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의 지도자들, 선비의 ‘언행일치’ 정신 본받아야
조선왕조는 성리학을 국학으로 삼고 그 이념을 국시로 삼은 유교국가이다.
조선 초부터 문치주의(文治主義)를 표방하고 지식에 기반을 둔 문화국가를 지향하였다.
바로 그러한 국가를 만들어간 대표적 지식인이 성리학을 주 전공으로 하는 선비(士)였고
선비의 복수개념이 사림(士林)이다. 선비는 조선시대를 이끌어간 주역이었다.
문치주의는 무력이 아니라 글로써 하는 정치이고
선비는 학문적 성취를 기초로 정치현장에 출사하여
대부(大夫)가 되어 논리로서 국민을 설득하고 봉사하는 사대부(士大夫)가 되는 것이 최종목표였다.
즉 선비로서 수기(修己)하고
대부가 되어서는 치인(治人)하여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 것이 사대부의 길이었다.
선비의 수기는 학문 도야와 인격 수양을 함께 하는 것이다.
지식을 아무리 축적한들 인격에 문제가 있어서는 곤란하고
사람됨은 좋지만 능력이 없어서도 안 되는 만큼 능력과 인격을 함께 갖춘 인간형을 추구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리더십에도 반드시 요구되는 자질이다.
선비의 치인은 남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봉사한다는 개념에 가깝다.
치산ㆍ치수(治山ㆍ治水)를 생각해보면 분명해진다.
기회주의 용납 않는 일관주의, 호화와 사치는 금기사항
선비는 문ㆍ사ㆍ철(文史哲)을 전공필수로 하여 이성훈련을 하고
시ㆍ서ㆍ화(詩書畵)를 교양필수로 하여 감성 훈련을 함으로써
이성과 감성이 잘 조화된 인간형을 추구하였다.
文은 문장학이고, 史는 역사, 哲은 당시 용어로는 경학(經學)이다.
순서도 경학이 먼저이고 그 다음이 역사, 마지막이 문장이었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답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를 경학으로 깨우치고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제반현상을 역사로서 이해했다.
또 경학을 씨줄로 역사를 날줄로 삼아 입체적으로 파악한 진리를 문장이라는 그릇에 담는 것으로
인문학의 완성도를 높였다.
문ㆍ사ㆍ철은 각각 따로 노는 것이 아니고 상호 보완하여야 제대로 학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외의 학문은 잡학으로 간주되었으니 선비는 기본적으로 인문학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시사(詩社)를 조직하여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시(詩)를 지어 상호교감하고 시에 얽힌 이야기와 역대 시인들에 대한 담화인 시화(詩話)를 나누었다.
선비에게 있어서 글씨인 서(書)는 누구나 갈고 닦아야 할 대상이었지만
그림(畵)은 모든 선비가 반드시 그려야 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시ㆍ서ㆍ화 역시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해야 빛나는 통합예술의 성격이 짙어서
선비들은 당연히 시ㆍ서ㆍ화를 아우르는 감성훈련을 하며 교양을 닦았다.
선비의 특징적인 면모는 일관주의(一貫主義)에서 잘 나타난다.
유학에서 강조되는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이념은 일관된 가치지향과 행동규범으로
선비의 앎과 행동을 규정하였다.
자신과 타인에게 똑같은 기준을 적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박하되 남에게는 후하게 대하는 ‘박기후인(薄己厚人)’의 생활태도를
보여 주었다. 이 일관성은 세력에 따라 표변하는 기회주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선비의 자조와 절개는 선비로서의 징표 같은 것이었다.
선비란 겉으로는 한없이 부드럽지만
속으로는 단단한 정체성을 갖고 있는 외유내강(外柔內剛)한 인물상이며
영어의 젠틀맨(Gentleman)이 여기 해당하는 것이 아닐지 싶다.
청빈을 미덕으로 삼아 검약(儉約)을 실천하는 청빈검약(淸貧儉約)의 생활철학을 가진 사람이
또한 선비이다.
조선 선비에게 있어서 호화와 사치는 금기사항이며 국가 사회의 공적(公敵)으로 치부되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남의 눈을 의식하거나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을 편안하게 여기며 그 속에서 도(道, 진리)를 즐기는 경지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인생의 모든 부분에 달관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것이므로
선비란 결국 세속적인 일에 대하여 초연할 수 있는 정신세계에 진입한 학인이다.
의리와 명분 중시... 현세에 대동사회 건설하려는 이상주의자
선비가 지향한 가치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사항이
학문과 행동을 일치시키려는 학행일치(學行一致)의 방향성이다.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길 때에 비로소 그 배움이 의미를 갖게 된다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귀의하던 경전인 <논어>의 첫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배워서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에서
익힌다는 말은 바로 행동으로 실천한다는 의미로, 학행은 함께 해야 그 효과가 극대화될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기쁨을 느낄 정도의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천 없는 학문의 공허함을 지적한 것이며
선비는 반드시 학행을 일치시킴으로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 실천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이 의리(義理)와 명분(名分)이었다.
사람이 지켜야 할 떳떳하고 옳은 도리인 의리는 항상 어떤 선택을 할 때마다 따져 보아야 하는 기준이었다.
명분이란 각기 이름에 걸맞은 분수나 역할로서 당시 조선은 명분사회였기 때문에
요행히 법망을 피하더라도 의리와 명분을 어기면 선비사회에서 도태당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이익을 도외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문에 선비는 일에 임하여 명분과 실리를 합치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양자의 합치가 어려워 선택의 기로에 서는 결정적 순간에는
명분을 택하는 것이 선비로서 살아남는 길이었다.
또한 의리를 지키되 인정(仁情)과 조화시키려 노력하였다.
의리만을 따지면 세상살이가 삭막하고 메마르기 쉽다. 인정만을 베풀면 기준이 없이 혼란스러워지므로
의리와 인정을 적절하게 보합하여 이성과 감성의 균형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나아가 강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를 부추겨주며(抑强扶弱),
공적인 일을 우선하고 사적인 일을 뒤에 하기(先公後私)를 실천하여
모든 구성원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생공존(共生共存)의 이상사회,
즉 대동사회(大同社會: 작은 차이는 있지만 크게 볼 때 함께 어우러져 사는 사회)라는 공동체 사회를
내세가 아닌 현세에 건설하려는 이상을 갖고 있는 이상주의자들이었다.
이 점이 이 세상의 곤고함을 내세를 준비하기 위한 전단계로 보는 다른 종교와 유교의 차별성이며,
선비는 이 세상에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역군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나의 삶을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듯이 타인의 삶을 실현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약육강식이라는 동물세계의 논리를 극복하려는 인간화 노력이었다.
사(士)ㆍ농(農)ㆍ공(工)ㆍ상(商)이라는 능력별 직업적 차별화는 인정하되
기본적으로는 함께 가는 사회를 대동사회로 설정하였던 것이다.
선비의 최고 덕목은 극기, 최종 지향점은 중용
선비정신의 핵심은 자기 자신을 이겨내어 예(禮)로 돌아가는 극기복례(克己復禮)이다.
극기(克己)는 자신의 탐욕이나 게으름, 타성 등을 이겨내는 것이다.
예(禮)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애경을 극진하게 하는 준칙이다.
자신의 욕심이나 게으름을 이겨내어 타인을 배려하는 예의를 갖추는 일이야말로
선비가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이었다.
선비의 최종 지향점은 중용(中庸)의 정신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지나치지도 않은 조화와 균형 감각이 요구되는 중정(中正)의 상태,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의 지도자들이 선비정신에서 계승해야 할 가장 절실한 리더십을 꼽으라면
말과 행동이 일치되는 언행일치(言行一致),
배움과 행동이 일치되는 학행일치(學行一致)의 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실천이 결여된 주장이나 공약은 공허하다.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믿음이 뒷받침이 안 되면 아무 일도 성공할 수 없다.
“너나 잘하세요.”라는 말이 유행하는 것도
결국 실천 없이 입으로만 교언영색(巧言令色)하는 지도자들에 대한 야유가 아닐까?
- 정옥자,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 2011년 11월, 리더십에세이 제 3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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