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아가는(문화)

冊 <비우고 채우는 즐거움, 절집숲> - 길 위에서 책읽기

Gijuzzang Dream 2011. 11. 2. 19:58

 

 


 

 

 

비우고 채우는 즐거움, 절집숲

 

 

나무만 쳐다보고 있어도 삶의 길이 보인다

 

 

 


영락없는 책상물림인지라 영적인 감흥마저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나무를 볼라치면

엘리아데가 <종교사 개론>에서 한 말이 한편의 시처럼 떠오른다.


“나무가 성스러운 힘을 담고 있다면,

그것은 나무가 수직이며 자라나서 그 잎을 잃어버리고 또다시 회생시키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무는 몇 번이고 무한히 재생하기(죽고 소생함으로써) 때문이며,

유액(乳液)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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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잎으로 하늘을 가린 나무를 바라보고 있으려면 어떤 거룩한 기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엘리아데는 나무의 형태나 양상 때문에 거룩한 것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나무를 통해 거룩한 것이 드러났을 적에 그 나무가 거룩해진다는 것이다.

신화로 보면 그의 말이 맞다.

그러나 어쩌랴. 그저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어떤 상징성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이니. 앞에 인용한 구절을 볼라치면, 엘리아데도 그런 일반인들의 심정을 기꺼이 인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성싶다.

나무의 거대한 뿌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심연과 연결돼 있다. 우리가 다다를 수 없는 세계, 혹은 두려운 세계와 소통하는 나무는, 거기서 오히려 자양분을 끌어올려 자신을 키워나간다. 올곧게 쭉 뻗은 줄기는 지상과 관련돼 있음을 상징한다.

 

하늘을 향해 있는 힘껏 기지개를 켜고 있는 형상은 천상과의 연결을 뜻한다.

나무는 그 모습 자체로 삼계(三界)와 소통한다.

그러니, 우리 앞에 떡 버티고 있는 나무를 보면 저절로 경배의식이 솟아나는 법.

실로, 나무 앞에 서면 머리 조아리고 치성을 드려야 마땅하다.

그 신성한 나무를 떼로 만날 수 있는 곳이 있으니, 절집에 이르는 길에 펼쳐진 숲이다.

이 나라의 절집에는 길든 짧든 숲길이 있고,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 신성한 기운을 느끼게 해준다.

물론, 그 길을 문명의 이기를 이용해 쏜살같이 지나가는 이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

속세의 속도를 버리고 아주 게으른 걸음으로 그 길을 걷는 이들에게 숲은 신성의 한 가닥을 엿보게 해준다.

걸어본 이들은 알리라. 절집에 이르기 전에 숲에서 이미 우리는 변하고 있음을.

그 절집 숲에 대한 이야기를 가득 담고 있는 책이 있다.

 

오랫동안 나무 이야기를 전해준 전영우 교수가 쓴 <비우고 채우는 즐거움, 절집 숲>(운주사)이다.

절 이야기를 해준 책은 숱하게 보아왔건만, 절집 숲에 대해서만 이야기한 책은 처음이다.

반갑고 즐겁고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한달음에 읽어볼 만하다.

그의 지적대로 절집 숲은 여러 기능을 맡아왔다.

그 하나는 일종의 점이지대 역할이다. 속(俗)에서 성(聖)으로 넘어오는 징검다리인 셈이다.

 

두 번째는 수행과 명상 같은 수도공간이면서 구황식량과 땔감 따위를 제공하는 생산공간 역할을 해왔다.

유사시를 대비한 가람 축조용 목재의 비축기지이기도 했다.

이 가운데 속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성속을 가르는 차폐공간이자

명상으로 이끄는 수도공간의 속성이라 할 수 있을 터다.

 

 

 

 

전영우는 이에 대해 책 들머리에서 다음처럼 말한다.

“절집 숲이 명상과 사색을 통해 잊고 살던 자아를 되찾고,

대면하기를 꺼리던 자기 자신을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소통과 교감을 통해서

마음의 풍요를 얻을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

절집 숲에 대한 이런 새로운 기능제안은 절집 숲이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는 특성 덕분에 가능하다.

 

이런 개방성 덕분에 절집 숲은 그 숲을 향유하고자 원하는 사람들 사이에

극심한 경쟁을 유발시키지 않는다.

내가 풍광의 아름다움을 즐긴다고 해서 남에게 돌아갈 즐거움이 줄어들지도 않는다.

이런 점이 바로 생태소비, 자연소비의 특성이다.

따라서 덜 소비하고 덜 훼손하며 덜 폐기해야 하는 생태환경의 시대에

절집 숲은 인간과 자연의 상생을 훈련하는 멋진 실습장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천성이 게으른지라 가본 곳이 얼마나 되겠는가 싶은 심정으로 책을 훑어보았다.

그런데 웬걸, 가본 곳이 많았다. 그때 이런 심정이 들었다. 먼저, 나이 먹었구나 하는 마음.

틈만 나면 봇짐 싸는 스타일이 아니건만,

그저 기회 닿는 대로 다녀왔는데도 가본 곳이 많다는 것은 내 삶의 나이테가 그만큼 늘어났다는 뜻.

다른 하나는, 감당해야 할 현실의 무게를 무척이나 버거워했구나 하는 마음.

위로와 격려 받고 싶은 심정이 그토록 간절하지 않았다면, 절 집 숲을 이토록 찾아다니지는 않았을 터.

정말이지 나는 절에는 관심이 없었고, 그곳에 이르는 곳에 펼쳐진 숲을 갈망했다.

그나마 내가 버텨낸 것은 절 집 앞에서 내 어깨를 쓸어주었던 그 숱한 나무들 덕이었던 모양이다.

지은이가 맨 처음 소개한 숲이 개심사여서 기분 좋았다. 고향에 있는 절집 숲이라 그러하다.

내 삶이 출발부터 일그러졌다는 것은 고향이라는 낱말에서 어떤 애잔함을 느낀다는 데서 이미 알 수 있다.

탯줄을 묻은 곳이건만, 술 한잔 기울일 벗이 없는 고향이라니,

그게 어찌 진정한 의미의 고향일 수 있겠는가.

누군가에게 출향은 성공의 다른 말이었겠지만 나에게는 근본 없음과 같은 말이다.

그래서 고향에 내려갈 적마다 개심사에 들렀을 터. 그래서 그 숲길을 걸었을 터.

내 안에서 들끓는 설움과 아쉬움을 토닥토닥 달래며 심호흡을 했을 터.

개심사 소나무가 굽은 데는 이유가 있단다.

서해안이나 남해안의 인구 밀접지역에서는 소나무로 집을 짓거나 배를 만들었다고 한다.

재목감으로는 역시 줄기가 곧은 소나무가 좋기 마련이다.

생각해보면, 수 천년 동안 곧은 소나무만 벌채해 왔을 터이니 남은 나무는 당연히 굽은 것일 수밖에.

그러니 지금 우리에게 미적 영감을 주는 굽은 소나무는 일종에 형질 나쁜 나무인 셈.

오호라,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니, 딱 그 경우로구나.

그러니 물을 수밖에. 나는 쓸모 없음에 대한 불안과 고통을 쓸모 있음으로 승화시켰냐고.

서둘러 다시 가고 싶다. 그 개심사에.

산에 오르려고 갔던 곳이 있다. 그러다 산에 이르는 숲길에 매혹당한 곳이 있다.

그 숲 덕에 산도 즐겁게 올랐다. 그러다 내려오며 미처 예상하지 못한 숲길에 감동한 곳이 있다.

그래서 그 절집마저 좋아졌던 곳이 있으니, 해인사 숲길이다.

지은이는 일주문에서 봉황문에 이르는 숲길을 걷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자연이 연출하는 장대함은 우리 각자의 행동거지를 조심스럽게 만들고 긴장감을 갖게 한다.

또한 인간이 얼마나 왜소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확인시켜준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종교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숲이 내뿜는 세월의 무게와 신성한 기운을 직접 체험하면

흐트러진 몸가짐을 바로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힐 수밖에 없다.

별로 길지 않은 이 숲길에서 우리는 어느덧 수도자로 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중략)

이처럼 숲은 위대한 종교가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 됨됨이를 바꾸는 스승이 될 수도 있다.”

다다라야 비로소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곳에 이르는 길 위에 있을 때 이미 바뀌기도 한다.

최치원과 정선이 해인사 숲길에서 노닐었던 것도 그래서였지 않았을까.

그러다 최치원은 홀연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지 않은가.

그럴 수만 있다면, 내 삶의 끝이 그와 같다면 얼마나 행복할꼬.

내가 오른 가야산은 모성의 산이었다. 탁 트여 다 품어주는 곳.

그 품에 안겨 있는 해인사이니 오죽하겠는가.

그 어미의 치맛자락에 해당하는 곳곳에 놀라운 숲길들이 펼쳐져 있다.

숲길을 걸으면 나는 어느새 어미에게 젖 달라고 조르는 철부지 어린아이가 되고 만다.

얼마 전 지리산에 오르려다 폭우로 도중에 내려온 적이 있었다.

머문 곳이 쌍계사 근방이라 비를 맞으며 그 절집 숲을 거닐었다.

비록 벚꽃이 한창일 적에 가지는 못했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사암에서 쌍계사에 이르는 짧은 길을 걸었지만, 그때 느낀 감흥은 색달랐다.

이 길이 책에도 나오는데, 내가 갔던 그곳에서 최치원이 노닐었다 한다.

그는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늘 한발 앞서 간 모양이다.

아직 절집 숲을 즐기지 못하는 이라면,
지은이가 통도사 솔숲을 걸으며 한 말을 참고하면 좋을 듯.

 

그는 말한다.


“무풍한송 속을 걷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솔빛이 온몸을 간질인다. 솔향이 온몸을 감싼다.

솔바람이 온몸을 휘감는다. 솔빛과 솔향과 솔바람이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별천지를 걷는다.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걷는다. 영혼을 씻어내는 황홀한 희열을 느낀다.

통도사 들머리 솔숲은 ‘걷는’ 사람만 누릴 수 있는 축복이자 전율이다. (중략)

솔숲을 걷는 일은 막연히 걷는 것과 다르다.

들머리 솔숲 길을 걷는 일은 업장을 벗고 정토에 들어서는 통과의례이며,

고요와 자비와 평화와 청정세계에 진입하는 엄숙한 절차다.

지고지선의 부처님을 모신 절집에 이르는 숲길, 들머리 솔숲 길은 우리의 또 다른 얼굴이다.”


나무 이야기로 글을 시작했으니, 나무 이야기로 끝을 맺으련다.

나무에 관한 아름다운 구절 하나 올려놓으니 곱씹어보시길.

나무만 쳐다보고 있어도 삶의 길이 보이는 법이다.

“나무는 그 자체로 길이다. 수십, 수백 년 동안 한곳에 머물면서도 길을 만드는 게 나무다.

나무는 억지로 길을 만들지 않는다. 미련스럽게 한곳에 머물러 있는 내공이 곧 길이 된다.

이곳저곳에서 찾는다고 길을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무처럼 자신의 자리가 곧 길이라는 것만 깨달으면 길이 보인다.”

 

강판권이 <미술관에 사는 나무들>에서 한 말이다.

- 이권우 도서평론가

- 2011-07-22 ⓒ 경향신문 & 경향닷컴 [길 위에서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