관이나 장수들이 말을 갈아탔던 곳으로 지금은 훈련장에 서 있다.



# 태평성대의 그늘

세조(1417~1468) 때부터 조선의 방위개념은

진관(鎭管) 체제와 그 뒤를 이은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였다.

진관 체제는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고,

유사시에는 군사 체제로 전환하는 향토단위의 방어전략이었다.

 

강성문 육사 명예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농업사회였으니 예전처럼 청야전술을 펴고, 산성에 틀어박혀 적군을 막는 일이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평지에 읍성을 쌓고 농민들은 농사를 지으면서

정기적으로 군사훈련을 받는 식으로 운영되었습니다.”

하지만 군사에는 문외한인 수령이나, 백성들의 입장에서

정기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다.
“천재지변을 이유로 정기적인 군사훈련을 기피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농사일이 바쁜데 무슨 군사훈련? 뭐 이런 식이었죠.”

개국(1392년) 이후 200년간이나 평화를 유지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양반관료층의 토지 집적현상이 두드러지면서 자영농이 소작농으로 전락함에 따라

병농일치, 양인개병의 원칙이 무너졌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제승방략체제였다.

제승방략은 유사시에 여러 지역의 군사들을 특정장소에 집결시켜 대처하는 체제.

이때 조정은 제승방략의 군사지도자를 파견하게 된다.

이런 방어체제는 신속하지만, 대규모의 침공을 받으면 무용지물로 전락한다.

“(제승방략 체제 아래서는) 전쟁이 나면 모든 군사가 모여

(조정이 보내는) 지휘관만을 기다리는 형편입니다.

장수가 오지 않고 적의 공격을 받으면 군대는 흩어지고 결국 패하게 됩니다.”

# 장수는 오지않고 왜군은 턱밑까지 쫓아오고…

역시 ‘징비록’의 고발이다.

임진왜란 때도 문경의 수령들이 제승방략에 따라 한 곳에 모여 조정이 파견하는 지휘관을 기다렸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지휘관(순변사)은 도착하지 않았고,

도리어 왜군의 진격이 더 빠르자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순변사 이일이 문경에 도착했을 때는 고을에 개미 새끼 한마리 보이지 않았다.

다시 그런 맥락에서 임진강 전투의 ‘한심 스토리’를 더듬어보자.

임진강 전투는 도원수(야전사령관)의 지휘 아래 진행됐다.

하지만 임진강 도하에 어려움을 겪은 왜군이 화해를 청하는 서신을 보내면서

짐짓 군대를 후퇴시키는 등 술수를 부리자 그만 속아 넘어가고 만다.

평양의 망명정부는 “적군이 고립무원하여 피곤하니 쳐야 한다”는 경기감사의 낙관론에 빠진다.

그러면서 임진강 도강에 소극적인 야전사령관(김명원)을 의심하여

또 다른 지휘관, 그것도 문신(한응인)을 파견한다.

그러면서 “너는 도원수(야전사령관)의 지시에 따르지 마라”고 명령을 내린다.

몸은 하나인데 머리가 둘인 말이 앞으로 나갈 수 있겠는가.

나폴레옹은 “작전을 펼 때에는 현명한 장수 두 사람보다 용렬한 장수 한 사람이 더 낫다”고 했다.

정 야전사령관의 작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꾸면 될 일 아닌가.

임진강 전투에 투입된 인원은 1만5000명이었고, 왜군은 1만2000명이었다.

병력, 숫자나 지형지물의 측면에서 유리했음에도,

한심한 위 아래가 연출한 엇나간 이중주로 참패의 고배를 든 것이다.

‘징비록’을 비롯한 각종 사료는 임진강 패전 이후 인간 군상들의 행태를 소설처럼 묘사한다.

“임진강 도강공격은 절대 안된다”고 섣부른 공격을 극구 반대했던 노병 유극량.

그는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비록 뜻은 같지 않지만 어찌 가만있으리오” 하면서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한다.

이때 ‘쌍두마차’ 김명원(도원수)과 한응인(도순찰사), 그리고 박충간(검찰사) 등은

모두 청단의(파란 색의 비단 옷)를 입고 있었다.

그런데 박충간이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를 도원수(김명원)라고 오해한 병사들이 “원수가 도망간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강을 지키던 병사들이 모두 “걸음아 나 살려라!”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대패한 김명원과 한응인은 평양으로 돌아왔지만 특별한 문책은 없었다.

김명원은 훗날 좌의정을 지냈다.
패전의 책임을 진 한응인에게는 공을 세워 보답하라는 뜻에서 강동지구 방수직이 내려졌다.

한응인은 나중에 우의정에 올랐다.

“왜군은 고립무원이니 빨리 쳐야한다”고 잘못된 정보를 올렸던 경기감사 권징은 가평으로 피했다.

# 전쟁은 죄없는 이의 목숨만 가져간다

왜군은 임진강 전투에서 크게 이겼음에도 쉽게 임진강을 건너지 못했다.

열흘 후에야 임진강 상류로 올라가 조그만 배를 타고 몰래 아군의 상황을 살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이곳을 지키던 부원수 이빈이 화살 하나 쏘지 않고 도망친 게 아닌가.

모든 군사가 흩어졌다. 이로써 임진강·한탄강 방어선이 무너져 조선은 누란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산 사람들은 어떻게든 살았으나 억울하게 죽은 이도 많았다.

이전에 김명원과 함께 한강 사수에 나섰던 부원수 신각은

김명원의 곁을 떠나 양주 산골짜기에 들어가 적 60명의 머리를 베었다.

하지만 김명원은 신각이 주장(主將)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보고했다.

조정은 5월18일 선전관을 시켜 전투에 참전하러 연천(한탄강)에 와 있던 신각의 사형을 집행하게 했다.
그런데 선전관이 연천을 떠난 지 얼마 안되어

신각이 양주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사실이 평양조정에 알려졌다.
이에 조정은 사형집행을 중지시키기 위해 급히 다른 선전관을 보냈다.

하지만 이 선전관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신각의 목이 나뭇가지에 효수된 뒤였다.

억울한 신각에게는 구십살의 노모가 홀로 계셨으니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조금만 쉰 후에 적정을 살핀 뒤 공격하자”고 건의한 죄로

한응인에게 죽임을 당한 이름 모를 장병들의 넋은 누가 달래줄 것인가.

그리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스러져간 백성들은 어떻고….

역사를 읽으면 역시 전쟁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전쟁의 결과가 어떻든 관계 없다. 전쟁은 무고한 백성들의 억울한 떼죽음만을 낳는다.

반면 살 수 있는 지위의 사람들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살아남아 떵떵거린다.

- 2007년 6월 15일 경향 〈이기환 / 임진진에서〉

 

 

 

 

 

 

 

 

 

 

 동파역에서  

민통선 이북 동파역 근처에 위치한 전원마을 해마루촌.

파주지역의 민통선은

50년이 넘게 임진강을 경계로 하여 또 다른 남북의 선으로 나뉘어 있다.

서울~평양~의주간 관서대로의 핵심적인 주 통로였던 임진나루는

임란당시 조선관군 대패의 치욕을 거울삼아 조선 숙종, 영조 때 군사목적의 요새로 그 격을 갖추었다.

1번국도의 상징적 관문 역할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일제강점 초기 일본군에 의해 이웃한 장산진과 함께 모두 헐려나갔다.

 

문루와 성벽, 부속건물 등은 겸재 정선의 그림에서나 남아있다.

 

지금은 풀밭에 나뒹구는 화강암 석재 몇 개만이 이곳이 중요한 요해처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제 서해의 짠 바닷물과 섞인 임진강을 건너는 길은

경의선 철교인 돗개다리와 통일대교, 전진교, 리비교가 그 관문의 역할을 대신한다.

감조하천(感潮河川· 조 수간만의 영향을 받는 하천)인 이 강이

임진나루 앞에서 달의 힘에 의해 소금기로 흐리고 민물로 맑기를 반복하고 있다.

거기엔 4개의 크고 작은 직선의 다리가 있다.

통행객들은 분단의 무감각에 체질화된 듯 검문을 거치고 남에 기계적으로 반응하며

50년이 훨씬 넘는 동안 이 강을 넘나들고 있다.

임진나루 북쪽의 대안인 진동면 동파리. 선조가 피란길에 머물렀고,

말발굽 소리로 분주했던 이름난 과거의 역터인 동파역은 어떤가.

초여름 수풀 속에 표지석 하나 없는 그 애환의 현장엔 군 훈련장이 서있다.

바로 곁에는 높은 음자리의 해마루촌 60여 가구가

우연하게도 지난 분단의 횟수와 같이 서로 다른 모습으로 민통선 마을의 복잡한 사연을 담아가고 있다.

임진나루와 동파역 사이에 촘촘한 역사의 사연과 소금기 섞인 애환들,

현무암의 장단적벽과 일월봉, 강이 가두어 둔 또 다른 신비의 민통선인 초평도….

휴전선과 NNL에 갇혀 소통되지 않는 오늘의 임진강….
동파역에서 난생 처음 주린 배로 허기진 아침을 맞이했던 선조임금.

지금 우리는 너무도 분명한 역사의 춘궁기를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곳에 서면 늘 반복되는 독백이다.

그래도 지금 그 땅에선 장단콩이 새싹을 틔우고

모낸 뒤의 가지치기로 녹색생명의 번짐은 쉼 없이 계속되고 있다.
〈이우형 한국국방문화재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