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20. 석대암 上

Gijuzzang Dream 2007. 12. 9. 13:53

 

 

 

 (20) 석대암 (上)

- ‘지장신앙’ 성지 중 성지… 절터의 속살이 펼쳐졌다 -

분단과 한국전쟁 이후 불타 폐허가 된 지장신앙의 성지 석대암터.

거미줄과 날벌레, 포탄소리를 뚫고 겨우 올라올 수 있는 궁벽한 곳에 있다.

<연천 석대암 / 이상훈기자>


단숨에 올라가려 했다. 그리 어렵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 헛된 오만함이란….
만만찮았다. 지장신앙의 성지를 찾는 길은 쉽지 않았다.

경기 연천 최고봉인 환희봉(877m) 정상 밑 해발 630m에 자리잡은 석대암 가는 길.

비무장지대가 아닌데도 ○사단 공보 장교가 따라나선 이유가 있었다.

지름길로 가려면 군부대를 관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연병장을 가로지르면 심원사지 부도군이 보이고, 바로 그 위에 옛 심원사(647년 창건) 터가 펼쳐진다.

부도군은 2기의 비석과 12기의 승려 사리탑으로 이뤄졌다.

휴정스님(1520~1604)의 법맥을 이은 스님들의 탑과 부도란다.

우리나라 제일의 지장신앙 성지인 심원사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철원 동송 상로리로 이전했다.

군부대 안에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원래의 자리엔 터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기자가 찾아가는 석대암은 바로 심원사에 딸린 암자다.


# 거미줄, 날벌레, 포격소리, 끝없는 돌길

단순한 암자가 아니다. 그야말로 지장신앙 성지의 성지다.

이우형씨(현강문화연구소장)에 따르면 원래 석대암 가는 계곡을 ‘절골’이라 했다.

석대암을 포함해서 무려 9개의 암자가 있었다니까.

심원사 터에서 차를 ‘버리고’ 산중에 몸을 ‘던졌다’.

끝없이 이어지는 돌길. 삐죽삐죽 제멋대로의 돌로 이어지는 산행은 고달팠다.

길목마다 투명한 그물을 꿰어놓은 거미줄의 훼방.

실로 오랜만에 사람의 땀 냄새를 맡았다는 듯 끊임없이 공격하는 온갖 날벌레들.

막춤을 추듯 연방 두팔을 휘저어가며, 그것도 모자라 온몸을 배배 꼬며 쫓아내도 아랑곳 없다.

귓전을 끊임없이 맴도는 ‘윙윙’ 소리에 절로 진저리가 난다.

‘꽈당! 쿵!’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난다.

벌레와 산새, 그리고 개천의 물 흐르는 소리만이 산행을 재촉하는 순간이었는데….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다.

“이게 무슨 소리죠?”
“포격 훈련하는 소립니다.”
“혹시 이쪽으로 떨어지는 건 아니겠죠?”
“절대 아니니 걱정 마세요.”

대포 소리가 계속 이어진 탓에 제법 익숙해 질 법도 했지만

소리가 너무 커서 들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 불 탄 지장성지

온갖 악재 속에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니 ‘석대암 50m’ 표지가 보였다.

몇 걸음이면 다 되었으려니 했는데 또 끝이 없다.

한번도 쉬지 않고 속보로 가겠다고 다짐했던 기자는 그만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럴 때 가장 힘이 빠진다. 다 왔겠거니 하면 다시 가야할 길이 보이고….

이제 끝났겠거니 하면 다시 고비가 생기고….

마지막 시험이 아닌가 싶다.

지장보살님을 뵙기 전에 인간의 모든 오만한 찌꺼기를 털어내라는 가르침인가.

단숨에 올라가려던 헛된 욕심을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올라간 길. 마침내 환한 공간이 펼쳐졌다.

따사로운 햇빛이 석대암 절터에 쏟아진다. 어둠 속을 비추는 한줄기 빛처럼.

여기가 바로 지장신앙의 본산인가. 불자들의 귀의처가 되었고 한국 불교의 성지로 꼽히던….

지장보살. 그 분은 누구인가.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모두 구제할 때까지는 영원히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보살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한 후 미륵불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 6도를 윤회하면서

고통받는 중생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대원력보살.

눈부신 햇살에 잠깐 눈이 멀었던 기자의 눈에 절터의 속살이 펼쳐진다.

물론 인간의 눈으로 보면 실망이다.

축대와 건물지, 우물지, 그리고 밑동만 겨우 남은 채 죽어버린 나무만이 처연하게 남아있을 뿐.

한 50m쯤 떨어져 그것도 나무 숲에 싸여 잘 보이지도 않은 곳에 있는 지장영험비는

제자리에서 뽑혀나간 채 위태로운 모습으로 기우뚱하게 서 있다.

하기야 한국전쟁 때 ‘인간의 손’에 의해 불탔으니

‘인간의 눈’에는 그렇게 처참한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겠지.

그런데 이상하다.

다른 유적이 이런 몰골이었으면 흥분했을 이우형씨였지만 웬일인지 담담한 표정이다.

“그냥 두는 게 좋을지도 모릅니다. 괜히 으리으리한 건물을 지어놓으면 더 흉한 몰골로 변하니까요.”

하기야 지장보살은 자비행을 철저하게 실천하려고

중생의 업고(業苦)를 자기 업고로 대비(大悲)하는 보살이 아닌가.

보관(寶冠)이나 영락(瓔珞)으로 치장하지 않고 오로지 가사만 걸칠 뿐이다.

그러니 인간의 헛된 몸치장이 가당키나 한 일인가.

수없이 이곳을 찾았을 이우형씨였지만 감회가 새로운 듯했다.

“이곳은 지장보살상이 발견된 우물이고요.

이곳은 보살님이 앉아 계셨던 곳이고요. 이곳은…. 이곳은….”


# 19살 청년의 인생역정

그의 인생 역정을 품에 안은 곳이니 그럴 수밖에 없을 터이다.

“절터 덕분에 농사꾼이었던 제가 이렇게 문화 유산에 빠져 살게 됐습니다.”

19살 때인 1984년.

석대암과 인접한 보개산 자락에 살고 있던 이우형씨가 본격적으로 암자터를 찾으러 나섰다.

“동네 사랑방에서 어르신들이 하는 얘기를 귀동냥 했어요.

지장보살님의 사연이 담긴 석대암이 이곳 어디엔가 있다는 말씀이었죠.”

지금도 이 암자터는 1년에 1~2명이 찾을까 말까 할 정도로 외진 곳이다.

포천쪽 보개산 정상을 거쳐 넘어오는 길이 있지만

한국전쟁 이후엔 군부대 훈련장이어서 민간인들이 감히 출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청년 이우형은 그런 살벌한 환경에서 3~4번이나 답사를 한 것이다. 그러나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계속 허탕을 쳤는데 하루는 산꼭대기(환희봉 정상)에서 내려다 보니

절터로 안성맞춤인 터가 보이지 않겠어요?”
단숨에 달려간 그는 마침내 자연상태 그대로 남아있던 암자터를 찾았다.

지장보살의 성지를 일개 농사꾼이 찾아내는 순간이었다.

그는 이때부터 문화유산 답사를 평생의 업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우형씨가 찾아낸 석대암은 창건 기록도 소설처럼 흥미롭고,

그 이후에도 헤아릴 수 없는 상서로운 감응과 이적(異蹟)으로

국내 제일의 영험한 생지장도량으로 성가를 높였다.

멀리는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오비이락·烏飛梨落)’는 속담이 탄생한 곳이며,

가까이는 광복 3일 전에 8·15 해방과 남북분단을 한꺼번에 예견한 이른바 쌍광방(雙放光),

즉 두 줄기의 빛이 쏟아진 곳이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목은 이색이

“보개산 지정석상의 상서로운 감응은 세상이 모두 아는 바이다(地藏瑞應世所共知)”

(보개산 석대암 지장전기)라고 했을까.

이제 석대암에 나타나신 생지장보살의 이야기를 해보자.
- 2007년 7월 20일, 경향, 이기환 선임기자 / 연천 석대암터에서



 

36곳 경승지 있는 보개산… 고려땐 60곳이 넘는 사찰

궁예가 나뭇가지를 한번 휘둘러 쌓았다는 보개산성 석축.

지장보살의 숨결을 담고 있는 보개산은 그리 간단한 산이 아니다.

휴전선 인근,

즉 경기 연천 신서면과 연천읍, 포천시 관인면, 강원 철원읍과 동송읍에 걸쳐있는 군산(群山)을 통칭한다.

 

남북으로 25㎞, 동서 14㎞에 둘레만 해도 180리에 달한다.

 

보개산군은 고대산(832m), 환희봉(877m·지도엔 지장봉으로 잘못 표기됨)을 사이에 두고 내보개, 외보개로 구분한다.

산내 최고봉은 금학산(947m)이며 석대암 뒤편의 환희봉은 내산의 최고봉이다.

 

보개산군엔 고려 때만 해도 60곳이 넘는 사찰이 있었다.

지금도 저마다 각각의 사연을 간직한 28개의 봉우리와 36곳의 경승지가 있는 영험한 산이다.

특히 미륵을 자처한 궁예와 관련된 설화가 줄을 잇는다. 금학산이 대표적.

금학산은 지금 봐도 예사롭지 않은 자태를 지니고 있는데, 학이 알을 품은 형상이란다.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고 궁궐터를 물색했을 때의 일이다.

풍천원 억새밭에 엎드려 있던 궁예는

도선의 지시(도선이 들판을 한 바퀴 돌고 올 때까지 엎드려 있으라고 했다)를 어기고

일어서는 바람에 불행이 생긴다.

그만 학이 날아가 고암산(풍천원 태봉국 도성의 진산)이 아니라 금학산에서 알을 낳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300년 도읍지의 힘은 금학산 쪽으로 옮겨갔으며,

고암산을 진산으로 한 풍천원 태봉국 도성터는 30년 도읍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어쨌든 300년 도읍지로 각광받은 곳은

금학산을 주산으로 한 지금의 철원 동송읍 이평리와 오지리 일대다.

학의 형상인 금학산의 남쪽 발등과 북쪽 발등 사이인데,

지금 봐도 도읍지로 손색이 없을 만큼 드넓은 평야 지대다.

지금도 보개산군의 관인봉 능선엔 보개산성이 남아있다.

전설에는 궁예가 부하 장졸들에게

“내 신통력으로 이 성을 쌓을 것이니 너희는 보고만 있으라”면서 싸리나무 가지를 꺾었다.

그리고는 한 번 휘두르니 웅장한 보개산성이 한순간에 완성됐다고 한다.

 

이런 수많은 전설이 깃든 보개산군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초토화된다.

한국전쟁 직후 보개산군의 원시림을 대부분 벌목하여 전쟁 복구사업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산군의 대부분이 군작전지역.

‘덕분에’ 벌목 이후 생긴 2차림이 어느덧 자라 제법 울창해졌다.

이젠 개발이다 뭐다 해서 건드리지 말고 제발 이대로 놔두었으면 좋겠다.
<이우형 / 현강문화연구소장〉


  

 

 

 

 

 

 

 

 국보법 ‘위반사범’ 가족들 국회서 문화제

 

사진작가 이시우씨(40). 그는 지난 4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2004년 진해에서 미군 핵잠수함을 촬영해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것 등이 문제가 됐다.

그는 모든 활동을 통일뉴스 전문기자로서 공개적으로 해왔다고 주장한다.

특히 상당 부분은 한·미연합사와 유엔사의 공식 취재 지원 하에 이루어진 것들이라는 것이다.

오산 등지의 미군기지에 열화우라늄탄 300만발이 있다는 특종기사 역시

미국에서 기밀 해제된 문서를 미국 환경단체로부터 입수해 썼다고 그는 밝혔다.

 

그의 구속영장에 거론된 ‘민통선 평화기행’(창비)은

2005년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시에 한국을 대표하는 책 100권에 선정돼

독일어와 영어로 번역까지 됐다.

그래서 그와 그의 가족들은 노무현 대통령까지 폐지하겠다고 했던 국가보안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그가 감옥에 갇혀야 하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23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는 이씨를 비롯한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 가족들이 모여

‘더 이상 가두지 마라’는 이름의 문화제를 열었다.

이시우씨의 중학 2년생 아들은 아빠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다.

“저는 편하게 잘 지내지만 고생하는 아빠가 안쓰러워요. 하지만 아빠는 잘 견뎌낼 거라 믿어요.

아빠가 없으니까 집이 너무 허전하고 심심해요.

예전처럼 엄마·아빠하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웃으며 행복하게 지내고 싶어요. 아빠 사랑해요.”

이씨도 옥중 답신을 보내왔다.

“모든 아름다운 과거는 돌아보면 아쉽고 안타까워서 쉽게 포기하지 못할 때가 많단다.

그러나 새로운 꿈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면

과거의 아름답던 기억도 뒤로 하고 걸어가는 것이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나아가는 일이야.

낯선 세계를 두려워 말고, 결심하고, 행동할 줄 알아야 한다.

네가 결심하고 행동하는 만큼 꿈은 진화한단다….”

수배 8년차 김모씨(31·여)는 행사장에 나오지 못하고 영상 메시지로 어머니를 간접 대면했다.

김씨는 경기대 재학 중 한국대학생총연합회 대의원이 된 이래 도피 중이다.

“제 인생 4분의 1을 수배 생활로 보내고 있네요. 많은 분들 도움으로 잘 지내니 걱정 마세요.

엄마가 아픈 다리 목발 짚어가면서 보안법 철폐 운동한다는 얘기 들었어요.

못난 딸을 믿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아빠 환갑 얼마 안남았는데 하루 빨리 온 가족이 다같이 모여 밥 한끼 먹었으면 좋겠어요….”

김씨 어머니(53)는 “권력 있는 사람들 지금 죄다 북한 왔다갔다 하는데

‘통일하자’고 외친 딸이 무슨 죄라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절규했다.

행사를 맡은 문치웅 간사는

“보안법이 개인을 괴롭히는 정도가 아니라 한 가정을 파괴한다는 점을 호소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찰에 따르면 올 상반기 동안 12명이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보안법 구속자는 641명이던 1997년 이래 줄곧 하향세를 보여

법 폐지 논쟁이 한창이던 2005년 18명으로 감소한 뒤 지난해 22명으로 다시 조금씩 느는 추세다.

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배중인 한총련 대학생들도 11명이나 된다.

진보연대 한선범 언론국장은

“‘행위’가 아니라 ‘생각’ 자체를 처벌하는 국가보안법은 민주화시대와는 양립할 수 없는 악법”

이라고 말했다. -  2007년 7월 23일 장관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