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16. 태봉국 도성 上

Gijuzzang Dream 2007. 12. 9. 13:54

 

 

 

 

 (16) 태봉국도성 (上)  

“저기가 비무장지대가 맞나요?”
강원 철원 홍원리 필승전망대. 의외였다.

비무장지대란 높고 깊은 산악지대, 즉 사람들의 발길이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게 일반상식인데….

게다가 이곳은 ‘철의 삼각지대’가 아닌가.

“적(북한 · 중국)의 생명선인

철원 · 김화 · 평강의 ‘철의 삼각지대(Iron Triangle Zone)’를 깨뜨려야 합니다.”(밴플리트)
한국전쟁때 밴플리트 장군이 이름 붙인 바로 그 유명한 요충지인데….

하지만 해발 220~330m 위 용암대지에 펼쳐진 드넓은 평원이다.

금방이라도 가서 썩썩 농사를 짓고픈 충동이 일어날 만큼.

하지만 평야를 품에 안고 있는 저편 고지와 능선의 이름,

그리고 사연을 알게 되면 나른한 평온이 깨진다.

철원 남방한계선에서 바라본 태봉국도성 동벽의 흔적(원 안).

휴전선과 경인선 철로가 동서남북으로 가르고 있는 분단의 상징이기도 하다. 

 

# 태봉국도성, 백마고지

전망대에서 맨 왼쪽에 자리잡고 있는 곳이 백마고지다.

넓은 철원평야에 기댄 채 해발 395m에 불과한 야트막한 고지였고 평범한 야산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 발발 후

철의 삼각지대 가운데 철원 꼭지점의 어깨부에 해당되는 요충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 야산을 빼앗기면 2억평에 달하는 철원평야는 순식간에 적의 감제 아래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군의 병참선인 3번도로(서울~원산)를 비롯, 보급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1952년 10월6일부터 백마고지를 둘러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열흘간 12차례의 쟁탈전 끝에 고지의 주인이 7번이나 바뀌었다.

피아간 1만70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고지에 쏟아진 포탄만 27만5000발에 이르렀다.

고지는 벌집이 되었다.
마침내 한국군 9사단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백마고지는 지금 민간인들은 갈 수 없는 남방한계선 북쪽에 있다.

주변의 산인 고암산(780m)은 일명 김일성 고지이며, 곁의 능선 별칭은 피의 능선이다.

또 이어 저격능선, 낙타고지…. 그리고 또 하나, 철의 삼각지대 맨위 꼭지점인 평강(지금은 북한).

# 핵무기 가상표적

이곳은 한국전쟁 때 미 극동사령부가 핵무기 사용을 고려하여 지목한 핵무기 가상표적이기도 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중공군이 참전하자 기자회견을 통해

“핵무기 사용도 늘 적극적으로 고려해왔다”고 언급한다.

비록 영국 등의 반대로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쩔 뻔 했단 말인가. 비극의 현장이 될 뻔한 평강이다.

이런저런 상념에 빠질 무렵,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 이재 원장과 이우형 연구원이 손가락을 내민다.
“저깁니다. 저기 나무 하나 보이시죠?”
손에 닿을듯, 금방이라도 뛰어가면 10분도 걸리지 않을 곳, 바로 그곳을 가리킨다.
“나무를 따라 쭉 이어진 윤곽이 보이죠? 저기가 바로 태봉국도성 외성의 흔적입니다.”

아! 태봉국도성.

풍운아 궁예가 1100년전 저기 보이는 풍천원 너른 들판에 도읍을 정하고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바로 그곳이라지.

“어마어마한 들판 아닙니까. 이곳을 한번 보면 왜 궁예가 이곳에 도읍을 정했는지 깨닫게 되죠.”
아니 이원장의 말처럼 왜 다른 왕조가 이곳에 도읍을 정하지 않았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태봉국도성이 단순히

비운의 왕 궁예의 야망과 좌절을 묻은 곳이라는 의미에서만 주목을 끄는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태봉국도성은 전쟁과 분단이 갈라 놓은 비극의 상징이다.

남북 분단과 냉전의 상징인 휴전선(군사분계선)이 딱 반으로 도성을 가르고 있으니 말이다.

휴전선을 중심으로 남북 2㎞씩 물러난 공간 사이,

즉 북방한계선과 남방한계선 사이에 팔자 센 도성이 떡하니 버티고 있다.

그뿐 이런가. 그것도 모자라 서울~원산간 경원선 철도도 도성을 갈라 놓았다.

# 휴전선으로 쪼개진 도성

남북으로는 끊어진 경원선이, 동서로는 휴전선이 도성을 잘라 놓은 것이다.

비운의 궁예는 죽어 1000년이 훨씬 지나 백골이 진토가 되었을 텐데도

사지가 잘리는 신세에 놓여있는 것이다.

“천우 2년(905년)에 새 서울(철원)에 들어가

대궐과 누대(樓臺)를 수리하였는데 극히 사치로웠다.”(삼국사기 열전 ‘궁예조’)

“궁예는 혹독한 혹정으로 백성을 다스리며...

국토는 황폐해졌는데 오히려 궁궐만은 크게 지어~원망과 비난이 일어난 것이다.”(고려사 태조 원년)

굳이 옛 사료를 들추지 않아도 태봉국도성의 규모는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때 지도를 보면 도성의 외곽성은 12.5㎞, 내곽성은 7.7㎞에 이른다.

백제의 풍납토성(3.5㎞), 신라 월성(1.8㎞), 고구려 국내성(2.7㎞)에 비할 바가 아니다.

조선의 서울성곽(17~18㎞)에 견줘도 그리 손색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금단의 땅. 그저 먼발치로 도성의 흔적만을 추측할 뿐이다.

곁눈질로 힐끔힐끔.

비무장지대의 관할권이 유엔사 정전위에 있고

비무장지대 출입 자체가 정전협정상 금지되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 먼발치에서 본 궁예의 흔적

행사차 평양까지 드나들었던 유홍준 문화재청장조차 우여곡절 끝에 태봉국도성을 친견할 수 있었다.

그것도 군 수색로를 따라 먼발치에서….

현재 가장 잘 남아있는 흔적은 바로 기자가 서 있는 이 필승전망대에서 볼 수 있는 도성의 동남벽 부분.

지금까지 4번 태봉국도성을 조사한 이재 원장의 말을 들어보자.
“흙으로 쌓은 흔적입니다.

사다리꼴 단면으로 성벽 단면 하단폭은 6~7m, 상단폭은 5m 정도이며,

높이는 1.2m 정도 남아 있었습니다.”

물론 성 자체가 비무장지대 안쪽인 데다 지뢰지대인 만큼

이원장도 제한된 수색로를 따라가며 제한된 지역만을 먼발치에서 확인했을 뿐이다.

끊어진 경원선과 3번 국도의 흔적은 잘 남아 있었다.

남북이 합의한다면 경원선과 3번국도 복원사업은 어렵지 않게 이뤄질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궁궐터도 짐작할 수는 있었는데 유구를 확인할 수 있는 거리는 안됐다.

일제가 만든 ‘조선보물고적도보’를 보면

태봉국도성터에서 많은 유적·유물이 확인됐음을 알 수 있다.

왕궁성 부근에 있었던 석등은 일제 때 국보 118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외성 남대문터에서는 귀부(거북모양의 비석 받침돌)가 확인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궁예는 철원 풍천원 벌판에 이토록 어마어마한 왕궁을 세웠을까.

궁예가 과연 꿈꿨던 것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 2007년 6월 22일 경향 〈이기환 / 철원 풍천원에서〉

 

 

 

 

 

 

 

 

 

 

 

태봉국도성 남북이 함께 조사 · 발굴을

태봉국도성과 인접한 곳에 있는 백마고지(왼쪽) 모습.

비무장지대 안쪽에 있다.

필자는 정확하게 4번 태봉국도성에 출입할 수 있었다.

지난 6월28일 유홍준 문화재청장 일행과 들어간 것까지 합해서 말이다.
아니 ‘출입’이라는 말은 가당치도 않다.

비무장지대 안쪽, 군사분계선(휴전선)을 정확히 반으로 가르고 있으니

그저 수색로를 맴돌며 ‘관측’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유청장과 함께 ‘관측’한 것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른바 ‘국가적인 첫 조사’의 디딤돌을 놓았으니 말이다.

그동안 3번의 조사는 참으로 힘들고 외로웠다.

군지도와 미군이 찍은 항공사진, 일제 때 자료를 참고로 남아있는 도성을 ‘눈’으로 찾는 작업이었다.

하지만 도성의 잔존 구간이 서로 다른 데다 높이는 알 수 없는 실정이었다.

지도에서는 마땅히 도성의 성벽이 있어야 하는 곳인데,

수풀이 우거져 확인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조사 후 만나는 사람마다 도성의 규모가 얼마나 엄청난지를 물어오곤 했다.

그러나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이번 조사에서 확인했듯 태봉국도성은 그곳에 분명 있었다. 하지만 참으로 초라하게 남아 있었다.
너무 안타깝고 기가 막혔다.

1100년 전에 쌓은 대제국의 도성을 후손들이 이렇게까지 처절하게 파괴시키고 훼손시켰는가.

궁예를 폄훼한 고려와 조선, 그리고 파괴의 절정이었던 한국전쟁.

그렇게 해놓고 역사와 전통을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늦지는 않았다.

한국전쟁 당시 ‘힘을 합해’ 도성을 파괴했던 남과 북은

이제 다시 ‘힘을 합하여’ 도성을 조사해야 할 때다.

휴전선을 반으로 가르고 있는 태봉국도성에 대한 공동조사야말로

분단 극복과 민족 통일의 상징이니 말이다.

 

이번에 궁예도성을 같이 다녀온 문화재청장은

도성의 전면적인 조사와 함께 사적 지정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일제시대 국보로 지정되었던 포정전(궁전) 앞의 석등도 복원할 뜻을 밝혔다.

도성에 대한 공동조사는 물론, 경원선 복원도 이뤄지기 바란다.

 

끝으로 필자의 무심한 실수 하나.
필자가 써온 ‘궁예도성’이란 표현은

궁예를 폄훼한 고려, 조선시대의 지리서나 일제시대의 지도에 나오는 말이다.

옳지 않은 표현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태봉국도성’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이재한 / 한국국방문화재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