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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능산리 출토 목간 -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立立立

Gijuzzang Dream 2011. 11. 4. 16:21

 

 

 

 

 立立立

 

 

 

 

“망측스럽게….”

2000년 4월 충남 부여 능산리 절터 주변 웅덩이에서 야릇한 유물이 출토됐다.

‘남근(男根)’목간이었다. 길이가 22.6㎝(두께 2.5㎝)나 됐다.

목간의 밑부분은 약간 뾰족하게 다듬었고, 그것도 모자라 구멍까지 뚫었다.

한쪽 면에는 ‘천(天)’자와 ‘무봉(无奉)’자가 서로 방향을 거꾸로 해서 새겨져 있었다.

다른 한면에는 ‘道立立立’이라는 글자가 확연했다.

 

땅을 향해 새겨진 ‘天’은 무엇인고?

또 남근 목간에 ‘立’을 세 번이나 반복한 뜻은?

이것은 ‘세워라(立 · 서라)! 세워라(立 · 서라)! 세워라(立 · 서라)!’라는 뜻이 아닌가.

대관절 이 무슨 망측한 소리인가.

목간이 발견된 곳은

백제 각 지방에서 사비성으로 들어오는 나성의 대문 및 중심도로와 아주 가까웠다.

그야말로 백주대로에서 이상야릇한 목간이 발견된 것이다.

이용현(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은 목간에 새겨진 글씨가 거꾸로 쓴 부분(天)과

제대로 쓴 부분(道立立立)으로 나뉘는 것에 주목했다.

“평상시와 발기 때의 두 가지 상황을 전제로 제작됐다”는 것이다.

“또 있어요. 밑부분 구멍에 줄을 매달아 늘어뜨릴 수 있도록 했고….

뾰족하게 깎아 밑부분을 꽂아 세울 수 있도록 하기도 하고….

마음대로 남근을 세우거나 아래로 축 늘어뜨릴 수 있도록 한 겁니다.”

윤선태(동국대 교수)는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라

‘도양(道)’을 ‘길의 신’으로 해석했다.

백제가 지금의 서울 세종로 격인 중심도로에서 ‘길의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백제인들은 남근목간을 세운 뒤 기도했을 것이다.

“이제 남근이(을) 섰다(세워라)! 섰다(세워라)! 섰다(세워라)! 사악한 귀신과 도깨비들은 썩 물렀거라.”

남근은 나라의 안녕, 그리고 악신 · 질병의 추방 · 예방 등을 위해 숭배되고 신성시됐다.

 

<삼국유사>는 “지증왕의 생식기가 1척5촌(약 45㎝)이나 됐다”고 기록했다.

또 가락국 김수로왕은 “거대한 남근을 낙동강 양쪽에 턱 걸쳐놓을 정도”였단다.

그걸 모르던 길손이 앉아 곰방대를 탁탁 터는 바람에 왕의 ‘그곳’에 커다란 흑점이 생겼다나 어쨌다나.

여하간 ‘길 제사’ 때 ‘세워~세워~세웠던’ 이 남근목간은 조선의 ‘장승’ ‘남근석’과도 맥이 닿아 있다.

이 전통은 도래인의 발자취가 닿은 일본까지 연결된단다.

백제가 뿌린 ‘남근 신앙’이 일본열도까지 영향을 끼친 것이다.

- 이기환 문화 · 체육에디터

- 2011-11-02 경향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능산리절터 출토 ‘목간’

 

문자 새긴 뒤 먹글씨 제작 눈길… 天 · 无 등 기록 제사의식 쓰인 듯

  

 

'목간(木簡)'이란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죽간(竹簡)과 함께 문자 기록을 위해 사용하던

목편(木片)으로 '목독(木牘)' 또는 '목첩(木牒)'이라고도 불린다.

폭 약 3㎝, 길이 약 20-50㎝, 두께 3㎜ 정도의 긴 나무판자에 묵서(墨書)했다.

원래는 대를 갈라서 한장 한장 끈으로 꿰어 사용했지만,

훗날 목편으로 바뀌어 종이가 발명될 때까지 썼다.

한국의 낙랑 채협총(樂浪彩塚)에서도 출토됐는데, 이들 목간에는 ‘논어’(論語)의 단편도 있고,

군대의 조직 · 우편제도 · 교통 및 여러 가지 물품의 이름을 기입한 것도 있어서

그 방면의 연구는 점차 중요시되고 있다.

백제시대 첫 목간은 1985년 부여 관북리 유적에서 발견됐다.

목간은 몇 년전 충남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발견된 목간처럼

운송 시 물품의 수량이나 수취인 등을 알려주는 ‘물품 꼬리표’ 역할을 하기도 한다.

부여 능산리절터에서 출토된 이 목간은

자연 상태의 나무 앞뒷면을 약간 가공하여 만들어서 단면이 원형에 가깝고 기둥모양을 하고 있다.

네 면 모두 글씨가 남아 있는데,

이중 대칭되는 두 면은 새김글씨와 먹글씨, 다른 두 면은 먹글씨 흔적만 남아 있다.

새김글씨와 먹글씨가 남아 있는 목간은

한쪽은 윗부분을 둥글게 깎아 턱을 만들어 끈으로 매달 수 있게 했는데

그 형태가 남근(男根) 모양을 하고 있다.

글씨는 가장 위쪽에 ‘무’(无)가, 그리고 그 조금 아래에 ‘봉의’(奉儀)가 새겨져 있고,

이 새김글씨 아래로 7자의 먹글씨 흔적이 남아 있다.

글씨의 아래는 앞뒷면을 약간 넓게 깎아내고 좌우면도 다듬어서 쐐기 형태로 만들었다.

그 반대면의 위에는 ‘무봉’(无奉)이라는 두 자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천’(天)자가 거꾸로 새겨져 있다.

따라서 전후면 전체 명문 중에서 후면의 ‘천’만이 거꾸로 음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천’자의 방향을 기준으로 본다면 나머지 글씨가 거꾸로 쓰인 셈이 된다.

‘천’을 기준으로 목간을 세울 경우 쐐기 형태의 끝 부분은 아래가 아닌 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쐐기 형태로 다듬은 윗부분에 직경 0.3㎝의 구멍이 뚫려 있는데

이는 ‘천’자를 바로 세운 상태에서 어딘가에 매달 수 있도록 고안된 듯하다.

먹글씨로 기록을 남기는 것이 목간의 일반적인 양상임에 비추어 보아 문자를 새긴 뒤

그 밑에 다시 먹글씨를 남긴 이 목간은 매우 특이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또한 먹글씨에 비해 잘 지워지지 않는 내구성까지 갖추고 있어 선별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봉(奉)이나 거꾸로 새겨진 천(天),

특히 불경을 욀 때의 발어사인 무(无) 등이 새겨진 점으로 보아

새김글씨 목간은 제사 의식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봉의’ 아래 먹글씨를 ‘길 옆에 세우다’는 의미로 판독할 경우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를 지냈던 흔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 김효숙 기자 press1218@daejonilbo.com
- 2010-01-25 ⓒ대전일보사

 

 

 

 

 

 

 

 능산리 출토 남근형 백제목간은 도성신 제사용

 

문 입구 기둥에 설치, 日 도조신(道祖神) 원류
日 목간 권위자 히라카와 미나미 교수, 실물 검토 결과 규명
 

 

 

   

충남 부여 능산리사지(사적 제434호)에 대한 1999-2000년 조사에서 출토된

6세기 중반 무렵 남근(男根) 모양 백제 목간(木簡)은

도성(都城)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은 제의용품이었다는 파격적 견해가 제기됐다.

일본 고대 목간 권위자인 히라카와 미나미(平川南. 63)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교수는

이성시(李成市) 일본 와세다대 교수, 김수태 충남대 교수와 함께

남근형 목간(길이 22.6㎝)을 소장 중인 국립부여박물관(관장 이내옥)에서 

이  유물을 관찰한 결과 도교적 전통에서 유래한 도성제(都城祭)에 사용된 기물이라고 말했다.

도성제(都城祭)란

일본 고대 율령(律令)에는 도향제(道饗祭. 미치아에사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제사의 일종으로,

천황(天皇)이 사는 도성(都城)으로 사악한 귀신이나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히라카와 교수는 "도향제에 관한 규정에서 남근(男根)에 대한 기술은 보이지 않는 대신,

곰이나 소, 사슴 등의 짐승 가죽을 쓰고 있다"면서 "(그러나) 9세기 일본 문헌자료에 의하면

노한 신(神)을 잠재우기 위해 논에 물을 대는 입구에다

쇠고기와 함께 남근을 둔다는 언급이 보이고 있는 점은 주목할 수 있다"고 말했다.

히라카와 교수는 쇠고기나 남근을 제사에 쓰는 것은 도교적 주술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전제하면서,

따라서 이번 능산리 출토 남근형 목간 또한 

신성해야 할 논에 다른 사악한 기운이 유입되는 것을 막고자 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접근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히라카와 교수와 이성시 교수는 이 목간이

첫째, 부여 나성(羅城)의 동문  근처에서 출토됐으며,

둘째, 목간이 남근형이고,

셋째, 무엇보다 이 목간에서 '길가에다가 세운다'를 뜻을 나타내는 '道緣立'(도연립)이라는 문구가

확인된다는 점을  중요한 증거로 들었다.

이 목간은 남근형이라는 형태상의 특이점 외에도

네 면을 다듬어 그 각면에  모두 묵글씨나 새김글씨를 넣었으며,

일부 면에서는 양끝에서 중간을 향해 각각  글자를 써 내려감으로써

결과적으로 글자 방향이 서로 반대되도록 배치하는가 하면, 

일부는 칼 같은 도구로 글자를 새기기도 하고,

다른 쪽에서는 묵 글씨를 쓰고 있어 그 용도에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많은 의문점은 다른 무엇보다

이 목간 제1면과 제2면에서 각각 '道緣立立立'(도연립립립)과 '道緣'(도연)이라는 글자가 확인됨으로써

풀리게 됐다.('道緣立立立'은 종래에는 '道緣立十二'라고 판독했으나 이번 실물 판독 결과 바로잡혔다)
'道緣'(도연)이란 길가라는 뜻이며

'立立立'은 세운다는 뜻을 세 번 강조한  것으로,

이와 같은 형식은 부적과 같은 주문에 지금도 많이 쓰이고 있다고 히라카와 교수는 말했다.

따라서 이 남근형 목간은 당시 백제왕이 상시 거주하는 도성 입구 시설에 문기둥 같은 곳에 매달아 놓음으로써(즉 '道緣立' 함으로써) 도성 바깥에서 사악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는 주술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고

히라카와 교수는 덧붙였다.

히라카와 교수는

"일본에서는 이와 같은 도성신앙(都城信仰)이 근세 이후에는 마을 입구에서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도조신(道祖神) 신앙으로 계승되고  있다"면서

"현재도 특히 중부에서 관동(關東)에 걸친 산간 지역에서는 성행하고 있으며, 더구나 그 중에는 남근을 상징화한 제물이 남아있지만 글자가 있는 것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도조신앙을 일본에서는 조몬시대나 야요이시대에 보이는 석봉(石棒. 돌로 만든 남근)에서 찾았으나,

능산리 목간을 통해 그 원류는 한반도, 특히 백제에 있으며, 여기에서 유래한 도성제(都城祭)에서 발전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성시 교수는 "이 목간으로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 차지하는 백제문자문화의 중요성이

고구려나 신라의 역할에 버금가는 것이었음은 주목되어도 좋다"고 말했다.

 

 

히라카와 교수에 의하면 도성제 신앙과 비슷한 형태는 수전(水田. 논)에서도 발견된다.

즉, 수전으로 물이 들어가는 입구에다 쇠고기와 함께 남근(모양 물건)을 두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나쁜 기운이 논으로 들어가 농사를 망치지 않기를 기원한다는 것이다.

"도성(都城)과 수전(水田)은 구획된 공간이며 왕권의 공간이라는 공통점을 지닙니다.

왕권이 기반이 되는 도성과 수전에서 그것의 안녕을 기원하는 제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제물 혹은 제의용품으로 쇠고기나 남근을 쓴다는 점이 독특한데

이번 능산리 목간을 통해 그 원류가 백제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능산리 목간은 1999-2000년도에 실시된 능산리사지 제6차 조사에서 확인된 것으로

567년에 축조된 능산리 사찰보다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조사단인 국립부여박물관에 의하면 이 목간은 사찰 기단 아래층위의 배수로에서 확인됐다.

능산리에 사찰이 들어서기 전에 묻힌 것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된다.

- 김태식기자, 연합뉴스, 2005년 3월14일

 

 

 

 

 

남근형 백제 목간(木簡)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두고 요즘 생떼를 쓰지만 그 영토욕이 현재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저들은 고대에도 한반도 남부를 일정기간 통치했다고 주장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임나일본부’설이다.

 

일본의 야마토 왕국이 4∼6세기 임나(가야)에 관부(官府)를 두어 직접 통치했다는 이 주장은, 그러나 지금은 일본 학계에서도 대부분 외면한다.

그런데도 일부 극우세력은 ‘임나일본부’ 환상을 버리지 못해, 최근 역사 왜곡으로 지탄받는 후소샤의 검정신청판 교과서에는 임나에 거점을 마련한 야마토 정권이 군사력으로 고구려 남하를 막았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다만 그들도 ‘임나일본부’라는 거짓 용어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다.

딱한 것은, 일본이 제 아무리 어거지를 써도 고대 한 · 일관계에서 무게 중심은 명확히 한반도 쪽으로 기울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는 점이다.

일제가 우리땅을 35년 강점한 동안 그들은 방방곡곡을 뒤졌지만 ‘임나일본부’를 입증할 유물은 나온 게 없다.

반면 한국의 4국(고구려 · 백제 · 신라 · 가야), 특히 백제가 일본에 끼친 영향은 지금도 일본의 국보에, 지명에, <일본서기>를 비롯한 역사서에 넘칠 정도로 남아 있다.

 

그 목록에 하나가 덧붙었다.

충남 부여 능산리에서 2000년 출토된 남근(男根)형 백제 목간이 그것이다.
이 목간은 형태가 특이한 데다 거기에 쓴 ‘道緣立(도연립)’이라는 문구를 해석하지 못해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2005년 3월 14일 국립부여박물관을 찾은 고대 목간의 전문가, 히라카와 미나미 일본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교수의 해석으로 궁금증이 풀렸다.

 

9세기 일본에는 왕이 거주하는 도성으로 사악한 귀신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남근형 제물을 성 입구에 걸어두는 도성제(都城祭) 풍습이 있었으며, 이후 민간에 퍼져 현재도 일부 지방에 남아 있는 도조신(道祖神)신앙으로 이어졌다는 것.

 

히라카와 교수는 ‘道緣立’이란 문구는 길가에 세운다는 뜻이어서, 형태와 문구상 백제의 남근형 목간이 일본 도성제의 원형임에 틀림없다고 강조했다.

이웃해 사는 한 · 일 양국간에 역사 · 영토 분쟁이 없을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 역사를 분명하게 알수록 일본의 생떼가 통할 여지는 좁아진다는 사실이다.

- 이용원 논설위원,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