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冊 <유럽의 책마을을 가다> - 길 위에서 책읽기

Gijuzzang Dream 2011. 11. 2. 23:33

 

 

 

 

 

 

 

 

정국진의 ‘유럽의 책마을을 가다’

 

 

 

자유 · 평등 · 다양성의 세계가 부러웠다

 

 
 

본디 책읽기는 모험이요, 여행인 법이다.

지은이가 언어로 세워놓은 새로운 세계를 답사해나가는 일이 곧 읽기 아니던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거대한 돌로 세운 기념탑도 세월의 힘을 견디지 못하거늘

한낱 언어로 세운 신기루에 열광하는 이유를. 그러나 그들은 보지 못한다.

언어를 주춧돌로 삼아 비로소 가능한 무한한 세계를.

그렇다고 아무나 그곳에 들어설 수 있는 바는 아니다. 기득을 버리는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껏 알고 믿어왔던 것을 고수하려면 왜 새로운 책을 읽으려 하겠는가.

더 나은 것이, 더 아름다운 것이, 더 옳은 것이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이려 여행을 떠나게 마련이다.

그러니, 책 읽는 이는 늘 배교의 가능성을 안고 있는 자들이다.

경배하고 숭배하려 다른 이가 남겨놓은 발자국을 뒤쫓는 무리가 아니다.

미답의 길을 당당히 걷고자 떠나는 셈이다.

영광이 아니라 혼란이 있을 터나, 이를 성장통으로 당연히 여기는 이들이 이 대열에 함께한다.

이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이미 고고학자다.

지은이가 세워놓은 세계를 속속들이 들춰보고 펼쳐보며 시시콜콜 따지니 말이다.

그렇다고 원리와 원칙을 따지는 냉정한 검사의 시선만 떠올리지는 말 것.

거기에는 차라리 에로티시즘에 가까운 면도 있다.

더듬고 보듬으며 생각의 결을 느끼려 하는 욕망이 숨어 있으니.

그러니 그 세계에 발디딘 이들은 행복하다.

현실이라는 땡볕에 지친 영혼들이 여기로 들어와 숨을 고르며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있으니.

정말, 기적이다.

여권을 발급받고 비행기표를 사고 여행지를 물색해 호텔을 예약하는 번거로운 과정이 필요없다.

그냥 책을 펼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나는 지금과 전혀 다른 세계로 곧바로 빠져든다.

이런 여행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책표지를 클릭하시면 창을 닫습니다.여행을 떠나 새로운 세계를 맛본 이들은 다시 여행을 떠나게 마련이다. 이곳에 뿌리내릴 수 없다. 잠시 돌아와 일상을 살아갈 수는 있으나, 저곳을 향한 열망을 꺾을 수는 없다. 신들메를 다시 매고 길을 떠날 수밖에 없다.

 

읽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책읽기를 여행으로 여기는 이는 늘 새로운 책을 찾는다. 다른 사람이 세운 전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그러니, 여행하는 이들이 책 읽는 것만큼 아름다운 풍경은 없다. 힘들고 어렵고 지칠 때마다 책 읽어 힘을 내니, 여행과 책은 궁합이 제대로 맞는다. 책 읽는 이들이 잠시 책을 덮고 여행 떠나는 것도 제격이다. 질서와 현실의 세계에서 신화와 이상의 세계로 건너가는 것에 익숙해 있으니 말이다.

보잘것없는 책벌레로서 꼭 떠나고 싶은 여행이 있었다.

유럽의 책마을이 바로 그곳.

 

책 좋아하는 이들이 한군데 모여 자신들만의 세계를 만들었다니, 어찌 아니 가고 싶겠는가.

세속의 마을은 번지수로 찾아가야 하지만, 그곳은 그러지 않을 터.

말하자면 괴테의 집이나, 셰익스피어의 집, 또는 세르반테스의 집이라 되어 있거나,

문학의 숲, 인문의 바다, 과학의 요지경 따위로 번지수가 매겨져 있을 듯하다.

또한 서가에 책은 켜켜이 쌓여 있을지니,

한밤에는 책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지은이나 주인공들이 마법에서 풀려나 한바탕 잔치라도 벌일 듯싶다.

아니, 어쩌면 그곳은 망명자들의 마을일지 모른다.

더는 책의 가치가 숭앙되지 않는 시대에,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여전히 그 가치를 옹호하는 이들이 모인 은밀한 곳 말이다.

가고 싶은 만큼 상상의 나래만 펼치고 있었는데, 그곳을 두루 다녀보고 쓴 기행문이 있다.

미술평론가 정진국이 쓴 <유럽의 책마을을 가다>(2010, 생각의나무)가 바로 그것.

 일러스트, 김상민기자

 

책마을이라면 옹기종기와 오밀조밀이라는 낱말이 맞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큰 터에 널찍하고 호화로운 건물을 지어놓고 단지라는 이름 붙인 곳이 있을 뿐이다.

무척 문화적이고 예술적입네 하지만, 가만히 보면 속물적이기까지 하다.

유럽은 어떨까? 교양과 지성의 가치를 아는 곳,

그러나 이제는 그곳도 변했으려니 과연 책마을에는 진풍경이 펼쳐질까 아니면 을씨년스러울까.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책을 집어 든다.

 

서둘러 결론부터 말하자면, 부러웠다.

그곳에는 여전히 책의 가치가 널리 인정받고 있었고, 그것을 문화로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본디 그러해야 하거늘, 우리는 왜 아직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더욱이 흥미로운 것은, 책마을 대부분의 역사가 짧다는 사실이다.

유명짜한 웨일스의 헤이 온 와이를 빼고는 대체로 1990년대에 조성된 마을이었다.

그럼에도 일종의 지역살리기 운동으로 책마을이 형성되었다는 사실에 감동받게 된다.

유럽도 사정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지방과 시골의 청년들은 도시로 나아갔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전통마을들이 서서히 붕괴해갔다.

이를 막고 다시 살리기 위해 책마을을 세운 곳이 많았다.

전시성으로 이루어지는 농촌살리기를 보면 왜 우리는 이런 생각을 못하나 아쉽기 짝이 없다.

대체로 책마을에 자리잡은 서점들은 헌책과 고서를 취급하고 있었다. 이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 시대의 지적 생산물의 총화라 할 책이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찾을 만한 가치가 있기 위해서는 많은 것이 요구된다.

일단, 내용이 시간의 담금질을 견뎌내야 한다.

오늘의 독자도 찾아 읽고 싶은 책이 아니고서야 어찌 유통될 수 있겠는가.

여기에 책을 만들고 펴내는 이들의 장인정신이 깃들어 있어야 한다.

한때 반짝 팔리고 말 책이라 함부로 만들었다면 지금껏 남아 사람들의 손을 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책이 하나의 예술품 대접을 받는 데는 책 만드는 이들의 감각과 정성이 필수이다.

 

그렇다면 물어보자. 우리가 과연 그러한가? 나는 부정적이다.

우리에게 헌책은 싼값에 책을 사본다는 의미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읽을 만한 책이라 귀하게 대접 받는 책도 예술품의 자격까지 얻지는 못했다.

이러고서야 어찌 출판문화를 말할 수 있겠는가.

책을 둘러싼 다양한 요소들이 성숙해야 비로소 책마을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책에 소개된 책마을은 유럽 10개국, 24군데. 지은이가 발품을 얼마나 들였을지 충분히 짐작이 간다.

흥미로운 것은, 지은이가 헤이 온 와이를 그리 중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국내에서는 책마을 하면 헤이 온 와이를 떠올린다.

알려져 있다시피 “1962년에 리처드 부스의 주도로 세계 최초의 책마을을 선언하고 나선 뒤로

그 종주국으로서 위상을 높여온 이 책의 왕국은 책을 주제로 한 관광촌의 전형”이다.

그런데 지은이는 유럽에 책마을이 널리 퍼지면서

헤이 온 와이의 리처드 부스가 일종의 제국주의적 행태를 보인다싶은 모양이다.

 

책마을의 정신보다는 상업성에 너무 치중하고 있다는 비판도 간간이 나온다.

먼저 시작한 것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나 이를 기반으로 우쭐대거나 압도하려고 해서는 곤란하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의 태도로 적합하지도 않다.

책이란 자유롭고 평등하며 다양한 가치를 옹호하는 세계다.

이에 반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비판받아 마땅하리라.

책 들머리에 나온 스위스 발레의 생피에르 드 클라주는

유럽의 책마을이 어떤 배경으로 세워졌는지 잘 보여준다.

“상설서점은 열세 곳. 대부분 지역 출신이 운영한다.

여러 언어의 일간지와 라디오 방송, 행정당국, 은행과 몇몇 기업도 마을이 환골탈태하는 일을 후원했다.

신부님의 아이디어는 마을의 700주년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마을에 보다 활기를 불어넣을 궁리를 하던 끝에 터져나왔다.

기 맑고 한가한 이 동네에서 술이나 마시고 춤과 음악을 즐기는 것으로 소일하지 말자는 취지였다.

책과 고향을 사랑하는 모임, 즉 동호회 겸 향우회를 결성한 마을 사람들은

대륙 최초의 책마을인 벨기에 ‘르뒤’를 찾아가 자문을 구하는 등 착실한 준비를 거쳐

1993년 책마을을 출범시켰다.”

책은 한 사람의 영혼을 일깨운다. 책마을은 쇠락하는 공동체에 활기를 불러일으킨다.

이 마을은 한여름에 문인의 강연과 낭송회, 사인회를 기본으로 하고

미술 및 자료 전시회, 영화상연, 제본 시연 등을 덧붙인 축제로 2만명 가까운 사람들을 불러 모은단다.

특히 마을에서 생산된 햇포도주와 음악을 곁들이는 주연은 축제의 자랑거리.

서가와 술통이 어우러져 있다니, 이 얼마나 환상적인가.

프랑스 니에브르의 라 샤리테 쉬르 루아르는

파주 출판도시와 다른 책마을을 꿈꾸는 이들에게 좋은 모범이 될 법하다.

프랑스 출판계에도 위기가 있었단다. 출판시장이 파리로 집중된 데다

거대 자본이 출판사와 서점을 장악했다. 군소 규모의 출판사와 서점들이 설 자리를 잃어 가는데,

인터넷의 출현으로 책 읽는 사람들이 현격히 줄었다. 더욱이 금융시장이 개방되면서

부동산값이 폭등해 사정이 더욱 나빠졌다. 이에 대한 적극적인 반응으로 책마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불안정한 고용, 갈수록 대기업화하는 출판사와 서점에서 겪는 스트레스 등에 넌더리를 치고서

더욱 이상적인 ‘귀농’은 못하더라도 역겨운 대도시 생활을 피해

중소도시와 농촌에서 다른 삶을 찾으려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 (중략)

책마을은 상당한 흡인력으로, 실적에 따라 퇴출될까 초조해하거나

살벌한 시장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출판계에서 주눅들어 사느니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먹물’들을 유혹했다.

책에 기대어 문화생활과 생계를 함께 꾸려 나가보려는 꿈과 믿음을 버리지 않은 사람에게는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대도시의 자극적인 환락과 소란과 피곤 대신,

자신만의 조용한 시간과 자유를 중시하는 사람에게는 떼돈을 버는 것은 아니지만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이 정도의 시소게임은 감내할 만한 것이다.”

그럴 수만 있으면 좋겠다.

책을 사랑하고 책 만드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전원풍경의 마을에 옹기종기 모여 살았으면.

더 벌지는 못하겠지만, 번 것으로 만족하며

더 많은 시간을 책 읽고 저자들과 만나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냈으면.

위풍당당한 건물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

아기자기한 축제와 행사로 발길이 끊이지 않는 마을이 되기를.

책 읽으며 책 만드는 사람들이 무에 큰 욕심이 있을까?

유럽의 책마을 사람들이 꿈꾼 대로 살아가면 되는 법이거늘 우리는 왜 못하는지 끝내 모르겠다.

- 이권우 도서평론가

- 2011-10-21 ⓒ 경향신문 & 경향닷컴 [길 위에서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