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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우방의 새로쓰는 불교미술] 1. 귀신 · 도깨비 · 짐승 얼굴은 용의 얼굴

Gijuzzang Dream 2011. 11. 3. 14:53

 

 

 

 

 

 

 1. 용면와의 조형구성

 

 

 

귀신 · 도깨비 · 짐승 얼굴요? … 용의 얼굴입니다

 

 

 
안압지 출토 용면와.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의 ‘새로 쓰는 불교미술’을 연재한다.

강 원장은 오랫동안 한국 불교미술을 연구해온 학자로

그동안 연구해 온 새로운 사실을 독자여러분들에게 소개해

한국의 불교미술사를 새롭게 볼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내 학문의 코페르니쿠스적 변화

고구려 벽화 통해 용에 다가가

 

1997년 여름 어느 날, 경주박물관의 성덕대왕신종의 용을 살피는데 너무 거대하여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는데 앞에서는 두 눈이 보이지 않고

옆으로 가야 깊숙이 들어간 두 눈을 겨우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용이 얼굴을 정면에서 보면 전모가 보이지 않고 표현할 수도 없다.

그 순간 깜짝 놀라며 아, 우리가 지금까지 불러온 귀면 혹은 도깨비가

바로 용의 얼굴을 펼쳐서 표현한 것이라는 것이 천둥치듯 가슴에 울려왔다.

이어 우리가 그 헤아릴 수 없는 일본과 한국의 귀면(鬼面)과 중국의 수면(獸面) 모두가

용의 얼굴로 바뀌는 찰나였다. 1997년 8월8일이었다.

그 날까지 이 지구상에서는 어느 누구도 귀신의 얼굴을 의심한 사람도 없었으며

더구나 용의 얼굴로 인식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왜냐하면 뱀의 정면 얼굴이 불가능한 것처럼 용의 정면 얼굴은 표현할 수 없다고 굳게 믿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어사전은 물론 한글사전이나 한문사전에는

'귀면(鬼面)'은 있어도 아예 '용면(龍面)'이란 단어는 없으므로

'용면(龍面)'이나 '용면와(龍面瓦)'란 용어는 내가 만든 셈이다.

2000년 경주박물관 강당에서 용면와를 주제로 택하여 정년퇴임 기념으로 강연했다.

 

그 이후로 단지 기와의 귀면이 용면으로 바뀌는 문제만이 아니고,

나의 학문은 대전환을 일으키기 시작하였으며

무슨 힘에 이끌려 이어서 고구려벽화를 연구하기 시작하여 10년째에 이르고 있다.

그것은 나의 학문뿐만 아니라 동양미술사연구의 대전환이었으며,

더 나아가 세계미술사 연구의 대전환점을 마련한 것이다.

인류의 미술이 새로이 탄생하는 감격적인 사건이었다.

 

 

통일신라 월지 출토 기와 관심

채색분석 통해 용을 조형 분석

 

이 연재를 계속하는 동안 여러분은 귀면이 용면으로 바뀌는 것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이며,

동시에 용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직도 모르는 것이 많아

용 연구모임을 만들어 용의 조형과 상징에 대하여 계속 공부하여 오고 있다.

그 이후로 나의 학문을 빠른 속도로 변화하여 무한히 확대되고 무한히 심화되어오고 있지만,

그대로 귀면을 고집하고 용의 얼굴임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10년 전, 아니 100년 전과 같은 상태에 머물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학문적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고 하겠다.

 

그래서 안타까운 나머지 사명감을 가지고 귀면을 용면이라고 인식해야 한다는 강의를

전국적으로 펼치고 있다. 용에 대하여 강연할 때에는 사자후(獅子吼)가 아니고 용후(龍吼)였다.

 

이제 용의 조형의 구성과 상징구조를 모르면 동양미술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동양의 모든 장르의 조형은 용과 반드시 관련되어 있으니 갈수록 용의 중요성이 절실하다.

특히 여래와 보살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다.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들 것이나 이미 어느 정도 용에 대한 내 나름의 이론체계를 정립하여 두었기 때문에

함께 공부하면 빨리 배울 수 있다.

 

‘용이 여래다’ 혹은 ‘여래는 보주다’ 라고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1년 동안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 마침내 모든 상호관계를 절실히 인식하게 될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통일신라의 걸작품 용면와(龍面瓦)는

월지(月池: 안압지) 출토 녹유 용면와로 처음으로 백묘 뜨고 채색분석 해보았다.

용의 입에서 나오는 영기문만을 부분적으로 채색 분석한 적은 있었으나,

이렇게 전체를 다루기는 처음이며 그러는 동안 새로운 점들을 배울 수 있었다.

역시 채색분석은 조형분석의 최선의 분석방법임을 재확인했다.

 

그런데 당시에는 귀신의 얼굴이 아니라 용의 얼굴이라고만 주장하였지

용의 입에서 나오는 무늬에 대하여는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못했다.

귀신의 얼굴을 용의 얼굴이라고 눈에 보였던 이후에 고구려벽화를 연구하면서,

용의 입에서 나오는 갖가지 조형들이

동양의 우주생성론(宇宙生成論)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신의 계시였다고 생각한다.

 

 

용의 얼굴은 제1영기 싹의 集積

원래 형상 없고 있어도 변화무쌍

 

용의 얼굴로 말미암아 인류문화사가 새로운 국면에 이르러

처음으로 인류역사의 본질을 드러내게 되었으니, 참으로 가슴이 벅차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당대의 고승(高僧)이며 예술가였던 걸출한 양지(良志)가 만들었음직한

월지 출토인 용의 얼굴 추녀마루기와를 백묘 뜨고 채색 분석하니 실로 감회가 깊다.

귀면을 용면으로 인식하면서 10년 동안 매일, 아니 순간마다 채색분석하며

색연필이 한 번 종이 위를 스쳐 지나며 칠해질 때마다 나의 학문은 한 계단씩 드높이 올라

시야가 조금씩 넓어졌으며, 동시에 순간마다 조금씩 깊어졌다.

그러니 수 천 점을 채색분석하면서 한없이 확대되고 심화된 셈이다.

 

모든 작품은 볼 때마다 새로이 보였으며 모든 작품이 그 심원한 사상을 점차 드러냈다.

연재를 시작하며 처음으로 용의 얼굴을 그려보고 채색 분석하면서,

나의 연구는 지금부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용의 얼굴을 오늘 처음으로 그려보고 채색 분석해 보았으니

오늘 비로소 용의 본질을 파악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여 일 지나 채색분석한 것을 논문으로 써보니,

전에 알지 못했던 것을 더욱 새로이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러니 관찰하고, 기록하고, 사진 찍고, 백묘 뜨고, 채색분석하고, 다시 채색분석한 것을

논문으로 씀으로서 비로소 한 작품의 조사가 끝나는 것이다.

 

 

   
안압지 출토 용면와 도판.

 

 

그러나 그런 과정을 수 천 번, 수 만 번 거쳐야 비로소 한 작품의 본질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이니,

그 끝없는 드라마와 같은 체험을 겪으면서 ‘하나’를 알면서 ‘일체’를 파악하는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종교적 체험을 동시에 겪는 것이다.

 

용면와의 부분들을 자세히 분석하여 보면

제1영기싹의 다양한 변주로 용의 형상을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중요한 눈은 보주이지만 차차 왜 보주인지 증명하여 보일 것이다.

코, 눈썹, 귀, 두 뿔, 갈기, 치아, 혀 등, 용의 각 부분의 형태들이나,

입에서 발산하는 영기 문은 모두 제1영기싹의 다양한 변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면 왜 옛 예술가들은 왜 그렇게 표현하였을까.

그 해답을 수 천 점의 영기문들을 채색분석한 다음에야 오늘날 비로소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즉 물에 내재하여 있는 대생명력(大生命力)을 가시화한 것이 갖가지 영기문인데,

그 가운데 최소 단위가 제1영기싹이며, 가장 위력적인 영기의 모양이기 때문이다.

제1영기싹에서 전개되는 제2영기싹.제3영기싹은 차차 설명하게 될 것이다.

여래나 보살상을 만들 때처럼, 당대의 최고의 조각가가 용면와를 만든 까닭이나,

녹유로 장엄한 까닭은 용의 존재가 동양우주론의 중심에 있는 존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용의 얼굴을 왜 다양한 조형의 제1영기싹으로 구성하였으며,

지붕의 추녀마루기와로 썼으며,

아래 부분을 잘라 사래기와로 쓰면서 법당이나 왕궁의 지붕을 장엄하였을까. 
 

 

 

■ 강우방은…

 

   
 

1941년 생. 서울대 독문학과 졸업,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학사편입-중퇴, 일본 교토와 도쿄의 국립박물관에서 연수,

미국 하버드 미술사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 학예연구실장,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관장을 역임.

이화여대 초빙교수로 봉직하다

현재 일향(一鄕)한국미술사연구원 원장으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저술로는 논문 모음집인 ‘원융과 조화 - 한국불교조각사의 원리 I’와

‘법공과 장엄 - 한국불교조각사의 원리 II’가 있다.

불교조각 개설서로는 <한국불교조각의 흐름>, 불화에 관한 것으로는 <감로탱>이 있다.

최근에는 새로운 시각으로 한국의 조형미술을 물론 중국과 일본의 조형미술을 해석하며

일반적 조형의 원리를 다루고 있는 ‘형태의 탄생’시리즈 첫 번째 책으로 <한국미술의 탄생>을 펴냈다.

에세이 형식으로 쓴 예술론으로는 <미의 순례>, <미술과 역사 사이에서>,

<한국미술, 그 분출하는 생명력>, <어느 미술사가의 편지>,

그리고 사진전 도록 겸 에세이집인 <영겁 그리고 찰라>가 있다.

평생 한국미술의 모태가 통일신라 미술에 있다고 생각해 왔는데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2000년 이래,

더 근원적인 모태가 고구려미술임을 확신하게 되어 한국미술 전체를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중국과 일본의 미술도 재해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미술사’의 가능성도 제시할 수 있게 되어 그리스, 로마, 서아시아 등지의 미술도 연구하고 있다.

- 강우방,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장

- 불교신문 2747호/ 2011년 8월31일

 

 

 

 

 

 

고구려 벽화에서 한국미술 원류 찾아낸 미술사학자 강우방

 

동 · 서양 古미술의 비밀을 푼다… "난 칠순의 문화 혁명가"

32년간 박물관 지키다 퇴임 후 대학으로…
동서양작품 2000점 분석…새싹 모양 무늬 발견
고대 조형예술을 해석할 수 있는 열쇠 문양학 개척
"학계 비판 심하게 한다고? 난 얌전한 사람… 불의를 못참을 뿐"

 

 

지난 주말 일향(一鄕) 강우방(姜友邦) 선생의 책 두 권을 동틀 때까지 읽었다.

한 권은 1993년 펴낸 '미(美)의 순례'였고 나머지는 2007년 출판된 '어느 미술사가의 편지'였다.

둘 다 에세이였지만 고(古)미술 문외한(門外漢)에겐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한국 미술에 대한 선생의 애정과 탐구욕에 경탄해

한 장(章)만 더, 한 장만 더 하다가 모조리 읽어버렸다.

특유의 직설화법으로 세태와 시정(市井)을 일갈할 땐 그 통쾌무쌍함에 속이 후련했다.

특히 고미술 작품들에서 새싹 모양 무늬를 발견하고 이것을 토대로

동 · 서양 미술의 비밀을 풀 열쇠를 찾는 대목에서는 추리소설을 읽는 듯 긴박하고 진진했다.

신라 불교미술을 우리 미술의 뿌리로 봤던 자신의 오랜 견해를 미련없이 버리고

고구려 미술에서 새로운 맥을 대려는 시도는 자기혁신의 전범을 보는 듯해 감동적이었다.

 

미술 서적으로 가득 찬 연구소에서 강우방 선생이 ‘동·서양 고미술의 비밀을 풀 수 있는 해법’에 대해 설명했다. 수십년 고미술을 연구해 온 학자의 이론을 단번에 이해하거나 수긍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새로운 것을 알아낸 기쁨과 그것을 알리고 싶어하는 표정만큼은 쉽사리 읽을 수 있었다. 일흔살이 된 학자는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며 줄곧 싱글벙글했다. / 이태경 기자

 

 

국립경주박물관장을 지낸 이 노(老) 미술사가에게 매료된 것은 그의 '오유(傲遊)' 때문이었다.

그는 '오유'를 "분명 오만한데 전혀 밉게 보이지 않는 태도"라며

"헤프게 덕담이나 하고 가식적 겸손보다는 오유를 택하겠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의 기개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썼다.

'인문학의 위기'라는데 정작 이 분야 최고의 학자들은 뭘 하고 있는지 찾던 끝에

주변에서 강 선생을 추천 받았다.

올해 고희(古稀)를 맞은 강 선생은 지난 2004년 이화여대 후문 근처에 연구실을 마련하고

'일향한국미술사연구원'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의 아호이기도 한 '일향'은 성덕대왕신종(속칭 에밀레종)에 새겨진 글귀 중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한 마을(一鄕)이 되었네'라고 삼국통일을 칭송한 것에서 따왔다.

그는 이곳에서 매주 강좌를 열어 미술사를 가르치는 한편,

고미술 작품의 본을 떠서 단계적으로 색칠해가며 그 무늬를 파악하는 '채색분석'을 하고 있다.

동 · 서양을 통틀어 작품 2000여점의 분석을 마쳤으니,

이제 차례로 논문을 발표하는 일만 남겨두고 있다고 했다.

 

지난 7일 낮 일향연구원을 찾았 때, 강 원장은 용 7마리가 새겨진 낙랑시대 황금버클 사진을

모니터에 띄워놓고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안광(眼光)이 모니터의 뒤(背)를 뚫으려는(徹) 형국이었다.

이 복잡한 무늬의 버클도 ‘채색분석법’으로 파헤칠 예정이다.

 


세계미술의 비밀, 내 손안에 있다

―지난 주말에 '미의 순례'와 '어느 미술사가의 편지'를 읽었습니다.
"아, 그 쉬운 책?"

―워낙 과문(寡聞)해서 어려웠습니다. 모르는 단어도 많고.
"그게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예요. 중요한 것은 교과서에서 소개해줘야 하는데….

책 중에 제일 안 좋은 책이 초·중·고 교과서예요.

전부 나열식이고 학생들로 하여금 문제의식을 갖게 하지 않아요. 그냥 좔좔좔 외우게 해놨으니."

졸지에 후진 교육의 산 증인이 돼버린 것은,

그에게 책에 나오는 '공포(栱包 ·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는 나무쪽)'가 무엇인지 물었기 때문이었다.

―저의 잘못만은 아니군요.
"(힐끔 쳐다보고) 잘못일 수도 있죠. 하하하. 모두의 책임이에요.

바로 그 공포에 동양 사상이 응축돼 있어요. 그 공포의 비밀을 제가 풀었거든요."

―공포뿐 아니라 동·서양 미술의 큰 비밀을 풀었다면서요.
"이화대학 와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를 시작했어요. 학계에서 벽화의 20%가량만 해석이 된 상태였죠.

그 나머지 80%를 제가 풀었어요. 그간 몰랐던 우리나라 미술의 80%를 알게 된 거죠.

지금 미술사학계 기성세대들은 초긴장 상태예요.

그간 연구하고 배워왔던 게 다 엉터리란 게 드러났으니까.

모두 '채색분석법'이란 것으로 밝혀낸 거예요."


 

호박넝쿨에서 솟아난 영기(靈氣)의 싹. 고미술에서 자주 발견되는 무늬와 비슷하다.
/ 강우방 원장 제공

1968년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로 박물관에 입문해

2000년 경주박물관장을 끝으로 32년간 박물관을 지켰던 그는

퇴임 후 이화여대 초빙교수로 일하면서 '영기문(靈氣文)'을 발견(?)했다고 했다.

나비 더듬이 같기도 하고 고사리 싹 같기도 한 무늬를 고미술품에서 똑같이 찾아내고,

이것이 성장 · 변형돼 연꽃이 되는 형상을 찾아낸 그는

이 무늬를 '우주에 충만한 신령스러운 기운'이라는 뜻으로 '영기문'이라 이름붙였다.

이 무늬가 동 · 서양 고미술에 공통적으로 쓰였기에

영기문 연구가 고대 조형예술을 해석할 수 있는 열쇠라고 보았다.

이를 토대로 문양학(文樣學)이란 학문을 개척 중이며 영기학파(靈氣學派)를 만들고 있다.

그는 책에서 "퇴임하고 대학교로 온 해인 2000년까지는 전생(前生)이고 그 이후로는 금생(今生)"

이라고 썼다.

―'영기학파'는 어떤 사람들로 구성됩니까.
"기존 세대 학자들은 없어요. 젊고 뛰어난 사람들이 뭉치고 있어요.

이제 미술사를 하려면 미술사학과에 가면 안 돼요. 가면 오류만 배우거든요."

―미술사 공부하려면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한테 와야죠. 하하하. 대중이 참 무서운 거예요.

'나는 가수다'에서도 대중이 가수를 뽑잖아요.

제 이론을 학계에서는 모른 척하지만 대중들은 금방 받아들여요. 나쁜 게 없고 틀린 게 없으니까."

―영기문을 처음 발견한 것은 언제입니까.
“2002년쯤이에요. 고구려 벽화를 제 손으로 그려보다가 생명의 싹을 발견한 거죠.

자연에도 영기문이 있어요. 대표적인 게 고사리 싹이에요.

모든 생명은 최초의 형태가 돌돌 말려진 모양이죠. 아기도 엄마 뱃속에서 둥그렇게 웅크리고 있잖아요.

그 싹이 점차 자라나서 연꽃이 되고 생명이 되는 것을 색깔로 보여주는 ‘채색분석법’을

2006년에 개발했어요.”

강 원장이 맨 넥타이에도 그가 말한 무늬가 있었다. 그가 반색하며 말했다.

“맞아요. 이게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서 사온 거예요. 서양에도 이 무늬가 널리 퍼져 있다는 거죠.

이 무늬를 왜 쓰느냐. 아름답기 때문이죠. 이 무늬가 이슬람 모스크에 특히 많아요.

그런데 이 무늬가 뭘 뜻하는지는 아무도 몰라요. 세계에서 오직 저만이 이 무늬를 설명할 수 있죠.”

그는 이미 “나만 알고 있다” “나만 할 수 있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이런 화법은 듣는 사람에게 반사적으로 의구(疑懼)와 경계(警戒)를 불러일으켰다.

그의 이력이나 평판에 대해 몰랐다면 이쯤에서 인터뷰를 중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간 읽고 듣기로,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한국 미술사학의 최고봉’이라고 불리는 강 원장은 애써 겸손하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그가 말한 ‘오유’였다.

중앙박물관장 공모에서 두 번 떨어지고 재야(在野)를 고집하는 그는

현재 박물관과 학계를 비판하는 데도 전혀 거침없었다.

―얼마 전 발간된 고(故) 한병삼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추모집에

“박물관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생각나는 분”이라고 썼습니다. 박물관의 위기란 어떤 것입니까.

“이를테면 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할 때 큰 위기였죠.

건축설계부터 가장 문제가 많은 게 당선됐어요. 크기만 하고 아주 창피해요.

그때 박물관장하고 많이 싸웠어요. 사람을 키워야 하는데 집만 키우니까. 지금은 사람이 없어요.”

―숭례문 단청(丹靑) 문제를 제기한 것도 그런 배경이 있습니까.
“단청을 공부하는 사람이 있다지만 단청을 몰라요.

단청 전통 기법은 전수가 안 돼 맥이 끊겼어요. 그만큼 나라가 썩은 거예요.”

강 원장은 위작(僞作)도 꾸준히 지적해왔다. 근년 들어 강 원장이 ‘위작 판정’을 한 것은

추사(秋史)가 초의선사에게 써줬다는 ‘명선(茗禪)’이란 글씨였다.

정민 한양대 교수는 최근 저서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에서 꼼꼼한 고증을 통해

이 글씨가 진품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은 지금 진검승부를 벌이고 있다.

―정민 교수의 주장을 읽어봤습니까.
“아 그거, 정민 교수는 한문을 잘하고 재주는 좋은데 글씨를 모르는 사람이죠.

그 주장을 읽어보니까 너무 한심해서…이걸 대응을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그러고 있어요.”

―안목이 없어도 문헌이나 논리로 고증할 수도 있잖습니까.
“작품이 가장 중요한 것이고 작품에 대한 이해가 먼저예요.

작품을 보면 진품이 아닌 걸 알 수 있거든요.”

 

―원래 성격이 다혈질입니까.
“아유, 저는 조용한 사람이죠.”

―글에서도 혈기가 넘쳐나던데요.
“하하하. 제가 원래 얌전한 사람인데, 불의는 못 참아요.”

―박물관장을 못한 데에 그런 성격이 일조했습니까.
“그건 김대중 정권 때 모든 요직을 특정학교 출신이 차지하면서 그렇게 된 거예요.

아, 박물관장 얘기는 그만 하고 제 독창적인 이론에 대해 써주세요.”

―많은 이들이 박물관장을 했어야 하는 분이라고 말하니까….
“그렇죠. 그때는 다 관장 자리 도둑맞았다고 했어요.

나는 박물관을 대표하는 학자였고. 누구도 나와는 상대가 안 되는 거죠.”

당시 강 원장은 정년을 1년 앞두고 명예퇴직을 신청, 경주박물관장을 퇴임했다.

그는 “당시 정부에서 주겠다던 훈장도 거절했다”고 말했다.

 


미술에서 진리를 찾는 것이 미술사학

―“미술사학이 인문학의 꽃”이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미술이 중요한 건 고대의 사상이 반영돼 있기 때문이에요.

노자 · 장자 사상을 반영해서 그림으로 조형화한 게 고대 미술의 무늬들이에요.

그런데 미술사를 한다는 사람들이 사상 공부를 안 하니까 이걸 못 보는 거예요.

미술에서 종교나 사상의 원형을 찾을 수 있어요. 글자로 된 문화재는 해석에 한계가 있어요.

그러나 조형화된 건 조형적으로 진리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걸 읽어내서 문자에는 없는 진리를 도출해내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미술사학이 인문학의 꽃이라는 거예요.”

―그 학문이 정말 재미있습니까.

“아유, 잠이 안 올 정도예요.

막 가슴이 설레고. 인류가 수천년간 몰랐던 걸 알게 되니까 시간도 아깝고 잠도 안 오죠.

어떤 때는 연구실에서 혼자 막 소리 지르고 환호하고 그래요.

그런 기쁨을 많은 사람들과 함께 누리고 싶어요.”

강 원장은 거침없는 실명(實名) 비판으로도 유명하다.

그 대상 중 한 명이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명지대 교수)이다.

강 원장은 특히 유 전 청장의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집중 비판해왔다.

유 전 청장의 저서에 실린 작품들에 대해 “절반이 위작”이라고 비판하며

“아는 만큼 보인다는 사람이 저서에 위작을 그렇게 많이 실은 걸 보면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는 말일 수도 있겠다”고 조소하기도 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게 맞는 것 아닙니까.
“그게 유홍준이가 만든 말인데,

그 친구가 말하는 ‘안다’는 건 역사적 사실, 에피소드, 스토리를 뜻하는 거예요.

그렇게 아는 게 아니라 안목을 갖고 작품을 관찰하고

사상과의 관계를 아는 ‘인식’의 문제가 핵심이에요.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인식이 없이 지식만으로 안다고 하면 위험해요.”

―학문하는 사람에겐 그렇겠지만 보통 사람에겐 괜찮은 문화재 감상법 아닙니까.
“역사적 사실뿐 아니라 유적의 본질에 대해서도 말해줘야죠.

본질은 없고 쓸데없는 것만 말해주니까 그렇죠.

유홍준이는 그래서 미술사가가 아니라 답사가(踏査家)예요.”

―대중적으로는 유 교수가 선생보다 더 인기 있잖습니까.
“아, 그럼요.”

―아까 “대중은 무서운 존재”라고 했습니다만.
“팬들의 질이 문제예요. 거긴 전부 아줌마 부대예요. 팬들도 수준 차이가 있어요.”

―유 교수와는 사이가 안 좋은가요.
“그렇지 않아요. 제가 아끼는 마음에서 그러는 거예요.

공부하면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텐데 연구는 안 하고 대중적인 얕은 글만 쓰잖아요.

그러니까 아까운 거고 질책하는 거지. 그 친구 내가 미워서 그러나요.”

―학생을 잘못 가르치고 엉터리 논문 써내는 대학교수들도 비판해왔지요.
“교수 평가할 때 논문 편수로 평가해요. 어떤 교수는 1년에 10편도 넘게 논문을 써요.

좋은 논문은 5년, 10년도 걸리거든요. 그런데 편수만 세니까 다 짜깁기하고 조작하고.

인문학은 조작을 많이 해요. 결론이 안 나오면 조작하는 거죠.

자연과학은 결론 조작하면 벌 받잖아요.

인문학은 안 그래요. 그러니까 인문학이 대접을 못 받아요.

교수가 공부 열심히 해서 5년 만에 좋은 논문 하나 내놓으면 대학에서 쫓겨나요.

그런 놈의 나라가 어디 있어요.”

―한국 대학의 총체적인 문제가 무엇이라고 봅니까.
“가장 큰 문제가 파벌이에요.

교수들끼리 파벌 만들어서 싸우고, 학생들은 자기 선생 글만 인용해요.

두 번째는 토론이 없어요.

교수는 항상 공부해야 하는데 다 한 자리 차지하려고 딴 데 가서 놀지 연구실엔 없어요.”

고려 수월관음도의 일부를 본떠 채색분석한 모습.
영기문이 변화 · 발전해 연꽃이 되는 과정을 분석했다. / 강우방 원장 제공

 

강 원장은 학계를 비판할 때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서울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고고인류학과에 편입해 1학기 만에 중퇴한 그는

‘한국 고고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고(故) 김원룡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교수에 대해서도

서슬 퍼렇게 비판했다.

“발굴단을 구성해 1년은 했어야 할 무령왕릉 발굴을 폭우 속에서 하룻밤에 끝냈고,

개인의 영달을 위해 그랬기 때문”이라는 이유였다.

그런 강 원장이 실명으로 칭찬하는 학자도 있다.

2005년 49세 나이로 작고한 미술사학자 오주석이다.

강 원장은 “오주석은 그림도 알고 한문도 알고 역사도 안 몇 안 되는 미술사학자였다”며

“살아있었다면 지금쯤 참 좋은 글을 많이 남겼을 텐데 정말 아까운 사람”이라고 했다.

 


“사실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

―오유(傲遊)란 말은 원래 있는 말입니까.
“고전에 있는 말이죠. 제가 엄청난 이론을 정립했으니까 자신 있고 당당하다, 그런 뜻이지요.

오유는 ‘오만’과 달리 좋은 말이에요.

세계미술에 얽힌 수천년 비밀을 제가 풀었으니 오유할 만하잖아요. 하하하.”

―한때 화가가 꿈이었다던데요.
“그랬죠. 그런데 그림에 대한 회의가 들 때쯤 우리나라 도자기와 석굴암을 보면서 이쪽으로 온 거죠.

그런데 결국 그림에 대한 꿈이 지금 제가 하는 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어요.

고미술 본을 떠서 직접 채색하잖아요.”

강 원장의 딸(강소연)도 미술사를 공부하고 현재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강 원장의 작은형은 강범석 전 일본 히로시마시립대 교수로,

갑신정변 당시 김옥균의 일기로 알려진 ‘갑신일록’이 일본에 의한 위작임을 밝혀낸 사람이다.

일향연구원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강 원장의 글이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올라온다.

그는 얼마 전 ‘세 가지 두려움’이란 제목으로 글을 썼다.

그 두려움이란 “아직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 새싹이 꽃피우기도 전에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것,

두 달가량 소요되는 유럽 답사를 과연 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니, 갑자기 겸손해졌습니다.
“어느 정도 하면 끝날 줄 알았더니 계속 모르는 게 나와요.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게 별것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그래서 뛰어난 후계자가 나와야 하는데 그런 제자를 키우지 못하면

이 연구가 중도에 끊길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지요.

 한 2년 정도 내 강의를 듣고 이 작업을 계승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작업을 할 수가 없어요.”

―유럽 답사는 실현되기 어렵습니까.
“비용 문제도 있고 건강 문제도 있고….

지금 서양에 가서 유물들을 둘러보면 엄청나게 새로운 걸 발견할 거라고 확신해요.

유럽 사람들이 자신의 문화의 가장 중요한 걸 모르고 있거든요.

몇 사람이 같이 가야 하는데 그 비용을 대기가 어려워요.”

―종교를 갖고 있습니까.
“없어요. 그러나 불교를 좋아하죠.

제가 불교 공부를 많이 하고 불교 미술에서 진리를 많이 배웠으니까요.”

―올해 연세가 일흔인데 소감이 있습니까.
“저는 나이하고 관계없어요. 하하하.”

―책을 보면 “나의 퇴임은 죽음뿐이다”라는 구절이 있던데요.
“공연히 하는 말이 아니에요. 그간 살아오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았는데

최근에서야 빙산 밑에 있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은퇴 같은 걸 생각할 틈이 없죠.

하나라도 더 알아내고 전 세계에 이걸 알려야 하니까요.”

―앞으로 중앙박물관장 제의가 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절대 안 해요.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어요.

내가 관장 안 된 것은 이 공부를 하라는 하늘의 뜻이에요.”

―“박지성이나 김연아, 박태환 같은 스포츠스타에게서 배운다”고 말씀해왔는데.
“그런 운동선수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의 엄청난 노력을 하거든요.

그 젊은이들이 세계를 제패한 것처럼 우리도 문화적으로 세계를 제패할 수 있어요.

그리고 그것을 나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요.”

나이 70이면 ‘노인’이라고 불러도 무례가 되지 않는 나이다.

그러나 강 원장의 눈빛은 말 그대로 초롱초롱 반짝였다.

그 안광(眼光)에 호기심과 장난기가 뒤섞여 있는 느낌을 받았다.

덩달아 그의 얼굴과 손도 나이보다 10년 이상 젊어 보였다. 마지막 질문을 할 차례였다.

―중국 문호 왕멍(王蒙)은 평생 배우려는 자세를 견지했다는 뜻으로

노년에 ‘나는 학생이다’란 책을 펴냈습니다. 선생의 삶을 ‘나는 ○○다’라고 표현한다면 무엇입니까.
“나는 문화적 혁명가다, 라고 말하겠습니다.

과거의 모든 것을 혁파하고 새로운 걸 제시하려고 해왔습니다.

지금 내가 공부하고 있는 것이 하나의 혁명적 사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혁명가이고 싶습니다.”

혁명(革命)을 꿈꾼 모든 사람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출발했다.

그 중 오만한 사람은 실패했고 오유한 사람은 성공했다.

강 원장의 혁명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원고를 쓰던 8일 밤 일향연구원 홈페이지에 접속해보니,

“수년간의 과제 하나가 오늘 완벽히 풀렸다”는 강 원장의 새 글이 올라와 있었다.

작성시각은 이날 밤 11시 33분이었다.

 

- [Why] [한현우의 커튼 콜]

- 2011.06.12 ⓒ 조선일보 & 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