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듬어보고(전시)

[서울시립미술관] 불멸의 화가, 반 고흐 展

Gijuzzang Dream 2007. 12. 1. 00:57

 

 

 



 

 

 

 


 [불멸의 화가 : 반 고흐 展]  


 

                              전시일정 : 2007년 11월 24일 ~ 2008년 03월 16일
                              전시장소 :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관람시간

휴관일

화 - 금

오전 10:00 - 오후 9:00

토, 일, 공휴일

오전 10:00 - 오후 8:00

전시설명

(도슨트)

화 - 금

오전 10:30 11:00

오후 1:00   3:00   5:00   7:00

10:30

어린이를 위한 전시설명

토, 일, 공휴일

오전 10:30 11:00

오후 1:00   5:00   6:30   7:00

관람요금

성인

12,000원

청소년

10,000원

학생할인권지참 : 1,000원 할인

어린이

8,000원

특별할인 : 초중고 교사

9,000원

단체(20인 이상)

각 2,000원 할인

 

 

 

(1) 전시 안내

 

예술가로서 가난과 좌절로 점철된 쓰라린 인생여정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마감한 비운의 화가 반 고흐는 창작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독특한 화법과 내면중심의 표현력으로 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가장 위대한 화가로 여겨질 뿐만 아니라 영혼 구도적인 강렬한 작품으로 사후 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대중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화가이다.

 

10년이 채 안되는 짧은 시간동안 그가 내뿜었던 광적인 예술 세계, 끝없이 감내해야 했던 가난과 고통의 삶의 드라마, 그리고 사후 기록적인 판매 가격을 올리며 세기를 초월해 인류에게 가장 인정받는 예술가로 남은 반 고흐의 신화들은 후대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귀감이 되어왔으며, 보는 이들의 가슴 속을 파고들어 진한 감동과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비단 그가 직면했던 삶의 역정에 대한 논점을 뒤로 하더라도, 그가 당시 아카데미즘이나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화풍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며, 정치적이거나 계산적이지 않은 채 본질적인 정신세계를 직시하여 평생 본연의 감정에 기반하고 있는 작업을 해왔던 점, 이것이 바로 반 고흐가 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작가로 숭배되는 이유일 것이다.

 

전 세계에 남아있는 반 고흐의 작품 절반 이상을 소장하고 있는 반 고흐 미술관과 크뢸러-뮐러 미술관으로부터 엄선한 유화작품 45점과 드로잉 및 판화작품 22점, 총 67점을 선보이는 이 전시는 국내 초유의 회고전일 뿐만 아니라 1990년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에서 열린 작가 백주기 전시이후 사상 최대 규모로 <아이리스>, <자화상>, <씨뿌리는 사람>,<사이프러스가 있는 길> 등 반 고흐 예술의 진수를 보여줄 걸작들이 전시된다.

 

반 고흐의 시기별 대표작들을 한데 모은 이번 전시는 국내 최초이자 최대 규모다. 반 고흐의 유화 대표작 45점과 드로잉과 판화 22점 등 총 67점을 선보이는 전시는 1990년 작가 사망 100주기를 기념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이후 최대 규모로 보험가액(작품 평가액)만 총 1조 4,000억원에 달하는 메가톤 급이다.

출품작은 반 고흐가 남긴 작품 879점의 절반가량을 소장하고 있는 네델란드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과 오텔로에 있는 크뢸러 뮐러 미술관에서 빌려 왔다.

반 고흐 미술관 소장품 중 5대 걸작으로 손꼽히는 파리 시절의 <자화상(1887)>과 생레미 요양소에서 그린 <아이리스(1890)>는 보험가액만 각각 1,000억원에 달하는 고흐의 대표작이다. 특히 '아이리스'는 반 고흐 미술관에서 한번도 해외에 반출된 적이 없는 귀한 작품이다
크뢸러 뮐러 미술관이 대여한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사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 1890)>, 밀레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평가되는 <씨 뿌리는 사람(1888)>, <우체부 조셉 룰랭(1889)> 등도 반 고흐의 손꼽히는 대표작이다.

 

 

이번 전시는 반 고흐 작품의 탄생과 변천과정을 손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연대기 순으로 전시가 구성되어 있다.

 

가난한 농민사회의 처참한 생활상을 화폭에 담으며 미술을 통해 인류애를 실현코자 화가의 길을 택한

초기 네덜란드 시기(1881-1885)부터,

처음으로 인상파의 빛을 발견하면서부터 자신의 화풍의 기틀을 마련한 파리 시기(1886-1888),

이상향을 꿈꾸며 색채의 무한한 신비를 마음껏 구현한 아를르 시기(1888-1889),

불타는 예술혼을 자연의 묘사를 통해 분출하던 생레미 시기(1889-1890),

그리고 생의 마지막을 장식한 70일간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 시기(1890)로 나뉘어

시기별 대표작들이 전시된다.

 

 

 

파이프를 문 귀를 자른 자화상

1889년 1월 / Chicago Collection Leigh B. Block United States

 

그가 자살했을 때까지, 반 고흐라는 이름과 예술 세계는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생전에 단 한점의 그림이 팔렸을 뿐이라 한다. 반 고흐 생전에 팔린 유일한 작품 <붉은 포도밭, 1890년>의 값은 400프랑이었다.   

 

그는 1888~90년에 파리의 앵데팡당 미술전람회에, 그리고 1890년 브뤼셀에서 그림 몇 점을 출품했고,

그가 죽은 뒤 1891년에는 파리와 브뤼셀에서 그를 기념하여 몇 점 안되는 그의 작품을 전시했을 뿐이다. 그의 개인전은 1892년에야 열렸고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에 대한 비평은 단 1번밖에 나오지 않았다. 

 

1901년 3월 17일, 파리. 베른하임 형제의 화랑에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전시회가 열렸다. 내걸린 작품은 모두 71개. 월말까지 2주간 이어진 전시회는 예술의 도시 파리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불우했지만 불멸의 화가’라는 평가가 이 때 나왔다.


열정과 절망ㆍ가난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11년 만에 열린 파리 전시회에서 다져진 반 고흐의 명성은 암스테르담(1905년), 쾰른(1912년), 뉴욕(1913년), 베를린(1914년)으로 이어졌다. ‘반 고흐 신드롬’ 속에 유족(동생의 미망인과 조카)들은 돈방석에 앉았다. 유명세(브랜드 파워)와 시간이 예술품의 가치를 증식시킨 셈이다. 예술과 돈, 고상함과 천박함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둘의 관계는 밀접하다.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은행원들이 모이면 예술에 대해 말하고 예술가들은 돈에 대해 얘기한다’는 말처럼.

이처럼 반 고흐의 사후 그의 영향력은 인상주의, 야수파와 추상주의, 표현주의에 걸쳐 거대한 것이었으며, 20세기초부터 주로 다른 화가들에 의해 명성을 얻기 시작한 뒤 그에 대한 평가는 끝없이 높아져가고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귀감이 되어 오고 있다.

 

“형의 노고는 헛되지 않을 것이오... 난 미래 사람들이 형을 이해할 거라 확신하오. 문제는 그것이 언제냐 하는 것이오.” 동생 테오의 예언처럼, 21세기에도 그의 붓 터치 속에 살아 숨쉬는 듯한 예술정신이 현대인들의 감수성을 일깨우며, 그가 내뿜었던 광기의 불꽃은 꺼지지 않은 채 진정한 영웅으로서 반 고흐의 신화는 계속되고 있다.

- 총 67점 (유화 45점, 종이작품 22점) 전시

 

 

(2) 작품 설명

 

자연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변한다. 봄이 되면 새싹이 나고 그 싹이 자라 여름에는 세상이 온통 녹색이 된다. 하지만 가을이 되면서 잎의 색은 조금씩 노랗게 변하고, 결국 겨울엔 가지만 앙상하게 남는다.

그런데 여기, 평생을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처럼, 가장 추운 계절에 스스로를 불태우는 불꽃처럼 살았던 화가가 있다. 그의 이름은 빈센트 반 고흐. 세계적적으로도 최고의 명성을 가진 화가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외국 화가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서울 시립미술관 "반 고흐" 전시는 10년 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면서 그가 남긴 불후의 명작들을 한자리에 모은 국내 초유의 회고전이다. 또한 좀처럼 접하기 힘든 반 고흐의 데생 작품도 만나 볼 수 있다. 

 


 ‘네덜란드 시기(1880~1885)’  

반 고흐는 ‘인물화’에 집중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진실 된 모습을 그리는 것이 화가의 의무라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 뉘넨 시기의 작품 대부분이 인물화이다. 특히 <슬픔>이란 석판화 작품은 어느 창녀를 그린 작품이다. 그녀는 나체로 의자에 앉아 양 팔에 고개를 파묻고 있다. 늘어진 가슴과 뱃살, 슬픔이 느껴지는 드로잉선이 그녀의 심리 상태를 보여준다. 인물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지만 대상의 몸에 대한 표현만으로 슬픔이란 감정을 훌륭히 표현해낸 작품이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영향을 깊이 받았던 반 고흐가 네덜란드의 가난한 사람들을 그리던 때로 대표작이 <감자 먹는 사람들(1885년)>이다.

이번 전시에는 그것과 비슷한 석판화가 오고, 유화  <베틀과 방직공(1884년)> 등이 소개되고 있다. 

 

 

 

Sorrow(슬픔)
1882. 11 / 38.5 x 29 cm / Van Gogh Museum (Vincent van Gogh foundation)
 

"인생의 고통이란 살아있는 그 자체이다" 라고 말했던 고흐가 화가로서 활동한 시간은 10년 정도지만 4년의 기간은 수채화나 데생을 그리는 습작 기간이었다. 엄청난 그림을 남기고 갔지만 누드를 그린 자료는 그리 많지 않다. <슬픔(Sorrow)>은 1882년에 그린 두 개의 누드 드로잉인데 그의 누드 중 가장 알려져 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한때 열렬한 동정심으로 청혼까지 했던 거리의 여인 크리스틴이다. 29세의 고흐가 헤이그에서 만난 거리의 여인 크리스틴(시엔)이라는 여인은 재봉 일을 하면서 매춘으로 부수입을 올리면서 살고 있었다. 반 고흐를 만났을 때에는 미혼모인데다가 낫지도 않는 고질적인 성병에 걸려 있었으며, 또 다시 누군가의 아이를 임신한 채 버려진 최악의 상태였다. 그런 그녀를 반 고흐는 내버려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그녀를 그리면서 반 고흐는 그 어느 것으로도 치유할 수 없을, 생의 바닥에 주저앉은 인간의 좌절을 보았다고 하는데, 화가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간의 감정을 그려야 한다고 믿고 있던 그는 그녀를 본 순간 비로소 슬픔이라는 감정이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하고 공감하였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굶주림에서 해방을, 어떻게 하면 의지할 데 없는 그녀를 돌봐줄 수 있을까, 하며 테오에게서 오는 생활비를 쪼개 그녀를 먹이고 입히고 하지만 결국 시엔의 가출과 생활고로 막을 내리게 된다.

 

동생 Theo(테오)에게...

"편지에 동봉한 그림은 내가 그린 드로잉 중 가장 잘 된 작품이라고 생되어 너에게 보낸다. 모델을 앞에 놓고 완성시킨 것은 아니지만 모델을 보고 직접그린 것이다. 스케치 할 때 똑같은 윤각을 얻기 위해 밑 종이 두 장을 깔고 그리느라 아주 힘이 들었어. 보드에서 드로잉을 떼면 동일한 그림이 밑 종이들에 프린트되지. 이 두 개의 밑 종이에 첫 번째 작품에 따라 즉석에서 완성을 시켰어."  라고 드로잉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적어 보냈다. 

 

 

 베틀과 방직공(1884년)

 

고흐는 1880년 27살이 되어서야 화가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까지 그는 그가 시도했던 화상이나 전도사 일에 모두 실패해 삶에 대한 의욕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였다. 평생의 후원자가 될 동생 테오의 권유대로 화가 일을 시작한 그는 원래부터 갖고 있었던 사회주의적 가치관대로 서민들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렸다. <베틀과 방직공>에서 방직공은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직물을 짜내고 있다.

그 직물은 바깥에서 비추는 빛으로 환히 빛나는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자아내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바깥의 환한 빛과 베틀에서 짜지는 파란 옷감의 대비. 빛과 어둠의 대비가 강렬하게 그려진 작품이다.

 

 

The potato eaters(감자 먹는 사람들)

1885 / 72 x 90 cm / Van Gogh Museum (Vincent van Gogh foundation)
- 이번 전시는 석판화작품이다.
 

동생 Theo(테오)에게...

"자연은 위대하고 고귀하고 진실되다. 인간은 자연 앞에서 평온과 인내를 잃지 말고, 힘써 일해야 한다. 나는 농부 화가가 된것 같아. 정말 그런 분위기야. 앞으로도 농부들을 계속해서 그리고 싶어. 옛 집에 돌아 온것 같아 편안해."

"나는 램프 불빛 아래에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접시로 내밀고 있는 손, 자신을 닮은 그 손으로 땅을 팠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 주려고 했다. "

 

네델란드 시절의 초기 작품중 하나로 손꼽히는 이 그림은 가난한 민중의 현실을 보여주면서동시에 인간애를 담으려 했다. 또한 네델란드에 머무는 동안 자연의 위대함과 진실함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네 생일을 맞아, 늘 건강하고 마음의 평화가 가득하길 간절히 기원한 오늘에 맞춰 유화(감자먹는 사람들)을 보내고 싶었는데, 작업이 잘 진행되긴 하지만 완성 하지는 못했다."

 

이 시기 동안 그는 두텁고 어두운 황토색과 고동색을 사용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개인 날을 보기가 드물고, 대낮에도 새벽녘같이 어둑어둑했던 드렌테의 자연에서 받은 느낌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당한 색깔이었을 것이다. <감자 먹는 사람들>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서 경건한 노동의 의미를 전하고 있다. 춥고 어두운 흙 속에서 수확을 여물어 내는 농부들의 표정에서 고흐가 오랫동안 그리고 싶어했던 삶의 진실이 묻어난다. 

 

 

 

  

  

 

  

 zosqjtmdp dbco (신발)

1886년 / 37.5 x 45cm / Van Gogh Museum (Vincent van Gogh foundation)

Pair of Shoes / 1886년

Three Pairs of Shoes / 1886 / 49 x 72 cm / Fogg Art Museum, Harvard University

Pair of Shoes / 1887년

Pair of shoes / 1887년 /  34.0 x 41.5 cm /

1888년 /  New York Metropolitan Museum of Art

1889년 / 32.5 x 40.5 cm / Van Gogh Museum (Vincent van Gogh foundation)


고흐는 농촌의 풍경과 농민들의 생활을 애정을 가지고 그린 작품들이 많다. 이 작품처럼 낡은 신발을 정물의 소재로 다루었던 화가는 고흐 이전에는 밀레가 있을 뿐이다. 밀레의 서민 감정에 퍽 공감을 느꼈던지 그런 영향을 받은 흔적은 고흐의 많은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한 켤레의 <신발>은 농부의 생활과 그 힘겨운 수고의 전부를 이야기해 주고도 남음이 있다.

고흐는 일생동안 신발 정물화를 총 일곱 점 그렸는데,

그 중 다섯 점은 파리에서, 한 점은 아를르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생레미에서 그렸다.

농부의 신발이라고 생각되는 이 그림은 낡고 투박한 한 켤레 가죽 신발이다. 그의 또 다른 신발 그림에는 탄광촌 '여성 광부'들이 신었던 구두라고 하는데 역시 낡고 허름한 신발들이다. 투박한 신발 속에서 고단한 인생을 살고 있는 농부와 탄광촌 여성 광부들의 힘겨운 시간 시간을 읽어낼 수 있다. 고흐는 본격적인 그림을 그리기 전에 탄광촌의 전도자로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고통이 배어나온 그의 삶과 그의 작품이다.
그는 파리에 나와서도 세련되고 밝은 도시적인 풍물을 그리면서, 고향에 대한 향수처럼 이런 신발들을 그려 네덜란드와 파리 양쪽에 살고 있는 그의 마음의 갈등 같은 것을 대변하여 주고 있다. 색채가 한층 밝아지고 필치가 잘게 되면서 격렬해지고, 배경의 밝은 빛과 어두운 신발이 강한 대비를 이룬다.

 

 


 ‘파리 시기(1886~1888)’  

반 고흐가 파리로 이주해 인상파의 ‘빛’을 발견하면서 초기의 어두운 색채에서 벗어나 밝은 색채를 도입하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반 고흐는 이전(네덜란드 시기)에 대가들의 작품을 답습하면서 익힌 화풍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화풍을 다져나간다. 특히 당시 파리에서 불고 있던 ‘인상파’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면서 인상파 화가로서의 기틀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자화상>과 각종 꽃 그림이 있다. 반 고흐는 2년간의 파리생활 동안 엄청난 양의 자화상을 그리기도 했는데 생애 총 40여점 중 35점이 이 파리 시기에 그린 작품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당시 파리의 풍경, 정물을 그린 작품과 그 중 한 점의 <자화상>을 볼 수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짧고 가는 선을 이용한 얼굴의 디테일한 묘사, 강렬하지만 어딘지 슬퍼 보이는 눈의 표현이 인상 깊은 작품이다. 또한 <파란 화병 속의 꽃>, <수레 국화, 데이지, 양귀비, 카네이션이 담긴 화병>을 비롯한 다수의 꽃 그림을 볼 수 있는데, 이 작품들에서는 굉장히 화려하고 건강한 느낌의 꽃을 만날 수 있다.  

 

 

Self-portrait (
자화상)
1887. 8-9 / 40.9 x 32.7-32.9 cm / Van Gogh Museum (Vincent van Gogh foundation)
 
"테오야, 모델을 구하는 게 아주 어렵다. 그래서 내 얼굴을 그리기 위해 일부러 좀 좋은 거울을 샀다. 내 얼굴색을 칠하는 어려움을 극복하면 다른 사람도 쉽게 그릴 수 있겠지.”

빈센트 반 고흐가 파리에 머물던 시절(1886~87년) 밀짚모자와 작업복을 입고 있는 자신을 그린 작품. 모델비가 없었던 반 고흐는 이 시기에 정물화와 더불어 총 35점의 자화상을 그렸는데, 스스로를 “풍경화가가 아니라 인물화가”라고 불렀던 반 고흐의 사람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

인물화를 통해 반 고흐가 표현하려고 한 것은 대상의 정밀한 모사가 아닌 인물의 내면과 본질이었다. 그는 “세부사항은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인물을 그 본질적인 특징에 따라 단순화할 것”이라며 “대상을 변형하고 재구성한 ‘부정확성’을 통해 융통성 없는 진실보다 더 ‘진실한 거짓말’을 그리겠다”고 공언했다.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강렬한 눈동자에서 이 땅에서의 삶을 예술에 헌납한 자의 불안하면서도 치열한 내면이 비친다.

 

 

 압생트가 담긴 잔과 물병

 1887년 2-3월/ 캔버스에 유채/ 46.3 x 33.2㎝/ 반 고흐 미술관 소장

압생트는 19세기 프랑스에서 즐겨 마시던 술로, 특히 예술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값은 싼 반면 도수가 높았기 때문이다. 빈센트 반 고흐 역시 압생트를 무척 즐겨 마셨는데,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거의 알코올 중독 상태였다”고 털어놓을 정도였다.

동료 화가 툴루즈 로트렉이 ‘르 탱부랭 카페’(1886-1887년, 반 고흐 미술관 소장)에서 압생트 잔을 앞에 둔 반 고흐를 그린 것을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 작품에서 반 고흐는 창문 앞쪽으로 테이블을 배치해 공간감을 살렸다. 그림 속 잔은 창밖의 거리를 내다보며 외로이 술을 마시는 사람을 상징한다. 압생트의 색이 연하다는 점과 물병에서 물을 따라놓은 양을 보아 강한 술맛을 완화시키려고 술에 물을 타서 희석해둔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받은 초기의 작품 중 하나로 파리에 머무는 동안 제작됐다. 날카로운 사선 구도 역시 일본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Parisian novels (파리인들의 소설책)

1887-1888 / 53 x 73.2 cm / Van Gogh Museum (Vincent van Gogh foundation)
 
"졸라, 플로베르, 모파상, 공쿠르 형제, 리슈팽, 도데, 위스망스 등 프랑스 자연주의자들의 소설은 정말 훌륭하다. 그런 소설을 읽지 않는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

.” (여동생 윌에게 보내는 편지)

빈센트 반 고흐만큼 문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미술가도 드물 것이다. 동시대 문학은 그에게 바깥세상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이자 상상력의 젖줄이었다. 그중에서도 자연주의 문학은 특히 그를 사로잡았다. 그는 현대적인 삶을 기록한 프랑스 자연주의자들의 소설을 읽으면서 성경에서 얻었던 것과 같은 영혼의 위안을 얻었다.

테이블 위에 쌓인 20여 권의 소설책을 그린 파리 시기의 이 작품은 반 고흐가 동시대 문학인들에게 바치는 오마주(Homageㆍ경의)다. 소설책을 그린 다른 작품들과 달리 이 그림에는 제목이 가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지만, 당시 프랑스의 보급판 소설들은 대부분 이런 노란 겉표지를 달고 나왔다.

 

 

 

 ‘아를르 시기(1889~1889)’  

이 시기의 화두는 ‘색채의 재발견’이었다. 프랑스 남부의 강렬한 빛을 통해 색채의 신비를 마음껏 구사, 고흐 특유의 빛과 색채가 만개했던 이 시기에는 자신을 떠나려는 친구 고갱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스스로 귀를 자르는 엽기적인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시기 고흐는 ‘눈 앞에 보이는 것을 정확히 표현하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신의 방식대로 강렬하게 표현하기 위해 심취한 시기’였다. 때문에  고흐의 작품 중 걸작이라 평가되는 작품이 이 시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였고, 고흐 자신도 가장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했던 시기이다.

남프랑스의 넘치는 빛을 화폭 위에 두껍게 물감을 발라 표현하는 독특한 양식이 특징으로 <해바라기> 정물화 여러 점과 , <별이 빛나는 밤에(1889년)>, 자신이 살던 방안을 그린 <아를의 반 고흐의 방(1889년)> 등 고흐의 주요 걸작들도 이때 탄생했다.

 

이번 전시에는 <우체부 조셉 롤렝>, <씨뿌리는 사람>, <노란집>, <카뮈유 룰렝> 등 그의 작품세계를 잘 나타내는 많은 걸작 들이 있다. 특히 파란 하늘아래 노란색 집과 노란색 거리(보색 대비)를 절묘하게 배치시키며 고흐 자신만의 개성 있는 작품세계를 보여준 <노란집>, 절정에 도달한 색채 활용의 감각을 느낄 수 있는 <씨 뿌리는 사람>, 그동안 만들어온 인물 표현의 완성을 보여주는 <우체부 조셉 롤랭>이 눈에 띄는 작품들이다. 

 

 

Still Life : Vase with Fourteen Sunflowers (열 네 송이 해바라기)

1889년 / 94 x 73. cm /  Van Gogh Museum (Vincent van Gogh foundation)


임파스토 기법을 사용하여 여름의 열정과 작열하는 태양의 에너지가 느껴지는 여름을 대표하는 반 고흐의 그림 중에서도 황금빛의 태양이 가득한 해바라기,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담아낸 그림이다.

고갱과 함께 쓰게 될 자신의 아틀리에를 장식하려고 고흐는 1888년 여름 아를르에서 몇 점의 해바라기를 그렸는데 그 중 가장 우수한 그림이다.

1886년 파리에 온 고흐는 인상파의 밝은 그림과 일본의 우끼요에를 접하면서 화풍에 많은 영향을 받고 1888년 2월 아를르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약 2년간 고흐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불꽃같은 열정으로 작품에 몰두한다. 그 해 고갱과의 공동작업을 위해 고갱을 1888년 10월 아를르로 초청하지만 성격 차이로 갈등을 겪다 그해 12월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르는 정신발작을 일으켰고 그후 정신발작 증세를 계속 보이면서도 불꽃같이 작품을 그렸다. 그리고 고흐는 그 그림들(해바라기)을 가지고 고갱과의 공동작업실을 장식했다.

 

문국진의 <반 고흐, 죽음의 비밀(예담)>을 보면, 아를의 맑고 뜨거운 햇볕에서 터질 듯이 피어나는 해바라기의 생리와 고흐의 강력한 투지가 운명적으로 만나 이룬 합작품이라 할 수 있는데 반 고흐의 불멸의 투혼이 그대로 투명된 작품 <해바라기> 작품의 가치를 잘 알 수 있었던 고갱은 속으로 찬탄을 금치 못하면서도 겉으로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고흐의 작품에서 대표적으로 속하는 <해바라기>는 고흐작품 분류에서 따로 떼어놓고 이야기 할 정도로 중요한 소재이다. 태양의 분신으로 여겼던 해바라기는 삶의 환희와 희망으로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가난하고 외로운 화가의 눈에 비친 광활한 대지에 강렬한 태양 밑에 눈부시게 피는 해바라기는 하나의 동경이 아니었을까.  

 

 

 

The sower (씨 뿌리는 사람)
1888. 6 / 64.2 x 80.3 cm / Kr?ller-M?ller Museum
 

빈센트 반 고흐의 아를르 시기(1888~1889)를 대표하는 야심작 중 하나.

반 고흐는 ‘농부의 화가’로 불리는 프랑스 화가 밀레를 가장 존경해 견습생 시절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1850년)>을 여러 차례 모사했었다.  

이 그림은 반 고흐가 1885년 네덜란드를 떠난 이후 처음으로 밀레에게 돌아가 자신만의 현대적 색채로 밀레의 주제를 재해석한 작품이다.

반 고흐에게 밀밭은 눈부신 노란색과 선명한 파란색, 밝은 녹색을 탐닉할 수 있는 좋은 소재였다.

가까이 다가서면 진짜 눈이 부신 것 같은 환각이 들 정도로 강렬한 방사형의 태양, 쇠라와 시냐크 등 점묘파의 영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짧게 끊어지는 붓터치,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노란색을 총동원해 보라색과 충돌시키는 극적인 대비…. 반 고흐의 불타는 듯한 감정이 화려하고도 열정적으로 표현된 이 작품은 남프랑스의 태양과 반 고흐의 상상력이 빚어낸 색채 표현의 절정을 보여준다. 

 

  

The yellow house (The street) / 노란 집(거리)

1888. 9 / 72 x 91.5 cm / Van Gogh Museum (Vincent van Gogh Foundation) 
 

“나는 진정한 화가의 집을 만들고 싶다. 비싼 건 아무것도 없지만 의자부터 페인트칠까지 모든 것이 특색을 지닌 그런 집.”

화가들의 공동체를 꿈꾸며 프랑스 남부의 아를로 내려간 빈센트 반 고흐가 세 들어 살았던 라마르탱 광장의 노란 집을 그린 작품이다. 가난한 화가들이 함께 모여 살면 생활비도 아끼고 예술세계도 발전시킬 수 있으리란 생각에서 인상파의 여러 화가들을 초대했지만, 오직 폴 고갱만이 이곳으로 내려와 함께 살았다.

<해바라기> 등 걸작들을 쏟아내며 색채 예술을 활짝 꽃피운 장소인 동시에 고갱과의 불화로 제 귀를 자르며 정신발작의 멍에를 짊어지게 된 곳이기도 하다. 그 자체로 명징한 보색대비를 보여주는 코발트색 하늘과 태양 아래 빛나는 노란집이 반 고흐가 왜 파리를 떠나 이곳으로 왔는지를 짐작케 한다.

 

 

 

 

Cafe Terrace at Night(밤의 카페 테라스)

1888 / 81 x 65.5cm / Kr?ller-M?ller Museum

 

 

   Starry Night over the Rhone Aries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1888년/ 72.5 x 92 cm/ Paris Musee d'Orsay France (이번에는 전시 안됨)

 

테오에게…

나는 지금 아를의 강변에 앉아 있네… 욱신거리는 오른쪽 귀에서 강물 소리가 들리네… 별들은 알 수 없는 매혹으로 빛나고 있지만 저 맑음 속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숨기고 있는 건지… 두 남녀가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고 있다네… 이 강변에 앉을 때마다 목 밑까지 출렁이는 별빛의 흐름을 느낀다네. 나를 꿈꾸게 만든 것은 저 별빛이었을까. 별이 빛나는 밤에 캔버스는 초라한 돛단배처럼 어딘가로 나를 태워 갈 것 같기도 하네.

테오, 내가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타라스콩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듯이 별들의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죽음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네. 흔들리는 기차에서도 별은 빛나고 있었다네. 흔들리듯 가라앉듯 자꾸만 강물 쪽으로 무언가 빨려 들어가고 있네… 강변의 가로등, 고통스러운 것들은 저마다 빛을 뿜어내고 있다네… 심장처럼 파닥거리는 별빛을 자네에게 보여주고 싶네… 나는 노란색의 집으로 가서 숨죽여야 할 테지만, 별빛은 계속 빛날 테지만, 캔버스에서 별빛 터지는 소리가 들리네…

테오, 나의 영혼이 물감처럼 하늘로 번져갈 수 있을까. 트왈라잇 블루, 푸른 대기를 뚫고 별 하나가 또 하나 나오고 있네... 1888년 6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고흐의 편지 

 

 

A Loving Couple(사랑하는 연인) /  Strolling Couple(산책하는 연인)

1888년 /  Van Gogh Museum (Vincent van Gogh Foundation)

 

반 고흐가 실패작으로 여겨 폐기했던 작품 중 일부가 처음으로 전시되어 화제에 올랐던 작품으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반 고흐 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는 이 작품은 반 고흐가 1888년(그가 자살하기 2년 전)에 그린 것으로, 제목은 외신에 따라 <사랑하는 연인 (A Loving Couple)> 혹은 <산책하는 연인(Strolling Couple)>으로 소개되어 있다. 작품 속의 여인은 남자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운하 옆길을 걷고 있다.
반 고흐는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자 폐기하고 연인의 모습 부분만 정교하게 오려 보관했으며, 작품은 2001년 소더비에 경매에서 판매되었다.
원래 그림 전체를 모습을 추정할 근거는 남아 있다. 반 고흐는 전체 그림의 스케치를 그렸고, 동료 화가 에밀 베르나르에게 “선원들이 마을로 애인들과 돌아오고, 도개교(들어올리는 다리)의 기묘한 실루엣이 크고 노란 태양을 배경으로 투사되어 있다”고 설명한 바 있다.
한 연구자는 반 고흐가 그림 중 연인 부분을 주의 깊게 오린 것으로 보아, 그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La Chambre de Van Gogh Arles(아를의 반 고흐 방)

1889 / 72 x 90 cm / Van Gogh Museum (Vincent van Gogh foundation)
 
 "나는 이곳을 정말로 화가의 집으로 만들고 싶어. 귀중품은 하나도 없지만, 의자에서 그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저마다 특색을 가졌으면 좋겠어. 침대는 시골 사람들이 쓰는 것으로 샀어. 쇠 침대가 아니고 커다란 2인용 침대 말이야. 그것이 있으니까 견고하고 지속적이고 고요한 분위기가 살아나." - 빈센트 반 고흐 -

 

남프랑스 아를의 노란 집에서 고갱과 함께 지내던 시절 고흐의 방을 그린 것이다. 이후 생레미 시절에 그는 이 원본 그림을 토대로 두 점의 복사본을 제작하였는데, 하나는 파리 오르세미술관에, 또 하나는 미국 시카고 현대미술관에 각각 소장되어 있다.

실내에서는 그의 취향에 맞는 몇 가지의 가구를 볼 수 있는데, 나무로 된 침대와 의자 등의 가구는 농부들이 쓰던 튼튼하고 커다란 것들이고, 벽에는 자신의 그림이 여러 점 걸려 있다. 그 밖에 가구다운 가구가 없는 소박한 침실은 고흐의 성격과 가난한 아를 시대의 생활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고흐는 자신의 방을 그리면서 유독 색채의 구성에 집착하였다. 보랏빛 벽과 노란색 침대와 의자, 진홍색 이불과 파란색 세숫대야 등 현실과 거리가 있는 날카로운 색채들이 방안에서 밝게 빛난다. 그림자나 미묘한 음영은 무시되었고, 붓으로 거칠게 칠해진 색은 강렬하며, 전체적으로 보색의 대비가 두드러진다. 공간은 의도적으로 재구성되었고, 소실점을 향해 좁아지는 마룻바닥의 선은 가구들을 끌어당기고 있는 것 같다. 

 

                                                

 

Vincent's Chair with His Pipe (고흐의 의자)

1888.12 / 93 x 73.5 cm /  London National Gallery  United Kingdom

 

 

 

Gauguin's Chair (고갱의 의자)

1888.12 / 92.5 x 72.5 cm / Amsterdam, Van Gogh Museum

 

네델란드 시절에 그린 신발과 함께 의자를 모티브로 한 이 그림도 고흐 특유의 것이다. 서민적인 냄새가 물씬 나는 이 한 개의 의자를 통하여 항시 거기에 걸터앉는 주인의 성품과 생활을 느끼게 하는 훌륭한 작품이다. 고갱과의 공동생활이 시작된 이래 그는 두 개의 의자를 그렸다.

먼저 그린 것이 이 작품(고흐의 의자)인데, 자신의 의자를 햇빛 아래에서 그렸고, 뒤에 그린 것은 고갱의 의자인데, 그것은 램프의 빛으로 그렸다. 고흐의 것은 건장하고 소박하며, 고갱의 것은 유순한 곡선으로 그렸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두 개의 의자는 아주 대조적인 두 사람의 성격을 암시하고, 마침내 비극으로 끝나는 공동 생활의 운명을 상징하기라도 하는 것 같다. 간단한 의자 하나를 그리는데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성격이나 생활까지도 묘사하는 그 감수성을 엿보게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인정을 받고자 원했던 것처럼, 고흐는 고갱에게도 인정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고갱의 강한 성격으로 이것이 실패하자, 그에 대한 강한 증오의 감정에 사로잡혀 그를 공격하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사랑과 증오의 감정이 고흐로 하여금 고갱의 빈 의자를 그리게 했다고도 말한다.

 

조용훈 청주교육대 국어과 교수는 <탐미의 시대(효형출판)>에서

"왼쪽 팔걸이를 지탱하는 다리는 화폭에서 완성되지 못한 채 잘렸다. ... (의자 위의) 촛불은 시나브로 창백하게 여위어 가고 곧 픽하고 쓰러질 것 같다. 그래서 그림은 풍요와 안락함보다 어떤 불길함을 은폐한 듯하다. 의자를 중심으로 묘한 긴장이 형성된다" 고 했다.

그림이 1888년 11월에 완성됐고 고흐가 고갱과의 갈등 끝에 자신의 귀를 자른 것은 그해 12월 23일, 그러니까 고갱에 대한 고흐의 불안심리가 그림에 반영돼 있다고 분석한다.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 / 고갱(Paul Gauguin)의 그림

   Van Gogh Painting Sunflowers

1888/ Oil on canvas/ Rijksmuseum Vincent van Goug, Amsterdam, the Netherlands.

 

또, 이주헌의 <명화는 이렇게 속삭인다(예담)>을 보면,

"반 고흐가 이 그림을 통해 그리고자 한 것은 '반 고흐 없음'이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부재중이 아니다. 다른 의자에 앉아 이 의자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반 고흐의 빈 의자를 바라보는 이는 타인이 아니라 반 고흐 자신이다."

이 그림에서 중요한 점이 바로 현실에서 반 고흐의 부재를 절감하는 이가 타자가 아니고 반 고흐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이주헌은 반 고흐가 그린 또 다른 의자 그림 <고갱의 의자>를 마주보게 배치하여 비교하도록 한다. 그러나 그 의자의 주인은 자신의 부재를 느끼지 못한다. 그의 부재를 느끼는 것은 그의 친구 반 고흐이다. 이렇듯 이 두 의자가 대화를 하고 있다고 상상하며 죽는 날까지 외로웠던 고흐의 마음을 위로한다. 

 

 

 

 

The Starry Night Saint-Remy (별이 빛나는 밤)

1889년 / 92 x 73cm /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US

 

그는 스스로 요청하여 생레미의 정신요양원에 입원한다. 이 시기동안의 그의 그림은 그 동안 보이지 않던 큰 변화를 보인다. 즉, 고정된 물체 속에서 역동적인 힘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세상은 그의 내적인 비전에 따라 경련적으로 형성되고 또 변형되어 화폭 위에 전개된다. 이러한 역동성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소재들 중의 하나가 사이프러스다. 혹자는 고흐의 삼나무를 흙에서 피어나는 불꽃으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하늘로 피어 오를 듯한 사이프러스와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하늘의 구름과 아름다운 별과 달을 그는 자주 그렸다. 그는 사이프러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나무들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만큼 아름다워. 마치 햇살이 눈부신 풍경 속에 검은 얼룩이 찍힌 것 같아."

 

<별이 빛나는 밤>을 보면 별 모양들이 소용돌이를 형성하고 마치 미로처럼 보이는데 하늘 아래 있는 것이 구름인지 파도인지 그리고 그것이 가까워지는 것인지 멀어지는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보는 사람의 의식과 긴장 상태에 따라 얼마든지 가깝고 멀게 보이는 것이다.

나선상과 아랍풍의 당초문양이 소용돌이로 변하고 밤하늘의 별들이 이 소용돌이 안에 말려들면서 선회하는 것 같은 역동감이 보이는 것이 인상적이다. 하늘의 별을 매우 빛나게 그렸을 뿐만 아니라 몇 겹의 빛의 소용돌이가 서로 사행(蛇行)하는 선형(線形)을 그리면서 융합되어가는 모습은 마치 아우라(Aura, 前兆)의 기승인지 아니면 장대한 환상의 감각인지 알 수 없으나 어느 것이라 할지라도 정신병원의 창 너머로 본 하늘을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직접 표현의 동기나 그 의도를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알 수는 없으나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릴 때 자기가 체험한 시각적 전조를 독창적인 자기표현이 하나로 표출한 것은 사실이라 하겠다. 

 

 

뒤집어진 게가 있는 정물

 1889년 1~2월/ 38 x 46.5㎝ / Van Gogh Museum (Vincent van Gogh Foundation)

 

빈센트 반 고흐는 아를르의 정신병원에서 퇴원한 후 그림에 대한 느낌을 되살리기 위해 정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반 고흐가 이 시기 <일본 예술>이라는 잡지에 실린 호쿠사이의 목판화 ‘해초 사이의 게’를 보고 영감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반 고흐는 늘 일본 화가들의 데생기법과 세부를 상세히 묘사하는 그들의 재능을 동경했는데, 그래서인지 이 작품은 게를 굉장히 수준 높게, 해부학적으로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붉은 색과 녹색의 대비가 경탄을 자아내는 이 작품에서 반 고흐는 게의 몸체는 소묘와 같은 붓놀림으로, 배경은 획과 선이 교차하며 흐르는 듯한 붓터치로 표현, 붓놀림에 다양한 변화를 주었다.

뒤집어진 게는 종종 반 고흐의 정신적 피로를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반 고흐는 자신의 위태로운 상황에 대해 발언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인류 전체의 운명과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 이 모티프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Portrait of Joseph Roulin(우체부 조셉 룰랭)

1889. 2-3 / 65 x 54 cm / Kr?ller-M?ller Museum
 

이 그림은 바로 고흐가 그리고자 한 서민의 전형적인 상이었다.

이 그림을 그리고 나서 반 고흐는 “나는 룰랭과 같은 기질의 사내를 본 적이 없다. 그의 음성은 이상하리만큼 순수하고 감동적인 데가 있어 내 귀에는 그의 음성이 달콤하면서도 동시에 애절한 자장가로 들리기도 하고 멀리 울려 퍼지는 프랑스 혁명군의 트럼펫 메아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것이 나의 내면의 가장 선하고 가장 근본적인 것을 개발해 주었다”라고 테오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

 

빈센트 반 고흐가 아를의 노란 집에 머물 때 친하게 지낸 우체부 조셉 룰랭을 그린 여섯 점의 초상화 중 하나. 반 고흐가 정신발작을 일으키자 아를 주민들은 그를 정신병원에 감금하려 했으나, 룰랭의 가족만이 끝내 그의 곁에 친구로 남아주었다. 그는 룰랭뿐 아니라 그의 아내 오귀스틴과 아들 카미유 등 일가족의 초상화를 모두 그렸다.

반 고흐는 이 시기 인생의 무상함을 담는 동시에 개체를 초월한 인간 본질을 담은 초상화를 그리고자 분투했다. 초상화는 그에게 현대 미술의 미래였고, 모델의 영혼을 그리는 초상화가가 되겠다는 그의 꿈은 "힘이 넘치는 수염을 가진 소크라테스 풍의" 룰랭이라는 모델을 만나면서 이루어졌다.

룰랭 가족이 마르세유로 전근을 떠난 후 그린 이 그림은 룰랭의 아내 오귀스틴을 위해 그린 작품. 넉넉한 모성을 지닌 오귀스틴을 매우 좋아했던 반 고흐는 오귀스틴을 위해 배경에 양귀비와 수레국화, 데이지 등 여름꽃을 그려넣었다.  

 
 

우편배달부 죠셉 룰랭의 부인 오귀스틴의 초상

 

 


 ‘생레미 시기(1889~1890)’  

그의 화두는 ‘자연으로 돌아가라’ 이었다. 반 고흐는 이 시기에 위대한 자연을 발견하고 자연과 빛의 형태를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발전시켜 회화를 통한 구원의 길을 모색했다. 특히 고갱과 다투고 자신의 귀를 자른 반 고흐가 생 레미 정신병원에 있으면서 작품 활동을 한 이 시기에 그는 정신적인 고통을 작품 활동으로 위대한 자연의 발견과 색채 회화로 승화시켰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이전에 비해 전체적으로 차분해진 느낌을 주게 된다. 자신이 입원해 있던 정신병원의 정원을 그린 <셍레미 병원의 정원>은 5월의 정원을 대상으로 했기에 녹색의 건강한 이미지이지만, 어딘가 슬픔이 배여 있는, 화창하지만 쓸쓸한 묘한 느낌의 정원을 표현하고 있다.

 셍레미 병원의 정원(1889)

고흐는 프랑스 아를에서 계속적인 정신적 발작으로 힘겨워하다가 1889년 5월 8일 생레미의 생폴 드 모솔 정신병원에 자진 입원한다. 병원에 도착한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 방식으로 미치거나 정신 나간 사람들의 삶을 보면서 병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를 잊어버리고 있다”고 썼다.

생폴 드 모솔 병원의 정원 모퉁이와 남자 환자를 수용하는 북쪽 병동을 묘사한 이 그림은 간결하고 부드럽게 채색된 병원 건물과 물감을 두껍게 바르는 임패스토 기법으로 표현된 풍요로운 5월의 정원이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그림의 오른편엔 여전히 화려한 빛깔의 꽃들이 고흐의 정열과 고결함을 나타내지만 왼편의 건물들은 병약한 노란빛으로 채색되어 있다. 보라색 아이리스와 초록의 키 큰 소나무, 우거진 빙카, 장미덩굴과 라일락 등 만개한 수목들이 화면 밖으로 부풀어오를 듯 생생하고 입체적이다.

이 시기에 반 고흐는 자신의 작품에 이름을 새겨넣는 일이 드물었으나, 이 작품은 스스로 만족스러운 나머지 완성된 작품으로 간주했음을 의미하는 또렷한 서명을 남겼다.

 

 

 Pieta(after Delacroix) / 피에타(들라크루아 모작)

1889. 9 / 73 x 60.5 cm / Van Gogh Museum (Vincent van Gogh foundation)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으론 드물게 종교적인 색채를 강하게 풍기는 이 그림은 프랑스 화가 들라크루아의 판화를 모사한 작품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 똑같이 예수를 그린 화가는 들라크루아와 렘브란트밖에 없다”고 말했던 반 고흐는 생레미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 병실에 걸어두기 위해 이 그림을 그렸다.

반 고흐는 들라크루아의 보색 이론을 좇아 예수의 시신은 밝은 노란색으로,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는 푸른색으로 표현했고, 배경인 하늘과 바위에도 동일한 보색을 사용했다.

붉은 수염을 비롯해 반 고흐의 자화상과 꼭 닮은 예수의 얼굴은 반 고흐가 병 들고 인정 받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고통받는 예수와 동일시했다는 해석의 근거로 자주 인용된다. “종교적 상념은 정신적 고통 속에서 나에게 아주 큰 위안을 준다”는 그의 고백이 아니더라도, 이 생에서의 환난을 자기구원의 빌미로 치환하려는 그의 분투를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올리브 따는 두 인부가  있는 올리브 과수원  

1889년 / 73.3 x 92.2 cm / Kroller-Moller Museum

 

고흐는 생레미에서 15여 점의 그림에 올리브 과수원을 담고 있는데 그 중 11점은 그가 선호하는 캔버스 크기인 30호(약 72 x 92cm)였다.

1889년 가을 고흐는 포도밭을 그리려 했으나 병원 근처에는 포도밭이 없었기에 프로방스 지역의 특징인 올리브 과수원은 좋은 대안이 되었다. 고흐는 이 작품을 1889년 12월에 그렸는데 그림의 구도는 몇 주 전 그린 다섯 점의 올리브 과수원에 대한 연작(괴테보르그 미술관)을 바탕으로 했다. 

 

꽃이 피는 아몬드나무

Branches of Almond tree in Bloom. Saint-Rémy.

February 1890. Oil on canvas. 73.5 x 92.0 cm

Vincent van Gogh Foundation, Rijksmuseum Vincent 


  

  Irises(아이리스)/  May 1889/ Oil on canvas/ J.Paul Getty Museum, Malibu, CA, USA

  

  

 Irises (아이리스)

1890. 5 / 92 x 74 cm / Van Gogh Museum (Vincent van Gogh Foundation)
 

남색 붓꽃(아이리스)과 노란 배경의 대조가 찬연하다. 정신발작을 일으킨 빈센트 반 고흐가 자진해서 프랑스 남부 생레미 지방의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 그린 그림. 병원에서 그린 그림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밝고 평온하다.

 붓꽃은 해바라기와 함께 반 고흐가 즐겨 그린 꽃이다. 1890년 2~4월 신경쇠약증에 시달리며 거의 그림을 그리지 못하던 반 고흐는 5월 각각 분홍색과 노란색을 배경으로 만개한 <아이리스>를 두 점 그리는데, 분홍색 바탕에 그린 작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이 작품은 반 고흐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 “노란색 배경의 붓꽃이 강렬한 보색 대비 덕분에 각각의 색채가 더욱 강조된다”고 썼다. 물감을 두껍게 칠하는 임패스토 기법 때문에 마르는 데 한 달이 걸려 정신병원을 퇴원하면서 갖고 나갈 수가 없었던 이 그림을 반 고흐는 학수고대하며 기다렸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 시기(1890)’  

반 고흐 생의 마지막 70여일의 기간이다. 그는 이 기간 동안 평균 하루에 한 작품 이상을 그렸다고 한다(80여 작품이 남아있음).

<의사 가셰의 초상>을 비롯한 인물화와 풍경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자신의 외로움을 꽃을 그리면서 달랜 <꽃이 핀 밤나무>, 기울어진 농가의 지붕이 독특한 <농가> 등의 작품이 있다.

 

 꽃이 핀 밤나무(1890)

고흐는 생의 마지막 70일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가서 보냈다. 

 그림에서는 나무를 제외한 대부분의 배경이 푸른 빛을 띤다.

고흐의 그림에서 푸른 빛은 환상, 꿈, 몽환적인 것에서부터 밤, 어둠, 죽음, 절망적인 상황에까지

다양하게 느껴진다. 위 그림 또한 마찬가지로 밤나무는 생에의 의지인 녹색 빛깔을 띠고 있으며 고결함의 상징인 흰 꽃을 피우고 있지만 전혀 생기라곤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금방이라도 푸른빛 배경과 동화되어 투명하게 사라져버릴 것 같다. 

 

농가(1890) 

생레미의 정신병원에서 퇴원해 생의 마지막 거처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옮긴 반 고흐는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쓴다.

“오베르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흔히 볼 수 없는 초가 지붕이 아름답다. 특이하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시골 풍경의 진수다.”

짚으로 지붕을 엮은 전통적인 농가는 반 고흐로 하여금 네덜란드의 고향 브라반트를 떠올리게 했다. 북쪽에 대한 회상으로 향수를 앓고 있던 반 고흐에게 농가는 매우 소중한 회화적 주제였으며, 그는 이를 통해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둘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농가의 지붕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느낌을 주지만 반 고흐가 그림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이 오래된 지붕의 시골 초가집이었다. 그는 프로방스의 강렬하고 햇빛 가득한 색채를 일 드 프랑스의 좀 더 추운 기후에 어울리는 녹색과 파란 색조로 대체했다. 그는 스스로도 남쪽 지방에 머무른 경험 덕에 북쪽의 색채를 더 잘 이해한다고 여겼다.

 

  Church at Auvers, The Auvers-sur-Oise (오베르의 교회)

1890 / 34 x 42 cm / Museum of Art, Rhode Island School of Design, Providence, US

 

생레미에서의 생활에 싫증을 낸 고흐는 동생의 추천으로 오베르에 오게 된다. 하지만 오베르에 오게 된 이후부터 그의 외로움은 더 커졌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컸다. 그러나 이 시기는 가장 많은 작품을 낸 시기 중의 하나이다. 결과적인 해석일지는 모르나 이 시기의 그림은 그의 불행한 종말을 암시라도 하는 듯 짙은 어둠의 이미지가 강하다.

오베르의 교회에 나타나는 무거운 하늘의 이미지가 그렇고 까마귀가 나는 밀밭의 하늘이 또한 그러하다. 특히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그 역동적인 이미지만큼이나 불길한 이미지도 크게 느껴진다. 바람에 쓰러질 듯 흔들리는 밀밭과 파도치듯 구부러진 길은 도저히 감내할 수 없는 그의 심리상태를 보는 듯하며, 금방 폭풍우가 몰아칠 듯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에서 불길함이 다가온다. 그 속을 날고 있는 까마귀의 존재가 이러한 느낌을 더욱 증대 시키고 있다.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이 작품을 남기고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정오의 휴식 / 1890. 1 / Paris Musee d'Orsay  

 

 영원의 문에서 - 1882(석판화) / 비탄에 잠긴 노인- 1890(유화)

반 고흐에게 생레미 정신병원에 머물렀던 후반기는 특히 고통스러웠다. 자활의 의지로 자진 입원했지만 발작은 점점 더 심해졌고, 고향 네덜란드가 있는 북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까지 덮쳤다.

이 시기 반 고흐는 네덜란드 시절의 주제와 팔레트로 돌아가 옛 그림들을 모사하기 시작했는데, 이 작품은 그가 1882년 헤이그에서 만든 석판화  ‘영원의 문에서’를 유화로 다시 제작한 것이다.

반 고흐는 이 작품에서 모델의 자세와 전체적인 구도는 황톳빛의 단색 석판과 거의 동일하게 유지하면서, 배경 등 공간 구성에만 작은 변화를 주었다. 보랏빛이 감도는 부드러운 파란색과 황록색 사이에 가벼운 보색 대비를 사용했으며, 석판에서의 각진 선은 보다 둥글게 완화했다.

웅크린 등과 꼭 쥔 주먹만으로 통탄의 슬픔을 자아내는 작품에서 반 고흐가 그린 것은 울고 있는 한 노인이 아니라 인간의 절망이다. 그것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나아지지 않는 자신의 병에 대한 절망이기도 할 것이다.

 

 

  

두 여인이 있는 사이프러스 나무

1890. 2 / Amsterdam, Van Gogh Museum  

 Country road in Provence by night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
1890. 5 / 90.6 x 72 cm / Kr?ller-M?ller Museum
 
빈센트 반 고흐가 생레미 정신병원을 퇴원하기 닷새 전 시작해 사흘 만에 완성한 생레미 시기의 대표작. 반 고흐의 화풍을 특징 짓는 불타오르는 듯한 빠른 붓놀림과 화면에 강한 공간감과 역동성을 부여하는 대각선 구도가 두드러진다.
사이프러스(실편백나무)와 별, 하늘, 구름, 밀밭 등 반 고흐의 핵심 모티프들을 모두 아우르고 있는 이 작품은 그의 많은 그림들이 실제 풍경을 대상으로 한 것과 달리 상상만으로 그린 작품이다.

반 고흐는 고갱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그림을 설명하면서 “아주 낭만적이고 프로방스 냄새가 많이 나는 풍경”이라고 썼는데, 키 큰 사이프러스로 대표되는 프랑스 남부의 프로방스는 반 고흐에게 소박한 행복의 동의어였다. 농사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두 농부와 하얀 말이 끄는 노란 마차,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듯 연기가 피어오르는 초가집 굴뚝. 그 스스로 “과장된 광채로 표현했다”고 밝힌 왼쪽의 큰 별은 그런 소박한 삶에 대한 동경의 표상이었을 것이다. 
 

 

 

 Wheat Field Under Threatening Skies(까마귀떼가 나는 밀밭)

1890 / 103 x 50.5cm / van Gogh Museum, Amsterdam, Netherlands

 

"건강을 위하여 뜰에서 제작을 하고, 꽃이 피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정말 좋은 일입니다. 바다와 같은 넓은 언덕을 향하여 멀리 펼쳐져 가는 보리밭의 그림에 지금 열중하고 있습니다." 고흐의 편지이다. 그는 또한 "저는 완전히 이 보리밭의 대작에 소모당하고 있습니다."라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 보내기도 하였다. 고흐의 최후 3점의 대작 가운데 하나로, 먹구름 낀 날 어두운 폭풍 속에 있는 밀밭 풍경이다. 
당장 비라도 올 것처럼 먹구름 내려앉은 날의 밀밭 정경의 붓 터치는 구름 낀 밀밭의 채색은 굵고 직선이며 강렬하다. 배경의 구름 역시 피어오르는 뭉게구름이 아니라 물이라도 쏟을 듯 낮고 넓게 굳어진 모양이고, 그 아래 까마귀까지도 무리지어 힘차게 나는 모습이 보는 이로 하여금 무겁고 음산하게 만들며, 비장한 마음까지 들게 한다. 이 그림을 통하여 고흐는 그의 마음과 생각을 예고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그림은 1890년 7월7일-10일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가 자살을 시도한 것은 이 그림을 완성하고 난 불과 며칠 뒤였다. 

1890년 7월 27일, 그는 보리밭 언덕에 올라 자기 가슴을 권총으로 쏘았다. 탄환은 심장을 뚫었고 고흐는 상처를 손으로 누른 채, 걸어서 돌아와 조그만 지붕 밑 그의 방에 누워 고통을 참으면서 파이프를 물고, 이틀 뒤인 7월 29일, 동생 테오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가 최후까지 살았던 집이었던 ‘고흐의 집’에서는 현재, 그림의 소재가 되었던 밀대를 팔고 있기도 하다.

 

 

 

 밀 이삭 / 1890년 / 64.5 x 48.5 cm / van Gogh Museum, Amsterdam, Netherlands

이 그림에서 고흐는 전체 표면을 밀 줄기로 채워 특별히 장식적인 효과를 냈는데 이러한 효과가 바로 그가 노렸던 것이었다. 고흐는 풀 하나와 같은 디테일을 연구했던 일본 화가들의 치밀한 정확도와 자연과의 조화 속에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찬양했는데, 식물 모티브를 근접 정물로 그리겠다는 고흐의 결정은 그가 그토록 동경했던 일본 판화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

 

 

The Good Samaritan(after Delacroix)
착한 사마리아인(들라크루아 모작)
1890. 5 / 73 x 59.5 cm / Kroller-Moller Museum 
 

이 작품은 고흐가 아를르의 병실에 머물 때 병실에 걸어두었던 들라크루아의 <피에타>와 <착한 사마리아인>의 석판화를 생레미로 가져가 모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고흐는 구불거리는 선과 짧고 평행한 터치를 사용함으로써 인물에 양감을 불어넣고 풍경에 깊이를 주려고 했으며, 데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도 고흐가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동경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반 고흐의 작품은 유화가 너무나도 많이 알려진 나머지 그의 드로잉 작업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기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의 드로잉 작품들을 보면 단지 연필과 지우개를 이용한 작업들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유화에서 보여주는 독창적인 감각을 발견할 수 있다. 오히려 드로잉이 가지는 순간성, 속도성, 그리고 무채에서 오는 아우라(aura, 전조, 傳兆)를 느낄 수 있다.

 

 

 

 

 

  

 

 

   
“그림 그리는 일은 내게 구원과 같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불행해졌을 테니까.”

1887년 여름, 반 고흐가 한 말이다.

가난과 좌절로 점철된 쓰라린 인생을 보내고 결국 스스로 삶을 마감한 그에게 ‘그림’은 말 그대로 ‘구원’이었다. 

 

 

(3) 반 고흐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

 

◇ 동생 테오 반 고흐(1857-1891)

                                     동생 테오와 '테오에게 보낸 편지'


반 고흐의 유일한 후원자이자 예술적 동지. 파리 화랑의 딜러로 일하며 버는 얼마 안되는 돈으로 형의 생활비를 대고 그림을 계속하도록 독려했다. 반 고흐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테오에게 668통의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그의 복잡한 내면과 그림에 대한 열정, 테오의 형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담겨 있다.
반 고흐의 자살동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동생에게 더 이상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는 게 정설로 전해진다. 테오는 반 고흐가 권총으로 자살 한지 6개월 만에 정신착란으로 숨졌다.
두 형제는 파리 근교의 오베르에 나란히 묻혔다.

 

<반 고흐의 어록…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1872년 8월과 1890년 7월 사이에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668통의 편지에는
그림과 그림그리기의 목표와 지향점 등이 담겨 있다고 한다.



Dear Theo.....(테오에게) 

'더듬어보고(전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나는 풍경화가는 아니다. 내가 풍경을 그릴 때도 그 속에는 늘 사람의 흔적이 있다.

(1882년 3월14~18일)

 

◆ 언젠가는 내 작품을 통해 그런 기이한 사람, 그런 보잘것없는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보여주겠다. 그것이 나의 야망이다.(1882년 7월21일)

 

◆ 풍경이 나에게 말을 걸었고, 그것을 빠른 속도로 받아적었다. 그것은 누가 가르쳐준 방법이나 체계 안에서 습득한 인습적인 언어가 아니라 자연 그 자체에서 나온 언어다.(1882년 9월3일)

 

◆ 나는 이 세상에 빚과 의무를 지고 있다. 나는 30년간이나 이 땅 위를 걸어오지 않았나! 여기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림의 형식을 빌어 어떤 기억을 남기고 싶다. 이런저런 유파에 속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진정으로 표현하는 그림을 남기고 싶다.(1883년 8월4~8일)

 

의욕적으로 일할려면 실수를 두려워해서는 안된다.

사람들은 흔히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 훌륭하게 될거라고 하지. 그건 착각이다.

너도 그런 생각은 착각이라고 말했잖아.
그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의 침체와 평범함을 숨기려고 한다.
사람을 바보처럼 노려보는 텅 빈 캔버스를 마주할 때면, 그 위에 아무것이든 그려야 한다.
너는 텅 빈 캔버스가 사람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지 모를 것이다.
비어 있는 캔버스의 응시, 그것은 화가에게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것 같다.
캔버스의 백치 같은 마법에 홀린 화가들은 결국 바보가 되어 버리지.
많은 화가들은 텅 빈 캔버스 앞에 서면 두려움을 느낀다.
반면에 텅 빈 캔버스는 "넌 할 수 없어"라는 마법을 깨부수는 열정적이고 진지한 화가들을 두려워 한다.
캔버스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무한하게 비어 있는 여백,
우리를 낙심케 하며 가슴을 찧어놓을 듯 텅 빈 여백을 우리 앞으로 돌려 놓는다.
그것도 영원히! 
텅 빈 캔버스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삶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여백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삶이 아무리 공허하고 보잘것 없어 보이더라도, 아무리 무위미해 보이더라도,
확신과 힘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어서 쉽게 패배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난관에 맞서고 일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간단히 말해, 그는 저항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1884년 10월)

 

◆ 진정한 화가는 캔버스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캔버스가 그를 두려워한다. (1885년)

 

펜과 종이를 대할 때처럼 물감을 사용할 때도 부담이 없었으면 좋겠다.
색을 망칠까 싶어 두려워하다 보면 꼭 그림을 실패하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부자였다면 지금보다 물감을 덜 썼을 것이다.
지도에서 도시나 마을을 가르키는 검은 점을 보면 꿈을 꾸게 되는 것처럼,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다.
그럴때 묻곤 하지.
프랑스 지도 위에 표시된 검은 점으로 가듯 왜 창공에서 반짝이는 저 별에게 갈 수 없는 것일까?
타라스 콩이나 루아에 가려면 기차를 타야 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간다는 것이지.(1886년 6월)

 

◆ 그림을 그리는 일은 내게 구원과 같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지금보다 더 불행했을 테니까.(1887년 여름~가을)

 

◆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기를.(1888년 5월)

 

◆ 그러나 언젠가는 내 그림이 물감값과 생활비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도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1888년 10월24일)

 

◆ 나를 먹여 살리느라 너는 늘 가난하게 지냈겠지. 네가 보내준 돈은 꼭 갚겠다. 안 되면 내 영혼을 주겠다.(1889년 1월28일)

 

◆ 요즘은 내가 아프기 때문에 너무 괴로워해서는 안 된다고, 그리고 화가라는 초라한 직업을 흔들림 없이 유지해야 한다고 다짐한다.(1889년 9월5~6일)

 

◆ 화가는 눈에 보이는 것에 너무 빠져 있는 사람이어서, 살아가면서 다른 것을 잘 움켜쥐지 못한다는 말이 나를 슬프게 한다.(1889년 12월)

 

◆ 그래, 내 그림들, 그것을 위해 난 내 생명을 걸었다. 그로 인해 내 이성은 반쯤 망가져버렸지. 그런 건 좋다.(1890년 7월29일 고흐가 사망시 지니고 있던 편지)

 
◇ 매춘부 시엔(1850-1904)
반 고흐의 초기 대표작 <슬픔>의 모델. 1881년 반 고흐가 헤이그에 머물 때 동거한 미혼모 매춘부로 반 고흐의 사랑이 머문 안식처였다. 그러나 반 고흐는 가족들의 반대로 시엔과 그녀의 자식들을 버릴 수밖에 없었고, 시엔은 반 고흐 사후 물에 빠져 자살했다.


◇ 폴 고갱(1848-1903)
반 고흐가 아를로 내려가 화가 공동체를 꿈꾸며 <노란 집>을 구해 작업할 때 유일하게 파리에서 동참한 화가. 경쟁과 조언을 반복하며 열정적으로 작품 활동을 하던 두 사람은 예술에 관한 견해차로 심하게 다투고, 반 고흐가 왼쪽 귀를 자르는 발작으로 이어지면서 결별했다.
고갱이 파리로 떠난 후 프랑스 최대 잡지인 파리마치는 “그들이 함께 지낸 기간은 두 달에 불과했지만 미술사를 바꿔놓았다”고 적었다. <해바라기>, <아를의 방>, <고갱의 의자> 등이 고갱과의 우정 속에서 그려진 그림들이다.


◇ 우체부 조셉 룰랭(1841-1903)
반 고흐가 아를에 머물던 시절 절친하게 지냈던 유일한 친구. 고갱과의 다툼 끝에 귀를 자른 반 고흐를 동네사람들이 미치광이로 몰아 감금하려 했으나, 룰랭의 가족만이 끝까지 그를 돌봐주었다. 반 고흐는 그와 그의 아내, 아들 등 모든 가족의 초상화를 그렸다.

◇ 의사 가쉐(1828-1909)

고흐의 동생 테오는 형이 생레미 요양원을 퇴원한 후 갈 곳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추천했다.

오베르에는 예쁜 시골 서민의 집들이 많았고 밭에는 보리와 밀이 물결치고 있었으며, 조용하고 경관이 아름다워 예로부터 카미유 코로,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1817-78), 오노레 도미에, 폴 세잔 등의 화가들이 이 마을에 화실을 두고 그림을 그렸으며,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그곳 의사 폴 가셰가 있기 때문이었다.

가셰 박사는 그동안 우울증에 관한 논문을 여러 편 썼으며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에두아르 마네, 세잔 등과도 친교를 맺었던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해서 어느 의사보다도 반 고흐를 잘 이해할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그래서 테오는 형이 생레미 요양원을 퇴원한 후 이곳에 가도록 주선했고 1890년 5월 50일 오베르에 도착하게 된다.

가셰는 첫눈에 고흐가 천재성을 지닌 화가라는 것을 알아보았고 이 둘은 대번에 친해졌다.

결국 고흐는 그의 생애를 이곳에서 마치며 죽는 순간까지 그림을 그렸다. 70일간 72점의 그림을 그렸으니 하루에 한 점씩 그린 셈이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마지막 정열을 이곳에서 불살랐다.

 

반 고흐가 마지막 희망을 안고 찾아간 오베르에서 믿고 의지하던 의사, 미술에 안목이 있는 가셰는 화가로서의 예명은 ‘반 리셀(Van Rysel)'이었는데 세잔느를 비롯한 화가들의 친구이자 후원자였으며 반 고흐를 지원하고 그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반 고흐가 자신의 딸 마르그리트에게 연정을 갖자 냉정하게 돌변, 반 고흐 자살의 한 동기가 됐다. 반 고흐의 임종을 지켜본 그는 “반 고흐는 정직한 사람이었고, 위대한 화가였다. 그를 살아갈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그림이었다”고 말했다.

반 고흐는 가셰와 마르그리트의 초상화를 여러점을 그렸다. 마르그리트는 77세로 숨질 때까지 평생 결혼하지 않고 은둔해 살았다.

 


피아노 앞에 앉은 마르그리트(1890) - 의사 가셰의 딸

 


◇ 요한나 반 고흐 본헤르(1862-1925)
테오의 아내. 반 고흐가 죽은 뒤 친척들은 모두 그의 작품을 가치가 없다며 불태워버리려 했으나, 요한나가 보존, 후세에 반 고흐의 작품세계를 알렸다. 요한나는 전시회를 열고 반 고흐의 편지를 책으로 출판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벌여 반 고흐 사후 10년이 안돼 그를 위대한 천재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4) '경매 블루칩' 반 고흐의 그림값은 ?


반 고흐는 37년의 짧은 생애 중 10년의 작품 활동에서 1만5,0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당대 비평가들로부터 "고흐의 색채는 야만적"이라는 신랄한 비판을 받아 생전에 <붉은 포도밭(1888년)>이 1890년 브뤽셀 전시회에서 400프랑(약 30달러)에 팔린 게 유일했다.
반 고흐의 작품은 사후 100년 가까이 돼 세계의 경매가 기록을 갈아치우며 최고 블루칩으로 자리매김했다.

1987년 2월 크리스티 경매에서 작품 <해바라기(1888년)>가 3,900만 달러(약 400억원)라는 최고가로 일본 손해보험사인 손보재팬에 낙찰됐고, 같은 해 11월 소더비 경매에서 <아이리스(1889년)>이 5,390만 달러(약 635억원)에 팔려 최고가를 기록했다.

또 1998년에는 반 고흐가 말년에 어머니의 선물로 그린 자화상 <수염 없는 예술가의 초상(1889년)>은 7,150만 달러(약 657억 8,000만원)에 경매됐다.

 

1990년 <의사 가셰의 초상(1890년)>은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8,250만달러(약 972억원)에 일본 굴지의 제지업체 명예 회장 사이토 료에이에게 낙찰돼 반 고흐 작품 중 최고 경매가를 기록하고 있다.

반 고흐가 친구이자 주치의를 그린 작품 <의사 가셰>의 1897년 매매가격은 불과 300프랑. 그러나 1990년 경매에서 8,250만달러에 낙찰돼 16년간 세계 최고가 예술품의 자리를 지켰다. (현재 1위는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으로 2004년 1억416만8천달러)

 

 

  

Portrait of Doctor Paul Gachet(의사 가셰의 초상)

 1890. 5 / 67 x 56 cm / Auvers-sur-Oise

 

생 레미에서 북쪽의 향수를 느끼기 시작한 고흐는 1890년 5월에 그의 동생 테오의 주선으로 파리 북쪽에 있는 오베르 슈르 오와르에 사는 의사 가셰의 곁으로 갔다 오와즈강을 중심으로 이 지방의 풍경은 많은 인상파 화가들의 근거지가 되어 있었다.

가셰는 고흐를 만났을 때 이미 62세 그 이전부터 도미에, 쿠르베, 마네, 피사로, 귀오멩, 세잔 등과 가까운 교분을 가진 친구였다.

이 작품은 고흐가 그린 3점의 가셰 초상 중의 하나로, 초상 작품의 걸작 중의 하나이다. 파리에서 그린 <탕기영감> 등 아를르의 루랭과 함께 모두 고흐를 잘 이해했던 사람들로서, 그 완성도가 높은 작품들로 남겨지게 된 것은 그들에 대한 고흐의 애정을 잘 나타내어주는 당연한 걸작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의사는 우리들 시대의 침울한 표정’을 가졌다고 고흐는 말하고 있다.

 

 

 

파이프를 든 소년(Garcon a la pipe ) / 파블로 피카소

  1905 / 99.7 x 81.3 cm 

 

2004년 5월 5일 7:00 pm 뉴욕 소더비에서 1억416만 8천달러에 경매됨. 현재 세계 최고가의 기록.

20세기의 천재화가로 불리는 파블로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1905)>이 미술 경매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파이프를 든 소년>은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9300만달러에 낙찰됐다. 여기에 수수료를 포함, 작품 가격은 1억416만8000달러(약 1200억원)에 달했다. 그간 최고 기록은 지난 1990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일본 제지회사 회장에게 팔린 고흐의 <의사 가셰의 초상>(1890년작·8250만달러)이었다. 


반 고흐의 그림 값은 매년 치솟아 소더비는 2002년 자산재평가과정에서 <해바라기>의 감정가를 8,000만~1억 달러로 평가했다.
 

 


(5)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생애

 

  

            13살, 19살의 반 고흐

 

  

  

 

 

 

   

고흐의 작품 활동은 1880년부터 1890년까지 10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 중에서도 다작의 시기는 후기 5년 정도에 불과하다. 정신적 착란 상태에도 불구하고 이 짧은 5년 동안 무려 800점에 가까운 작품을 완성하였다.

 

고흐는 1886년 3월 고향인 네덜란드를 떠나 파리로 간다. 약 2년을 파리에서 머문 후

1888년 2월 남부 프랑스의 아를르에 정착하는데 이곳에서 고갱과의 만남을 갖는다. 그러나 그 만남은 비극적으로 끝을 맺게 되고 고흐는 정신발작을 일으켜 자신의 귀를 자르기까지 한다.

1889년 5월부터 생레미에 있는 요양원에 입원한다. 요양원에 있으면서 더욱 고독해진 그는 1890년 5월 요양원을 떠나 북부 프랑스의 오베르에 도착한다.

일시적으로 정신적 안정을 되찾는 듯 했으나 끝내 이겨내지 못하고 1890년 6월 27일 권총으로 자살하고 만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 1853년 3월30일 네덜란드 준데르트에서 장남으로 출생

- 1857년 동생 테오 출생
- 1869~1875년 구필 화랑의 헤이그ㆍ런던 지점 근무

- 1877년 신학 공부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이주

- 1878년 신학대 입시 낙방 후 벨기에 보리나주 탄광에서 전도사 재직
- 1877~1879년 암스테르담에서 신학 공부. 벨기에 탄광에 전도사로 재직했으나 광부 선동으로 해직,
- 1880~1885년 그림 입문. 네덜란드 에텐ㆍ헤이그 등에서 <감자 먹는 사람들> 등 어두운 색채의 초기작 그림
- 1886~1888년 파리 몽마르트르에서 테오와 함께 살며 인상파 화가들과 교유. 밝은 색채의 <자화상> 등 그림
- 1888~1889년 프랑스 남부의 아를로 옮겨 <노란 집> 등 그림. 고갱과 함께 지내다 심한 언쟁 후 귀를 자름
- 1889~1890년 생레미의 생폴 요양원에 입원. <아이리스> 등 그림
- 1890년 파리 근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옮겨 <까마귀 나는 밀밭> 등 그림

- 1890년 브뤼셀의 20인전에 출품한 <붉은 포도밭>이 4백 프랑에 팔렸는데 이는 고흐 생애 중에 팔린 단 하나의 그림

- 1890년 7월27일 오베르 밀밭에서 권총 자살 시도
- 1890년 7월29일 사망

- 1891년 1월25일 동생 테오도 신경쇠약으로 인한 건강악화로 사망
                         오베르의 조그마한 묘지에 고흐와 함께 묻힘

 

 

 

 
 
 

 - 한국일보, 서울경제, 뉴스컬쳐, 일간지 기사, 반 고흐 展 홈페이지, 기타 등에서 기주짱 종합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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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incent / Don Mcl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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