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건봉사 (上) | ||
- 지뢰밭 뚫고 ‘호국불교의 성지’ 밟다 - 탑 고개를 헐레벌떡 넘어서면 울창한 노송 사이로 들려오는, 염불하는 북소리, 징소리가 울렸다.” (이관음행 건봉사 불교부인회장) 그리고 흰 포장의 음식점 하며, 문수고개는 전후 10여일간 시골 5일장터를 방불케하는 대성황의 모습이었다.”(윤용수 전 거진읍장) 불교신자가 아닌 기자에게는 다소 무미건조한 여정이다. 민통선 이북을 다니면서 심심찮게 험한 일을 당했던 기자이고 보니…. 이젠 민통선에서 해제된 데다, 승합차가 불이문(不二門) 밖 주차장에 떡 하니 기자를 내려주니 예상 밖에 손쉬운 길이다. 중창불사로 화려해진 사찰 안팎을 둘러보고, 특히나 부처님의 치아 진신사리를 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었다.
이우형씨가 속삭인다. 그러나…. 그건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건봉사 경내를 벗어나자마자 길이 사라졌다. 허리춤, 아니 한 길 높이의 수풀 사이로 끊임없이 펼쳐진 계곡. 제멋대로 넘어진 나무와 수풀,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눈을 스치는 기분 나쁜 거미줄을 노젓듯 헤쳐나갔다. 길인 줄 알고 발을 내딛다가는 허방다리를 짚기 일쑤였으니…. 계곡을 가로지르려 이끼 낀 바위를 딛다가 하릴없이 미끄러지곤 했다. 사진기자의 무거운 장비를 들어주고 싶어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설상가상. 휘적휘적 앞서가던 이우형씨가 발길을 멈춘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지만 길을 잃은 게 분명하다. 뒤따르던 기자일행은 한순간에 절망감에 빠져든다. 다시 오던 길을 내려와 다른 계곡으로 접어든다.
여기서 길을 잃으면 내려갈 수도 없지 않는가. 목표를 잃어가는 절망감과 길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머릿속은 어지러워지고, 몸과 마음의 기운은 바닥을 헤매고…. ‘그만 돌아가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하지만 태연하게 앞장서는 길잡이의 의연한 모습에 다시 삼키고 말았다. 7시가 다 돼서야 일행은 천신만고 끝에 보림암터에 닿았다. 일제 때까지 9칸 건물이 있었다 한다. 얼마전까지는 초석과 굴뚝의 일부가 남아있었다는데, 지금은 켜켜이 쌓인 기와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신라 법흥왕 20년(553년)에 창건되었으니 20여 개에 달하는 건봉사의 부속암자 가운데 가장 유서깊은 곳이다. 도중에 고종의 후궁인 엄귀비가 백일기도를 한 뒤 영친왕을 낳았다는 봉암암이 있다. 하지만 유격훈련을 방불케하는 여정이었으니 한눈을 팔 겨를이 있을 리 만무했다. 후다닥 대충 사진 찍고, 암자를 중건한(1523년) 보림선사가 도를 깨달았다는 마루난간에 앉았다가 급히 하산하기 시작했다. 하산길의 어려움은 언급하지 않으련다. 땀, 풀, 상처, 흙, 물이 뒤범벅이 된 일행의 몰골을 서로 바라보고는 허허 웃기만 했다. 기자는 산행 내내 가슴 속에 담아놓았던, 그러나 차마 꺼낼 수 없었던 궁금증을 이우형씨에게 풀어놓았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수풀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길인데 9년이라니. 또 하나 묻고 싶었던 한마디.
등골이 오싹했다. 만약 산행 도중에 이 대답을 들었다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민통선 취재하면서 보림암은 한번쯤 올라가봐야 ‘그래도 민통선 취재 좀 했네’ 하는 소리 듣지 않겠습니까.”
하기야 이우형씨 덕분에 또 하나의 추억거리를 담을 수 있지 않았나. 그리고 또 하나의 교훈도…. 별 것 아닌 취재같아 쉽게만 보았던 건봉사의 하루는 그렇게 ‘건봉사의 역사’ 만큼이나 파란만장하게 끝났다. 마음 속으로 ‘이런 밋밋한 취재라니…’ 하고 얕보았던 기자에게 사정없이 죽비세례가 날아온 것이다. 건봉사는 그렇게 간단한 절이 아니다. 이후 발징, 나옹, 사명, 만해스님 등이 주석(駐錫)하며 국난극복과 불교발전을 위해 용맹했던 한국불교 부흥의 성지이자 요람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寂滅寶宮)인데다 사명대사가 임진왜란때 승군을 모은 호국불교의 상징이기도 하다. 특히 무려 27년 5개월 동안 염불을 외며 국난극복과 신행을 닦는 염불만일회가 이 절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조선 세조 이후 왕실의 귀의를 받은 한국 4대 사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유구한 역사 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사연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제 이 절의 역사와 사연을 풀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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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아부한 불교 ‘치욕’ | ||
흙먼지를 흠뻑 뒤집어쓰고, 다시 민통선 초소에서 기본 30분의 승강이를 거치고 들어가야만 했던 건봉사였다. 하지만 이젠 철조망의 멍에에서 풀려 무애(無碍)의 도량이 되었다. 그러나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 절집에 발을 들여놓기란 그 발심의 정도가 지뢰밭을 넘는 것처럼 정말 께림칙하다.
10년 전 어느 날 고성 죽왕면의 어느 바닷가에서 석양을 등지고 주지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건봉사 불이문(不二門)의 진짜 의미를 아시나요?” 건봉사의 불이문은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비수를 감춘 치욕의 상징입니다. 조선불교의 암울한 식민지 시대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타루문(墮淚門)입니다!” 조선 4대가람이요, 역사를 되짚어 봐도 그들에게는 가시같은 존재인 이 건봉사에 ‘화려한 법난’이 시작되는 것이다. 벚나무 식재와 함께 전각의 석축과 교량의 난간석이 모두 일본풍으로 뒤바뀐다. 만일염불회의 성지에 등공탑을 세우더니(1915), 한국 불교에서는 형식을 찾아볼 수 없는 십바라밀석주를 비롯하여 낙서암 지역의 일(日)자형 연못인 연지(蓮池)를 꾸민다. 그 속내가 “조선은 죽었다!”는 뜻 외에는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다. 이곳에서 승병을 도모하고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사명당대사의 기적비는 어떠한가? 조선총독부가 철저하게 파괴하지 않았는가? 국적없는 식민지 불교의 무기력한 아부가 다른 곳도 아닌 이 상징의 국찰인 건봉사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이뤄진 것에 분개한다. 어찌 생각하면 일제강점기의 화려했던 건봉사는 거푸집에 불과하다. 이제 이 도량을 어떻게 리모델링할 것인가? 이런 화두는, 건봉사에 주석하며 왜색으로 변모해 가는 모든 현상을 목도하며 침묵했던 만해스님 심정만큼이나 복잡하다. 이제 우리가 만들어야 할 진정한 불이문은 어떤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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