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장서각 특별전 《조선왕실의 여성》
1. 전시 일정
◆ 전시기간 : 2005. 10.17(월)-11.18(금) / 09: 30-17:00(일요일 휴관)
◆ 장 소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전시문의 (031)707-5880
2. 전시 개요
이번 전시는 장서각에 소장된 자료 가운데 왕실여성의 생애와 문화를 조명할 수 있는 자료로 구성됐다.
일반적으로 왕실여성이란,
위로 왕비로부터 아래로 궁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을 포괄하는 개념이지만,
이번 전시에서는 국왕과 혼인을 맺은 왕비(王妃)를 포함,
귀인(貴人), 소의(昭儀), 숙의(淑儀) 등의 후궁(後宮),
그리고 국왕과 혈연관계인 공주(公主), 옹주(翁主) 등으로 한정했다.
이번 특별전은 혼인을 통해 왕실여성으로 편입된 때로부터
궁궐 안에서의 갖가지 생활과 일생을 마친 뒤 능묘(陵墓)에 안장될 때까지
왕실여성의 일생을 다양하게 살펴보고자 한 것.
이를 위해 이번 전시에는 아래와 같이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 모두 1백여 점의 자료가 소개된다.
제 1주제 - 책봉(冊封)과 가례(嘉禮)
: 왕실여성에 편입되는 절차로서
간택단자(揀擇單子) · 책봉교명(冊封敎命) · 가례의궤(嘉禮儀軌)와
이와 관련된 여러 목록으로 발기(件記) 등이 소개된다.
제 2주제 - 출산(出産)과 안태(安胎)
:왕실후계자의 출산과정을 적은 호산청일기(護産廳日記),
아기의 태를 봉안하는 안태등록(安胎謄錄), 그리고 태지(胎誌) · 태봉도(胎封圖) 등이 소개된다.
제 3주제 - 의례(儀禮)와 행사(行事)
:대비·왕비 등의 축수(祝壽)를 위한 진연(進宴) · 진찬(進饌)에 관한 의궤(儀軌),
그들의 품계나 존호(尊號)를 가상(加上)하는 것에 관한 의궤 및 이들과 관련된 옥책문(玉冊文),
여러 행사와 관련된 복식(復飾) 자료가 출품되었다.
제 4주제 - 교육(敎育)과 여가(餘暇)
:내명부(內命婦)의 질서 속에서 받는 엄격한 교육 문화와
개인의 일상적 여가 문화를 내훈서(內訓書)와 한글소설 · 놀이자료 등으로 소개한다.
제 5주제 - 상장(喪葬)과 추숭(追崇)
:왕실여성의 죽음에 따르는 상례(喪禮)와 장례(葬禮) 절차와 사후 추숭되는 과정을 기록한 의궤를 비롯하여 비지문(碑誌文) · 산릉도(山陵圖) · 원묘도(園墓圖) 등이 전시된다.
조선왕조는 유교를 통한 도덕정치의 구현을 표방했기 때문에
왕실여성의 관념이나 생활도 유교적 이념에 그 토대를 두었다.
특히 내명부의 수장인 왕비는
국모로서 모든 여성의 표상이자 그 지위에 따르는 특권이 주어졌지만,
유교적 예절과 도덕의 준수에 있어서는 누구보다 모범이 되어야 했다.
또, 왕실의 의례를 전승시키고 행사를 주재하는 역할로부터
왕실여성의 일상을 단속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왕비에게 집중된 일상은
왕실여성 전체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의 장서각 특별전은
이러한 조선왕조 왕실여성의 면모를 오늘의 우리 사회에 투영시켜
그 전승 양상과 변화상을 함께 살펴보고
또 이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옛 왕실의 풍속과 문화를
여성이라는 시각을 통해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번 전시에서 장서각 유일본으로 처음 공개하는 것과
왕실의 여성문화를 이해하는데 특별히 주목되는 자료를 볼 수 있게 해 더욱 주목을 끈다.
① 《소령원산도(昭寧園山圖, 18세기 후반)》는
숙종의 후궁인 숙빈최씨(淑嬪崔氏, 1670-1718)의 묘소가 있는 소령원(昭寧園) 일대의 지세를 그린
지형도(地形圖) 형식의 그림이다.
그림의 겉면 제첨에 ‘소령원산도(昭寧園山圖) 삼매 외 이점(三枚 外 二点)’ 이라 적혀 있어
이 그림의 원제목이 ‘소령원산도’ 였으며 모두 3매가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② 조선왕조의 가례의궤중 가장 작성연대가 빠른《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 1627)》는,
인조 5년(1627)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 가례를 담은 기록이며,
영조 이후 가례의궤처럼 일정한 순서가 정해지지 않았으나
조선후기 반차도를 판각으로 찍어 채색한 것과 달리 인물과 의장을 붓으로 직접 그린 점이 이채롭다.
③ 성종의 어머니 소혜왕후 한씨(1437-1504)가 편찬한 여성교육서《어제내훈(御製內訓, 1737)》은,
언행과 효친, 혼례, 부부 등을 한글로 담았으며
이후 여성이 읽을 수 있는 한글이나 국역본 등이 본격적으로 출간되었다.
④ 《순조태봉도(純祖胎封圖, 1806)》는 19세기 초기 지형도의 양상을 엿보게 하는데,
일정 영역을 한 화면에 집약시킨 점과 부감법(俯瞰法)으로 넓게 조망한 점,
그리고 근경에서 원경에 이르는 경물을 아래에서 위로 쌓아올리듯 구축적으로 구성한 점이 특징이다.
⑤ 헌종 14년(1848) 창경궁 통명전에서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1789-1875) 육순을 경축하기 위한
진찬을 기록한《무신진찬의궤(戊申進饌儀軌, 1848)》에서는,
‘현자(絃子)’ 라는 3줄의 현악기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하고,
' 관동무(關東舞)' 기록이 궁중연향에 처음 나타나 음악사적 의미가 크다.
⑥ 특히 왕가의 출산 기록 《호산청 일기(護産廳日記)》를 처음으로 일반인에게 공개한다.
이 일기는 영조의 친모인 숙빈 최씨가 희빈 장씨와 권력 다툼을 하면서
영조를 포함한 세 아들을 출산한 한문 기록이다.
『숙종실록 권27』에
"숙종 20년(1694) 9월에 숙의 최씨가 왕자(영조)를 낳았으므로 예에 따라 호산청 환시의관(宦侍醫官)들에게 상을 내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산실청(産室廳)은 비(妃)나 빈(嬪)이 왕자, 왕손들을 탄생할 때에 임시로 설치되는 기관이며,
호산청(護産廳)은 후궁, 내명부가 해산할 때 설치한 임시기구로 산실청과 같은 직무를 행하던 곳이다.
⑦ 출산과 산후조리에 대한 한글 지침서《임산예지법(臨散豫智法)》은 눈여겨볼 만하다.
<참고> 2005년 1월 26일 동아일보
조선시대 왕실 여인들의 출산지침서 《임산예지법(臨散豫智法)》원본이 처음으로 발견돼
당시의 출산 관리를 그려볼 수 있게 됐다.
가톨릭대학 김호 교수는 최근 발표한 논문 "조선후기 왕실의 출산지침서《임산예지법》" 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김 교수는 “일제시대 수원의 도립병원장을 지냈던 삼목영(三木榮)이 쓴 《조선의서지(朝鮮醫書誌)》에 왕실출산법이 간단히 소개된 적은 있었으나 지침서 원본이 발견된 것은 처음” 이라며 “편저자와 간행년은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순조 이후의 19세기 문서로 추정된다” 고 밝혔다.
임산예지법은 총 9개 항목으로 출산시 산모의 주의점과 태아관리법, 젖먹이는 법 등 구체적인 주의점을 제시하고 있다.
출산을 앞두고 목이 마를 땐 물 대신 묽은 미음을 진상하고, 산모의 소화에 도움이 되도록 기름진 음식, 마른 음식 등도 삼갔으며, 또한, 출산을 돕는 여성에 대한 규정도 있어 산파는 어리고 경박한 여성 대신 나이 많고 유식하고 순한 사람을 골랐다고 한다.
먼저 출산 장소로 소란하지 않고 너무 덥거나 춥지 않은 곳을 골랐으며 만약 더운 날이라면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곳에 창문을 열고 맑은 물을 많이 담아 열기를 막도록 했다.
해산일이 다가오면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미역국과 흰밥을 먹고, 밥을 먹을 수 없을 때는 꿀물을 권하였다. 또 해산달에는 딱딱한 음식·떡·기름진 음식을 피하고 목이 마를 때도 물 대신 맑은 미음을 먹도록 권했다.
산통이 시작될 때의 주의법도 소개했다.
진통을 시작한 산모는 천천히 걸어다니며 골반을 이완시키고 복통이 임박해도 놀라지 말고 가능하면 너무 일찍 힘을 주지 말라고 권했다. 또 사람을 붙들고 천천히 걷도록 하며 너무 허리를 구부리거나 오래 앉아있거나 눕거나 잠을 자지 말라고 일렀으며, 산모의 자리에는 짚으로 된 깔개를 덮고 붉은 부적을 준비해 액운을 쫓았다.
출산 직후에는 산모를 편하게 눕힌 다음 궁녀들이 허리와 다리 부위를 마사지하게 했다.
산후조리 때는 산모의 몸을 너무 덥거나 춥지 않게 하였으며, 미역국은 산모의 출산 뒤가 아니라 출산 전 한달께부터 먹였고, 물도 함부로 마시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출산 후에는 국에 밥을 말아먹는 것으로 시작해 차차 음식량을 늘리고 날 것, 찬 것, 단단한 것은 되도록 먹지 않도록 했다.
신생아는 놋대야에 매화 · 오얏뿌리 · 호랑이머리 삶은 물로 목욕시켰으며,
아이의 목욕물에 저담즙(돼지쓸개)을 조금씩 넣거나 배꼽 처리때 햇솜으로 덮어두라는 지침도 있었다.
갓 태어난 아기의 태독을 제거하기 위해 `주사'라는 광물을 꿀에 개어 태아의 입안에 바르고 보드라운 헝겊에 `황련감초탕'을 적셔 씻어냈다.
김교수는 “당시 천연두의 원인이 입안의 오물 때문이라고 생각해 구강을 닦아냈던 것” 이라며 “오늘날 태아의 입안을 알코올로 닦아내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보인다” 고 설명했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방법에 대해서도 자세히 나와 있다.
처음 산모의 유즙이 모였을 때 매우 아프지만 참고 손으로 서서히 주물러서 유즙을 버리면 젖이 뭉칠 염려가 없으며, 초유를 짜서 버리는 것은 초유 성분이 산모의 더러운 기운이 뭉친 것으로 해석한 결과이다.
또 젖을 먹일 때 처음 나오는 것은 반드시 짜서 버린 후에 먹이고
밤에 자고 나면 역시 젖을 짜버리고 먹이도록 하게 했다. 또 우는 아이에게는 젖을 먹이지 않도록 했다.
김 교수는 “조선시대 왕실에서 수백년간 이어 내려오는 것으로 오늘날 출산을 앞둔 가정에서도 참고할 만하다”고 설명했다.
⑧ 그 외 일상사에서 궁중 여성들은 칠교놀이와 한글소설 읽기 등이 유행했는데,
평생 운세를 점치고 풀이한 「사주편년(四柱編年)」에서는 궁중 여성들의 무속 생활을 엿볼 수 있다.
⑨ 택일의 방법을 설명한 《션택요람》, 궁합법을 나타낸 《상사주초궁합법》등 전시된 무속 자료는
대부분 한글 기록이며,
⑩ 그 외《원자아기씨 안태등록(元子阿只氏 安胎謄錄, 1790)》등도 귀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3. 전시 특강
- 장소 : 대학원 A강의실
(1) 10. 21(금) 오후 2시
이성미(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가례와 궁중연향에 나타난 조선시대 여인들』
(2) 10. 28(금) 오후 2시
김진세(서울대학교 명예교수) 『궁중여인들의 독서문화』
(3) 11. 4(금) 오후 2시
이영춘(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왕실여성의 상장(喪葬)문화』
4. 찾아가는 길
한국학중앙연구원(전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50 (대표전화: 031-709-8111)
- 버스 및 지하철 교통편
▣ 세종문화회관 → 분당행 버스 → 분당 양지마을(우리은행) 하차 → 운중동행(220번) 버스 → 종점(한국학중앙연구원) 하차
▣ 세종문화회관(5500, 5500-2번 버스) → 판교 하차 → 춘풍령 앞 정류장에서 220, 303, 1550-3번 버스 → 운중동(한국학중앙연구원) 하차
▣ 잠실 → 분당행 버스 → 분당 중앙공원 하차 → 운중동행(220번) 버스 → 종점(한국학중앙연구원) 하차
▣ 양재역 환승주차장 또는, 강남역 앞에서 분당행 승차 → 분당 양지마을(우리은행 앞) 하차 → 운중동행(220번) 버스 → 종점(한국학중앙연구원) 하차
▣ 지하철 4호선 인덕원역 하차 → 2번 출구 → 303번 버스 → 한국학중앙연구원 하차
▣ 지하철 분당선 서현역 하차 → 2번 출구 → 운중동행 220번 버스 → 종점(한국학중앙연구원) 하차
▣ 지하철 분당선 수내역 하차 → 2, 3번 출구 → 남향으로 60m 직진후, 분당 다운타운BD 앞에서 운중동행(220번) 버스 → 종점(한국학중앙연구원) 하차
5. <참고> 장서각의 유래와 역사
○ 장서각(藏書閣)은,
1911년 이왕가(李王家)에 의하여 설립된 조선왕실 도서관(李王職圖書館)이다.
1908년 고종 황제는 등극 후 기능이 쇠퇴해가는 규장각의 기능을 회복코자
전국에 산재해 있는 서적들을 모으면서 서고를 신축하여 "장서각" 을 창건하고자 하였으나
일제에 의하여 중단되었다.
조선총독부의 황실령 제34호에 따라 황실의 사무를 관장하는 이왕직관제가 제정된 후
1911년 1월 9일에는 이왕직도서과(李王職圖書課)로,
3월 30일 조선총독부에서는 규장각 등 모든 서고의 서적을 총독부 산하 취조국(取調局)으로
강제 이관 접수시키게 하였다.
6월 19일에는 역대 왕들의 어제(御製) 및 선원보책(璿源譜),
각 군영(軍營)으로부터 모은 구위대(九衛隊) 수장도서, 무주(茂朱)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등,
이관받은 도서들과 계속하여 새로 구입한 서적들을 모아 이왕직장서각을 설치하였다.
한편, 최근 북한의 국가문서고(國家文書庫)와 중앙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적상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 1,763권 900책은 장서각에 소장되었다가
6 · 25전쟁으로 행방불명되었던 것임이 확인되었다.
1915년 창경궁(昌慶宮) 안에 일본식 건물인 장서각을 짓고 모든 서적을 이관하였다.
이때 이관된 도서 내역은
도서가 5,355종 10만 137책이었으며, 기록류가 1만 1730책, 주자(鑄字)가 65만 3721개 71분(盆), 판목 7,501장, 기타 부속품이 12종이었다.
1945년에는 미군정법령 제26호에 따라 구왕궁사무처 장서각이 관리하다가,
1955년에는 대통령령 제1035호에 따라 창경원사무소 장서각이,
1969년에는 문화재관리국(문화재청 전신)으로 이관되었다가,
1978년 6월 3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과 함께 한국학과 인문사회분야의 학술자료를 집중수집하고, 1981년에 한국정신문화연구원(2005. 2. 1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명칭변경)으로 이관되었다.
○ 장서각의 특성은,
주로 왕실관계의 귀중한 자료로 구성되어 있으며,
궁중의식과 행사때 작성된 의주(儀註)와 발기(發記)의 고문서 어제류(御製類) 등의 왕실 관계자료와
도형류(圖形類), 한글궁체 소설류 등을 소장하고 있다.
인수받아 소장중인 장서각 고서, 고문서들은
지금도 소유주체는 문화재청인데 한중연(한국학중앙연구원)이 위탁관리를 하고 있다.
그런데 문화재관리국이 모든 소장 문서를 넘겨준 것은 아니고,
자신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소위 A급 문서들은 '빼돌렸다'한다. 이렇게 빼놓은 문서 수량이 만만치 않으며, 대전의 국립문화재연구소 자료실에는 이들 귀중본이 오동나무 상자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 장서각 전적(典籍)의 기능,
장서각은 주권을 빼앗긴 시대적 상황에서 설립된 기구로서
조선시대 전(殿), 관(館), 각(閣)과 같이 국왕의 자문에 대비하였던 주된 기능은 상실되었고,
다만, 장서의 구성면에서 볼 수 있듯이 왕실에 연관된 자료를 모집 정리, 보존하는 기능에만 치중하여 왔다.
1981년부터는 한국정신문화원이 그 장서를 관리 운영하면서
대부분의 자료가 마이크로 필름으로 촬영되어
귀중자료의 과학적 보존 아래 많은 국내외학자들이 편리하게 이용함으로써 한국학 연구에 기여하고 있다.
○ 장서각의 소장현황(2005년 9월말 현재) : 합 계 - 428,812책
일반도서 = 301,900책 / 문고본도서 18,985책 / 소 계 - 320,885책
장서각 이관고서 = 한국본(42,562책) 중국본(27,313책) 일본본(12,874책) - 82,749책
고문서 = 11,677점
마이크로 필름(24,341롤)
마이크로피시( 3,118장)
○ 보물지정현황
보물 제1128호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疎)》 2卷2帖
보물 제1129호 《대불정타라니(大佛頂陀羅尼)》 1卷1帖
보물 제1130호 《약사유리광여래본원공덕경(藥師琉璃光如來本願功德經)》 1卷1冊
보물 제1131호 《범강경여사나불설보살심지계품(梵綱經廬舍那佛說菩薩心地戒品)》 1卷1冊
보물 제1132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2卷1冊
보물 제1135호 《정사공신조온사패왕지(定社功臣趙溫賜牌王旨)》 1포(鋪)
보물 제1136호 《입학도설(入學圖說)》 1冊
○ 기타 문화재 지정 현황
서울특별시 지정(등록번호 나제 13634-13661호) 1980. 11. 11
일반동산문화재등록 : 정다산전서 등 28종 58책(안춘근 문고)
경기도 지정(등록번호 나3-781-1667호) 1984. 10. 30
일반동산문화재등록 : 역학계몽요해 등 887종 4,491책(장서각 귀중본)
------ 한국학중앙연구원 홈페이지, 신문기사 등 자료들 참고 기주짱, 정리하여 올립니다.
■ Francis Lai / Bill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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