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기의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
일연의 흔적을 쫒아 되씹은 삼국유사
만약 그가 곁에 없었다면, 우리는 얼마나 보잘것없고, 초라해 보였을까.
다시 보아도 그 뜻이 새로우니, 그 말이 깊고 넓기만 하다.
가만히 앉아서 들은 이야기를 한담 삼아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나고 자란 땅을 직접 밟으며 듣고 확인한 것들만을 전해주었으니, 그 마음 한량없이 크다.
짓밟히고 피눈물 흘리는 사람들에게 자랑스러움과 희망을 주고자 했던 말이니, 그 뜻 지극히 넓기만 하다.
일연의 <삼국유사>를 떠올리면 얼핏 드는 생각이다.
<삼국유사>를 읽는 방법은 여럿 있을 수 있다.
완역본을 읽어 젖히는 것은 고전적인 방법이다. 기왕이면 사진을 덧붙인 책을 읽는 것이 좋다.
죽은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이야기임을 확인할 수 있으니. 풀이한 책을 보아도 된다.
신화는 이성과 논리로는 이해되지 않는 법.
우리의 신화적 독자성을 날줄로, 세계 신화의 보편성을 씨줄로 삼아 짠 그물로
상징의 의미를 낚아올린 책을 보면 <삼국유사>가 더 흥미롭고 살가워지기 마련이다.
여기 <삼국유사>를 읽는 또 다른 방법이 있다.
일연이 그러했듯 발품을 팔아가며 <삼국유사>에 나온 현장을 찾아가 보는 것이다.
신화가 허황한 이야기의 모음이 아니라, 한 민족의 집단 무의식이 오롯이 배어 있다는 것을, 오늘의 우리가 삶의 잣대로 삼을 만한 지혜가 가득 담겨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터.
<삼국유사>에 미친 시인 고운기가 먼저 이 일을 했으니, <삼국유사 길 위에서 만나다>(현암사)가 그 열매이다.
고운기가 먼저 찾은 곳은 양양 진전사 터.
고향이 경상도 경산인 여덟살 난 김견명이 어미의 품을 떠나 전라도 광주의 한 절로 공부하러 갔다. 여섯해가 지나서 출가를 결심하고 설악산 아래로 와 머리를 깎았다 한다. 승려로서 받은 이름은 회연. 그가 출가한 절이 바로 진전사이니, 강원도 양양군 둔전리에 있다. 회연이 누구기에, 이 여행의 들머리를 장식한 것일까?
“나는 이 터를 찾아 자주도 갔다.
절집 한 채 없이 터만 남은 곳이니 조금은 심심했다.
적막한 빈터에서 길손은 마음과 가슴의 눈만 열 뿐이다.
그렇게 지난 세월을 반추해 보지 않고서는 좀체 잡히지 않을 모습들이 있다.
길손의 상상력은 한없이 날개를 단다. 빈터에 서는 일은 하나의 구축인 동시에 새로운 시작이다.
진전사에서 출가한 김견명, 곧 회연은 나중에 일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바로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그이다.”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아무렴, 일연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을 첫 출발지로 삼지 않고 어찌 삼국유사 기행을 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절터와 삼층석탑, 그리고 부도만 남았다 하더라도 말이다.
진전사는 30년 넘게 중국에서 선종을 배운 도의 스님이 세운 절로
가지산문(迦智山門)이라 부르는 우리나라 최초의 선종 일문이 시작된 곳이라 한다.
이 절 근방에 평창의 월정사와 양양의 낙산사가 있으니,
<삼국유사>에 두 절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를 알 만하다.
그래서 고운기는 진전사를 소년 일연의 베이스캠프라 말한다.
하 수상한 시절, 여러 절을 두루 돌아다니며 참된 말씀의 세계를 갈구했을 터이니 하는 말이다.
아마도 일연은 그 시절부터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썼을 성싶다.
일연이 평생 가슴에 품었을 조신의 꿈이야기가 바로 낙산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 않던가.
이야기인즉슨 이렇다.
승려 조신이 강릉태수 김흔공의 딸을 좋아하게 되었다.
여러 해 동안 낙산사의 부처님에게 행운이 돌아오길 기도했다.
그런데 태수의 딸이 혼처를 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신은 낙산사에 가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부처님을 원망했다.
그러다 잠이 들었는데, 김씨 아가씨가 조신 앞에 홀연히 나타났다.
평소 흠모하던 조신과 한삶을 살러 왔다는 것이다.
뛸듯이 기뻤던 조신, 처녀를 데리고 고향동네로 가 50년을 살았다. 그런데 그 삶이 참으로 기구했다.
큰아이는 굶주려 죽었고, 한 아이는 구걸하러 갔다가 개에게 물려 앓고 있다.
함께하면 행복할 줄 알았건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통만 더해갔다.
아내가 살아나갈 겨를도 없는데 부부 사이의 사랑이 가당키나 하냐며 이별하자 했다.
이 말을 들은 조신은 기뻐했다고 한다. 그도 이 지겨운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듯.
두 아이씩 맡아 헤어지려다 눈을 떴다. 벌써 아침인데, 수염과 귀밑머리가 하얗게 셌다.
그제야 큰 깨달음을 얻어 원망하던 부처님을 바라보며 참회했다 한다.
양양 진전사 터를 출발지로 삼으면
주변의 낙산사, 강릉의 굴산사 터, 평창 월정사를 한묶음으로 둘러보란다.
거기에 다 <삼국유사>의 흔적이 남아 있으니.
<삼국유사>는 어떤 면에서는 신라유사이기도 하다. 비중이나 분량 면에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니 고운기가 떠난 여행의 고갱이도 경주일 수밖에 없다. 시인이라 그러할까.
고운기는 ‘신화의 땅’ 경주에 들어서면서도 첫 기행지로 분황사를 내세운다.
“절도 절이지만 분황사 정문에서 황룡사 터를 바라보는 즐거움과 그 뜻이 각별하기 때문”이라 하니,
역시 시인은 화려하고 빛나는 것보다 스러지고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것을 더 사랑하는 모양이다.
시인은 분황사에서 두 명의 인물을 떠올린다.
그 첫 번째는 희명. 경덕왕 때 일어난 일이다.
멀쩡하던 다섯살 딸아이가 눈이 멀었다. 그 딸의 어미 이름이 희명이니,
의지할 데 없던 여인은 분황사 왼편 전각 북쪽에 그려진 천수대비를 찾아 빌었다.
천수대비가 누구던가. 천개의 눈과 손을 가지고 두루 세상을 살피는 관음보살이지 않은가.
그 많은 눈 가운데 하나만 딸아이에게 달라고 떼를 썼던 것.
<삼국유사>에 간략하게 기록된 이야기지만 피 끓는 모성과 이에 응답한 기적이 가슴을 적신다.
두 번째는 원효의 아들 설총.
아버지가 입적하자 설총은 그 유해를 잘게 부수어 얼굴 모양 그대로 만들어 분황사에 모셨다.
그런데 설총이 예불을 드리러 오자 소상(塑像)이 돌아보았단다.
시인은 혼잣말을 한다.
“아비는 아들의 무엇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아들에게 전할 무슨 애틋한 사연이 남았더란 말일까”라고.
이 책에서 비로소 알게 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서봉총은 1926년에 발굴되었다고 한다. 그때 마침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브가 신혼여행차 일본에 왔단다.
그는 고고학자였다. 서봉총 발굴 소식을 들은 황태자는 부러 경주까지 와서 금관을 손수 꺼냈다고 한다.
금관에 세 마리의 봉황 모양이 장식되었으니 이름을 봉황총이라 짓자 제안했다는데,
스웨덴(瑞典)의 ‘서’자와 봉황의 ‘봉’자를 따서 서봉총이라 했단다.
이 황태자가 나중에 국왕이 되어 스웨덴이 복지국가로 성장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하니,
역사와 문화의 가치를 아는 이답다 하겠다.
남산을 다룬 장은 아쉽기만 하다.
다른 지역과 균형을 이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소략하게 다룰 수밖에 없었을 터다.
나는 경주에서 가장 빛나는 곳은 남산이라 생각한다.
정말, 야외박물관으로 이만한 곳이 또 어디 있는가 싶다.
지천으로 널린, 민중의 간절한 열망이 담긴 마애불들이야말로 국보다.
고운기는 말한다.
“이 많은 마애불을 만든 이들은 누구였을까? 아마도 ‘경주에 사는 온갖 사람’이라 말해야 옳을 듯하다.
마애불의 가짓수가 많은 만큼, 새긴 모양이 제각각인 만큼.
그런데 오늘 남산을 오르며 곰곰 생각해보니, 누가 와서 만들었건,
그것은 신라 사람들에게 다름 아닌 ‘큰바위 얼굴’이었으리라 싶다.
경주사람들은 부처의 얼굴을 스승으로 알고 바위에 그려, 자신과 후손들에게 귀감이 되게 한 것 같다.
세월이 흐르면서 부처는 곧 자신들의 얼굴이 되었고.”
경주기행은 분황사를 기점으로 왕릉과 남산, 그리고 무장서 터를 두루 돌아보도록 이끌고 있다.
<삼국유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는 경상도 바닷길에서 주로 벌어진다.
지금으로 치면 7번 국도. 당장 수로부인이 떠오르고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가 생각난다.
고운기는 특히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를 공들여 현대적으로 해석한다.
“1800여년 전 혈혈단신 이민자가 ‘저팬 드림’을 이룬 성공담”으로 보기도 하지만,
바닷가에서 수중고혼이 된 부부의 슬픈 넋을 기리기 위한 굿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만파식적과 처용도 이 길에서 만나는 이야기다.
절 이름에 선적 깨달음에 얽힌 재밌는 일화가 스며 있는 포항 오어사에 들른 다음
경주 대왕암과 울산 개운포와 김해 수로왕릉을 살펴본다.
이제 지은이의 발길이 닿는 곳은 백제의 땅.
마음이야 고구려도 가보고 싶겠지만, 분단 현실은 삼국유사 기행의 영역을 제한한다.
신화를 연구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보자면 익산 미륵사는 하나의 도전이다.
신화로 보자면 무왕, 즉 서동의 아내는 선화공주여야 한다.
그 유명짜한 서동요가 이들의 연예사이지 않던가.
그런데 2009년 1월, 미륵사 서탑에서 사리봉안기가 발견되면서 사단이 났다.
이 봉안기를 보면 미륵사 창건의 주인공은 사택왕비이며 그녀가 바로 무왕의 아내였다는 것.
지은이는 서동요 해석의 새로운 길을 열어 보이는데,
그 하나는 “알을 품고 가는”이라는 구절을 미루어 건국신화로 추어올리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개성이 뚜렷했으면서도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인연을 맺지 못한,
주어진 삶을 제대로 살다가지 못한 ‘어떤 셋째딸’들을 위한 진혼가”로 보는 것이다.
두루 타당성 있는 해석이라 흥미롭다.
익산 미륵사 터에서 시작해 김제 금산사와 고창 선운사, 그리고 영광 법성포에서 여행을 마무리했다.
알고 떠나든, 가서 비로소 알든 떠나지 않는 이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고, 오래된 지혜를 만날 수 없다.
그곳에 가면 켜켜이 쌓여 있는 이야기들을 만나 볼 것.
그 이야기는 황당무계한 것들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겪을 우리네 인생사 이야기들의 DNA 창고다.
그래서 내가 나일 수 있는 집단적 뿌리를 만나게 되고, 내 삶의 미래를 짐작할 수 있는 법이다.
버려진 모퉁이 돌이 주춧돌이 되게 마련이다.
‘유사’라 해 나머지 것들이라 했지만,
그곳에 우리 삶의 비의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상상의 원천이 숨어 있다.
지금 무언가를 읽고 싶다면, <삼국유사>부터 펼쳐 보기를.
- 이권우, 도서평론가 [길 위에서 책읽기]
- 2011-09-23 ⓒ 경향신문 & 경향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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