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17. 태봉국 도성 下

Gijuzzang Dream 2007. 12. 9. 13:54

 

 

 

 

 

 (17) 태봉국도성 (下)

- 大동방국의 기치… 궁예는 역사의 패륜아일까 -


 

태봉국 도성 안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경원선 철로 흔적.

최근 유홍준 문화재청장과 함께 도성을 답사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신라는 운수가 다하고...  뭇 도적이 고슴도치 털처럼 나타났다.

가장 악독한 자들이 궁예와 견훤 두 사람이었다.”(김부식의 사론)
궁예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각박하기 이를 데 없다.

한때는 “사졸들과 고락을 함께 했으며, 인사에도 사사로움 없어 백성들이 추앙했다”(삼국사기)는

호평을 들었는데…. 이쯤해서 역사는 늘 승자의 편임을 상기하자.

궁예가 웅지를 펼 무렵 중국 중원은 혼란기였다.

당나라에 망조가 들고 중원은 5대10국시대(907~979년)에 접어들고 있었다.

천년왕국 신라는 망해가는 나라였다.

궁예는 처음에는 “평양 구도(舊都)에 잡초만 무성하니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고 선언하고는

국호를 고려라 했다. 고구려 재건의 기치를 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야망은 커진다.

# 대동방국

904년엔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바꾸었고,
911년엔 태봉(泰封)으로 다시 고친다.

마진은 ‘摩訶震檀’의 줄임말. ‘마하’는 범어로 ‘크다’는 뜻이고 ‘진단’은 동방을 말한다.

또 주역에는 ‘태(泰)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진다’고 했고,

봉(封)은 봉토를 뜻한다.

결국 궁예는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 세계’, 즉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이다.

“비겁한 자의 친구가 되느니 정직한 자의 원수가 되는 게 낫다”고 설파한 궁예.

그는 철원(896년·현재 구철원 동송)~송악(898년)에 이어

905년 다시 철원(이곳 풍천원)에 도읍지를 정했다.

철원에만 두번이나 도읍을 정한 것이다.

궁예가 뜻을 폈던 시기에 신라 천년왕국이 뿌리째 무너지면서 백성들은 유리걸식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미륵불을 자처하고 나타난 궁예에 홀딱 빠졌다.

세상이 끝나는 날 홀연히 출현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미륵불이 현신했다니까.

그는 세상을 구원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세운 것이다.

철원 환도 이후 궁예는 907년 무렵 삼한 땅의 3분의 2를 품에 안았다. 실로 대단한 기세였다.
하지만 너무 과속했던 탓일까.

궁예에게 귀부했던 고구려 부흥세력, 즉 왕건을 중심으로 한 송악세력이 반발의 기미를 보인다.

당초 궁예가 구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긴 이유는 왕건세력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북원(원주)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떨친 양길을 제압하려면 송악 호족들과의 제휴가 필요했던 것이다.

# 비참한 최후

하지만 궁예는 뜻을 이루자 다시 철원으로 복귀했다.

그러면서 청주지역의 1000가구를 철원 땅으로 이주시킨다.

이것은 궁예가 송악세력 말고도 새로운 지지세력을 확보하려는 뜻이었다.

남으로 남으로 세력을 키워간 궁예로서는 ‘고구려 세력’만으로는 천하를 경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동안 궁예를 도왔던 송악세력, 즉 고구려 부흥세력은 불안에 떤다.

게다가 도읍지 건설에 엄청난 공력을 쏟았고, 때마침 흉년이 들면서 민심이 돌아섰다.

불승들도 관심법(觀心法)을 내세워 신하들과 심지어 부인, 아들까지 죽인 궁예를 외면했다.

결국 궁예는 918년 보수 호족들에 의해 축출된다. 그의 최후는 너무도 비참하다.
“궁예는 암곡(巖谷)으로 도망하여 이틀 밤을 머물렀는데,

굶주림이 심하여 보리이삭을 몰래 끓여 먹다가 부양(평강)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려사)

과연 그럴까.
물론 역사서는 한결같이 궁예를 역사의 패륜아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철원지역에서 지금도 채록되는 구비전설은 궁예왕을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인물로 전한다.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전설은.
“구레왕(궁예왕)이 재도(再圖)할 땅을 둘러보는 데 어떤 중이 나타나자 ...

이에 왕이 혹시 용잠호장(龍潛虎藏)할 땅이 없겠느냐 하매

중은 이 병목 같은 곳에 들어와 살 길을 찾는 것이 어리석다 하자 ... 

(궁예가) 아아 천지망아(天之忘我)로다 하고 심연을 향해 몸을 던지니... 우뚝 선 채로 운명하였다.”
육당 최남선이 궁예왕 묘가 있는 삼방협(평강~안변 사이의 협곡)에서 채록하여 쓴

‘풍악기유(楓嶽記遊)’의 한 토막이다.
풍악기유는 또한 “(궁예왕은 이후) 이 지방의 독존신(獨存神)이 되었다”고 했다.

 

유인순 강원대 교수의 채록을 살펴보자.
“금학산(철원 동송읍·947m) 밑에 도읍했으면 300년은 갈 건데, 고암산(780m) 밑에 세워

그 양반(궁예왕)이 망했다는 거야”

“(왕건과 강비의 사통이) 들키니까...  왕건을 죽일 수 있지만 자기를 보살펴준 사람이기 때문에....”

대부분 긍정적인 내용이다.

구비전설은 물론 궁예왕의 실정을

대궐터 선택의 잘못, 방탕한 여성관계, 가학증세, 그로 인한 민심의 이반과 왕건과 갈등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원인에 대해서는 역사서와는 분명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

태봉국 도성 남문지 옆에 있었던 석등.

일제 때 찍은 것이다. 일제시대 국보였다.

월정전망대 우측 전방에 있었으나 현재는 확인하기 어렵다.


# 각박한 평가

유교수는 “전설 전승 집단의 의식 속에 왕건에 대한 강한 부정의식이 숨어 있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구비 및 지명전설에는

궁예왕이 추종세력과 함께 보개산성(포천 관인), 명성산성(철원 갈말), 운악산성(포천 화현) 등에서

치열한 항전을 벌인다.

“궁예 관련 지명전설을 보면 무려 네곳의 대궐터가 보입니다.

풍천원 벌판을 비롯해 왕건 세력과 치열하게 싸운 명성산성과 보개산성,

그리고 운악산성 등이 그곳입니다.

궁예는 쫓겨난 뒤 바로 죽은 게 아니라 왕건과 10~15년가량을 더 항전했다는 자료입니다.”

지금도 왕건과 대치하며서 여우처럼 엿보았다고 해서 붙은 ‘여우고개’,

200명이 들어갈 수 있다는 ‘궁예왕굴(명성산)’,

궁예가 자신의 운세와 국운을 점치려 ‘소경과 점쟁이’들을 불렀다는 ‘소경의 절터’,

궁예와 왕건이 투석전을 벌였다는 운악산 인근의 ‘화평장터’,

대패한 궁예군의 피가 흘렀다는 ‘피나무골’ 등….

유교수는 이 모두가 궁예왕에 대한 주민들의 승모와 연민, 안타까움을 상징하고 있다고 본다.

궁예는 원대한 포부를 지닌 개혁가였다.

하지만 기득권 세력과 대결에서 끝내 패했다. 또한 역사서는 승자의 기록 아닌가.

궁예를 어떻게 폄훼하든 어쩔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좀 옹졸하다는 생각은 든다.

 

저 유명한 역사가 사마천은 무려 2000년 전에 쓴 ‘사기’에서 유연한 사고를 보여준 바 있다.

그는 ‘사기’의 세가(世家)에 제후와 왕의 흥망성쇠를 담았다.

그런데 진나라 말 농사꾼의 신분에서 일어나 한때 천하를 호령했던 미완의 혁명가 진섭(陳涉)을

당당히 ‘세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면서 이유를 달아놓았다.
“진섭이 죽었으나 그가 봉립하고 파견한 왕후장상(항우와 유방이 대표적)이 마침내 진을 멸망시켰다.

이것은 진섭에 의해 처음으로 반란이 시작되어 그런 결과를 촉진한 것이다.

고조(유방)때는 진섭을 위해 분묘를 간수하는 30가구를 배치해놓고

지금도 가축을 잡아 진섭을 제사지낸다.”

승리자로서, 최소한 이 정도의 아량은 베풀 수 있지 않을까.
- 2007년 6월 29일 경향〈이기환 선임기자 / 철원 풍천원 벌판을 바라보며〉


 

 

 

 

 

 

 

 

과거 · 현대 · 미래 함축된 곳 … 풍천원 벌판을 도읍지 삼아

어찌 홍곡(鴻鵠)의 뜻을 연작(燕雀)이 알리오.
궁예가 철원 풍천원 벌판을 도읍지로 삼은 뜻을 보통의 우리가 짐작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임진강 · 한탄강 유역의 독특한 환경을 살펴보자.

이곳의 지리적인 특징은 서울∼원산간의 단층대인 추가령곡과 대륙충돌대라는

일정한 방향성을 가진 두 습곡단층대에 의해 결정된다.

너무도 예민한 접촉대다.

그러니 서로 다른 세단계의 화산암 분출이 시간의 폭을 두고

이 지층구조의 중심선 취약부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이에 더하여 임진강 · 한탄강을 중심으로 하는 인간의 역사 역시 뜨겁게 흘러왔다.
전곡을 중심으로 하는 구석기 중심의 선사벨트,

고구려 · 백제 · 신라와 북방계의 남하에 의해 조용할 날이 없었던 역사적 쟁패의 사례.

그리고 지금도 한국전쟁과 냉전, 분단의 기구한 사연이 두 강을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역사가 농축돼 있는 곳이라는 뜻이다.

엄청난 에너지 충돌의 한 복판에 궁예의 태봉국도성이 위치한다.

도식적인 국도풍수의 이론은 이곳에서 통하지 않는다.

미완의 혁명가였던 궁예의 배포와 추종했던 싱크탱크 그룹의 청사진을 만족할 만한 공간이

철원벌의 풍천원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용암벌판에 있었기 때문인 것이다.

풍천원을 보면 국토의 중심이며 삼재 소통의 매개 공간인 오리산을 진산으로 하고,

청정했던 지장신앙의 메카인 보개산을 앞에 두었다.

궁예는 이곳에서 미륵 세상을 펼치려 했다.

철원 도피안사 비로자나불상을 도성의 품에 안아 반야용선을 띄우며

해가 지지 않는 불국토를 건설하려 했다.

이런 궁예의 웅대한 설계를 상상한다면

궁예가 마냥 폭군의 이미지요, 실패한 정치가요, 허황된 종교인라고 매도한다는 것은

너무 단견일 수 있다.

습곡단층대가 일으키는 땅의 봉합점이자 열에너지가 분출하는 중심부에 위치한 태봉국도성.

918년 6월인 바로 이맘때 숨어서 보리 이삭을 훔쳐 먹던 궁예의 최후와,

철책 안에 가둬진 태봉국도성의 침묵이 던져주는 화두가 더 없이 무겁기만 하다.
〈이우형 / 한국국방문화재硏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