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주짱의 하늘꿈 역사방

지켜(연재자료)

[민통선 문화유산 기행] 29. 건봉사 上

Gijuzzang Dream 2007. 12. 9. 13:48

 

 

 

 (29) 건봉사 (上)

- 지뢰밭 뚫고 ‘호국불교의 성지’ 밟다 -

금강산 일만이천봉 남쪽 끝자락, 아니 향로봉 자락 연꽃모양의 자방(子房)에 자리하고 있는 건봉사다.

“(어릴 적) 다리 아픈 줄 모르고 이십오리길을 걸어 할아버지 할머니 손에 매달리며 (건봉사를) 찾았다.

탑 고개를 헐레벌떡 넘어서면 울창한 노송 사이로 들려오는, 염불하는 북소리, 징소리가 울렸다.”

(이관음행 건봉사 불교부인회장)

“(4월 초파일) 참관하는 사람끼리 비켜서기조차 힘들 정도로 인산인해를 이뤄 각종 장사꾼들,

그리고 흰 포장의 음식점 하며, 문수고개는 전후 10여일간 시골 5일장터를 방불케하는

대성황의 모습이었다.”(윤용수 전 거진읍장)

일제시대, 건봉사의 추억을 전하는 이들의 감회는 새롭겠지만,

불교신자가 아닌 기자에게는 다소 무미건조한 여정이다.

민통선 이북을 다니면서 심심찮게 험한 일을 당했던 기자이고 보니….

이젠 민통선에서 해제된 데다,

승합차가 불이문(不二門) 밖 주차장에 떡 하니 기자를 내려주니 예상 밖에 손쉬운 길이다.

중창불사로 화려해진 사찰 안팎을 둘러보고,

특히나 부처님의 치아 진신사리를 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었다.

553년에 창건됐고, 보림선사가 도를 깨달았다는 건봉사 부속 암자 보림암터.

한국전쟁의 참화 등으로 암자가 그대로 폭삭 주저앉았다.

고성 건봉사/박재찬기자


# 악마의 목소리

오후 5시쯤. ‘이제 다 둘러본 것인가’ 하면서 다소간 나른해진 몸을 뒤틀고 있을 무렵,

이우형씨가 속삭인다.
“저기, 여기서 한 40분 올라가면 보림암이라고 있는데요. 한번 가보시렵니까?”
“무슨 사연이 있는 암자인가요?”
“한국전쟁 이후 암자가 폭싹 내려앉아 지금도 기와가 그대로 쌓여있는 곳인데요.”
예상과 달리 워낙 편한 여정이어서 찜찜했는데 잘됐다 싶었다.

그러나…. 그건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건봉사 경내를 벗어나자마자 길이 사라졌다.

허리춤, 아니 한 길 높이의 수풀 사이로 끊임없이 펼쳐진 계곡. 제멋대로 넘어진 나무와 수풀,

그리고 시도 때도 없이 눈을 스치는 기분 나쁜 거미줄을 노젓듯 헤쳐나갔다.

길인 줄 알고 발을 내딛다가는 허방다리를 짚기 일쑤였으니….

계곡을 가로지르려 이끼 낀 바위를 딛다가 하릴없이 미끄러지곤 했다.

사진기자의 무거운 장비를 들어주고 싶어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우형) 선생, 40분이 지났는데….”
“다 왔습니다.”
그건 말뿐. 가도가도 끝없는 수풀 우거진 급경사 길,
1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설상가상. 휘적휘적 앞서가던 이우형씨가 발길을 멈춘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지만 길을 잃은 게 분명하다.

뒤따르던 기자일행은 한순간에 절망감에 빠져든다.

“여기가 아닌가봐요.”
그럼 어쩌란 것인가. 시간은 벌써 6시30분이 되고, 해는 뉘엿뉘엿 산너머로 빠져가고….

다시 오던 길을 내려와 다른 계곡으로 접어든다.
‘한번만 길을 더 잃으면 내려가자 해야지.’


# 폭삭 무너진 1500년 역사

큰일 났다 싶었다. 계곡의 땅거미는 분초를 다투며 쏜살같이 뛰어노는데….

여기서 길을 잃으면 내려갈 수도 없지 않는가.

목표를 잃어가는 절망감과 길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머릿속은 어지러워지고, 몸과 마음의 기운은 바닥을 헤매고….

‘그만 돌아가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다.

하지만 태연하게 앞장서는 길잡이의 의연한 모습에 다시 삼키고 말았다.

7시가 다 돼서야 일행은 천신만고 끝에 보림암터에 닿았다.

30평 남짓한 암자터는 그야말로 폭격을 맞고 그대로 주저앉은 듯했다.

일제 때까지 9칸 건물이 있었다 한다.

얼마전까지는 초석과 굴뚝의 일부가 남아있었다는데, 지금은 켜켜이 쌓인 기와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신라 법흥왕 20년(553년)에 창건되었으니

20여 개에 달하는 건봉사의 부속암자 가운데 가장 유서깊은 곳이다.

기자일행이 사선을 뚫고 올라온 계곡은 절경으로 이름난 보림동 계곡이라 하고,

도중에 고종의 후궁인 엄귀비가 백일기도를 한 뒤 영친왕을 낳았다는 봉암암이 있다.

하지만 유격훈련을 방불케하는 여정이었으니 한눈을 팔 겨를이 있을 리 만무했다.

털썩 주저앉았던 일행은 쏜살같이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계곡을 바라보며 급히 털고 일어났다.

후다닥 대충 사진 찍고,

암자를 중건한(1523년) 보림선사가 도를 깨달았다는 마루난간에 앉았다가 급히 하산하기 시작했다.

하산길의 어려움은 언급하지 않으련다.
필설로 표현하기 싫은 과정을 거쳐 밤 8시가 넘어서야 건봉사에 도착했다.

땀, 풀, 상처, 흙, 물이 뒤범벅이 된 일행의 몰골을 서로 바라보고는 허허 웃기만 했다.

기자는 산행 내내 가슴 속에 담아놓았던,

그러나 차마 꺼낼 수 없었던 궁금증을 이우형씨에게 풀어놓았다.

“이선생이 이전에 마지막으로 올라간 적은 언제죠?”
“한 9년 됐나요?”
9년이라고? 기막힌 일이었다. 까마득한 옛날이 아닌가.

인적이 드문 곳이라 수풀이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길인데 9년이라니. 또 하나 묻고 싶었던 한마디.


“우리가 갔던 길이 미확인 지뢰지대는 아니었겠죠?”
“예전에 보림암을 조사할 때 지뢰탐지기를 써서 조사했어요.”
웃음이 나왔다. 이미 조사한 곳이라 괜찮다지만, 도중에 길을 잃어버리지 않았나.

등골이 오싹했다. 만약 산행 도중에 이 대답을 들었다면….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또 이우형 선생한테 속았네요.”
번번이 기자를 ‘속여’ 힘겨운 여정으로 이끌었던(?) 그가 또…. 이우형씨가 덧붙였다.
“아까 보림암 올라간다니까 (건봉사) 주지스님이 고개를 갸우뚱하더군요.

그렇지만 민통선 취재하면서

보림암은 한번쯤 올라가봐야 ‘그래도 민통선 취재 좀 했네’ 하는 소리 듣지 않겠습니까.”


# 호국불교의 상징

그의 너스레에 기자는 “그래 맞다. 고맙다”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기야 이우형씨 덕분에 또 하나의 추억거리를 담을 수 있지 않았나.

그리고 또 하나의 교훈도….

별 것 아닌 취재같아 쉽게만 보았던 건봉사의 하루는

그렇게 ‘건봉사의 역사’ 만큼이나 파란만장하게 끝났다.

마음 속으로 ‘이런 밋밋한 취재라니…’ 하고 얕보았던 기자에게 사정없이 죽비세례가 날아온 것이다.

건봉사는 그렇게 간단한 절이 아니다.

신라 법흥왕 7년(520년) 아도화상이 창건했으니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이후 발징, 나옹, 사명, 만해스님 등이 주석(駐錫)하며

국난극복과 불교발전을 위해 용맹했던 한국불교 부흥의 성지이자 요람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寂滅寶宮)인데다

사명대사가 임진왜란때 승군을 모은 호국불교의 상징이기도 하다.

특히 무려 27년 5개월 동안 염불을 외며 국난극복과 신행을 닦는 염불만일회가

이 절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조선 세조 이후 왕실의 귀의를 받은 한국 4대 사찰 중 하나이기도 하다.

유구한 역사 만큼이나 파란만장한 사연을 담고 있기도 하다.

이제 이 절의 역사와 사연을 풀어보자.
- 2007년 9월 21일 이기환 선임기자

 

 

 

 

 

 

 

  

 

 

 

 

 

 일제에 아부한 불교 ‘치욕’

흙먼지를 흠뻑 뒤집어쓰고,

다시 민통선 초소에서 기본 30분의 승강이를 거치고 들어가야만 했던 건봉사였다.

하지만 이젠 철조망의 멍에에서 풀려 무애(無碍)의 도량이 되었다.

그러나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 절집에 발을 들여놓기란

그 발심의 정도가 지뢰밭을 넘는 것처럼 정말 께림칙하다.

 

10년 전 어느 날 고성 죽왕면의 어느 바닷가에서 석양을 등지고 주지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건봉사 불이문(不二門)의 진짜 의미를 아시나요?”

“그야 생과 사가 둘이 아니고, 번뇌와 깨달음이 둘이 아니고, 착함과 착하지 않음이 둘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이 둘이 아닌 해탈의 불국토를 상징하지요.”

“스님! 아닙니다!

건봉사의 불이문은 내선일체(內鮮一體)의 비수를 감춘 치욕의 상징입니다.

조선불교의 암울한 식민지 시대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타루문(墮淚門)입니다!”

“?….”

1911년 9월 조선총독부의 ‘조선사찰령’이 공포되면서 일제의 치밀한 조선불교 무력화 디자인이 실행에 옮겨진다.

조선 4대가람이요, 역사를 되짚어 봐도 그들에게는 가시같은 존재인

이 건봉사에 ‘화려한 법난’이 시작되는 것이다.

친일주지의 임명을 시작으로 일본풍의 절집으로 도량을 바꾼다.

벚나무 식재와 함께 전각의 석축과 교량의 난간석이 모두 일본풍으로 뒤바뀐다.

만일염불회의 성지에 등공탑을 세우더니(1915),

한국 불교에서는 형식을 찾아볼 수 없는 십바라밀석주를 비롯하여

낙서암 지역의 일(日)자형 연못인 연지(蓮池)를 꾸민다.

그곳 두 개의 석주에 새겨진 여섯 자의 진언과 용사활지(龍蛇活地), 방생장계(放生場界)의 글은

그 속내가 “조선은 죽었다!”는 뜻 외에는 다른 해석의 여지가 없다.

이곳에서 승병을 도모하고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사명당대사의 기적비는 어떠한가?

조선총독부가 철저하게 파괴하지 않았는가?

필자는 절대 이런 불이문을 통과하여 건봉사의 경내로 들어가지 않는다.

국적없는 식민지 불교의 무기력한 아부가 다른 곳도 아닌 이 상징의 국찰인 건봉사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이뤄진 것에 분개한다.

어찌 생각하면 일제강점기의 화려했던 건봉사는 거푸집에 불과하다.

이제 이 도량을 어떻게 리모델링할 것인가?

이런 화두는,

건봉사에 주석하며 왜색으로 변모해 가는 모든 현상을 목도하며

침묵했던 만해스님 심정만큼이나 복잡하다.

이제 우리가 만들어야 할 진정한 불이문은 어떤 것일까.
- 이우형 / 현강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