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30. 건봉사 下

Gijuzzang Dream 2007. 12. 9. 13:46

 

 

 

 (30) 건봉사 (下)

- 지금 다시 ‘萬日會의 정신’ 볼 수 있을까 -

 

염불만일회와 사명대사의 정신이 담긴 건봉사.

하지만 전쟁의 참화와 대형산불 등으로 수난을 당한다.

가장 최근에는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바 있다.

사명대사 기적비(사진왼쪽)도 한국전쟁으로 완전히 파손됐다.(오른쪽)

 


1500년의 성상을 쌓은 건봉사의 역사는 파란만장 그 자체다.

520년(신라 법흥왕), 절을 창건한 아도화상의 삶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중국 위나라 사신으로 고구려에 온 아굴마(阿굴摩)와

고구려 규수인 고도령(高道寧) 사이에서 난 혼혈아.

하지만 귀국길에 오른 아버지는 소식을 끊었고,

16살이 된 아들 아도는 아버지를 찾아 “불경을 더 배우고 아버지를 찾겠다”면서 중국으로 떠난다.

아도는 천신만고 끝에 아버지를 만났으며,

아버지의 소개로 고승 현창을 찾아 19년간이나 불경을 공부한다.

36살의 나이로 귀국한 아도는 신라로 건너가 눌지왕의 따님 병을 고치면서 신임을 얻는다.

이 인연으로 아도화상은 흥륜사와 도리사, 그리고 건봉사 등 여러 곳에 절을 짓는다.


# 27년5개월간의 수도

건봉사가 인구에 회자된 것은 바로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 덕분이다.

때는 바야흐로 758년. 발징스님이 만일선원(萬日禪院)을 베푼다.

만일선원이란

결사를 통해 모인 스님과 신도들이 만일 동안 흐트러짐 없는 몸과 일상생활 속에

아미타불 염불을 외며 신행을 닦는 것이다.

1만일이라면 27년5개월가량이니 얼마나 뼈를 깎는 수도인가.

일상생활 속 수도라도 회원들의 결속이 절대적이었다.

바로 이 염불만일회가 건봉사에서 처음 시작된 것이다.

발징스님이 이 결사를 처음 결성했을 때

덕행이 높은 정신·양순 등 31인의 수행승과 향도계원 1280명이 참여했다.

 

1만일이 되던 때인 787년 어느 날,

개울물이 불더니 아미타부처님의 가호로

31인의 육신이 공중으로 날아올라 961인의 향도와 함께 극락세계로 왕생했다.

염불만일회는 국가가 위기에 닥쳤을 때

국란 극복을 위한 전국민적인 힘을 모으는 기폭제로 활용되기도 했다.

몽골침입 때

고려 요세(了世)스님이 염불회의 일종인 백련결사운동을 주도하면서 항몽의 의지를 심기도 했다.

건봉사에서 시작된 염불만일회는

1802년과 1851년, 1881년, 1908년에 이어 1998년까지 모두 6차례 베풀어졌는데,

1998년 6회 때는 3050명이 참가했다.


# 사명대사와 승병 700인

건봉사가 호국불교의 상징이 된 데는 사명대사(1544~1601)의 활약 또한 무시할 수 없다.

1592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나라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불처럼 가물가물해졌다.

사명대사는 “누란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그대로 둘 수 없다”는 스승 서산대사의 편지를 받는다.

사명대사는 즉시 각처에 격문을 보내 승의병을 모은다.

대사는 이렇게 모인 700명의 승군을 건봉사에서 조련하여 건봉령을 건너 천리길을 달려간다.

700명이나 되는 승군을 훈련시킬 정도로 건봉사의 규모가 컸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의승도대장이 된 사명대사는

1593년 1월 명나라군과 더불어 평양성~개성~서울 수복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지금 건봉사에 가면 부처님의 진신치아사리를 친견할 수 있다.

은은한 진줏빛을 띠는 사리는 온도에 따라 색깔이 변한다고 한다.

이 치아사리에 대한 사연도 만만치 않다.

643년(선덕여왕) 자장법사가 당나라에서 불두골(佛頭骨)과 불아(佛牙) 등 불사리 100과와

부처님의 옷인 비라금점(緋羅金點) 한 벌을 가져왔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사리는 셋으로 나눠 황룡사 탑, 태화사탑, 그리고 통도사의 계단(戒壇, 계를 수여하는 단)에 두었다.

그런데 통도사 사리가 횡액을 당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 왜군이 통도사에 난입, 금강계단에 모셔진 사리를 탈취해간 것이다.

 

1604년 8월 사명대사는 선조왕의 명령으로 일본에 건너간다.

신하들이 “동쪽 오랑캐인 왜가 원래 불교를 숭상하므로

사명대사 같은 분이 강화사신으로 가야 한다”고 추천했기 때문이다.

사명대사는 8개월간 일본에 머물면서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얻었으며

3000여 명의 포로를 데리고 이듬해 4월 귀국했다. 그때 사명대사는 왜군이 탈취한 사리도 되찾았다.


# 도굴범과 부처님

사명대사는 가져온 사리를 통도사에 다시 모셨고,

그 중 12과는 의승군을 일으킨 건봉사 낙서암(사명대사의 본사)에 봉안했다.

훗날 혹 있을지 모를 재난에 대비하려고 분장(分藏)한 것이다. 하지만 도굴의 화를 입을 줄이야.

1986년 6월10일, 민통선 이북지역에서 출입하기 어려운 건봉사에 도굴꾼 일당이 잠입한다.

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이지만, 관리 또한 어렵다는 허점을 파고든 것이다.

‘모대학 건봉사 복원조사단’임을 사칭한 위장출입증으로 검문소를 지났으나

그 다음부터는 무사통과.

그들은 이틀간 ‘사적 조사단’ 운운, 유유자적하면서 제초작업을 벌이는 척 했다.

일당은 12일 금속탐지기로 문화재의 유무를 확인한 다음

13일 아침 2시간에 걸친 도굴 끝에 치아사리를 훔쳐갔다.
하지만 잘못 가져간 것이다.

 

6월 하순부터 모든 도굴꾼들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사리를 돌려주라”고 꾸짖는 것이었다.

일당은 하루도 아니고 며칠간이나 계속된 꿈의 계시에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한달여에 걸친 7월14일,

일당 중 주범 ㄱ씨는 결국 공범을 시켜 서울 봉천동 ㄱ호텔로 찾아가

훔쳐간 사리 12과 가운데 8과를 맡겨놓고 달아났다.

그러나 나머지 4과는 공범 중 한 명이 달아나는 바람에 증발되고 말았다.

 

건봉사 측은 결국 되찾은 8과 가운데 3과는 적멸보궁 석탑에,

나머지 5과는 법당에 봉안하여 참배불자들의 친견을 허락하고 있다.

 

불자들은 부처님의 꾸짖음으로 일부나마 사리를 되찾은 이 사건을 불사리의 이적(異蹟)이라 한다.


# 만일염불회의 정신으로

건봉사는 세조가 1465년 행차해서 닷새 동안 머물며 자신의 원당으로 삼은 이후

전국 최대 규모의 사찰로 자리매김했다.

승병 700명의 훈련장소일 만큼 컸던 것이다.

 

왕실은 이후에도 부역을 면제해주거나(예종·1469년),

사역을 사방 10리로 정해주거나(성종·1470년),

쌀 10섬을 수확할 수 있는 토지를 내리면서(명종·1552년) 건봉사를 후원했다.

 

하지만 1878년 4월에는 대형 산불 때문에 대웅전을 비롯,

3183칸이 전소되는 비운을 겪는다.

 

당시 군수를 지낸 이도식이 1882년 쓴 건봉사 사적기를 보자.
“옛 기록과 사찰에 달린 임야 등이 한꺼번에 불길에 휩싸여 한 줌 재로 변하니

불상이 땅에 드러나고 승도가 머무를 곳을 잃어 놀라고 참혹한 형상을 어찌 다시 말로 이를까.”

한국전쟁 때도 유엔군의 공습과 10만발에 이르는 함포사격 등으로 절이 페허가 되었다.

그후 50년이 더 지난 2007년 초가을,
지금 건봉사 가는 길은 쉽고 편하다.

1989년 민통선에서 해제된 이후 중창불사를 거듭해온 덕에 지금은 옛 영화의 풍취를 맡을 수 있다.

하지만 한가지 더 중창돼야 할 것이 있으니

바로 염불만일회의 정신이 아닌가 싶다.
염불만일회를 결성한 발징스님의 초심으로 돌아가면 어떨까.

 

현재 민망한 일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불교계는 물론

내남할 것 없이 중심을 잃고 정신을 놓아버린 지금….

허세, 허명, 거짓의 세상이 아닌, 참삶의 세상을 추구하고 기도하는….

만일, 즉 27년5개월은 아니어도 좋다. 1년, 아니 단 하루라도….
- 2007년 10월 5일, 이기환 선임기자

 

 

 

 

 

 

 

 

  

한국전쟁 때 잿더미… 남은 유적이라도 보존을

건봉사는 한국전쟁 때 잿더미가 되었다.
하지만 단순히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불타버린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건봉사를 불태운 것은 전쟁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개탄스럽다.

복원된 건봉사 전경.

1945년 공산치하에 들고 1948년부터 종교적 기능을 상실했던 건봉사.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10일.

‘부처님 오신 날’을 불과 3일 앞두고 재앙을 맞이한다.

 

유엔군은 후퇴하던 북한군의 중간집결지였던 건봉사에 대한 무차별 공습을 벌인다.

3~4대의 폭격기는 대웅전 지역의 모든 전각을 불태웠다.

국보 412호 ‘금니화엄경’ 46권과 도금원불, 오동향로, 철장 등 사명대사 유물이 모조리 사라졌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전선이 고착화하자 건봉사 지역은 2년간 처절한 고지전의 현장이 된다.

향로봉·건봉산 전투는 물론 북한 쪽의 351고지전투, 월비산 전투 등 전사에 남을 지루한 싸움이 벌어진다.

 

1951년 4월부터 휴전 직전까지 16차례의 공방전에서 국군이 쏘아댄 포탄만 10만발에,

미 7함대 함포사격과 공군기 폭격으로 그야말로 초토화한다.

국군 수도사단을 시작으로 이곳에 교차 투입된 국군 부대가 7개 사단에 이르고,

그때마다 이곳에 주둔하던 국군에 의해 건봉사의 남아 있던 전각과 요사는

군부대 막사와 땔감으로 전쟁 중에 헐려나갔다. 그야말로 뼈까지 다 발라 먹은 것이다.

휴전 후에는 주둔한 군부대의 실화로 낙서암지역이 소실되는가 하면

고승들의 부도탑이 밀반출되고 그 많았던 중요 문화재들이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1954년 이후에는 불이문 외에는 완전히 폐허로 변해 헐벗고 잡초만 우거진 빈 터가 되어버렸다.

전쟁 직전 640칸 규모의 건봉사가 사라진 것이다.

과연 그래야만 했을까.

아무리 전쟁 중이었다지만 1500년 역사를 지켜온 이 귀중한 문화재를

갈갈이 찢어 놓아도 되는 것이었을까.
더 슬픈 것은 그 원인과 가해자가 홍건적도 아니고 왜구도 아니고 몽고족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입만 열면 문화민족임을 자부하는 바로 우리들의 짓이다.

전쟁으로 두 눈이 충혈되어 저지른 부끄러운 50여년 전의 분명한 자화상이다.

 

건봉사는 이후 우여곡절 끝에 중창불사를 벌였고,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거듭났다.
하지만 이미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문화유산들이 사라진 지 오래다. 후회한들 무슨 소용인가.
- 이우형/ 현강문화연구소장

 

 

 

**** 이상 30회까지 이어졌던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연재는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