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끼며(시,서,화)

冊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 - 길 위에서 책읽기

Gijuzzang Dream 2011. 11. 2. 23:13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


 


 


서경식의 글을 읽다 가슴이 아린 적이 몇 번 있다.

그가 몇 차례 오늘의 삶이 가능하다고 여겨본 적은 없다는 투로 말해서였다.

나는 그 말에 묻어있는 지독한 절망과 고독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했다.

참으로 지금 사는 모습을 스스로 그려본 적이 없다. 숨 막힐 듯 답답했고 앞날은 캄캄했다.

버텨낼 재간도 없었고, 밀고나갈 힘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흐릿하게 보이는 삶의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일뿐이었다.

한낱 책벌레가 그 정도였다면, 서경식이 헤쳐 나왔어야 할 젊은 날의 늪이

얼마나 지독하고 넓고 깊었을지 짐작하고도 남을 만하다.

 

 

누이와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가족사의 불행이 좀체 누그러들지 않았다.

조국으로 유학을 떠난 두 형은 분단 조국의 모순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다.

간첩으로 몰려 옥살이를 해야 했고,

한 형은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으려고 분신까지 했다가 겨우 목숨을 건졌다.

지극 정성으로 옥바라지한 어머니는 자식들이 석방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한 많은 삶을 마감했다.

3년 후 아버지도 같은 병을 앓다 세상을 떠났다.

시간이 지나면 헝클어진 삶이 정리돼야 하건만, 더 꼬여버린 형국이다.

여행이기보다는 도피라고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잡아놓은 날짜가 다가올수록 마음이 들뜨기보다 더 착잡해지고 무거워졌으니까.

그렇게 떠난 여행이라 미술관 순례를 미리 계획하지는 않았다.

누이의 기분이 전환되길 바랄 뿐이었다. 여기저기 둘러보다 벨기에의 브뤼주로 갔다.

그 도시가 베풀어준 부드러운 늦가을의 정취를 만끽하다 흐루닝헤미술관에 들렀다.

거기서 “이렇듯 ‘예사롭지 않은 것’과 맞닥뜨리기 위하여 나는 멀리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인가”라는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그림을 보게 되었다. 헤랄드 다비드의 ‘캄비세스왕의 재판’.

형벌이 죄인의 살가죽을 벗겨내라는 것이었던 모양이다.

이 장면을 화가는 너무나 가열한 사실정신에 근거해 그렸다.

 

서경식은 “화면 오른쪽의 사나이. 나이프를 입에 물고 사뭇 익숙한 손놀림으로 왼쪽 발목에서 뒤꿈치 언저리의 날가죽을 벗기고 있는 사나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그가 말한 대로 축산문화를 배경으로 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견 엽기적인 장면에 왜 그토록 집중했을까.

먼저 그림에 담긴 “정밀성을 추구하는 장인적 열성” 때문이었을 터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다. 이 그림이 아버지의 죽음을 연상시켰다.

본디 책이나 예술 감상은 그러해야 하는 법이다.
일차적으로 그것을 썼거나 그린 사람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문학교육이니 예술교육이니 하는 말들이 이런 성취를 목표로 한다.

기실, 책이든 그림이든 잘 읽어낸다는 것은 오랜 시간의 교육이 필요하고, 높은 수준의 교양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그것이 읽거나 보는 이의 삶의 문맥에 자리잡아 새로운 의미를 창출해야 한다. 그것을 보거나 읽었더니 숨기거나 감추거나 가려졌던 내 삶의 무언가가 드러나고, 그 의미와 가치를 곱씹어볼 수 있어야 하는 법이다.

서경식은 그런 의미에서 타고난, 창조적인 감상자다.

어둡고 눅눅한 지하실에 채광창을 만드는 심정으로 떠난 여행에서 자신을 사로잡는 그림을 만나는

벼락 같은 축복을 기록한 <나의 서양미술 순례>가 대체로 그런 식으로 쓰여 있어 하는 말이다.

저간의 사정은 이렇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느 날 아는 아주머니 한 분이 맏형 집에 갑작스레 찾아왔다.

자리에 앉자마자 물을 달라며 사내목소리로 말했는데, 형수 말로는 꼭 아버지 목소리를 닮았더란다.

그런데 이 아주머니는 아버지와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러다 왼쪽 발목을 자꾸 만지면서 “여기가… 여기가 나른해”라고 중얼댔다.

가족들이 섬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버지가 투병생활을 할 적에 왼쪽 발목에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는데,

몽롱한 상태에서 자꾸 뽑아 버리려 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버지는 저승으로 선뜻 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한이 풀려야 갈 수 있는 법이거늘, 외려 한만 더 쌓였으니 떠나지 못하고 다시 나타날 수밖에.

바욘느에 자리 잡은 보나미술관에서 만난 ‘화가 누이의 초상’은

서경식이 누이에게 품은 애정의 한 자락을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어둑한 곳에 대여섯살 되었음직한 소녀가 서 있다.

이제 갓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가난한 오라버니를 위해 모델이 되어주었으리라.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일일 수 있지만, 오빠를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

“약간 튀어나온 이마며 꼭 다문 입언저리에는 귀여운 의지력이 담겨 있다.”

서경식은 이 그림을 설명하면서 “보면 볼수록 그리운 사람들에 대한 추억 비슷한 생각이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탄산수의 포말같이 솟아나는 것이다.

생각하건대 나는 그러한 감정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는 감상을 덧붙인다.

짐작하듯, 이 그림이 누이를 떠올리게 했다.

보나미술관에 들렀을 때는 같이 여행을 다니던 누이가 귀국한 다음이었다.

누이는 열다섯살 때부터 어머니와 함께 오빠들의 옥바라지를 했다.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부당한 운명의 짐이었다.

거기다 부모는 끔찍한 병을 앓다 생을 마감했다. 재일 조선인으로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힘든 삶이다.

정말 “그 ‘생활’의 밑바닥이 불안을 품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오빠로서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마치 이 그림을 그린 보나처럼 야심은 컸으나

그 몇 갑절이나 되는 불안에 압살당할 듯한 공포감으로 한 시절을 지내왔다.

“20대의 나날들이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영원히 사라져버린 것을” 안타까워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그림을 보며 “내 상념 속의 누이는 물론 이미 어린아이는 아니지만

어두컴컴한 속에서 혼자 서성거리고 있다”고 느낄 수밖에.

그래도 말해야 한다. 누이가 자기만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비록 교토의 번화가에 있는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계속하더라도.

하긴, 그것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엉거주춤이라는 독약에 마비된” 삶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가 왔다.

“누이라 하더라도 언제까지나 오빠 마음에 드는 포즈를 취하고 있을 수는 없다.

어둑한 속에서 언젠가는 희미한 빛이 비치는 쪽을 향해 걷기 시작해야 한다.

설사 불행을 엮어내게 된다 하더라도 자기 나름의 삶을 살아보려고 버둥거려볼 수밖에 없다.”

프랑스 루브르미술관에 들러 꼭 보고 싶은 작품이 있었다. 이런 식으로 편지를 보내고 싶어서였으리라.

언젠가 형이 편지에서 말한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보고 있어.

베토벤을 숭앙하고 루오를 사랑하는 형이 책에서 본 그 작품 말이야.

이 작품을 보니 지상의 숙명에 묶인 인간의 고뇌라든가,

육체의 어두운 뇌옥에서 벗어나 영원을 움켜잡으려는 혼이라는 말이 떠오르네.

언젠가 형도 직접 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아. 그러나 그렇게 쓸 수는 없었다.

그가 본 작품이 ‘빈사의 노예’와 ‘반항하는 노예’여서다.

두말할 나위 없이 노예는 바로 형들이었다. 재일 조선인이라는 사슬에, 분단이라는 차꼬에 묶여 있는.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어떤 수사학으로도 형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는 없었다고 서경식은 회상한다.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의 국립 고흐미술관에 가서도 확인한 것은 형들과의 관계였다.

죽기 며칠 전 고흐는 테오에게 “내 생활은 뿌리가 뽑히고 내 걸음걸이도 휘청휘청한다.

나는 내가 너희들의 저주스러운 짐짝이 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전적으로 그렇진 않을지 몰라도 어쨌든- 염려하게 되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서경식은 이 편지글에 대한 자신의 단상을 다음처럼 적어놓는다.

“현세적인 가치관에 대한 순수한 저항을 관철하기 위해서도 의식주 따위 현세적인 뒷받침은 필요하다.

(중략) 이 단순한 모순이야말로 옛날 옛적부터 창조자, 구도자, 혁명가를 괴롭혀왔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 채찍질을 해대지만,

그런 행위는 그 채찍의 의미를 이해하는 자까지도 함께 쓰러뜨리고 마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타자에 대해서도 창조자, 구도자, 혁명가이기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창조자, 구도자, 혁명가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해자들이 그 채찍의 아픔을 참고 견뎌주어야 하는 것이다.”

테오는 기꺼이 그 짐짝을, 그 채찍질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형제가 나란히 묻혀 있는 무덤이 이를 상징한다. 고흐의 편지를 곱씹는 서경식의 심정을 떠올려본다.

모든 것을 송두리째 앗아간 운명적인 사건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형들이 자신에게 던져준 그 짐짝을 기꺼이 감당하겠다는 의지의 표현 아닌가.

실로, 형들의 삶에 대한 애정 어린 동의와, 자신의 운명에 대한 화해로

이토록 아름다운 장면을 찾기란 쉽지 않다. 원망하고 저주하는 글을 찾아보기는 수월하지만 말이다.

청춘이라는 말에는 반드시 예찬이 붙어야 한다. 여러모로 인생의 황금기는 이때가 아닐 수 없다.

밝고 맑고 싱그러워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더 두렵고 힘들고 위축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절망에 빠진 청년들이 기억해주길.

오늘 보이는 성취가 가능하리라 여기지 못했던 지난날의 청춘들이 있음을.

자신에게 던져진 짐짝을 힘겹게 둘러메고 먼 길을 걸어와 비로소 지금의 자리에 있는 이들이 있음을.

얼핏 보기에 너무나 약할 듯싶은 것들,

그러니까 책과 그림과 음악을 그늘막 삼아 그 험한 곳을 건너온 이들이 있음을.

나는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미술관 여행기로 보지 않는다.

한 시대의 우울이라는 거대한 늪을 건너는 법을 일러주는 지혜의 책이라 평가한다.

바라건대, 이 땅의 청춘들이 이 책과 더불어 <청춘의 사신>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으며

서경식에게서 위안과 격려를 받을 수 있기를!

- 이권우 도서평론가

- 2011-04-15 ⓒ 경향신문 & 경향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