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책거리(책가도, 冊架圖)

Gijuzzang Dream 2007. 12. 4. 21:42

 

 

 

 책가도(冊架圖) / 책거리(冊巨里)

 

 

 

책거리는 지배층의 외래지향적 고급문화인 책가화(冊架畵)를 본으로 하여

조선시대 전반의 학자를 존경하고 학문을 숭상하는 풍조와

관리로서의 출세를 바라는 기복적 소망을 배경으로 서민층에서 널리 애호되었다.

 

책거리는 민화 중에서도 걸작이 많은 부문으로 많은 책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지묵필연(紙墨筆硯) 등의 문방구와 문방의 淸 완상품,

학자의 일상용품으로서 안경․ 찻그릇․ 부채․ 과일․ 꽃․ 시계 등의 진기한 외래물품을 첨가하여

호화롭고도 기품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낸 그림이다.

 

책거리는 사랑방의 기물을 소재로 하여 선비취향의 분위기를 연출해 내는 그림으로

조선시대의 유교적인 학문숭상의 의식을 반영하고 있다.

그 소재가 상층고급문화의 성격을 반영하고 있으면서도 서민층에서 애호되었던 것은

민화의 성격중의 하나인 상류층 미술의 저변확대현상이라는 한 면을 잘 말해준다.

 

책가화(冊架畵)는 궁중의 화원에 의해 제작되어 국왕을 비롯한 최상위계층에서 사용했던 장식병이었고, 책거리(冊巨里)는 ‘서민화가’들에 의해 제작되어 서민층에서 수용된 일상의 실용치레물이었다.

 

책가화와 책거리는 기본소재와 표현양식을 공유하면서도 그려진 기물의 종류에

수용층의 성격이 반영되어있고,

책가화(冊架畵)의 음영법(陰影法), 선투시화법(線透視畫法)과

책거리의 다시점(多視點), 역원근법적(逆遠近的) 표현에는

제작층의 공간인식과 표현이 드러나 있으며, 채색의 색감과 분위기는 사용자의 신분을 나타내고 있다.

 

해석의 학문적 기반과 준거틀이 마련되어 있지 않은 민화에 있어서

궁중의 어좌를 둘렀던 책가화(冊架畵)와

서민들의 사랑방에서 사용되었을 책거리의 상호비교에서 도출될 수 있는 상대적 특징들은

민화의 회화성 정립에 하나의 시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한 시대 미술문화의 다채로운 발현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궁중과 상류계층의 장식화와 서민들의 생활화인 민화는

그 수요층이 신분사회인 왕조시대에서 양극단에 위치한다.

그러나 이 두 수요층의 책가화(冊架畫), 책거리(冊巨里)는 감상화가 아닌 장식화, 생활화라는 면에서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다.

일정한 本의 유형을 따르므로 화가의 개성이 중요시되지 않는 익명성,

다채극채(多彩․極 彩)의 화려한 장식성,

특정한 장소의 성격에 부합하는 쓰임새를 가지는 장소성이라는 특징을 공유한다.

 

책거리그림은 책가도(冊架圖)․ 서가도(書架圖)․ 문방도(文房圖)․ 문방사우도(文房四友圖)․

책탁문방도(冊卓文房圖) 등의 여러 가지 이름이 있으나,

이 중에서 ‘책가도(冊架圖)’와 ‘책거리’가 가장 널리 쓰이고 있다.

책가도의 명칭은 이러한 그림이 통용되던 당대에 ‘책가화(冊架畫)’로 지칭되었듯이

장르개념으로 사용할 때는 책가화로 일컫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책거리(冊巨里)’로 표기된 ‘책거리’는 ‘책가(冊架)’의 우리말을 한자로 적은 것이라 생각되는데

이는 정조(1752-1776-1800)가 12년(1788) 9월 18일에 자비대령화원의 녹취재 그림을 채점한 뒤

특별히 써서 내린 판부(判付)의 글에 보인다.

여기에서 책거리는 문방 화문(文房 畫門) 가운데 ‘冊架’ 화제(畵題)의 그림을 말한 것이므로

당연히 책가화와 같은 뜻일 것이나, ‘거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는 알 수 없다.

 

 

‘冊’은 당연히 서책일 것이나,

‘架’의 우리말 뜻이라고 볼 수 있는 ‘거리’는 필자의 추정으로는 ‘옷걸이’의 ‘거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架’의 사전 뜻풀이는

①물건을 얹어 놓는 장치인 시렁으로서 ‘書架’가 대표적인 용례이며,

②횃대로서 옷걸이인 ‘衣架’로 쓰이며,

③건너질러 가로대어 놓는 것을 뜻한다.

 

책과 기물이 수납된 청나라의 다보격류의 가구는 조선시대에는 보이지 않는 유형이다.

우리나라에서 책을 수납하는 가구의 범칭인 ‘書架’와 차별을 두기 위해

유사한 의미의 ‘冊架’로 일컬은 것으로 생각된다.

 

‘架’가 가로의 수납장치를 일컫는 예로서 筆架를 들 수 있다.

붓을 세로로 걸어 놓는 것을 필격(筆格)이라 하고, 가로로 걸쳐놓는 것을 필가(筆架)라  하였다.

조선시대에 책과 옷은 모두 가로로 수납되는 물건이었으므로

‘옷거리’의 용례와 같이 ‘책거리’라고 한 것으로 생각된다.

 

18세기 후반에 책가화와 책거리는

화원이 그린 ‘책가’ 화제의 궁중장식화를 지칭하는 같은 의미의 말로써 쓰여졌으나,

책가의 서양화법적 입체표현이 그림의 핵심이었던 궁중 책가화는

짧은 시기에 소량이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는 반면,

장식문양과 구경거리 위주의 민간수요 책거리는

20세기 전반까지 그 명맥이 끊기지 않고 많은 양이 제작되었다.

 

현재적 입장에서 책가 표현이 중심인 궁중장식화 계열을 책가화로,

서민수요의 책을 비롯한 구경거리 중심의 민화를 책거리로 구분하여 지칭하는 것은

큰 무리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조자용(趙子庸, 1920-2000)은

‘거리’를 ‘구경거리’의 ‘거리’에서 온 것으로 보아 책거리를 ‘책더미 구경거리’인 것으로 해석했다.

 

본 연구에서는 畵員에 의해 제작되어 궁중상류계층의 장식화로 소용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은 책가화로,

‘서민화가’들에 의해 제작되어 서민층에서 수용되었다고 생각되는 것은 책거리로,

그 제작층․ 수용층에 따라 용어를 구별하여 사용하고자 한다.

 

민화 책거리는 궁중과 상류계층의 장식화인 ‘冊架畫’를 원류로 하여

서민층의 장식욕구와 소박한 기원(祈願),

고급문화에 대한 선망의식에 호응하여 전개된 것으로 생각된다.

 

책거리는 책과 문방용품, 완상용의 기물들이라는 책가화의 소재를 공유하면서도

세부적인 품목에서는 차이를 보이며, 장식화(裝飾化)와 문양화(文樣化)의 경향,

입체와 공간에 대한 인식과 표현 등에서 민화만의 독자적인 표현양식을 보이고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에게 민화의 매력을 적극적으로 논리화 할 수 있는 감동을 주어

 「불가사의한 조선민화」를 쓴 계기가 된 것도 그가 ‘문방도’로 분류했던 책거리 그림이었다.

 

책거리는 궁중화원들에 의해 제작되어 궁중을 비롯한 상류계층의 생활 장식화로 사용되었던 책가화가

저변화되는 과정에서 시간적, 공간적, 계층적 차이를 가지고

점차 일반화, 간략화, 상업화되는 사회경제적 위상과 문화적 수준과

기호의 계서적(階序的) 차이에 의해서 점진적으로 변형되면서 형성된 것이라고 이해된다.

 

책가화의 도상내용도

청나라 다보격도류의 그림이 우리나라의 중앙 상류계층으로 전래되어

점차 우리나라의 형편에 맞게 부분적으로 변개되고 창안되면서 정형화된 뒤,

이것이 다시 민간으로 저변화되고 토착화되는 과정의 여러 가지 맥락에 따라서

파생적으로 변모된 것들이 많다고 생각된다.

- 이인숙(영남대)의 논문 <책가화, 책거리의 제작층과 수용층> 중에서 발췌

 

 

 

 

 

 

 

 

 장한종의 <책가도(冊架圖) 병풍>

 

 

 

정 병 모 (경주대학교 교수)

 

 

 최근 경기도박물관에서는 처음으로

궁중 화원인 장한종(張漢宗, 1768~1815)이 그린 책가도 병풍 한 틀을 공개하였다.

 

궁중화원이 그린 책가도(冊架圖)로는 이형록(李亨祿, 1808∼?)의 작품만이 알려진 상황이라

장한종 <책가도병>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더욱이 이형록의 작품은 삼성미술관 리움을 비롯하여 몇 군데 소장품이 알려졌지만,

장한종의 책가도(冊架圖) 는 경기도박물관 소장품이 유일하다.

이 병풍은 10월 6일부터 12월 16일까지

부산박물관에서 개최하는 "행복이 가득한 민화" 전시회에 출품될 예정이다.

 

 

책거리라고도 불리는 책가도(冊架圖)

서가 위에 책을 비롯하여 도자기, 문방구, 생활용품 등이 진열된 그림이다.

 

책가도가 조선에서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된 시기는 18세기 후반 정조 때이다.

정조는 책가도에 대하여 직접 거론할 정도로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늘 책 속에서 살면서 학문에 대한 열정을 잃지 말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그가 "우문일념(右文一念)"이라고 표현하였듯이

문화 정책에 힘쓰고, 학문을 진흥하기 위해 규장각을 설치하며,

학문의 생활화를 주장하였다.

이는 조선 초기에 세종이 집현전을 경영한 것과 상통하는 업적이다.

 

조선왕조는 원래 문치주의를 표방하였지만,

특히 두 임금 때 학문의 진흥을 토대로 조선시대 문화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정조가 특별히 책가도(冊架圖) 에 대하여 애정 어린 관심을 보인 것은

정조의 학문 진흥 정책과 연관이 깊다.

임금이 책가도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이자, 고관대작들도 그 뜻에 부응했다.

 

당시 귀한 분들은 앞을 다투어 집안의 벽을 책가도 병풍으로 치장했다는 기록이

그러한 분위기를 전한다.

또한 규장각 자비대령화원들의 시험문제로 책가도를 그리게 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당시 최고의 화원인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까지

책거리의 제작에 뛰어들었다.

 

이처럼 임금으로부터 시작된 책거리의 관심은 당시 새로운 유행을 이끌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김홍도의 책거리는 차치하고 당시의 책거리조차 한 점도 알려지지 않는다.

지금 전하는 책거리는 19세기 이후의 작품들이다.

19세기 전반에는 화원 이형록과 장한종이 책거리로 이름을 떨쳤다.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된 <책가도병(경기도박물관 소장)> 을 그린 장한종은

궁중의 화원이면서

야담인 『어수록(禦睡綠)』 일명 『어수신화(禦睡新話)』를 지은 작가로도 유명하다.

이야기를 모아 세상을 경계하기 위해 바보 이야기와 음담패설을 많아 수록하였다.

 

그의 <책가도병>은 노란 휘장을 걷어 올리자

그 안에서 서가의 위용이 드러나 보이게 하는 극적인 구성을 취하였다.

서가는 아랫단에 문갑이 달리고 여러 칸으로 나뉘어져 있고,

그 안에는 책을 중심으로 도자기, 문방구, 과일, 꽃 등이 진열되어 있다.

 

당시 서양회화의 영향을 받아 유행한

선투시도법의 공간에 음영법까지 표현되어 중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서가에 있는 도자기는 청나라에서 수입한 분채(粉彩) 도자기가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문방구나 가구는 조선의 것이다.

 

조선후기에는 왕실과 사대부가에서 청나라의 도자기를 수집하는 열풍이 일었는데,

바로 그러한 현상을 이 책거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짙은 갈색의 틀 속에 회색의 천장, 갈색과 회갈색의 벽으로 책장을 표현하여

갈색과 황색의 따뜻한 색조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휘장에는 약간의 음영을 넣어 입체감을 내어 서양화풍의 영향도 엿보인다.

 

이처럼 복잡하고 정형화된 짜임새 속에서 그림 하단 오른쪽에는 두껍닫이 문 한 쪽을 떼어 놓아

엄격한 규범 속에서 숨통을 여는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낙관이 없는데 어떻게 장한종이 그린 것으로 보느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궁중에서 제작된 책거리에는 그림 중 도장을 글자를 새기 부분이 보이도록 슬쩍 눕혀 놓는다.

 

 

이 병풍에서는 왼쪽 끝 위에서 3번째 단에

'장한종인(張漢宗印)'이란 글자가 보이는 인장이 옆으로 뉘어져 있다.

우리는 이 숨겨진 인장으로부터 궁중 책가도(冊架圖)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 장한종의 책가도병 - 

- 2007. 10. 4   

***** 내용 중 그림들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임의로 기주짱이 첨가하기도 합니다 *****

 

 

 

 

 

 

 자수 책가도 8폭병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된 자수 책거리 8폭 병풍의 조사자로 참여하였다.

 

이 병풍은 궁수(宮繡)의 정교함과 자연 염색에서 오는 실(絲)의 은은함으로

눈 설지 않고 정겨웠다. 또 자수의 기법도 기본인 자리수로부터 서책의 경계를 구분한 징금수,

책갑의 측면에는 칠보수와 매듭수, 두루마리와 붓 등에는 평사누름수와 이음수,

와문과 당초문에는 깃털수와 느낌수 등등으로 감탄이 절로 나지만

그보다도 그림의 곳곳에 퍼즐처럼 숨어 있는 화자(畵者)의 뜻을 살피는 게 더욱 재미있었다.


책거리 그림은

취재(取才)의 과목이 된 궁중회화이면서도 민화적 기능을 가진 특이한 회화 형태이다.

조선후기의 이러한 그림들은 김홍도, 이윤민, 이형록(이택민)과 같은 화원 화가들의 작품이 알려져

있는데, 이 병풍은 자수이어서 운필을 살필 수 없었지만

대체로 통도사성보박물관 수장의 이형록의 책가도와 견주어볼 때 비슷한 점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자수책거리 8폭병> 1-4폭, 19세기, 견본자수, 각 폭 163.0×41.0cm, 개인소장

<자수책거리 8폭병> 5-8폭


경물의 내용을 살펴보면 화면 향좌로 부터 향우로 펼쳐진 양상이

대체로 소년시절부터 노년시절로 전개되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즉 1폭에서 8폭까지가 각기 연령적으로 10대로부터 80대까지의 기원, 성취 등을 표현한 것으로

화자의 작의(作意)를 읽을 수 있었다.


향좌의 첫 폭의 시계는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의 시간의 중요성,

수선화(水仙花)는 수선(修善)을 의미하면서

소년시절 학문에 전념하고 선행을 쌓는 10대를 은의적으로 표현하였으며,

 

둘째 폭에서의 자연석 벼루는 연마 또는 도야(陶冶)해야 하는 학문을,

도자병의 용문(龍紋)은 입신으로 20대의 과거급제로 등룡(登龍)하는 성취의 염원을 나타낸다.

 

셋째 폭에서의 다듬어진 벼루는 학문의 성취를 나타내고,

은 능서불택필(能書不擇筆)로 정진되어가는 30대를,

 

넷째 폭의 산호(珊瑚)는 벼슬살이로서의 임금의 산호만세(山呼萬歲)로

벼슬살이를 하는 40대를 상징한다고 보여진다.

 

다섯째 폭에서의 정당(旌幢)은 정정당당(正正堂堂)한 앞길을,

공작깃은 공작(公爵) 즉 높은 관직을,

각 폭에서의 보병(寶甁)은 의미상 보평(保平)을 상징한 것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일곱째 폭에 부젓가락과 여의 등이 있는데

부젓가락인 화적(火箸)은 화적(禾積), 화적(貨積)의 뜻으로 50대에는 ‘재물의 번창’을 의미하며,

여의(如意)는 공자의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내용과 연관되어

70대의 거리낌 없는 복락으로 표현되었다.

 

마지막 폭의 불수감과 석류는 자손의 번창을 가문의 규합 등으로 나타내고 있다.

 


우리의 책거리는

일반적으로 중국의 청공도(淸供圖), 다보각경(多寶閣景) 등에서 유래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지만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기원과 염원을 담아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따라서 그림을 들여다보면 살펴본 만큼 그림 속의 뜻이 배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명귀가 새삼 되새겨진다.
- 문화재청 부산국제여객부두 문화재감정관실 이현주감정위원

- 문화재칼럼, 2008-03-24

 

 

 

 

 

  책거리(책가도) 

 

 

독서인이 관리이며 정치가이고 예술가이기도 한 한자문화권에 있어 독서는 생활 그 자체이기도 했다.

책이 있는 방은 향기롭다.

책은 인류의 예지가 고스란히 담겨 시공을 초월한 만남을 가능케 하는 타임머신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우리는 단위 면적당 가장 많은 책을 발간한 자랑스런 기록도 갖고 있다.

비록 관직에 있지 않더라도 도를 닦고 덕을 함양하기 위해,

그리고 산림 가운데 처하며 제자를 가르치기 위해서 책 읽는 낭랑한 소리는 끊이지 않았고

이를 나타낸 그림이 한둘이 아니다.

또한 독립된 주제로 책이 가득 꽂혀진 서가를 나타낸 그림이 있다.

 

우리의 옛그림 중에서 같은 한자문화권인 중국이나 일본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의 하나로

<책거리> 그림을 들 수 있다.

갑(匣)이 다양한 여러 책들과 문방제구(文房諸具) 및 완상용 골동품들을 함께 나타내

여러 폭으로 된 병풍으로 꾸민 이들 그림은 '책거리'란 명칭 외에도

<책가도(冊架圖)> <서가도(書架圖)> <문방도(文房圖)> <책탁문방도(冊卓文房圖)>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그림에 대한 조명은 민화연구가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민화의 범주에서도 즐겨 그렸지만

어엿한 전문화원들에 의해 궁중의 장식화에서 시작된 것으로 여겨진다.

 

문헌자료에 의할 때 김홍도(1745-1806 이후)와 같은 거장도 이 분야에 손을 대었으며,

이윤민(李潤民, 1774-1841), 이형록(李亨祿, 1808-? ) 부자가 책거리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이 그림은 19세기에 정형이 이루어진 바 오늘날 전래된 책거리들에서는 그 이전 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책거리에서 보이는 여러 칸으로 구성된 대형의 서가는 조선에 있어 그 예가 드물다.

또한 등장되는 고동기(古銅器)나 도자기들은 중국의 것들이다.

비록 그림 내 개별소재는 철저히 중국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이와같은 그림이 중국에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이를 화려하고 짙은 채색을 사용해 사실적으로 정확히 나타냈다.

원근법 및 명암법의 구사가 두드러졌다는 점에서

서양화 기법의 수용이란 측면에서 크게 중시되며 제작시기도 암시된다.

 

그림에 따라서는 서가의 등장없이 책상에 책 등 각종 기물을 쌓거나 문자도와 결합한 것들,

또한 여러 소재를 단순히 나열하거나 때로는 추상미까지 보여주는 것들도 있다. 

 

좌우 대칭을 이루는 서가는 세로 3단으로 칸 지워져있고,

중간층은 책의 등장없이 여러 종류의 향로 등 고동기와

합, 병, 꽃병, 주전자, 잔 등의 기명(器皿)들이 그려졌다.

화사한 채색에 중심에서 상하좌우로 펼쳐지는 방사선형의 구도를 보여준다.

그런 화가 이름은 화면에 나타나 있지 않으나 솜씨와 기량으로 보아 일급 화원이 그렸음이 분명하다.

간혹 이와같은 썩 훌륭한 책거리 중에는

화면에 나온 눕혀진 도장으로 화가이름을 슬며시 드러낸 것(隱印)들도 있다.

 

왕실의 장식병풍에서 출발한 책거리는

중국의 다보각(多寶閣)이나 다보격(多寶格)과 같은 목가구와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들은 서화골동 등 진귀한 유물을 넣는 가구이다.

우리에겐 이를 평면화한 그림으로 대용한 듯 여겨지며,

중국에선 이를 하나의 독립된 주제의 그림으로 옮기지 않았다.

이 계열의 그림을 중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책거리에 대한 관심은 서양인들에게로 옮겨져 이에 대한 연구업적이 발표되었다.

수요층의 확대로 조선말에 이르러선 민화로도 많이 제작되었다.

지역적 특징을 보이는 것들도 있으며,

진채(眞彩)만이 아닌 수묵으로 그린 예 등 다양한 양식을 이룩했음을 알려준다.

 

흔히 수렵도가 무(武)의 상징임에 비해, 책거리는 문(文)의 상징으로 보기도 한다.

 

이들 모두는 중국식 복색, 중국의 기명들이 등장되지만

중국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양식을 이룩한 점에서 크게 중심된다.

학문을 숭상하는 유교국가인 조선이 창출한 가시적인 조형예술로

값진 문화유산의 하나로 선뜻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 이원복 <나는 공부하러 박물관 간다> 효형출판 pp124-127

 

 

 

 

 



 

 

 

- Mis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