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임진진 (上) | ||||
-임진왜란… 임금은 백성버리고, 신하는 임금 버리고-
민통선 이남이지만 군 시설이니 역시 민간인은 들어갈 수 없다. 헌헌장부(軒軒丈夫) 군 장교의 안내로 임진진, 즉 임진 나루터에 닿았다. 고깃배 몇 척이 동양화폭처럼 고즈넉이 떠있다. 고기잡이가 허락된 몇 몇 어부의 것이라고 한다. 홍수에다 만조가 겹치는 날이면 이곳 임진강 나루는 완전히 물에 잠긴다. 1번 국도의 효시인 셈. 전쟁을 모르고 살았던 조선의 수치스러운 패배 사연을 담고 있는 곳이다. 그리고 누란의 위기에 빠진 상황을 접한 온갖 군상(群像)들의 행태를 낱낱이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한양 근처까지 밀고 올라오자 조정은 패닉 상태에 빠진다. 조정은 피란을 결정한다. 조선왕조실록(수정)과 유성룡의 징비록 등 사료를 보면 그야말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한 편의 드라마다. 임진나루를 건널 때는 이미 밤이 되었다. 날은 어두운 데다 비까지 내리자 앞길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왕 일행은 임진강 남쪽 언덕에 있는 승정(丞亭 화석정) 건물을 헐어 불을 피웠다.
동파역(파주 진동면 동파리)에 닿은 것은 밤 8시였다. 하지만 위기가 닥치자 왕이고 뭐고 없었다. 급기야 임금이 먹을 음식마저 없어지자 문책이 두려워진 허진과 구효연의 선택은? 삼십육계 줄행랑이었다. 선조수정실록의 피눈물 나는 후회. 때문에 위태로운 시기에 임하여 흩어지는 것이 적을 본 군사들보다 심했다.” 그런데 왕이 요동으로 건너갈 것을 결정하자 도망칠 것을 몰래 도모했다. 먼저 사초책(史草冊)을 불구덩이에 넣고 불을 지른 뒤….” 명망 진신(縉臣)들이 보신책을 품었다. 경성~의주에 이르기까지 문 · 무관은 겨우 17인이었으며….” ‘껍질만 벗긴 현미로 밥을 지어 바치기도’ 했다. 언제 봐도 착하디 착한 우리 백성들이다.
이제 ‘한심사건 Ⅱ’편을 보자. 무주공산인 한양을 점령한 왜군의 가토 기요마사가 5월10일 파주~임진진에 도달한다. 왜군은 물살이 세서 쉽게 건널 수 없었다. 선조도 경기도와 황해도 군사들을 모아 임진강 사수에 전력을 기울이라고 명령해놓은 상태였다.
10일이 넘도록 임진진을 두고 대치하는 상황에 이르자 적이 꾀를 낸다. 우선 강화를 권하는 사신을 우리 측에 보낸다. 전하(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귀국에 길을 빌려(假道), 명나라에 원한을 갚은 의향뿐이온데….” 소수의 척후부대만을 남긴 채 나머지 병력을 파주까지 후퇴시키는 등 술수를 부린다. 하지만 평양의 임시조정은 엄청난 오판을 내린다. 그런 상황에서 왜군이 강화를 요청하고, 군대를 임진강에서 철수하자 잔뜩 고무된 것이다. 13일 경기감사 권징이 장계를 올린다. 기운이 피로하여 급격히 꺾여 막사를 불태우고 도망치려는 징조가 있으니 추격하게 해주십시오.” 조정은 “왜 빨리 진격하지 않느냐”고 교지를 내렸지만 김명원은 우물쭈물했다. 그러자 평양의 조정은 ‘전세가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는 데도 반격하지 않는다’고 의심한다. 그러면서 문신인 한응인(도순찰사)을 불러 이해 못할 지시를 내린다. 이들은 모두 강변 출신 사병들로 오랑캐와의 싸움에서 잔뼈가 굵은 최정예병이었다. 그런데…. 제 아무리 정예병인들 얼마간의 짬이 필요했다. 하지만 한응인의 마음은 급했다. 하지만 문신인 한응인은 “빨리 진격하라”는 왕명을 받았던 터라 마음이 급했다. 불평 불만자 몇 명을 끌어내 목을 베어버린다. 하늘처럼 여기라는 백성들의 목숨을 개돼지 취급한 것이다. 야전사령관 김명원은 그 모습을 보고는 눈과 귀를 닫을 수밖에 없었다. 한응인이 전략 전술을 모르는 문신이지만 임금이 친히 “김명원의 지시를 받지 말라”는 특명을 내렸으니 참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서슬 퍼런 한응인의 명에 따라 임진강을 건너 적 몇 명을 죽이자 우리 측 진영에서는 이긴 줄 알고 환호성을 터뜨렸다. 후방의 적 7~8명이 윗옷을 벗은 채 대검을 휘두르면서 뛰쳐나오자 아군은 추풍낙엽처럼 무너졌다. 단 한 명도 왜군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이기환 선임기자 / 파주 임진진에서〉 |
유극량 장군의 충성심 |
정확히 415년 전. 1592년 선조왕 일행은 엄청난 폭우 속에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임진나루를 건넌다. 임금은 이렇게 수도를 버리고 야반도주했지만 뜻 깊은 장수는 잘못된 작전에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이 강을 거꾸로 건넜다. 책상물림인 한응인이 평양 조정의 명을 받고 내려와 임진진을 건너 왜군을 치려 할 때였다. “경솔한 도강”이라면서 반대했다가 목이 베일 처지에 놓인다. “비겁하다”는 게 이유였다. 기가 막힌 유극량의 말. “오로지 국가 대사를 그르칠까 두려워 할 뿐이오.” 노장 유극량은 말에서 내려 장탄식한다.
유극량의 신의와 충성은 젊을 적부터 뿌리가 있었다. 그가 무과에 급제하고 집에 돌아오자 어머니가 구슬피 울었다. 후에 네 아비를 만나 너(유극량)를 낳은 것이다. 노비의 소생이라는 것이 들키면 삭과(削科 · 과거 급제 취소 조치)된다는데 이 어찌 원통한 일이 아니냐.” 그는 노비의 운명에서 완전히 벗어났지만, 죽을 때까지 원 주인집을 섬겼다. 늘 예물을 바쳤으며 주인집에 인사할 때는 동네 입구에서 말을 내려 예물을 손에 받들고 걸어 들어왔다고 한다. 위기에 빠지자 도망치기에 급급했던 임금과 고관대작들…. 그들은 후에 살아 남아 승승장구했지만, 유극량 같은 장수는 헛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된 삶인가. 예나 지금이나 유극량 같은 인물이 “그저 바보처럼 착하기만 한 인물”로만 치부되는 세상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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