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썹 달이 침침하게 내리 비치고 있는 야밤중에 등불을 비춰든 선비차림의 젊은이가 쓰개치마를 둘러쓴 여인과 담모퉁이를 돌아가고 있다. 이들이 어떤 사이이며,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호젓한 곳에서 남의 눈을 피하여 은밀히 만나야 하는 사람들인 것만은 틀림이 없는 듯하다. 예법을 생명으로 알던 왕조 귀족들로서 비록 그 상대가 노는 여자라 할지라도 아직 새파란 나이의 젊은이가 내놓고 여자와 만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층층시하에 있는 젊은 선비가 어른들의 눈을 피하여 집을 빠져나오느라 이렇게 밤깊어서야 만난 모양이다. 여인은 밤이 늦어서야 나타난 사나이가 야속하다는 듯, 여간 새침을 떨지 않으니 답답한 남자는 무엇으로나 달래보려는 듯 품속을 더듬어 찾고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서로 안타까워 하는 마음이야 두 사람이 어찌 각각 모를 리가 있겠는가! 만난 일이 반가워서 벌이는 실랑이일 뿐이다. 그래서 화제에 '달빛이 침침한 한밤중에,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안다(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 라고 하였으니,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도 이런 애틋한 사랑은 있게 마련인가 보다. - 간송문화 회화 52, 통속인물, 2011년,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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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이 밝힌 '월하정인' 제작시점은?>
미스터리였던 신윤복 활동시기, 천문학자가 밝혀냈다.
<月下情人> 그림 속 남녀 데이트 시각은 1793년 8월 21일 자정
▲ 조선시대 풍속화가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의 활동시기가
그림 속에 있는 달 모양을 통해 처음으로 확인됐다.
신윤복은 김홍도 · 김득신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풍속화가이지만
그에 대해 알려진 역사적 사실은 1758년 출생했다는 것 단 하나뿐이다.
그 외 활동 기록은 전혀 없고, 당연히 작품들의 정확한 제작 시기를 알 수 없었다.
미스터리 신윤복이었던 셈이다.
신윤복은 일부 작품에 기록된 간기(刊記 · 간행물 정보를 담은 기록)를 통해
19세기 초에 활동한 것으로 짐작됐으나, 그림을 그린 정확한 날짜가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월하정인>은 간송미술관에 보관돼 있는 국보 135호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에 수록돼 있다.
그림에 나오는 달은 위로 볼록한 모습이다.
이태형 천문우주기획 대표는 "밤에는 태양이 떠 있지 않아 달의 볼록한 면이 위를 향할 수 없고,
오직 달이 지구 그림자에 가려지는 월식일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계절은 여름으로 확인됐다.
그림에 담긴 글을 보면 그림을 그린 시간대가 밤 12시를 전후한 자시(子時) 무렵이다.
월식은 보름달이 뜰 때 일어나는데, 자시 무렵은 달이 가장 높이 뜬다.
그런데 그림에는 달이 처마 근처에 보인다.
이 대표는 "보름달은 태양의 반대쪽에 있기 때문에 겨울에는 높이 뜨고 여름에는 낮게 뜬다"고 말했다.
월식 형태는 부분월식이었다.
달이 완전히 가려지는 개기월식은 여름철에는 달의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진행된다.
이에 비해 그림은 지구의 그림자가 달 아랫부분만 가리고 지나가는 부분월식이라고 이 대표는 말했다.
이 교수는 신윤복이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약 100년간 일어난 월식 중 서울에서 관측 가능한 부분월식을 조사한 결과,
1784년 8월 30일(정조 8)과 1793년 8월 21일(정조 17) 두 번에 걸쳐
그림과 같은 부분월식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승정원일기> 등 당시 정부 기록을 확인해보니
1784년에는 8월 29일부터 31일까지 서울 지역에 3일 연속 비가 내렸다. 월식을 관측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1793년 8월 21일에는 오후까지 비가 오다 그쳐서 월식을 관측할 수 있었다고 기록돼 있었다.
결국 신윤복은 1793년 8월 21일 밤 자정 무렵 부분월식으로
아랫부분이 옴폭 들어간 달 아래 있는 남녀를 그린 것이다.
이 대표는 "해외에서는 고흐의 그림에 나타난 별을 천문학으로 분석해 제작 시기를 알아내기도 했으나,
국내에서 그림에 나타난 천체 현상을 천문학으로 분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신윤복의 활동시기를 찾아낸 것은
앞으로 과거 화폭을 통해 새로운 국내 역사적 위인, 예술가들의 활약 스토리에
더 많은 콘텐츠를 부가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 2011.07.02 조선
김홍도, 김득신과 더불어 조선시대의 3대 풍속화가로 알려진 신윤복은
그 활동에 대한 기록이 없어 작품들의 정확한 제작 시기를 알 수 없었다.
다만 일부 작품에 기록된 간기(刊記)를 통해 19세기 초에 활동한 것으로 짐작될 정도였다.
필자는 천문학이라는 전공을 살려 국보 135호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에 수록된
‘월하정인(月下情人)’ 속 달의 모양을 분석해 그 그림이 그려진 정확한 일자를 알아내고자 했다.
국내외 어느 작가의 그림 속에도 월하정인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모양의 달이 그려져 있지 않다.
때문에 월하정인에 그려진 달은 초승달이 잘못 그려진 것으로 여겨져 왔다.
신윤복은 왜 저런 모양의 달을 그렸을까?
만약 신윤복이 그림 속의 달을 실제로 보고 그렸다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과연 저런 모양의 달이 보일 수 있을까?
월하정인에 대한 분석…단서는 ‘달’
일상적으로 밤에는 달의 볼록한 면이 위를 향할 수 없다.
이는 달의 볼록한 면 쪽에 태양이 있기 때문이다.
밤에는 태양이 없어서 달의 볼록한 면이 지평선보다 아래를 향한다.
따라서 그림 속의 달 모양은 월식이 일어날 경우에만 볼 수 있다.
월식은 태양-지구-달이 일직선상에 놓여 달이 지구의 그림자에 가려지는 현상을 말한다.
달의 전부가 가려지는 현상을 개기월식, 일부가 가려지는 현상을 부분월식이라 한다.
그림 속에 쓰인 글에는 그림을 그린 시간대가 야 3경으로 나온다.
이것은 자시(子時)로 밤 12시를 전후한 시간이다.
월식이 일어나는 날은 보름달이 뜨는 날로, 자시 무렵에는 달이 가장 높이 뜬다.
처마 근처에 달이 보이는 것은 보름달의 남중고도가 낮다는 것이다. 즉 여름을 말한다.
보름달은 태양의 반대쪽에 있기 때문에 겨울에는 남중고도가 높고 여름에는 낮다.
여름철 한밤중에 일어나는 개기월식은
지평선과 작은 각도로 진행되기 때문에 달의 왼쪽부터 가려져서 오른쪽으로 진행된다.
즉, 달의 볼록한 면이 지평선과 약간의 각도를 가지고 옆으로 놓이게 되며
그림처럼 달의 윗부분만 보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것은 개기월식이 아닌 지구의 그림자가 달의 아랫부분만 가리고 지나가는
부분월식의 그림이다.
신윤복이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약 100년간 일어난 월식 중 서울에서 관측 가능한 부분월식을 조사해 봤다.
그 결과 1784년 8월 30일(정조 8년, 신윤복 26세)와
1793년 8월 21일(정조 17년, 신윤복 35세) 두 번에 걸쳐 그림과 같은 부분월식이 있었다.
월식이 일어나더라도 기상 현상 등의 이유로 실제로는 관측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따라서 <승정원일기> 등 당시 월식을 기록한 문서들을 통해
실제로 서울 하늘에서 이 월식이 있었는지를 조사했다.
당시 일식과 월식은 국가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매우 중요한 천문현상으로 여겼기 때문에
거의 빠짐없이 기록이 남아 있다.
문서를 통해 알게 된 결과,
1784년에는 8월 29일부터 31일까지 서울 지역에 3일 연속 비가 내려 월식을 관측할 수 없었다.
그러나 1793년 8월 21일(음 7.15)에는 오후까지 비가 오다 그쳐서 월식을 관측할 수 있었다.
<승정원일기 [원전] 제1719책>에는
‘7월 병오(15)일 밤 2경에서 4경까지 월식(月食)이 있었다’고 정확하게 기록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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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복은 풍경이나 사람을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한 화가로 알려져 있다.
그가 그린 ‘야금모행(夜禁冒行)’에는
겨울철 새벽에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피곤한 표정으로 기방을 나서는 양반이 표현돼 있다.
이 그림에는 그믐달이 등장한다.
그믐달로 추정해 볼 때 야금모행을 그린 시간은 대략 새벽 3~4시경이다.
신윤복의 야금모행(夜禁冒行), 월야밀회(月夜密會), 정변야화(井邊夜話)
이외에도 ‘월야밀회(月夜密會)’와 ‘정변야화(井邊夜話)’에는 보름달이 낮게 그려져 있다.
보름달의 위치만으로 볼 때는 보름달이 낮게 뜬 저녁이나 새벽쯤의 상황이다.
이 그림들을 통해 신윤복이 사실과 무관하게 달을 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월하정인에 나타난 것처럼 위로 볼록한 달은
일상에서 거의 볼 수 없는 모양의 달이기 때문에 임의로 그런 달을 그렸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이상의 상황을 토대로 1793년 8월 21일(음력 7월 15일, 신윤복 35세, 정조 17년) 자정 무렵을
'월하정인'의 제작 시기로 보고 보다 자세히 분석해 봤다.
달의 고도
- 달의 고도가 낮게 그려져 있어서 여름으로 추정했지만 정확한 달의 고도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달 뒤에 지평선 등 특별히 비교 대상이 될 만한 배경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분석한 결과
1793년 8월 21일 자정 무렵 달의 고도는 약 40도로 북극성의 고도와 비슷한 정도였다.
물론 달과 함께 그려진 처마와 담벼락의 고도는 보는 사람의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
관측자가 앉아 있었다고 보면 40도 정도의 고도에 위치하는 달은 충분히 그림처럼 보일 수 있다.
처마의 고도가 서 있는 사람에게는 낮아 보이겠지만 앉아 있는 사람에게는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을 보는 화공이 건너편 담벼락 아래 낮은 자세로 몰래 숨어서
이 광경을 스케치 했다고 보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각도다.
주인공들의 복장
- 신윤복이 그린 ‘청금상련(廳琴賞蓮)’은
연꽃이 피어 있는 것으로 보아 7~8월 한낮에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그림에 나오는 남녀의 복장과 월하정인에 나오는 남녀의 복장이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월하정인 속에 등장하는 여인은 밤이라 장옷을 하나 더 걸쳤을 뿐이다.
기본적으로 조선시대에 남자는 바지, 저고리에 두루마기를 입었다.
물론 계절에 따라 겹두루마기(봄, 가을), 홑두루마기(여름), 솜두루마기(겨울)로 바뀐다.
여자도 짧은 저고리에 풍성한 치마가 기본이었고
그 위에 입는 당의가 계절에 따라 겹당의(봄, 가을)나 홑당의(여름)로 바뀐다.
따라서 월하정인 그림 속 주인공들의 복장으로 보아
이 그림이 1793년 8월 21일에 그려졌을 것이라는 추론에 큰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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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침침야삼경 양인심사양인지(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라는 화제(畵題).
그림 속에 쓰인 월침침야삼경(月沈沈夜三更)은 말 그대로 ‘달도 침침한 밤 3경’이라는 시간이다.
야삼경(夜三更)은 자시(子時)로 당시의 시간을 기준으로 하면 밤 11시부터 새벽 1시까지의 시간이다.
이 야심한 시간에 과연 두 남녀가 은밀히 만나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까?
하지만 이 시대의 역사를 연구한 자료를 찾아보면
당시에 늦은 밤에 밀회를 즐기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월하정인'에 나타난 부분월식의 시간과 그림 속 글에 나타난 시간으로
두 남녀의 만남 시간이 자정 무렵이었다는 것은 충분히 추론할 수 있는 일이다.
주) 참고자료 : 「판소리와 풍속화 그 닮은 예술 세계」(효형출판, 김현주 저) 본문 中 - ‘연인들의 야밤 밀회가 성행한 시대에 이러한 소재와 정서를 담은 춘의도들이 그려졌을 것이다.’
이 그림의 천문학적 분석은 신윤복이 당시에 정확한 상황을 보고 그렸다는 전제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는 사물을 사실 그대로 그리는 진경산수(眞景山水)의 시대였고
신윤복이 그린 다른 그림 속 달들도 모두 사실적으로 그려졌다.
때문에 '월하정인'도 실제 상황을 묘사했을 것이라 추론하고 천문학적으로 분석해봤다.
앞으로 예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천문학적 현상을 토대로
제작 연대가 불분명한 작품들의 제작 연대를 추정하는 일이 더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천문학은 시대를 재는 가장 정확한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이태형 충남대 천문우주과학과 겸임교수 (주)천문우주기획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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